선생님은 이 병을 몰라요


인생에서 정말 힘든 상황을 맞았을 때 이것을 혼자 극복하는 것은 사실상 거의 불가능하다. 만약 혼자서 극복할 수 있다면, 그 사람은 매우 운이 좋은 사람이거나 혹은 그가 처한 상황이 진정 힘든 상황은 아니었을 가능성이 더 크다.




죽고 싶은 사람은 없다


사람들은 고통스러운 상황을 벗어나길 간절히 바라며 그것에서 벗어날 방법이 없다고 느낄 때 자살을 시도하는 것일 뿐, 결코 죽음 그 자체를 원하는 것은 아닌 셈이다.


냉정할 정도로 객관적이고 과학적인 사고에 근거해 의학적 판단을 내리는 훈련을 받아왔고, 내가 가르치는 의과 대학생과 전공의 들에게도 늘 이러한 면을 강조해 왔던 내가 장모님이 보내 주신 한약을 먹고 한의원에 가서 침을 맞는다는 것은 정말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내가 통제하거나 예측할 수 없는 외부의 무언가가 있을 때 그것에 따라 행동을 결정할 경우, 나의 생활 자체가 스스로도 예측 불가능해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상황이 좋지 않을수록, 미래를 예측하기 힘들수록, 오히려 자기 생활을 규칙적으로 잘 유지할 수 있어야 한다. 약속과 계획은 신중하게 세우고, 한번 무언가를 하기로 결정하고 나면 가능한 한 바꾸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제 나는 ‘루틴routine’을 유지하려고 노력한다.


요즘 나는 분명히 느낀다. 살면서 위기를 겪게 되면 누구나 한 번쯤 자살 생각을 할 수 있지만, 이는 죽음 자체에 대한 갈구가 아니라 삶의 괴로움을 더는 견디기 힘들다고 느끼는 상황에서 필연적으로 경험하게 되는 우울감이 만들어 낸 것일 가능성이 훨씬 더 크다는 것을. 그러므로 그 우울감을 다스릴 수 있다면, 자살 생각 역시 지나갈 수 있다는 것을. 내 마음이 진짜 죽음을 원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불안할수록 원래 계획대로


도저히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 때에는 원래의 계획대로 밀고 나가야 한다. 이는 불안 그 자체의 속성 때문이다. 불안은 기본적으로 예측 불가능성 또는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에서 나온다. 그런데 역설적으로 불안한 사람들은, 자신의 선택을 자꾸 변경함으로써 미래를 더 예측 불가능하게 만드는 오류를 범하곤 한다. 애매하고 불안한 상황이라면 한번 내린 결정을 자꾸 바꾸기보다는 계획대로 밀고 나가는 편이 훨씬 더 나은데도 말이다. 계획대로 해 보다가 잘 되지 않으면 그때 방향을 바꾸어도 늦지 않다.


우리의 뇌는 생각보다 아주 훌륭하다. 결과 예측이 어렵거나 애매한 상황일 때에는 여러 가지 대안들 중 첫 번째로 드는 생각이 가장 나은 선택일 가능성이 크다. 첫 번째로 드는 생각은 뇌가 그 시점까지의 여러 정보들을 근거로 가장 적합하다고 판단한 것이기 때문이다.


나의 환자들이 이러한 상황에 처해 내게 직장을 그만두겠다고 한다면, 나는 무엇이라고 할 것인가? 아마 나는 주저 없이, 감정이 생각에 영향을 주는 기전에 대해 설명하고, 우울한 감정 상태에서는 단지 현재의 두려움에서 벗어나기 위해 대책 없는 결정을 저지르게 될 가능성이 크다고 말하며, 그분들의 우울 증상이 개선될 때까지는 결정을 미루라고 조언했을 것이다.


가장 힘든 순간, 포기하고 싶은 순간에 무언가를 그만두려고 해선 안 된다. 그러한 상황에는 우리의 판단이 충분히 이성적이지 못하기 때문이다. 무언가를 그만두려면 적어도 지금 이 순간, 내 이성이 감정을 충분히 통제하고 있다는 자기 확신이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처음 계획했던 대로 하던 것을 계속하는 편이 훨씬 더 낫다.



 

'왜'에서 '어떻게'로


하지만 사고로 인해 골절이 되거나 피부가 찢어지는 일이 아닌 이상, 질병의 원인을 정확히 말할 수 있는 경우는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우울증을 비롯한 다양한 정신과적 질환은 전체 인구의 20퍼센트 정도가 경험하게 되는 매우 흔한 질병이지만, 그 원인이 무엇인지 쉽사리 설명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자꾸 원인을 찾으려고 머릿속이 작동할 때 그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생각을 싹둑 자르고, 냉정하게 ‘원인 따위는 없다’는 점을 받아들여야 한다. 불행에는 이유가 없다. 세상 모든 일은 그 원인을 찾아야 해결할 수 있지만, 그럴 수 없는 일이 한 가지 있다면 그것은 불행일 것이다. 아프지만, 이것을 인정해야 한다. 상황은 상황대로 두고, 지금 이 순간 할 수 있는 일을 해야 한다.




행복의 시뮬레이션


흔히 사람들은 우울이 가장 힘든 감정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거의 모든 경우 우울 이전에 불안이라는 감정이 존재한다. 불안은 기본적으로 예측 불가능성에서 시작된다. 하지만 일단 우리는 불안해지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부정적인 결과를 예측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머릿속으로 부정적인 결과, 그 중에서도 가장 나쁜 결과를 끊임없이 반복해 상상하기 시작한다. 앞서 이야기한 ‘두 번째 화살’을 만들어 스스로에게 쏘는 셈이다. 이러한 상태에까지 이르면, 어느새 가장 나쁜 결과는 수많은 경우의 수 가운데 하나가 아닌 현실적인 위협으로 느껴지게 된다. 구체적인 두려움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우리 삶의 어떤 상황에서 최악의 경우를 맞이하게 될 가능성은 최고의 경우를 맞이하게 될 가능성만큼이나 적다. 다시 말해, 일어날 수 있는 최악의 불행은 로또에 당첨될 확률만큼이나 낮은 것이다.





한번 더 생각해보기 - 자살을 하면 안 되는 이유


최근 발표된 한 연구에 의하면, 기분장애(우울증 및 조울증) 환자 334명의 자녀들 701명을 5.6년간 추적 관찰한 결과, 가족 내 우울증 전이의 영향을 통제하고 나서도 부모의 자살 시도가 우울증이 있는 자녀의 자살 시도 가능성을 다섯 배나 증가시키는 것으로 나타났다.





현실 직시 : 답이 없음이 답일 때


“답이 없다고 절망할 것이 아니라, 그 상황을 받아들이고 견뎌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답입니다.”  


하지만 거듭 강조하다시피 나쁜 일이 우리 삶에 미치는 영향은 그 자체의 크기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사건에 대한 나 자신의 반응으로 인해 결정된다.


일상을 유지해야 한다. 이것은 정말로 중요한 일이다. 끼니를 거르지 않고, 친구들을 만나고, 가족들과 나들이를 하고, 운동이나 산책을 하고…. 이런 일들을 포기해선 안 된다. 그래야만 정말로 답답하고 괴로운 상황조차 마침내 받아들일 수 있게 된다. 받아들인다는 것은 포기한다는 것과 완전히 다르다. 받아들인다는 것은 내 인생에서 나의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부분이 존재한다는 것을 인정하지만, 그것이 단지 내 인생의 작은 조각이 되도록 하겠다는 것이다.





인내 : 한계를 인정하면서 한계를 넓히기


진정한 ‘인내’는 무조건 참고 견디는 것이 아니라 당장의 변화가 나타나지 않는다 하더라도 무언가 해야 할 일을 계속하는 것이라고 믿는다.





지금 그리고 여기 : 미래와의 관계 형성하기


삶이 고통스러울 때 사람들은 현재를 외면하고, 앞으로 더 좋아질 것이라며 미래를 향한 막연한 기대를 품게 된다. 하지만 아무리 고통스러워도 현재를 받아들이지 못한 상태에서 갖는 이러한 기대는 희망이 아니다. 희망은 오히려 고통 속에서 고통을 직면하게 함으로써, 우리가 현재에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다.


하지만 우울증에서 조금 더 회복된 지금의 나에게는 오늘 하루가, 지금 이 순간의 현재가 너무나 소중하다.





희망에게 시간을


삶의 어느 순간, 고통이 아주 커져 버려 감당하기 힘든 크기가 되면, 이 ‘삶의 이유’는 보이지 않고 ‘죽음의 이유’만 수백 가지 떠오르기도 한다. 세상이 나에게 죽어라, 죽어라 하는 것처럼 느껴지는 날도 있다. 그럴 때마다 ‘삶의 이유’나 ‘죽음의 이유’ 같은 것을 생각하고 있다는 것 자체가, 지금 내가 우울해서 그런 것일 가능성이 크다는 점을 상기했으면 한다. 평소 ‘살아야 할 이유’ 같은 것을 심각하게 고민하는 사람은 그것이 직업인 철학자 말고는 없을 것이다. 내 삶이 행복하다거나 불행하다고 생각할 수는 있지만, 그저 평범하게 살아가는 보통 사람들은 전혀 그런 생각을 하지 않고 주어진 인생을 ‘그냥’ 살아간다.





한번 더 생각해 보기 - 트라우마를 극복하려면


트라우마는 과거의 반복이므로, 이를 이겨 내는 방법은 아주 간단하다. 바로 ‘그것이 끝나게 하는 것’이다. 이 말의 의미는 간단하다. 트라우마는 과거에 끝나 버린 사건이므로, 현재의 자신에게는 영향을 주지 않는다는 사실을 스스로 정확히 인식해야 한다는 것이다. 과거의 사건을 회상할 수는 있다. 생각은 ‘하는’ 것이 아니라 ‘나는’ 것이므로. 그러나 사건이 떠오르는 것과 동시에 ‘그 사건은 지금의 나에게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생각을 의식적으로 꺼내는 것은 확실히 가능하다. 즉,   그땐 그때고, 지금은 지금이다.  이러한 자세를 갖는 것이 트라우마 극복에는 매우 바람직하다는 것이다.


일상을 회복하는 것이 트라우마 극복의 시작이자, 거의 전부다





YOLO! 1년차의 마음 가져보기


새로운 것에 대해 많은 호기심을 갖고 있고 함께할 친구와 가족이 있는 사람들은 고난을 슬기롭게 견뎌 낸다. 그리고 그렇게 고난을 견뎌 내고 나면, 심리적으로 더욱 굳건해져 다른 사람들을 포용하고 도와줄 수 있는 큰 그릇으로 성장하기도 한다. 그러므로 아무리 아프고 힘들고 괴로워도, 나와 내 가족 그리고 친구와 동료들의 삶에 대한 관심, 새로운 것에 대한 호기심의 끈을 놓쳐선 안 된다.






잘잘못 따지지 않기


누군가를 떠올리며 그의 잘못을 되새김질하고, 분노하고, 상황을 이렇게 만든 그를 미워하고 원망하는 것도 내 정신 건강에 이로울 게 하나도 없다.





가족을 웃게 만들기


괴로움으로 인해 관계가 단절되고 삶의 영역이 좁아진 사람들의 특징 중 하나가 어떤 일에 있어서든 쉽게 서운해한다는 것이다.


 


팬으로 살아가기


삶의 어느 순간 몸과 마음이 지치고 아플 때, 나는 누군가(아이돌 가수든 배우든, 운동 선수든 스포츠팀이든 상관없다)의 진심 어린 팬이 되어 보라고 권하곤 한다. 우울한 상태에 놓인 사람들에게는 좋은 것이라곤 없다. 어느 순간부터인가 즐거움을 주는 것은 모두 사라져 버린 듯하고, 다른 사람들이 웃거나 기뻐하는 상황에도 아무런 감흥을 느끼지 못하는 상태가 되기도 한다. 누군가의 팬이 된다는 것은 누군가를 좋아하게 된다는 의미다. 삶의 위기 상황에 처했을 때 좋아할 수 있는 누군가가 남아 있다는 것은, 깜깜한 밤에 켤 수 있는 촛불 하나가 아직 남아 있는 것과 같다. 비록 하나의 촛불은 매우 약한 불빛을 내뿜을 뿐이지만, 그 촛불 하나가 있음으로 해서 우리는 어둠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을 찾아볼 수 있게 된다.


사람들과 어울려 살아가고 조금씩 나이를 먹어가는 과정에서, 나는 점점 삶의 목표 그 자체보다는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이 긴 여행길 자체가 더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고 있다. 아무리 이 여행길이 험하다 하더라도, 함께하는 누군가가 있다면 혹은 함께하지는 못한다 하더라도 멀리서나마 응원받을 수 있고 내 편이 되어 줄 수 있는 누군가가 있다면, 이 힘들고 거친 여행길에 상처받거나 실망하거나 때로 주저앉게 되더라도 다시 일어나기가 훨씬 수월해진다는 것을 믿는다. 팬이 된다는 것은 바로 그런 누군가를 만드는 일이 아닐까.




도움을 줌으로써 도움 받기


2013년 4월 혼자서 귀국해 수술을 마친 후 다시 미국으로 돌아갔던 나는 오랫동안 미루어 왔던 가족과의 장거리 여행을 마침내 실행에 옮기게 되었다. 여행지는 캘리포니아에 인접한 애리조나 주의 ‘세도나’였다. 세도나는 여러 편의 서부 영화 촬영지이기도 했으며, 미국에서 가장 영적spiritual인 곳으로 알려져 있는 데다, 많은 예술가들이 찾는 아름다운 휴양 도시로도 유명하다.


그리고 돌려받을 것을 기대하지 않으며 타인을 돕고 친절을 베푸는 사람이 되겠다고도 다짐한다. 내가 먼저 그렇게 했을 때 타인은 물론 나 자신의 선함을 이끌어 낼 수 있다고 믿기에. 그리고 그것이 궁극적으로 나 자신을 구원할 것이라고 믿기에.




한번 더 생각해 보기 - 고통을 겪는 가족과 함께 살아가기


세상의 모든 것이 변해도 우리 가족은 ‘함께’라는 것을 상대가 느끼게 해 주고, 스스로도 그렇게 느낄 수 있어야 한다. 그렇게, 가족은 함께 고난을 견디며 더 단단해지는 법이다.




마치는 글 1


지금 이 순간 소멸하지 않고 살아 숨 쉬는 나의 존재는 희망에 대한 가장 분명한 근거가 아닐까.  


우리는 스스로 희망을 만들 수 있다. 희망의 근거가 우리 자신의 존재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스스로의 희망에 의해 구원될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삶은 자신의 길을 찾아 낼 것이다.




마치는 글 2


“순순히 어둠을 받아들이지 마오.”   이 책 맨 처음에도 인용했던 이 말은 영화 <인터스텔라>에 나와 더 유명해진 시인 딜런 토마스의 시 제목이다

Posted by Daesung Ju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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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행복은 생각인가


우리는 의식적인 부분이 자기 행동의 원인이라고 굳게 믿는다. 큰 오해다. 사실 일상의 수많은 선택과 행동은 의식의 손길이 닿지 않는 곳에서 조용히 이루어진다.


이성적 통제가 항상 생존에 도움이 되었다면, 극도의 위험에 놓인 인간은 더욱 합리적으로 행동하도록 진화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4. 동전탐지기로 찾는 행복


자연은 기막힌 설계를 했다. 내 생각에, 개에게 사용된 새우깡 같은 유인책이 인간의 경우 행복감(쾌감)이다. 개가 새우깡을 얻기 위해 서핑을 배우듯, 인간도 쾌감을 얻기 위해 생존에 필요한 행위를 하는 것이다.


"행복감을 인간이 왜 느낄까?"라는 질문으로 이 챕터를 시작했다. 여러분은 어떤 대답을 했을지 궁금하다. 나의 간결하고도 건조한 답은 "생존, 그리고 번식"이다.


행복하기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 생존하기 위해 필요한 상황에서 행복을 느껴야만 했던 것이다.


생존에 유익한 활동이나 생각을 하고 있을 때, 그 일에 계속 매진하라고 알리는 것이 쾌의 본질적 기능인 것이다(Nesse & Ellsworth, 2009)


5. 결국은 사람이다


물소들은 사자들이 우글거리는 아프리카 초원을 수십만 마리의 동료들과 함께 횡단한다. 서로 잡담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살아남기 위해서. 매가 혼자 있는 비둘기를 습격할 때 사냥에 성공할 확률은 약 80%다. 하지만 비둘기가 다른 친구 10마리와 함께 있을 때는 60%, 50마리와 함께할 때는 10% 이하로 사냥 성공률이 떨어진다(Trivers, 1985). 사람도 마찬가지다. 시카고 대학의 카시오포(Cacioppo) 교수 팀의 오랜 연구에 의하면 현대인의 가장 총체적인 사망 요인은 사고나 암이 아니라 외로움이다(Cacioppo & Patrick, 2008).


인간의 본성을 압축한다면 나는 "The ultimate SOCIAL machine"이라고 표현하고 싶다. 사회성은 인간의 생사를 좌우하는 가장 독보적인 특성이다. 최근 여러 분야의 석학들이 이구동성으로 주장하는 결론이다.


인간의 뇌는 도대체 무엇을 하기 위해 설계되었을까? 일평생의 연구를 토대로 그가 내린 결론은 '인간관계를 잘하기 위해서'다(Gazzaniga, 2008).


인간의 뇌가 급격히 커진 시기는 함께 생활하던 집단의 크기가 팽창할 때와 맞물려 있다.


인간의 뇌를 성장시킨 기폭제는 타인의 존재였다는 것이 최근 널리 각광받는 던바 교수의 '사회적 뇌 가설(social brain hypothesis)'의 핵심이다.


내 생각엔, 행복한 사람은 바로 이 고지식한 사회적 뇌를 잘 '이용'하는 자들이다.


이런 '사회적 영양실조'를 막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왕성한 '사회적 식욕'을 갖는 것이다. 식욕의 근원은 쾌감이다. 그래서 사람(특히 이성)을 만나고, 살을 비빌 때 뇌에서는 사회적 쾌감을 대량 방출한다. '강추'한다는 뜻이다. 우리는 이런 사회적 쾌감을 예민하게 느꼈던 자들의 유전자를 지니고 산다. 그래서 지금도 사람을 절실히 찾는 것이고, 가장 강렬한 기쁨과 즐거움을 사람을 통해 느끼는 것이다. 사람과 무관해 보이는 감정들도 사실 대부분 사람 때문에 생기는 것이다.


극도의 사회성. 하버드 대학의 에드워드 윌슨(Edward O. Wilson) 교수가 최근 저서에서 내린 결론이다(Wilson, 2012). 지구에서 최고의 생존 성공담을 가진 동물은 개미와 인간이다. 두 생명체의 공통된 특성은 유별날 정도로 사회적이라는 것이다. 한 개체로서는 그다지 탁월한 능력이 없지만, 서로 돕고 나누고 이용하는 복잡한 사회적 능력 덕분에 두 종은 지구에서 유례가 없는 성공신화를 썼다. 그래서 윌슨은 인간의 지구 정복을 '사회적 정복(social conquest)'라고 표현했다.


행복감을 발생시키는 우리 뇌는 이처럼 사람에 '중독'되어 있다는 사실을 놓쳐서는 안 된다. 그래서 사회적 경험과 행복은 불가분의 관계를 맺는다. 사회적 경험이 행복에 중요한 것은 물론이고, 나는 한 발 더 나아가 행복감(쾌감)은 사회적 과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존재하게 되었다고까지 생각한다.


첫째, 행복은 객관적인 삶의 조건들에 의해 크게 좌우되지 않는다. 둘째, 행복의 개인차를 결정적으로 좌우하는 것은 그가 물려받은 유전적 특성, 조금 더 구체적으로는 외향성이라는 성격 특질이다.


6. 행복은 아이스크림이다


스칸디나비아 행복의 원동력은 넘치는 자유, 타인에 대한 신뢰, 그리고 다양한 재능과 관심에 대한 존중이다(Bormans, 2010). 그들 사회는 돈이나 지위같은 삶의 외형보다 자신에게 중요한 일상의 즐거움과 의미에 더 관심을 두고 사는 곳이다.


복권 당첨 같은 일확천금의 경험은 장기적인 행복의 관점에서 보면 저주가 될 수도 있다. 실제로 위의 복권 연구에서 보면, 복권에 당첨된 자들의 행복 더듬이는 둔해진다. 복권 당첨 후 그들은 TV 시청, 쇼핑, 친구들과의 식사 같은 일상의 작은 즐거움에서 이전 같은 기쁨을 더 이상 느끼지 못했다. 큰 자극의 후유증이다.


돈은 마음만 먹으면 무엇이든 얻을 수 있다는 착각을 심어준다. 그래서 초콜릿 같은 시시한 것에 마음 두지 않게 하고, 이런 자극을 음미하는 능력을 감소시킨다. 심지어 사람이라는 자극에도 관심을 덜 갖게 한다. 돈을 생각할수록 카페에서 다른 사람과 대화를 덜 하고(Mogilner, 2010), 어려움을 당해도 다른 사람의 도움을 사양한다는 연구 결과들이 있다(Vohs, Mead, & Goode, 2006).


자료들을 보면 행복한 사람들은 이런 '시시한' 즐거움을 여러 모양으로 자주 느끼는 사람들이다(Diener, Sandvik, & Pavot, 1991).


객관적으로 얼마나 많이 가졌느냐보다 이미 가진 것을 얼마나 좋아하느냐가 행복과 더 깊은 관련이 있다(Diener, Lucas, Oishi, & Suh, 2002).


정서학자들의 중요한 발견 중 하나는 불행의 감소(예: -4에서 0)와 행복의 증가(예: 0에서 4)에 기여하는 요인들이 서로 다르다는 것이다. 이것을 긍정-부정 정서의 독립성(independence)이라고 하며(Diener&Emmons, 1984), 정신 병리에 몰두했던 심리학이 행복 연구를 시작하게 된 이론적 배경이다. 이 말을 쉽게 푼다면, 불행의 감소와 행복의 증가는 서로 다른 별개의 현상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화려한 변신의 순간에만 주목하지, 이 삶을 구성하는 그 뒤의 많은 시간에 대해서는 미처 생각하지 않는다. 그래서 성공하면 당연히 행복해지리라는 기대를 하지만, 실상 큰 행복에 변화가 없다는 사실은 살면서 깨닫게 된다. 그제야 당황한다.


프랑스 사상가 라 루시프코(La Rouchefecould)가 400년 전에 지적한 대로 우리는 "상상하는 만큼 행복해지지도 불행해지지도 않는다".


많은 사람이 미래에 무엇이 되기 위해 전력 질주한다. 이렇게 'becoming'에 눈을 두고 살지만, 정작 행복이 담겨 있는 곳은 'being'이다.


그래서 행복은 '한 방'으로 해결되는 것이 아니다. 모든 쾌락은 곧 소멸되기 때문에, 한 번의 커다란 기쁨보다 작은 기쁨을 여러 번 느끼는 것이 절대적이다. 유학 시절, 지도 교수가 쓴 논문을 읽은 적이 있다. 제목은 '행복은 기쁨의 강도가 아니라 빈도다(Happiness is the frequency, not the intensity, of positive affect'. 나는 이것이 행복의 가장 중요한 진리를 담은 문장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7. '사람쟁이' 성격


행복에 절대적인 영향을 비치지만, 대부분이 미처 생각지 않는 요인에 대해 살펴보려 한다. 어떤 것이 그렇게 중요할까? 오랫동안 행복을 연구한 석학들을 한 자리에 모아놓고 그 질문을 한다면 대답은 거의 비슷할 것이다.

"유전. 더 구체적으로는 외향성."


"행복해지려는 노력은 키가 커지려는 노력만큼 덧없다(Lykken & Tellegen, 1996)." 다소 극단적인 표현이지만, 그래도 행복에 있어서 유전적 개입을 부인하는 학자는 없다.


유전의 힘은 강력하다. 하지만 냄새도 모양도 없는 이 유전적 요인을 일상에서 간파하기란 쉽지 않다. 그래서 선천적으로 행복한 성향을 가지고 태어난 사람의 외적 '증상'에 주목하게 되고, 그것이 행복의 원인이라고 착각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기침이 감기의 증상이지 원인은 아니다.


유전과 행복을 각각 하나의 대륙이라고 한다면, 이 둘을 연결하는 보스포러스 다리가 있다. '외향성'이라는 성격 특질이다. 유전적 영향에 의해 외향성 수치는 어느 정도 정해지며, 그 외향성의 정도가 개인의 행복수치와 깊은 관련을 맺는다.


두 그룹 간의 차이는 오직 두 가지 영역에서만 나타났다. 첫째, 성격. 행복한 사람들은 월등히 더 외향적이고 정서적 안정성이 높았다. 둘째, 대인관계. 행복지수 상위 그룹의 사회적 관계의 빈도와 만족감이 월등히 높았다. 사실 두 가지 특징의 공통분모는 '사회성'이다. 그래서 이 논문의 저자들은 행복을 보장하는 충분조건은 없지만, 없어서는 안 될 필요조건이 사회적 관계라는 결론을 내렸다.


내향적인 사람들도 혼자일 때보다 누군가와 함께 있을 때 더 높은 행복감을 느꼈다(Diener & Biswas-Diener, 2008). 그래서 내가 농담처럼 하는 말이 있다. 회식 3차로 노래방에 갈 때, 배려한다는 마음으로 평소 조용한 김 양을 먼저 보내지 말라고. 노래방에서 그녀는 속으로 웃으며 좋아할 수 있다.


최근 주목받는 콜로라도 대학의 리프 반 보벤(Leaf van Boven)교수의 연구에 의하면, 행복한 이들은 공연이나 여행 같은 '경험'을 사기 위한 지출이 많고, 불행한 이들은 옷이나 물건 같은 '물질' 구매가 많은 것으로 나타난다(Van Boven & Gilovich, 2003). 행복과 관련해 경험보다 물질 구매가 불리한 점은 무엇일까? 경험(여행)에 비해 물질(신상 백)에서 얻는 즐거움은 더 빨리 적응되어 사라지고, 타인과의 상대적 비교를 더 자주하게 된다((누군가 반드시 더 좋은 가방을 들고 다닌다!).


외향성은 일종의 '사회성 위도'다. 이 값이 높을수록 사회적 관계의 양과 질이 높고, 바로 이 점이 행복에 절대적 기여를 한다.


레바논에 이런 속담이 있다. "사람이 없다면 천국조차 갈 곳이 못 된다."


8. 한국인의 행복


행복감을 예측하는 가장 중요한 문화적 특성은 개인주의다(Diener, Diener, & Diener, 1995).


개인주의는 국가의 경제 수준과 행복을 이어주는 일종의 '접착제' 역할을 한다(Inglehart, Foa, Peterson, & Welzel, 2008). 역으로 이 접착제(개인주의)가 부족한 사회는 경제적 발전을 이룩해도 거기에 상응하는 행복감이 뒤따라오지 않는 경우가 있다. 한국과 일본이 그 예다.


이렇듯 과도한 타인 의식은 집단주의 문화의 행복감을 낮춘다. 행복의 중요 요건 중 하나는 내 삶의 주인이 타인이 아닌 자신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알베르 카뮈는 이런 말을 남겼다. "행복해지려면 다른 사람을 지나치게 신경 쓰지 마라(To be happy, we must not be too concerned of others)."


본인의 경제 수준과 상관없이, 사랑보다 돈을 중요하게 생각할수록 그의 행복도는 낮다(Diener & Biswas-Diener, 2002). 반대로 사랑에 더 많은 가치를 두는 사람일수록 행복하다.


9. 오컴의 날로 행복을 베다


철옹성 같던 매슬로우의 이론도 최근 위아래가 뒤바뀌고 있다(Kenrick, Griskevicius, Neuberg, & Schaller, 2010).


행복한 사람일수록 미래에 더 건강해지고, 직장에서 더 성공하며, 사회적 관계도 윤택해지고, 더 건강한 시민의식을 갖게 된다(구재선, 김아람, 서은국, 2009; 구재선, 서은국, 2012, 2013 신지은, 최혜원, 구재선, 서은국, 2013 Diener, Kanazawa, Suh, & Oishi, 2014; Lyubomrisky, King, & Diener, 2005). 한국과 미국 사회에서 동일하게 나타나는 현상이다. 이런 연구들에서 어떤 사람을 '행복한 사람'으로 정의했을까? 남의 칭송과 칭찬을 받으며 사는 사람이 아니라, 일상에서 긍정적인 정서(기쁨 등)를 남보다 자주 경험하는 사람이다.


휴대전화를 이용해 현재 무엇을 하고 있으며 얼마나 즐거운지를 대학생, 직장인, 주부, 노인 등 다양한 사람들에게 물어보았다(구재선, 서은국, 2011). 한국인이 하루 동안 가장 즐거움을 느끼는 행위는 두 가지로 나타났다. 먹을 때와 대화할 때.



Posted by Daesung Ju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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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까운 사이일수록 경계를 지켜주어야 합니다. 지신의 일과 타인의 일, 자신의 생각과 타인의 생각, 자신의 감정과 타인의 감정을 분리ㅏ해서 봐야 합니다.


자신이 실시간으로 느끼는 감정을 더 구체적으로, 더 상세하고 명확하게 알아차리는 것을 심리학에서는 '정서입상(Emotional Granularity)' 또는 '정서분별(Emotion Differentiation)'이라고 합니다.


노벨생리의학상을 수상한 신경과학자 제럴드 에덜먼(Gerald Maurice Edelman)의 말을 빌리자면, 우리에게 현재란 본질적으로 '기억된 현재(remembered present)'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내 감정을 안다는 것은 그 순간의 '내 상태'를 알아차린다는 것이면서 동시에 내 과거의 의미와 미래의 의도를 알아차린다는 것입니다. 굉장히 거창하죠? 철학적 느낌도 많이 풍기고요. 실제로 정서분별은 일차적으로 심신의 건강에 보탬이 되는 역량이지만, 더 나아가 삶의 나침반이 되어주는 실존적 작업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보통 우울증이라고 표현하는 것은 우울장애의 한 유형인 '주요 우울장애(Major Depressive Disorder)'를 말합니다. 주요 우울장애로 진단받았다면 다른 사람보다 우울을 더 많이 느낄 뿐 아니라, 건강한 사람보다 부정적인 정서를 분별하는 수준이 낮다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사회적 불안장애로 진단받은 환자는, 사람을 만날 때 느끼는 부정적인 감정을 구체적으로 분별하지 못했기 때문에 전체적인 느낌을 불안이라고 애기하는 것일 수 있지요.


하나의 실험 결과를 일반화하는 것은 무리가 있지만, 이 연구는 아무리 불편하고 불쾌한 경험이라 하더라도 억지로 피하거나 별것 아니라고 애써 그 영향을 축소하기보다 최대한 구체적으로 맞닥뜨리는 학습을 하느 ㄴ것이 오히려 고통을 줄여줄 수 있다는 가능성을 시사합니다. 게다가 이러한 학습효과는 일시적이지 않았습니다. 불편한 마음을 구체적으로 표현해서 내가 느끼고 있는 감정에 대해 분별하는 훈련을 받았던 사람들은, 이후 거미와 맞닥뜨리더라도 불편감이나 고통을 전보다 덜 느꼈습니다.


강한 감정을 느끼는 순간을 위해 기억해둘 것이 있습니다. 그 감정을 드러내지 않으려고 애쓰거나 일단 덮어둔 채 다른 활동을 하면서 잊어버리려고 하기보다는 이런 마음으로 다가가는 것이 좋습니다. 그 감정은 내게 뭐라고 말하고 있지? 그 감정에 어떤 이름을 붙일 수 있을까? 그 감정은 왜 일어났을까? 내가 무엇을 놓친 것일까? 이 감정 안에 나의 어떤 소망(욕구, 의지)가 들어있을까? 이러한 질문들을 던져보면서 이해하는 시간을 가져보는 겁니다. 걷기 좋은 공원이나 강변, 숲길을 혼자 천천히 걸으면서 자문자답하는 것도 좋습니다.


아무리 강렬하고 불쾌한 감정이라 하더라도 무시하거나 잊어버리지 않고 그 즉시 들여다보는 작업을 시작한다면 그 감정이 오래 지속되지 않습니다. 게다가 스스로 조절하는 힘이 늘어나 적절한 행위를 선택할 수 있는 여지가 많아집니다.


정서와 연관된 신경들은 내장운동 영역에 포함되어 있어서, 감정은 몸의 생리적 반응을 동반합니다. 평소에 몸에서 일어나는 반응을 민감하게 느끼고 잘 들어주는 연습을 하면 특히 강렬한 감정을 겪을 때 크게 도움이 됩니다.


원인을 알지 못하는 감정은 오래간다.


감정이 일어나고 조절되는 것은 대개 우리가 알아차리지 못하는 사이에 매우 빠른 속도로 일어나지요. 우리가 주어진 상황에서 지금 무엇을 해야 하는지, 뇌는 자동적으로 알아냅니다. 정서분별이 잘될수록 이러한 과정이 더 매끄럽고 적절하게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뇌에게 좀 더 정교한 도구들을 안겨주는 셈이죠. 이것이 우리가 정서를 가능한 한 구체적으로, 그리고 실시간으로 잘 알아야 하는 이유입니다.


미국의 인지심리학자 제럴드 클로어(Gerald Clore)와 캐런 개스퍼(Karen Gasper)에 따르면 귀인이 덜 된 부정적 감정일수록 더 오래 지속된다고 합니다. 내가 왜 이런 감정을 느끼는지 잘 알지 못하면, 그때 느끼는 부정적 감정은 더 오래가고 다른 일에도 광범위하게 영향을 끼칠 가능성이 높아집니다. 따라서 그냥 우울하다고 하더라도 슬픔이나 짜증, 불안이나 화 등 구체적 감정으로 쪼개고 쪼개어 각각의 원인을 들여다볼 필요가 있습니다.


감정은 어쩔 수 없는 것이라는 당신에게, 감정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이해하면, 내가 느끼는 감정 자체를 바꿀 수 있습니다.


이처럼 우리는 몯느 정보를 실시간으로 일일이 처리하지는 않습니다. 그보다는 과거 경험을 토대로 곧 다가올 미래를 예측하는데, 현실과 예측의 차이, 곧 오차를 제거해가면서 적절한 행위를 고릅니다. 이것이 뇌가 지각하는 방식입니다. 뇌는 단순히 외부 자극에 반응하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가설을 갖고 예측하면서 실제 경험에 대비해 예측 오차들을 줄여나가는 '예측코딩(Predictive coding)' 프로세스를 돌리고 있죠. 이를 통해 우리는 시각, 청각, 촉각 등 다양한 지각을 경험합니다. 뇌는 실시간으로 들어오는 데이터를 가지고 과거 경험에 비추어 끊임없이 가설을 만들어냅니다. 그래서 오늘날의 신경과학은 뇌를 일종의 '예측기계(Predictive machine)'라고 부릅니다.


한마디로 정리하면 우리가 경험하는 감정은 물론이고, 타인의 감정에 대해 이렇다 저렇다 읽는 것도 모두 뇌가 예측한 결과물입니다. 틀릴 수 있을까요? 물론입니다. 예측이기 때문에 당연히 빗나갈 수 있습니다.


일단 예측오류가 최소화되면 예측은 하나의 지각이 도비니다. 이런 방식으로 뇌는 과거 경험을 현재 상황에서 적절한 행위로 갖아 잘 이끌어줄 하나의 범주를 구성하는 데 사용하지요. 뇌는 지속적으로 개념을 구성하고 감각 입력이 무엇인지 식별하기 위해 범주를 만들어내며, 무엇이 그것을 일으켰는지 원인을 추론하고, 그것에 대해 어떻게 하면 좋을지 행위 계획을 세웁니다. 참 복잡해 보이는 일들이 순식간에 이루어지죠. 내부 모델이 하나의 정서 개념을 만들 때, 그 결과는 하나의 정서 사례가 됩니다. 감정은 이렇게 해서 일어납니다. 정서구성론을 한마디로 정리하면, 정서가 시각이나 청각처럼 여타 지각이 구성되는 방식과 같은 방식으로 구성된다는 것입니다. 정서가 선천적으로 뇌 안에 들어있어서 상황에 맞게 튀어나오는 것이 아니라, 눈으로 보고 귀로 들으며 그게 무엇인지 알아차리는 방식으로 만들어진다는 사실은 기존의 심리학 교재로 정서에 관해 공부한 이들에게는 매우 충격적인 내용입니다.


감정이 어떻게 일어나는지 조금 더 쉬운 설명이 필요할 것 같군요. '행복'을 예로 들어볼까요? 언제 행복하다고 느끼나요? 사랑하는 사람이 나를 향해 활짝 웃을 때, 시원한 숲속을 걸어갈 때, 소중한 친구와 맛있는 음식을 먹을 때 우리는 행복에 대한 다양한 사례들을 경험합니다. 어려운 시험을 통과했을 때, 시합에서 기대하지 못한 우승을 거두었을 때, 계획대로 목표를 달성했을 때에도 우리는 행복하다고 느낍니다. 두꺼운 책을 다 읽은 뒤에도, 누군가를 도와주었을 때에도 뿌듯한 행복감을 느낍니다. 각 경험들은 서로 종류가 다릅니다. 이때 뇌는 이 정보들을 하나의 범주로 모아놓기 위해 행복이라는 개념을 만듭니다. 그리고 그 개념 덕분에 앞으로 다가오는 감각적 사건들에 의미가 생깁니다. 

새로운 경험을 맞닥뜨리면 이것이 '행복'이라고 분류된 이전 경험들과 얼마나 비슷한지 신속하게 비교하면서 현재 경험을 해석합니다. 물론 이 과정에서 중요한 것은 내 기준입니다. 절대적인 '행복'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죠. 지금 내가 갖고 있는 목표들, 예를 들면 가족과 함께 즐거운 시간 많이 보내기, 꾸준히 운동하기, 사회에 참여하기 등이 반영됩니다. 이 모든 것은 나의 생존과 생체적응, 곧 알로스타시스가 효과적으로 이루어지는 데 기여합니다.


지금까지 말했듯 감정이란, 내 과거 경험과 맥락에 따라 실시간 만들어지고 변화하고 흘러가는 것이니까요. 상황이 조금만 바뀌어도 달라지는 것이 감정인데 우리는 거기에 지나치게 많은 의미를 부여해온 게 아닌지 모르겠어요.


어떤 감정을 느꼈든, 얼마나 강렬하든 상관없이 그것이 무엇이고 어떤 맥락에서 나온 것인지 의미를 구체적으로 알게 된다면 생각과 행동을 조절할 수 있습니다. 갑자기 분노가 폭발해서 소리를 지르는 사람에게 '감정조절'이 안 된다고 말하지만, 사실은 말과 행동의 조절이 안 되는 것이지요.


감기에 걸리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바이러스에 감염되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바이러스는 종류도 많고 감염되는 경로도 다양합니다. 하지만 어떤 이유로든 감기에 걸리면 '코가 막히고 열이 나고 기침을 하는 등' 거의 동일한 결과가 나타납니다. 이처럼 구조적으로 다른 요소들이 같은 기능 또는 같은 결과를 내는 것을 '축중(degeneracy, 縮重)'이라고 합니다. 우리에게는 좀 낯설게 들리지만 물리학이나 화학에서는 이미 널리 쓰이는 개념이자, 우리 뇌를 이해하려면 꼭 알아야 할 신경작용입니다. 배럿 박사는 저서 '감정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How emotions are made)'에서 이 '축중' 개념을 가지고 정서를 설명합니다. 슬픔이나 화 같은 정서 경험도 그와 다르지 않다는 얘기지요. 갖가지 원인으로 인해 드러난 결과 또는 현상을 슬픔, 화, 기쁨으로 우리가 해석하는 것이지 애초에 화와 슬픔, 기쁨을 일으키는 신경학적 기제가 따로 있지 않습니다. 


혹시 '파충류의 뇌' '포유류의 뇌' 같은 말을 들어봤나요? 폴 매클린(Paul MacLean)이라는 신경과학자가 제안한 '삼위일체 뇌(Triune Brain)'이론에서 나온 말입니다. 인간의 뇌는 가장 깊은 곳의 파충류의 뇌, 그다음 층인 포유류의 뇌를 거쳐 진화했으므로 뇌가 세가지 층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주장이었지요. 1950년대에 처음 발표된 이래로 이 이론은 매우 널리 알려졌습니다. 하지만 최근 신경과학자들은 우리 뇌가 이처럼 층을 이루어 진화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밝혔습니다. 인간의 뇌가 다른 동물과 다른 것은 구조가 달라서가 아니라 더 미세하게 신경 배선(wiring)이 되어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지요.


'이성으로 감정을 통제한다'는 말은 뇌신경과학의 입장에서 보면 틀린 말입니다.


하지만 감정에 대해 제대로 이해하려면, 이렇게 생각과 감정을 대립 구도로 보는 시각부터 버려야 합니다.


아주 오랫동안 심리학은 뇌가 '자극(Stimulus) --> 반응(Response)' 기관, 즉 자극을 받아야 반응하는 기관이라고 가정해왔지만, 신경과학의 발견들로 이 역시 사실이 아님이 밝혀졌습니다. 동물의 신경계는 외부 자극이 있어야 반응하는 것이 아니라, 먼저 감각이 예측되고 그 뒤에 바깥에서 들어오는 감각 입력들에 의해 교정되는 순서로 작동합니다. 끊임없이 움직이는 뇌 활동이 들어오는 감각정보 처리에 영향을 끼치기 때문에, 엄밀히 말해서 이전에 내가 경험한 것과 무관하게 '중립적' 또는 '객관적'으로 지각한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도구적 접근에서 말하는 심리적 건강이란 무조건 긍정적인 기분을 많이 느끼고 부정적인 기분을 덜 느끼는 것이 아닙니다. 그보다는 유용한 정서를 더 많이 느끼고, 해로운 정서를 덜 경험하는 것을 뜻합니다.


그럼 사람들은 특정 정서가 유용한지를 어떻게 알까요? 특정 맥락에서 어떤 정서가 유용하다는 것을 학습한 사람은 비슷한 상황에 처할 때 그 정서에 대한 선호도가 높아집니다. 그러므로 정서에 대한 선호는 변할 수 있슶니다. 내 감정을 적절히 표현해 대인관계가 좋아지거나 당면한 목표를 성공적으로 이루었다고 판단되면 그 감정은 더 많이 느껴지고 더 빈번하게 표현될 수 있습니다. 반면 내가 느끼는 감정을 솔직하게 있는 그대로 표현했다가 예상치 못했던 불리한 경험을 했다면 그와 비슷한 감정은 통제될 수 있습니다. 표현만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덜 느낄 수도 있습니다.


마음챙김에 관한 중요한 경전 중 하나인 '사띠빳타나경(Satipatthana sutta, 念處經)'에서 부처는 신체긴으, 감각, 그리고 느낌과 의식, 의식의 내용 등의 무상한 본성을 명확히 바라보며 마음챙김을 유지할 것을 권했습니다. 반면 서구의 마음챙김 훈련들은 무아나 무상을 그만큼 가옺하지는 않습니다.


주의를 한곳에 붙들어매려고 애쓰는 것이 아니라, 지금 내게 들어온 자극에 대해 자동으로 해석(interpretation)하려는 경향을 자제하는 것입니다.


오랫동안 명상을 지도해온 기 암스트롱(Guy Armstrong)에 따르면, 마음챙김이란 "무언가를 경험하면서 그것을 경험하고 있다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감정이 격할 때, 또는 무언가 자극을 강하게 받았을 때에는 순간 내 몸과 마음에 일어나느 ㄴ느낌을 보면서 걷습니다. 마치 내 위에서 나를 내려다보듯 '아, 속이 부글부글 끓고 있구나' 또는 '배가 쿡쿡 쑤시는구나' '아주 뚜껑이 열렸다 닫혔다 하는구나' 하고 중얼거리기도 합니다. 머리가 뜨겁거나 어깨가 쑤실 때에는 그 부분을 만져주면서 따뜻한 마음으로 대합니다. 그리고 '어째서 그런 느낌이 드는 거니?' '이 느낌들은 어디에서 온 거야?' 하고 물어봐줍니다. 몸의 느낌에 대고 직접 물어보는 것입니다. 빨리 감정을 억누르려 하거나 일부러 다른 생각을 하려고 애쓰는 것보다 훨씬 효과적입니다. 몸은 종종 우리에게 직접 답을 건네주기도 합니다.


캐나다의 임상심리학자 랜디 패터슨(Randy Paterson)은 "자존감이라는 말은 시대가 만들어낸 신화다. 실제로 존재하지도 않는다"고 주장합니다.


박사는 저서 <비참해지는 법(How to be miserable)>에서 "'자기혐오'가 있을 뿐'자존감'이라는 것은 없다"고 주장합니다. 왜냐하면 자존감은 추구해서 어덩지는 대상이 아니라, 균형잡힌 삶을 잘 살아갈 때 결과적으로 느껴지는 전반적인 만족감에 지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한편 마음챙김의 연구로 유명한 심리학자 리처드 라이언ㅇ과 커크 워런 브라운은 <왜 우리에게 자존감이 필요없는가?(Why we don't need self-esteem)>라는 도발적인 제목으로 글을 발표했지요. 이들은 '나'를 대상으로 self-as-object 바라보는 서구 심리학의 오랜 관습 때문에 나에 대한 다른 사람들의 반응과 의견을 내면화한 것을 '나'로 착각하게 되었다고 설명합니다.


반면 '나'를 하나의 과정(self-as-process)으로 바라보는 사람들은 내가 가치있는지, 쓸모 있는지, 사랑받을 만한지 확인하려고 애쓰지 않기 때문에 자존감 같은 것이 필요 없어진다고 주장합니다.


내 이름이 지영이라면 "나 화났다"가 아니라 "지영이가 화가 났구나"라고 말을 걸어보는 겁니다. 내가 아끼는 조냊가 화가 났다고 하니, "지영아, 무엇에 화가 났니? 내가 어떻게 해주면 좋겠니?"라고 자연스럽게 물어보게 되겠지요. 이렇게 나 자신에게 3인칭 시점으로만 말을 걸어도 정서조절이 더 잘된다는 연구 결과도 있답니다.


오레곤대학교의 심리학자 엘리엇 버크먼(Elliot Berkman) 교수는 농사를 짓거나 병원에서 일하는 레지던트처럼 신체적으로 고단하게 일하는 상황이 아니라면 우리의 피로는 대부분 심리적인 것이라고 말합니다.


버크먼 교수에 따르면, 사람들이 항상 피곤하다고 느끼는 것은 대개 강도 높은 정서 때문입니다.


지나치게 긍정적인 감정도 사람을 피곤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결국 부정적이든 긍정적잉든 강도가 높은 감정은 몸에 부담을 준다는 말입니다. 

물론 정신적으로도 부담을 줍니다.


세팔라 박사에 따르면 행복은 성공해서 얻어지는 결과가 아니라, 오히려 성공으로 이끄는 원인입니다.

물론 이때의 행복이란 열정이나 흥분과 같이 강하게 일어나는 감정이 아니라, 차분함-만족감-평화로움과 같이 강도가 낮은 긍정적 정서를 말합니다. 이러한 정서들은 스트레스에 더욱 잘 대응하게 해주고 역경을 만나도 문제를 더 능숙하게 해결하도록 해줍니다.


내가 살아오면서 지금껏 보아온 사람들, 그리고 그리 길지 않은 시간 동안이지만 심리학과 뇌과학이 만나 빚어낸 수많은 최신 연구 결과들을 볼 때, 내 생각은 대략 한 방향으로 수렴됩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최선을 다하지만, 그 결과는 알 수 없지' 하고 마음을 먹는다면 어떨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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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정의 자세한 분화와 수치화는 자신의 마음을 매우 구체적으로 다룰 수 있게 해주어, 여러가지 상황에서 더 좋은 판단을 할 수 있도록 돕는다.


연인-가족 사이에 일어나는 사랑의 감정, 상대에게 내 모든 것을 의지하고 싶은 마음, 사랑이 배신당했을 때의 처절한 감정들은 이미지화하면 할수록 그 기저에 존재의 불안, 신에 대한 열망, 허무함 같은 깊은 욕망과 이어져 있음을 이해하게 된다. 그 욕망은 우리가 인지할 수 있는 것보다 거대해서, 왜 그런 것이 있어야 하는지, 무엇 때문에 그렇게 되는 것인지 이해하기도 힘들다. 게다가 그 흐름은 고고하고 도도하다. 아무도 모르는 숲속에서 흘러나온 위대한 강과 같은 느낌이다.


인간의 두뇌는 수학적 판단으로 움직인다. 우리의 마음이라는 것도 실은 마찬가지다.


치료자인 내 입장에서는 문제가 만성적인 경우 개입해야 하지만, 일시적인 경우 굳이 문제의 원인을 따질 필요가 없다. 문제가 있다고 해서 꼭 풀어야 하는 것은 아니니까.


자신의 문제를 스스로 파악할 때도, 마치 남을 분석하듯 질문을 던지고 경우의 수를 나누고 일일이 상황을 대입해 보아야 한다. 평소 논리적으로 생각하는 습관도 필요하겠지만, 더 중요한 것은 자신을 정당화하려는 무의식적인 방어기제들이다.


가족이나 친구와 대화를 할 때 걸핏하면 화를 내는 사람은 정상적인 대화론 상대를 이길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자신이 이런 사람이라면, 불편한 감정을 느끼는 순간 그 감정에 몰입하는 것을 스스로 방해하라. 자신을 관찰하는 제2의 자아를 끄집어내야 한다. 화난 나, 울고 있는 나를 객관적으로 관찰하는 눈을 떠올려보라. "화가 났는데 어떻게 떠올려요?"라고 할지도 모르겠다. 그때는 관찰하는 사람의 마음으로 나에게 말을 거는 것이다. 

'너 화가 많이 났구나.' 

이렇게 속으로 '분명하게' 말을 걸어라. 그 후에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흥분하지 마. 지금은 네가 화낼 때가 아니야. 우리 조금만 더 상황을 살펴보자.'

이렇게 되기까지는 훈련이 좀 필요한데, 평소에도 자신에게 말을 걸고 대화하는 버릇을 키울 필요가 있다.


단순하고 미숙할수록 병적인 카테고리화가 일어나는데, 내가 남자라는 이유만으로 '상남자 vs. 非상남자(여자, 게이, 트렌스젠더, 일부일처 남자, 허약한 남자, 고자 등 모두 포함)' 같은 구도를 만들기도 하고...


인간 역사에 있어 자신의 오류를 정당화시켜줄 존재는 항상 필요했다. 사람들은 범주화를 통해 존재의 불합리성을 '악'으로 규정했다. 종교적인 악에 대한 믿음이 사라진 지금은 그런 시선이 인간에게로 향하는 것 같다. 남녀 간에도 계층 간에도 이런 양상이 보이며, 외국인이나 소수자를 대하는 방식에서도 이런 점이 잘 드러난다.

이 방식은 참으로 편리하다. 특별한 회개나 성찰이 없어도 마음이 편해지니까. 혐오하는 대상이 있으면 분노 에너지는 좀 들지만, 그를 통해 얻는 정당성으로 안도감을 얻는다. 게다가 자신을 악에 희생된 피해자에 위치시켜 책임과 의무를 회피할 수도 있다. 그게 편안하고 따뜻하게 느껴지겠지만, 실제로 그것은 자신을 장작 삼아 태운 온기에 지나지 않는다.


어릴 때 왕따를 당했던 내담자에게 흔히 하는 말이 있다.

"트라우마에서 벗어나야 해요. 자신을 객관적으로 바라보세요."

이 말은 카메라를 자신의 머리 위쯤에 두라는 이야기다. 내담자들은 카메라를 자기 눈에 위치시키고, 옛날 자기를 괴롭힌 아이 앞에 서 있던 자신을 반복하려 한다. 시간도 어린 시절에 고착되어 있고, 스스로도 어린아이인 채로 남아있다. 상담자는 현재 시점에서 환자가 '과거의 일은 이미 지나가버린 것'임을 깨닫게 해주어야 한다. 그래서 내담자 스스로 머리 위의 객관적 시점에서 자기 자신과 가해 아동을 관찰하기를 권유한다. 이는 자신을 피해 아동이라는 틀에 갇히지 않게 해주며, 이미 다 지난 꼬마아이들 간에 일어난 일로 어린 시절의 사건을 재해석하도록 도와준다.

이렇게 시점 카메라를 이동시키면서 자신을 상상하고 관찰하다 보면 탄생하는 것이 있다. 첫번째는 상상 속 타인들의 시선에 대한 반응으로, 이는 '하부 인격'들을 형성하기 시작한다. 여기에 구체적인 대인관계, 사고 판단의 패턴들이 결합되면서 점차 정교한 인격이 된다. 두번째는 그보다 상위 개념인 '내면의 하부 인격들을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나', 즉 '관찰하는 자아(Observing Ego)'다. 이를 통해 자신과 타인, 사물을 냉정하게 거리를 두고 이해하는 것은 물론, 자기 내부의 여러 인격들의 움직임이나 감정도 관찰하며 조정할 수 있다. 이에 대해서는 이어지는 소인격체 이론에서 다시 다룰 것이다.


자신의 언행이 평소답지 않다거나 감정이 과격해 졌다거나 수줍어졌다거나 말투가 다른 사람처럼 변했을 때, 우리는 그 변화를 스스로 깨달아야 한다.


그 다음으로, 과연 그 상황에서 그 인격이 나오는 것이 적절한가 생각해본다.


이런 생각들을 해가며 자기 내면에서 불쑥 튀어나오는 여러 가지 인격들을 이해하다 보면, 그들을 관찰하는 새로운 자아가 발달하기 시작한다. 처음에는 그들이 밉거나 부끄럽지만, 내부의 부정적 자아도 긍정적 자아들과 함께 맡은 역할이 있음을 차차 이해하게 된다. 결국 자기 자신은 성장하고 있는 존재이며 아직 완벽하진 않더라도 내가 옳은 길을 가고 있음을 이해하고, 자애롭고 균형잡힌 눈으로 자기를 바라볼 수 있게 된다.


'자기 통합'이라는 말이 어렵게 들릴 수도 있다. 그러나 내면의 하부 인격들끼리 친근하게 대화를 진행한다고 생각하면 더 쉬울 것이다.


폭력적인 남자들은 실제로 내부의 열등감이나 불안감이 심한 편이다. 그래서 자신의 유일한 무기, 즉 폭력과 분노에 의지해 주변 사람을 대한다. 안타깝게도 가장 가까이 해야 할 자식들이 그 폭력의 대상이 되는 경우가 많고, 자신에 대해서도 자학적인 태도를 가지고 있어 심리적 접근이 어렵다. 이런 아버지의 아들-딸들은 왜 아버지가 그랬는지 이해하기 어려워하며, 아버지를 그저 정체를 알 수 없는 괴물로 느끼는 경우가 많다. 따라서 의사는 아버지가 왜 그런 행동을 했는지 심리적인 재해석을 해줘야 한다. 폭력성의 내면은 외로움, 열등감, 고집, 무지 등으로 가득하다는 것을 이해할수록, 폭력에 대한 두려움도 제어할 수 있게 된다.


인간이 가진 중요한 의무는, 부모가 가르쳐준(그게 좋든나쁘든) 인간에 대한 관점, 사회가 가르쳐준 관점을 극복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현재 자신의 위치와 삶의 목표를 돌이켜보는 과정이 필요하다. 이 과정에서 참자아가 발생하며, 부모와 사회를 넘어선 이후에는 또다시 자신이 만들어낸 관점을 극복하는 과정이 필요하게 된다. 이 모든 과정을 거치며 나라는 이상한 나라의 영토가 점점 더 확장되는 것이다. 


자기 취향을 세분화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느냐가 중요하다.


부정은 쉽다. 어떤 사실이나 존재를 그저"아니"라고만 하면 되니까. 없애는 것은 쉽고, 만드는 것은 노력을 필요로 한다. 우울증 환자가 쉽게 부정적 감정에 휩싸이는 것도 그것이 긍정적 감정을 갖는 것보다 힘이 덜 들어서다. 치료자인 의사도 환자의 분노, 짜증, 불안을 '제거'하는 것은 비교적 쉬운 반면, 화자에게 의욕이 생기도록 하려면 많은 노력을 해야만 한다.


긍정적 감정은 아주 작을 때가 많다. 친구에게 펜을 빌려주고 싶은 마음, 개미를 밟지 않으려는 마음, 하늘을 보고 든 '참 아름답구나' 하는 생각 등. 이를 남에게 굳이 말할 것 까진 없다고 해서 자기 자신에게까지 숨기지는 않아야 한다. 자기 자신에게 '내가 이런 생각을 했구나. 흠, 꽤 착한걸'하며 작은 칭찬이라도 꼭 하는 것이 좋다. 내가 말을 해놓고도 내가 더 기뻐질 것이다.


우울증에 숨어 있는 분노를 이겨내려면, 자신을 괴롭히거나 남을 비난하고 싶은 욕망에 지지 말아야 한다. 자꾸 스스로를 칭찬해주어야 한다. 헛말, 거짓말이란 걸 알더라도, 자기 글씨를 보며 "우리 ㅇㅇ 글씨 참 잘 썼네", 라면을 끓여놓고 "우리 ㅁㅁ 어디 가서 굶지는 않겠네" 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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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자의 자리에서 욕심을 버리고 진심을 다해 최선을 다한다면 분명 살기 좋은 세상이 될 거야. 지금 우리에겐 그게 제일 필요해." - 유희열의 문유석 판사 회고 중에서


담담한 동심


이제 파산 문제는 특정 계층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들 자신을 포함한 모든 사람에게 닥칠 수 있는 문제이고,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파산제도와 개인회생제도는 일종의 사회적 보험인 것입니다.


어찌 보면 법원의 면책결정은 별 게 아닙니다. 원래 가치가 0원인 채권을 0원이라고 공식 확인해주는 것에 불과한 것이죠.


물론 파산 사건의 증가와 함께 이러한 악용 사례가 늘어날 가능성은 저희들도 항상 염려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적어도 아직까지 우리나라에서의 개인파산은 남용을 걱정하기보다는 이용하지 않는 것을 걱정해야 하는 걸음마 단계라고 생각됩니다.


파산한 기업은 청산되어 소멸하지만, 파산한 인간은 계속 살아가야 합니다. 도전하다가 쓰러진 인간에게는 무덤 대신 두 번째 기회가 주어져야 합니다. 이것이 활자가 아닌 사람을 통해 제가 배운 것입니다. 


한번도 용서받지 못한 사람


그런데 그 순간, 피고인의 마지막 한마디가 제 가슴을 찔렀습니다. "나는 단 한 번도 용서받아 본 적이 없습니다!"


희망이 인간을 고문한다


기성세대의 위선을 비웃고 가치를 전복하려 싸우다 보니 어느새 이제는 위악이 쿨한 것이고 날 것의 욕망이 솔직한 시대가 돼 버린 것 같습니다. 하지만 위악이 위선보다 나은 것이 도대체 뭐죠?


대중의 물질적 욕망의 배후에는 자본의 논리가 있습니다. 로버트 매닝 (Robert D.Manning)의 '신용카드 제국'이라는 책을 읽어보면 미국의 1970년대 장기불황 시대에 금융자본이 기업금융으로 수익을 창출하지 못하자 찾아낸 활로가 소비자 금융임을 알 수 있습니다. 열심히 일한 당신, 떠나라! BC 로 사세요~


지성과 반지성


요즘 새삼스레 드는 생각은 좌와 우, 보수와 진보 등의 편 가르기는 다 본질과 직결되지 않는 '이름 붙이기'에 불과하고, 진짜 대립하고 있는 것은 지성과 반지성이라는 것입니다.


자신이 안다고 생각하는 것도 절대적 진리가 아니라 상대적일 수 있음을 인식하고, 자신이 틀릴 가능성을 인정하고 유보적인 태도를 취할 수 있는 것 또한 지성적인 태도일 것이빈다. 이에 반하여 자신이 믿고 있는 것 또는 자신이 바라는 것을 아는 것과 혼동하는 것, 더 나아가 자신이 믿고 있는 것 또는 바라는 것에 저촉되는 것을 무조건 배척하는 것은 갈릴레이를 법정에 세웠던 바로 그 반지성 아닐까요.


매사에 꼭 선명한 결론을 내리려고 무리하는 것은 오만인 동시에 무지입니다. 근거 없는 확신을 유포하는 것은 무지를 넘어선 범죄일 수도 있는 것이고요.


의견과 지식의 한계를 스스로 인식하고 이를 전제로 자기 검증을 되풀이하며 자기가 말할 수 있는 부분까지 말하자는 것입니다. 결론을 내릴 만한 근거가 없으면 스스로 단정하지 말고 의문만 제기하면 되는 것 아닙니까. 결론을 사실상 내려놓고 반문하는 의문이 아니라, 진실에의 열린 가능성을 열어 둔 순수한 의문 말입니다.


서울 법대와 하버드 로스쿨 3


수강신청을 할 때는 우선 이렇게 쌓인 수년 치의 강의 평가를 정독한 후 실제 수업을 들어가 직접 판단하고 확정합니다. 성의 없이 수업하는 교수가 살아남을 수 있을까요?


기본적으로 한국의 법학 교육은 학생들의 머리 위에 거대하고 복잡한 개념의 탑을 쌓아놓고, 그 완결적 구조의 아름다움을 음미하도록 하고는 실제 지금 이 사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분쟁을 해결하는 방법에 대해서는 각자 일하면서 알아서 자기 머릿속에 들어있는 개념들에 꿰어 맞추든지 뭐 알아서 하라는 방식인 것 같습니다.

하버드 로스쿨의 법학은 그야말로 '실사구시'하는 학문입니다. 기본적으로 판례법이 중요한 소스인데, 판례라는 것 자체가 실제로 사회에서 일어난 분쟁이나 해결의 과정이니 현실적일 수 밖에 없고요, 성문법을 주로 가르치는 과목도 기본적인 개념과 법조문은 학생들이 읽어와야 하지요. 그리고 교수는 실제 주로 발생하는 사례들이나 이를 단순화한 연습 문제를 가지고 이 법조문이 도대체 무슨 소리고 어떨 때 써먹으라고 나온 것인지를 가르칩니다. 


그런데 개인적으로 느끼기에는 시스템의 차이, 학문 풍토의 차이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차이는 이곳에서는 '정성', '성실' 같은 평범해 보이는 가치를 우리보다 더 귀하게 여긴다는 것입니다. 자기가 맡은 일에 최선을 다하는 것에서 행복을 찾는 것이 당연한 문화인 것이죠. 교수들도, 학사 행정을 담당하는 직원들도, 도서관의 사서들도, 스쿨버스를 운전하는 기사들도 다들 자기 일에 최선을 다하고 거기서 즐거움을 찾는 것 같습니다. 밥벌이하려고 마지못해 하고 있다는 인상을 받을 수가 없습니다.

다들 정말 귀찮을 정도로 학생들 공부를 도와주려고 애를 씁니다. 학사 행정 담당 스태프가 밤이고 일요일이고 학생들에게 메일을 보내서 다음주 주요 행사와 세미나를 알리고 참석을 권유합니다. 도서관 사서는 제 논문계획서를 읽어보고는 큰 흥미를 느낀 포인트를 말하며 자료 찾는 것을 도와줄 테니 만나서 같이 토론해 보자고 연락해 옵니다. 


한국형 세미나 유감


판사들도 법원 행사로 이루어지는 세미나 때 보면 겸손, 미괄식, 문맹자 배려 증후군을 잘 보여줍니다. 그런데 묘한 것은 판사들이 재판부 내에서 사건 결론을 합의할 때나 동료 판사들끼리 공통의 현안인 사건 쟁점에 대해 톨노할 때에는 또 완전히 딴판이라는 겁니다. 굉장히 효율적으로 쟁점만 치열하게 토론하곤 하거든요? 한참 싸우다가도 상대방의 논거가 더 그럴듯하면 바로 "어, 듣고 보니 그러네? 난 의견 번복하여 그 설에 찬동!" 하고는 손바닥 뒤집듯 바로 입장을 바꾸는 것에 거리낌들이 없고요.

짐작컨대 이런 토론은 그야말로 일상적인 업무로서, 모두의 시간이 금인 상황에서 가장 합리적인 결론을 빨리 도출해 사건을 해결해야 하는 실무적 필요성이 압도적인 경우니까 효율적으로 이루어지는 듯해요. 


이유 같지 않은 이유로


저는 그냥 엄벌할 것이면 엄벌할 사유를 상세히 힘주어  쓰고, 선처할 것이면 유리한 정상을 상세히 써서 양형 이유만 읽어봐도 이 재판부가 무엇에 중점을 두고 판단했는지 납득이 가도록 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정치, 사회 어느 영역에서든 세상을 정말 의미있게 바꾸기 위해서는 원래 자기와 의견이 같은 사람들의 열광보다 자기와 의견이 다른 사람들의 수긍을 얻을 수 있는 방법으로 주장을 펴야 한다고 봅니다. 판결도 마찬가지지요. 항상 첨예하게 이해관계가 대립된 양측이 있기 마련인데 모두가 박수치는 판결이란 있을 수 없다고 봐요. 판결에 불만족 하는 쪽에서도 '마음에는 안 들지만 읽어보니 판사가 잘못했다고까지는 하지 못하겠네' 정도의 반응을 보인다면 성공적인 판결문이 아닐지요. 그러기 위해서는 최대한 중립적인 입장에서 보편적인 논리와 어느 누구도 부인하기 어려운 근거를 들어야 할 것입니다. 


법원 유모아


법정에서 치열함을 넘어 살벌하기까지 한 갈등의 양 당사자들과 함께 재판을 진행해야 하는 법관에게 유머를 구사할 수 있는 여유와 능력은 소중한 자질이라고 생각


제도 이전에 욕망이 있다


애덤 스미스는 개개인이 최선을 다해 경쟁하면 결과적으로 사회 전체가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이롭게 된다고 했는데, 내쉬 균형에 따르면 실제로는 각자가 최선 대신 차선을 선택하는 방법으로 경쟁을 줄인다면 최악의 사태를 피할 수 있다는 것이니까요.


나는 놀기 위해 태어났다


대법원장님이 인사청문회 때 이런 말씀을 하는 것을 TV 에서 본 적이 있습니다. "나는 개인에 대한 외부의 부당한 간섭을 배격하고 자유분방함을 추구하며 인간을 일정한 틀에 묶어두려는 어떠한 시도에도 반대한다. 법의 사명은 이런 사회를 조성하는 것이다."



Posted by Daesung Ju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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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역에 관하여



2. 독감 백신에 대한 두려움

수은 화합물인 보존제 티메로살은 다회 용량 독감 백신을 제외하고는 모든 아동기 백신으로부터 2002년까지 완전히 제거되었다. 하지만 그로부터 십 년이 훌쩍 더 지난 지금까지도 백신 속 수은에 대한 두려움은 살아 있다.


3. 우리의 몸은 윌의 은유를 결정한다

영국인들은 <한 대 맞는다 jab>고 표현하고, 총을 좋아하는 우리 미국인들은 <한 발 맞는다 shot>고 표현한다. 어느 쪽으로 부르든, 백신 접종은 폭력이다. 그리고 백신 접종이 성 매개 감염병을 예방하기 위한 것일 때, 그것은 성폭력이 되는 듯하다.


백신 접종이 대개 흉터를 남기지 않는 지금도, 그 때문에 우리에게 영구적인 낙인이 찍힐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은 사라지지 않았다. 우리는 백신이 자폐증을, 혹은 오늘날 산업화된 나라들을 괴롭히는 여러 면역 장애 질병들(당뇨, 천식, 알레르기)을 일으킬지 모른다고 두려워한다. B형 간염 백신이 다발 경화증을 일으킬지 모른다고 두려워하고, 디프테리아-파상풍-백일해 백신이 영아 돌연사를 일으킬지 모른다고 두려워한다. 여러 백신을 동시에 접종하면 면역계에 부담이 될지 모른다고 걱정하고, 전체 백신 접종 수가 많으면 면역계가 압도되어 버릴지 모른다고 걱정한다. 일부 백신에 든 포름알데히드가 암을 일으킬지 모른다고 두려워하고, 다른 백신에 든 알루미늄이 뇌를 오염시킬지 모른다고 두려워한다.


그는 마크 트웨인을 언급한다. “어떤 미국인이 믿음이라는 것을 이렇게 정의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네. 즉, ‘믿음이란, 우리가 사실이 아니라고 알고 있는 것을 믿게 하는 능력’이라고 말이야.” 그리고 말한다. “그 사람 얘기는, 우리가 열린 마음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지. 작은 바위 덩어리가 철도의 화차를 막는 것처럼, 진실의 작은 조각이 커다란 진실이 나아가는 것을 막게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일세.”


4. 집단 면역

이웃이란 철학자들이 타자라고 부르는 것, 우리가 지닌 자기애의 이기성이 시험당하는 대상으로서의 존재 (키르케고르)


우리가 백신의 효과를 따질 때 그것이 하나의 몸에 어떤 영향을 미치느냐만 따지지 않고 공동체의 집합적 몸에 어떤 영향을 미치느냐까지 따진다면, 백신 접종을 면역에 대한 예금으로 상상해도 썩 괜찮을 것이다. 그 은행에 돈을 넣는다는 건 스스로의 면역으로 보호받을 능력이 없거나 의도적으로 그러지 않기로 결정한 사람들에게 기부하는 셈이다. 이것이 바로 집단 면역(herd immunity)의 원리이고, 집단 접종이 개인 접종보다 훨씬 효과적인 것은 바로 이 집단 면역 덕분이다. 


효과가 상대적으로 적은 백신이라도 충분히 많은 사람이 접종하면, 바이러스가 숙주에서 숙주로 이동하기가 어려워져서 전파가 멎기 때문에 백신을 맞지 않은 사람이나 백신을 맞았지만 면역이 형성되지 않은 사람까지 모두 감염을 모면한다. 자신을 백신을 맞았지만 미접종자가 많은 동네에서 사는 사람이 자신은 맞지 않았지만 접종자가 많은 동네에서 사는 사람보다 홍역에 걸릴 가능성이 더 높은 건 그 때문이다.


5. B형 간염 백신과 공중 보건 조치의 계급성

B형 간염 백신 접종의 한 가지 수수께끼는 최초의 공중 보건 전략이었던 <고위험군> 접종만으로는 감염률을 낮출 수 없었다는 것이다. 1981년에 B형 간염 백신이 처음 도입되었을 때는 수감자, 보건 노동자, 게이 남성, 정맥 주사를 쓰는 마약 복용자에게만 권유되었다. 그러나 B형 간염 감염률은 변함이 없었고, 그로부터 십 년 뒤에 모든 신생아에게 백신을 권장했을 때야 비로소 낮아졌다. 집단 접종만이 감염률을 낮출 수 있었던 것이다.


우리 시대가 철저히 취약한 존재로 여기도록 부추기는 아이들의 작은 몸도, 사실은 질병을 퍼뜨릴 능력이 있기 때문에 위험한 존재이기도 하다.

 

“백신은 다수 집단을 동원해서 소수 집단을 보호함으로써 효과를 발휘하지.” 아버지(의사)의 설명이다.


6. 우리에게는 병균이 필요하다

요즘도 위생 가설을 감염성 질병을 예방하지 말아야 할 이유로 해석하는 사람들이 있다. 한 친구는 내게 “아직 정확히는 모른다지만, 홍역 같은 질병이 건강에 꼭 필요할지도 모른대”라고 말했다. 하지만 아메리카 대륙의 선주민들은 몇천 년 동안 홍역 없이 살았고, 비교적 최근에 대륙에 홍역이 도입되었을 때 그 결과는 처참했다.


많은 바이러스는 우리가 없으면 번식하지 못하지만, 우리도 바이러스에게서 얻었던 것 없이는  번식하지 못하는 것이다.


7. 오염에 대한 두려움

옛날 한 수도원장은 어떻게 신자와 이단자를 구별하면 좋겠느냐는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고 한다. “모조리 죽여라. 신은 제 백성을 알아보실 것이다.”


이미 많은 연구에서, 항균 비누로 씻는 게 그냥 비누와 물로 씻는 것보다 세균을 더 잘 제거하진 않는다는 결과가 나왔다. 매스턴 박사가 넌지시 말한 바에 따르면, 트리클로산이 비누에 들어 있는 건 오로지 회사들이 세균을 씻어내기보다 죽인다고 약속하는 항균 제품에 대한 시장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홍역 환자 1,000명 중 약 1명 꼴로 뇌염이 따른다는 건 알고, MMR(홍역-볼거리-풍진) 백신 접종자 300만 명 중 약 1명꼴로 접종 후 뇌염 발생이 보고된다는 건 안다. 그런 사례는 워낙 드물기 때문에, 연구자들은 그런 뇌염이 정말 백신 때문에 일어난 건지 아닌지를 확실히 결론 내리진 못했다.


어떤 종류의 백신이든 주사 후 실신과 근육통을 일으킬 수 있는데, 그것은 백신 때문이 아니라 주사 행위 자체 때문


<위험 인식, 즉 사람들이 주변 환경의 위험 요소에 대해 내리는 직관적 판단은 전문가들이 제공하는 증거에 완강하게 저항하곤 한다.> 역사학자 마이클 윌리히는 그렇게 말했다. 우리는 우리를 해칠 가능성이 가장 높은 것들은 오히려 겁내지 않는 경향이 있다. 우리는 운전을 한다. 그것도 아주 많이 한다. 술을 마시고, 자전거를 타고, 너무 오래 앉아 있는다. 그러면서 오히려 통계적으로 따져서 별달리 위험하지 않은 것들을 걱정한다. 우리는 상어를 무서워하지만, 순 사망자 수로 따지자면 지구에서 제일 위험한 생물은 모기일 것이다.


슬로빅이 실험에서 확인했던 경우처럼 사람들이 자신의 믿음을 반박하는 정보를 접할 때, 우리는 자신이 아니라 정보를 의심하는 경향이 있다.


연구자들이 나 같은 사람에게서 목격하는 통계적 위험 무시 현상은, 부분적으로나마, 위험에 휘둘리는 삶을 살기 싫다는 마음 탓일 것이다.


독성학자들은 <용량이 독을 결정한다>고 본다. 어떤 물질이든 과잉으로 쓰이면 독이 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물이 아주 많은 용량일 때는 인체에 치명적이라, 2002년 보스턴 마라톤 대회에서 주자가 수분 과잉으로 죽은 사건도 있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물질을 용량과는 무관하게 안전한 것 아니면 위험한 것으로 생각한다. 그리고 이런 사고방식을 노출에 대해서까지 확장하여, 화학 물질에 노출되는 것은 아무리 짧거나 제한적이더라도 무조건 해롭다고 여긴다.


8. 자연은 선하다는 통념과 ‘침묵의 봄’

요즘 어떤 부모들은 아이가 백신 없이 ‘자연적으로’ 감염성 질병에 대한 면역을 발달시키도록 만든다는 발상에 매력을 느낀다. 그 매력은 백신이 본질적으로 부자연스러운 것이라는 믿음에 의지한 바가 크다. 그러나 백신은 인간과 자연 사이의 중간적 장소에 속하는 물질이다.


효과 없는 치료법, 독성 강한 예방약, 환경을 망치는 살충제가 여태 쓰이는데, 왜냐하면 말라리아에 쓸 수 있는 효과적인 백신은 아직 없기 때문이다. 안타깝게도 DDT는 현재 그런 장소에서 말라리아를 좀 더 효과적으로 통제할 수 있는 몇 가지 수단 중 하나다. 남아프리카 공화국 일부 지역에서는 일 년에 한 차례 집 안쪽 벽에 DDT를 바르는 것만으로도 말라리아가 거의 근절되었다. 미국에서처럼 비행기로 수백만 에이커에 뿌리는 방법과 비교할 때, 이 적용 방법은 환경에 주는 충격이 비교적 적다. 그러나 DDT는 여전히 완벽하지 않은 해법이다. DDT를 생산하는 화학 회사가 거의 없고, DDT를 살 돈을 기꺼이 후원하려는 기부자는 없으며, 많은 나라는 딴 나라에서는 금지된 화학 물질을 쓰기를 꺼린다.


13. 여성 치료사와 비난받는 엄마들

논문이 널리보도되자 홍역 백신 접종률이 뚝 떨어졌지만, 사실 논문의 결론은 <우리는 홍역, 볼거리, 풍진 백신과 앞서 말한 증후군 사이의 연관성을 증명하지는 못했다>라는 거였으며 논문의 주된 발견은 더 많은 연구가 필요하다는 거였다.


14. 우리는 모두 오염된 존재

백신 속 포름알데히드가 암을 일으킬지도 모른다는 공포는 미량의 물질에 대한 공포라는 점에서, 즉 사람들이 해당 물질의 다른 흔한 공급원들을 통해 접하는 양보다 상당히 더 작은 양을 두고 형성된 공포라는 점에서 수은이나 알루미늄에 대한 공포와 비슷하다. 포름알데히드는 자동차 배기가스와 담배 연기에 들어있을 뿐더러 종이 가방과 종이 타월에도 들어 있고, 가스 난로나 벽난로에서도 나온다.


고농도라면 정말 유독하지만, 포름알데히드는 인체가 만들어내는 물질인 데다가 대사 활동에도 꼭 필요한 물질이다. 게다가 애초에 우리 몸에서 순환하고 있는 포름알데히드의 양은 백신 접종으로 얻는 양보다 상당히 더 많다.


모유를 분석한 실험실들은 그 속에서 페인트 희석제, 드라이클리닝 용액, 내연제, 농약, 심지어 로켓 연료를 검출해냈다.


순수함, 특히 신체적 순수함은 언뜻 무해한 개념으로 보이지만, 실은 지난 세기의 가장 사악한 사회 활동들 중 다수의 이면에 깔린 생각이었다. 신체적 순수함에 대한 열정은 맹인이거나 흑인이거나 가난한 여자들에게 불임 시술을 실시했던 우생학 운동의 동기였다. 신체적 순수함에 대한 걱정은 노예제가 폐지된 뒤에도 한 세기 넘게 살아남았던 인종 혼합 결혼 금지법의 이면에 깔린 생각이었으며, 최근에서야 위헌으로 판정된 남색 금지법의 이면에 깔린 생각이기도 했다. 모종의 상상된 순수성을 보존하려는 노력 때문에, 그동안 인류의 유대는 적잖이 희생되어 왔다. 제대혈과 모유에 든 엄청나게 다양한 화학물질이 앞으로 아이들의 건강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는 아직 정확히 모른다지만, 최소한 우리는 우리가 출생 시점부터도 전반적인 주변 호나경보다 더 깨끗한 존재는 못 된다는 걸 안다. 우리는 모두 오염된 존재이다. 자기 몸의 세포보다 더 많은 수의 미생물을 장 속에 품고 있다. 우리는 세균으로 우글거리는 존재이고, 화학 물질로 포화된 존재이다. 한마디로 우리는 지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과 이어져 있다. 물론, 그리고 특히, 다른 사람들과도.


17. 백신 속 수은을 둘러싼 혼란

후속 연구를 통해서 에틸수은과 메틸수은은 <크나큰 차이>가 있다는 게 확인되었는데, 제일 중요한 점은 에틸수은에는 메틸수은이 일으키는 신경 독소효과가 없다는 점이었다. 2012년 ‘소아과학’에 실린 기사는 AAP의 티메로살 성명 이후 13년 동안 수행된 연구를 돌아보며, <백신 속 티메로살이 인체에 위험하다는 신뢰할 만한 과학적 증거는 없다>고 결론내렸다.


18. 자본주의와 백신

백신 접종 거부는 엄밀히 따져서 자본주의의 전형이라고는 할 수 없는 체계를 훼손하는 일이다. 이 체계에서는 온 인구가 부담과 이득을 함께 진다. 백신 접종은 자본주의의 산물을 자본의 압박에 대항하는 목적으로 사용하게끔 해주는 일이다.


19. 가부장주의 vs 소비자 중심주의

의사들의 가부장주의는 그동안 환자들의 소비자 중심주의로 교체되어 왔다. 우리는 소비자 수요 조사에 근거를 두고 작성된 메뉴를 들여다보면서 그중에서 검사와 치료법을 주문한다. 가부장주의 모형에서 아버지에 해당했던 의사는 여기에서는 웨이터다. 손님이 왕이라는 생각은, 의학에 도입될 경우 위험천만한 금언이 된다. 생명 윤리학자 아서 캐플런은 이렇게 경고했다. <사람들에게 의료는 시장일 뿐이고 그들은 의뢰인일 뿐이며 그들이 고객으로서 만족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환자의 자율성을 제공받아야 한다고 계속 말해준다면, 의료의 전문성은 소비자의 요구 앞에 붕괴하고 말 것이다.> 의사들은 환자들이 원하는 것을 주려는 유혹을 느낄 것이다. 그것이 설령 환자들에게 나쁘더라도.


21. 지나치게 많고 지나치게 이르다?

무균실에서 살지 않는 한, 모든 아기에게는 여러 차례의 백신 접종에서 얻은 약독화된 항원을 처리하는 것보다 매일 일상에서 감염을 물리치려고 싸우는 게 더 버거운 일일 것이다.


23. 양심적 거부와 도덕의 문제

“까다로운 부분은, 그냥 불편한 느낌과 양심이 말해주는 바를 어떻게 구별할 건가 하는 문제야”


법률은 일부 사람들이 의학적, 종교적, 철학적 이유에서 백신 접종으로부터 면제받을 수 있도록 허락한다. 하지만 우리 스스로 그런 사람 중 하나가 될 것인가 말 것인가 결정하는 문제는 정말로 양심의 문제다.


여동생은 이렇게 제안했다. “서로 의존하는 관계라고 생각해 봐. 우리 몸은 자기 혼자만의 소유가 아니야. 우리는 그렇지 않아. 우리 몸들은 서로 독립적이지 않지. 우리 몸의 건강은 늘 남들이 내리는 선택에 의존하고 있어.”  이 대목에서 동생은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몰라서 잠시 머뭇거렸는데, 그녀에게는 드문 일이었다.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지도 잘 모르겠지만, 요컨대 독립성이란 환상이 존재한단 거야.”


24. 자연적 몸과 정치적 몸

우리는, 우리 몸은, 독립적이면서도 의존적이다.


종류를 불문하고 모든 위험-편익 분석과 집단 면역 모형에서는 백신 접종이 대중 뿐 아니라 개인에게도 이득이라는 결론이 나오는 편이다.


26. 건강과 질병의 이분법

그녀가 조사했던 사람들 중 일부는, 그녀의 표현을 빌리자면 <면역 마초> 같은 태도를 보였다. 가령 자기 면역계가 <끝내준다>고 말하는 식이었다. 역시 마틴이 들은 말을 인용하자면, 어떤 사람은 <훌륭한 생활 기준을 따르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백신이 필요하지만, 중산층이나 상류층 사람들의 좀 더 세련된 면역계에는 백신이 방해만 될 것> 이라고 말했다.


면역 기능이 약화된 사람은 잘 기능하는 면역계를 가진 사람들이 면역을 지녀서 자신을 질병으로부터 보호해 주는 데 의존할 수 밖에 없다.


질병이 정말로 무언가에 대한 벌이라면, 그것은 오직 살아있는 데 대한 벌일 뿐이다.


어릴 때 내가 아버지에게 무엇이 암을 일으키느냐고 물었더니, 아버지는 한참 생각하다가 이렇게 대답했다. “생명, 생명이 암을 일으킨단다.” 암의 역사를 쓴 싯다르타 무케르지의 책을 읽기 전까지, 나는 아버지의 저 대답을 교묘한 둘러댐으로만 여겼다. 무케르지는 책에서 생명이 암의 원인일 뿐 아니라 심지어 암이 곧 우리라고 주장했다. “그 타고난 분자적 핵심까지 속속들이, 암세포는 과잉 활동적이고, 생존 능력을 타고났고, 공격적이고, 생식력이 뛰어나고, 창의적인 우리 자신의 복사본이다” 그리고 그는 덧붙였다. “이것은 결코 은유가 아니다.”


27. 과학 정보를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우리가 지식을 몸으로 상상한다면, 몸의 일부가 맥락으로부터 뜯겨 나갔을 때는 뻔히 해로울 것임을 알 수 있다. 백신을 둘러싼 토론에서는 이런 식의 절단이 상당히 자주 벌어진다. 전체 연구가 지지하지 않는 어떤 입장이나 생각을 지지하기 위해서 개별 연구를 내세우는 것이다.


우리가 과학적 증거를 알아볼 때는, 정보 전체를 고려해야 한다. 수역 전체를 조사해야 한다. 만일 그것이 방대하다면, 어느 한 사람이 하기에는 불가능한 일이 된다. 의학 한림원에 제출할 2011년 백신 부작용 보고서를 작성하기 위해서 동료 심사를 거친 논문 12,000편을 점검하는 일에는 의학 전문가 18명으로 구성된 위원회가 꼬박 2년을 들여야 했다. 그 위원회에는 연구 기법 전문가, 자가 면역 질병 전문가, 의료 윤리학자, 아동 면역 반응에 대한 권위자, 아동 신경학자, 뇌 발달 연구에 전념하는 연구자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들의 보고서는 백신이 비교적 안전하다는 사실을 확인한 것은 물론이거니와 오늘날 우리에게 주어진 정보를 항해하는 데 어떤 종류의 협동이 필요한지도 보여주었다. 우리는 혼자서는 알 수 없다.


28. 모르는 것이 주는 두려움

“두려움은 존중할 수 있어요. 백신에 대한 두려움은 이해할 만합니다. 하지만 그런 결정은 존중할 수 없어요. 그건 쓸데없는 위험을 지는 겁니다.”


아버지가 스토아 철학에 끌린 이유는, 내게 설명하신 데 따르면, 우리가 자신에게 벌어지는 일을 통제할 순 없지만 그 일에 대한 감정은 통제할 수 있다는 생각 때문이다. 장 폴 사르트르의 말을 빌리자면, “자유란 주어진 것에 대한 행함”이다.


29. 의학적 신중함과 사회적 편견

사람들이 편견으로 기우는 경향성은 스스로가 특히 취약하다고 느끼거나 질병에 대해서 위협을 느낄 때 좀 더 강화된다고 한다. 일례로 한 연구에 따르면, 임신한 여성은 임신 초기 단계에서 외국인 혐오를 좀 더 많이 드러낸다. 슬프게도 우리는 자신이 취약하다고 느낄수록 좀 더 편협해지는 것이다.


하지만 그래도, 나는 여전히 백신 접종에는 의학을 초월한 이유들이 있다고 믿는다.


30. 면역은 우리가 함께 가꾸는 정원이다

우리는, 마틴 루서 킹이 상기시켰던 것처럼 우리 모두가 ‘벗어날 수 없는 상호성의 그물에 얽혀 있다는 사실’을 종종 못 보곤 한다.


우리는 싸우지 않고 질병과 싸울 수 있을지도 모른다. 내가 이 이야기를 읽은 기사의 제목은 <몸 속 미생물 정원을 가꾸다> 였다. 이 은유에서, 몸은 이질적이고 낯선 것이라면 모조리 공격하는 전쟁 기계가 아니다. 우리가 적절한 환경에서 다른 많은 미생물과 함께 균형을 이루어 살아가는 정원이다. 몸의 정원에서, 우리가 제 속을 들여다볼 때 발견하는 것은 자기가 아니라 타자다.

  

우리가 사회적 몸을 무엇으로 여기기로 선택하든, 우리는 늘 서로의 환경이다. 면역은 공유된 공간이다. 우리가 함께 가꾸는 정원이다.



Posted by Daesung Ju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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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리학 일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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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통제력을 발휘하기 위한 에너지가 고갈되어 자기통제력을 잘 바루히할 수 없는 상태를 ‘자아 고갈’ 상태라고 한다…

방전된 정신력에 필요한 이 연료의 정체는 과연 무엇일까? 많은 연구 끝에 이 에너지원이 포도당과 관련이 있음이 밝혀졌다. 연구에 의하면, 자기통제력을 발휘하고 난 후 설탕물을 마신 사람들은 자기통제력이 회복되는 모습을 보였으나 인공감미료로 단맛만 낸 물을 마신 사람들은 회복되지 않는 현상이 나타났다. 자기통제력을 발휘하고 난 후의 혈당 수치가 이후의 자기통제력과 관련성을 보이기도 했다.

-26쪽 “설탕이 의지력을 돕는다”


에너지 소모가 많은 상태에서는 관용을 잘 발휘하지 못하는 현상이 나타난다. 자기통제력이 필요한 과제를 하는 등 에너지를 많이 소모한 사람들은 그렇지 않은 사람들에 비해 자신의 입장(예컨대 정치적 입장)과 다른 의견을 듣는 것을 더 꺼려하는 현상이 관찰된 바 있다. 에너지가 소모된 상태에서는 내 의견과 다른 의견은 “별로 중요하지 않고 믿을 수 없다”고 응답하는 경향을 보인다. 역시 비슷하게 성별, 인종 특정 지역 출신에 따른 고정관념을 벗어나는 데에도 에너지가 필요하다는 사실이 밝혀지기도 했다…

이와 관련된 오류가 바로 ‘확증편향’이다. 우리는 어떤 말이 정말 옳기 때문에 지지하기도 하지만, 지지하기로 한 입장과 맘에 드는 결론을 먼저 정한 다음 거기에 맞는 증거들을 수집하기도 한다.

-42쪽 “생각을 조절하기”


감정을 억제한 참가자가 재해석을 한 참가자에 비해 대화를 하는 내내 혈압이 더 높았다. 감정을 억제한 사람이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다는 사실은 별로 새로울 게 없으나 좀 더 흥미로운 부분은 대화 ‘상대방’의 스트레스 수준이었다.

그래프에서 확인할 수 있듯 대화 도중 감정을 억제한 경우 당사자뿐 아니라 그 사람의  ‘파트너’ 또한 혈압이 상당히 올라가는 현상이 확인되었다… 대화 도중 한 사람만 감정을 억제해도 같이 있는 사람까지 스트레스를 받게 된다는 것이다.

반면 감정을 일으킨 경험에 대해 “이 일은 이렇게 생각해볼 수도 있지 않을까?”라며 재해석을 해본 참가자들(감정을 억제하지는 않았지만 적응적인 방법으로 조절한 사람들)의 경우 본인과 상대방 모두 마음의 평화를 비교적 잘 유지한 것으로 나타났다. 정리하면, 감정조절이 필요할 때에는 감정을 억누르기보다 적절히 표현하며 마음 속으로 재평가해보는 것이, 나와 상대방의 행복, 관계의 질에 도움이 될 것이다.

-47쪽 “감정을 다스리기”


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연구에서는, 학생들은 특히 스트레스가 맣은 시험기간에 자기통제력이 요구되는 다양한 일들에 실패하는 경향을 보인다는 것을 확인했다. 학생들은 평소보다 시험기간에 감정조절에 실패하고(갑자기 막 화를 낸다든가), 정크 푸드를 많이 먹고, 약속을 잘 안 지키며 과소비하는 경향을 보였다. 즉 신경 쓸 일과 스트레스가 많을 때 우리는 감정이나 생활 패턴을 잘 조절하지 못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도 마찬가지로 조절을 안 하고 싶어서라기보다 스트레스 때문에 중요한 에너지를 소모하게 되어 수행이 떨어졌다는 것이 포인트다...

스트레스를 해소하기 위해서는 친구들과 수다를 떨거나 재미있는 텔레비전 프로그램을 보면서 기분전환을 하는 것이 도움이 된다. 이렇게 만들어진 긍정적 정서는 스트레스를 해소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많은 연구들이 스트레스를 받았을 때 재미있는 영상을 봄으로써 긍정적 정서를 느끼게 되면 부정적 정서가 줄어들고 스트레스 또한 줄어든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긍정적 정서는 스트레스를 줄여줄 뿐 아니라 자아고갈 상태에서 우리를 회복시켜주는 등 떨어진 수행을 다시 회복시키는 효과도 있다. 따라서 학자들은 긍정적 정서가 마치 마법의 지우개처럼 스트레스나 에너지 고갈을 ‘취소’ 또는 ‘치료’하는 효과가 있다고도 이야기한다.

-56쪽 “스트레스 줄이기 연습”


자기통제는 불필요한 욕망을 꺾는 것, 즉 유혹에서 벗어나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다. 그런데 이 단계는 자기통제 과정을 통틀어 갖아 큰 난관이라고 할 수 있다. 왜냐히면 유혹을 이기는 것은 너무 힘든 일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애초에 쓸데업시는 유혹을 원천봉쇄하는 방법은 없을까? 그 방법으로 연구자들은 ‘ㅇㅇ하면 반드시 ㅇㅇ한다’는 식의 ‘무조건적 명령문 만들기 (if-then plan)’를 추천한다. 예컨대 ‘운동을 열심히 한다’같은 추상적인 목표 대신, ‘아침에 눈을 뜨면 팔굽혀펴기를 10번 한다’, ‘계단과 엘리베이터가 있다면 반드시 계단을 택한다’, ‘수학문제를 하나 틑릴 때마다 무조건 앞구르기 10회를 한다’와 같은 구체적인 조건과 행동을 만들어두라는 것이다…

연구에 의하면 if-then 전략을 쓰는 사람들은 그렇지 않은 사람들에 비해 비교적 적은 에너지를 들여서 자기통제를 하고 그 결과 자아고갈 현상도 덜 겪는다. 비교적 ‘지속 가능한’ 자기통제를 하게 되는 것이다.

-74~75쪽 “무조건적 명령문 만들기”


현실을 직시하기 전 순진무구한 우리들은 세상을 장밋빛으로 보는 경향이 있다. 연구에 의하면, 사람들은 내가 하는 일들이 처참하게 망하기보다는 어떻게든 잘 풀리게 될 거라고 생각하고 과거는 실패로 가득했을지 몰라도 미래에는 성공이 기다리고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런 막연한 긍정적인 예측은 사실 자신의 ‘바람’에 기초한 환상에 가깝다. 따라서 현실을 직시할수록 막연한 긍정적 사고는 점차 줄어들 수밖에 없다. 일례로 우울증 환자들이 일반인들에 비해 현실을 더 정확하게 예측하는 등 현실 직시는 우울증과 관련을 보이는데, 이를 ‘우울증적 현실주의(depressive realism)’라고 한다.

-114~115쪽 “현실 직시를 돕는 부정적 사고”


일반적으로 긍정적인 편인 사람들은 응원을 받았을 때 더 좋은 성과를 보였다. 하지만 비관적인 사람들은 응원을 받으면 오히려 성과가 떨어졌다. 이들에게는 응원을 받고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것이 오히려 독이 되었다. 이외에도 많은 연구들이 기본적으로 부정적인 사람들은 긍정적으로 생각할 때보다 “망하면 어쩌지”라며 걱정할 때 더 성과가 좋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왜 이런 현상이 나타나는 것일까? 연구자들은 긍정적인 사람들이 희망을 행동의 양분으로 삼는 반면, 비관적인 사람들은 자신들의 높은 불안을 행동의 양분으로 삼기 때문이라고 이야기한다. 긍정적인 사람들은 희망을 가짐으로써 의욕을 얻고 실패에 대한 불안이 줄어들어 성과가 올라가지만, 비관적인 사람들에게 이런 과정은 잘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118~119쪽 “비관주의자도 적응적일 수 있다”


...연구자들은 이러한 현상을 ‘맹목적인 축적(mindless accumulation)’이라고 부른다. 사람들이 자신이 원하는 바를 분명히 인식한 채 노력을 기울인다면 목표 달성 시점에 노력을 멈춰야 한다. 원하는 바를 다 얻고 난 후에는 굳이 노력을 기울일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노력을 하면서도 자신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왜 그 노력을 하는지 잘 모르거나 인식하지 못한다. 따라서 어느 시점까지 애써야 하는지도 잘 모른다. 결국 더 이상 노력을 쏟을 수 없을 때까지, 몸이 지치고 쓰러질 때까지 노력하게 된다.

노력을 멈추는 기준이 목표 달성이 아니라 신체적/정신적 피로가 된다는 것이다. 목적이 이끄는 삶이 아니라 피로가 이끄는 삶이 된다고나 할까? 안타깝게도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이런 삶을 살아가고 있다.

-126~127쪽 “무조건적인 노력에 대한 경고”


미주리대학의 심리학자 로라 킹과 동료들은 사람들이 어떨 때 가장 삶이 의미있다고 느끼는지를 조사했다. 여러 연구를 통해 일상 생활 속에서 다양한 활동들과 삶의 의미감 사이의 관계를 조사한 결과, 사람들이 실생활에서 의미감을 느끼는 겨이우는 고생 끝에 무엇을 성취했을 때보다 행복할 때였다. 객관적 성취보다도 행복감 같은 정서가 사람들이 느끼는 삶의 의미감을 더 잘 설명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사람들은 무엇보다 행복할 때 자신의 삶이 의미있다고 느끼며, 고생 끝에 대단한 것을 성취하더라도 그 과정에서 즐거움과 보람, 기쁨 같은 낙이 없다면 그 일을 통해 충만함을 느끼기는 어렵다는 것이다.

이런 현상이 나타나는 이유를 학자들은 긍정적 정서의 기능에서 찾는다. 학자들은 기분이 좋고 평온하다는 것은 다 잘되고 있다는 신호라고 이야기한다. 반면 뭔가 불안하다거나 짜증이 나는 것은 문제가 있다는 신호라고 본다.

-160쪽 “자아실현은 고통 끝에 오는 것일까?”


사람들의 자존감이 높아지거나 낮아지는 데에는 몯느 일이 동일한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따라서 스스로의 자존감이 삶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 이해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자존감이 걸려 있는 영역이 무엇인지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 자존감이 수반되는 영역이 어디인가에 따라 어느 부분에서 좌절을 느끼고 어느 부분에서 희열을 느끼는지가 달라지고, 삶의 크고 작은 목표들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연구에 의하면, 사람들이 자신의 자존감을 거는 분야는 외모, 사람들의 인정, 경쟁에서 이기는 것, 학문적 능력, 가족의 사랑과 지지, 도덕성, 신의 사랑 등 크게 일곱 가지라고 한다.

-180쪽 “내 자존감이 걸려있는 영역은?”


실제로 여니구에 의하면 자존감이 높든 낮든 실제 능력이나 자신의 능력에 대한 자신감에는 큰 차이가 나지 않는다. 다만 “다른 사람들도 내가 잘한다고 생각해줄까?”의 문제에서 큰 차이를 보인다. 자존감이 건강한 사람들은 “나도 내가 괜찮다는 걸 알고 다른 사람들도 나를 그렇게 생각한다”고 믿는 반면, 자존감이 건강하지 않은 사람들은 “나도 내가 장점이 있다는 건 알지만, 다른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것 같아”라고 믿는 것이다. 실제로 엄친아 수준으로 많은 것을 성취한 사람들도 자신이 성취한 것을 주변 사람들이 별로 인정해 줄 것같지 않다고 생각할 경우 자존감이 상당히 낮은 편이라는 연구가 있다.

이렇게 자존감이 건강하지 않은(지나치게 낮거나 불안정한) 사람들의 큰 특징 중 하나는 사람들이 자신을 받아들여줄 거라는 확신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때문에 이들은 특히 관계에서 불안을 많이 느낀다.

-198쪽 "소속감이 자존감을 돕는다"


이렇게 사랑과 인정을 부여해주는 가족, 친구, 연인 등의 안정적인 관계는 자존감의 매우 중요한 요소다. 만약 자신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부분에서 충분히 잘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자신에게 좀처럼 만족할 수 없고 자존감이 불안한 편이라면 나에게 부족한 것은 다름아닌 좋은 관계가 아닐지 생각해보자.

-200쪽 "건강한 자존감을 위한 운동법"


가난한 개인들이 부유한 개인들에 비해 행복도가 낮은 건 맞지만 일단 소득이 일정 수준 이상이 되면 개인 간 행복도에는 큰 차이가 나지 않는다.

대니얼 카너먼과 동료들이 2010년 미국에서 4만 명을 대상으로 한 대규모 조사 결과, 연소득 4~5만 달러를 기점으로 돈이 실제로 느끼는 '행복감(정서)'에 미치는 영향은 서서히 줄다가 7만 달러 즈음에서 멈추는 현상이 나타났다.

...긍정적 정서의 경우 소득 최하위 그룹과 최상위 그룹에서 행복감을 자주 느낀다고 한 사람들이 각각 약 70퍼센트, 90퍼센트로 생각보다 큰 차이가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부정적 정서를 별로 느끼지 않는다는 케이스도 각각 55퍼센트, 80퍼센트, 행복에 대한 인지적 평가도 20점 만점에 각각 5점, 7.5점으로 소득 최하위층과 최상위층의 행복도 차이가 어마어마하게 크지는 않았다.

-226~227쪽 "그래도 돈은 중요하다"


대니얼 길버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사람들은 돈을 많이 벌어서 여유를 즐기고 편하게 살면 행복해질 거라고 생각하지만 우리의 마음은 뭔가에 빠져 있을 때 행복하다. 친구와 수다를 떨어간, 뭔가를 만들거나, 성관계를 할 때가 대표적이다." 즉 우리의 삶은 큰 성취 후 더 이상 할 게 없을 때보다 뭔가에 빠져있을 때 더 행복하다는 것이다. 결국 성취의결과가 어떠한가, 어떤 타이틀을 다느냐는 것보다 매 순간을 누구와, 무엇을, 어떻게 하며 사는가, 즉 '어떻게 사느냐'가 훨씬 중요하다는 것이다.

-241쪽 "어떻게 살면 좋을까?"


그 결과 재미있게도 여가 시간을 갖거나 별일 없이 시간을 써버린 사람들, 무얼 하든 자신을 위해 시간을 쓴 사람들보다 남을 위해 시간을 쓴 사람들이 가장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이 넉넉하다고 지각하며 마음의 여유를 갖는 모습을 보였다. 따라서 연구자들은 많은 사람들이 시달리고 있는 만성적인 '시간 기근(time famine)'에 대한 한 해법은 남을 위해 시간을 보내는 것이라고 이야기했다.

이런 현상이 나타나는 이유로 연구자들은 타인을 위해 시간을 쓰고 있는 자신을 바라볼 때 더 "내 시간이 여유로운가 보다"라고 느기게 되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연구에 의하면, 돈의 경우도 자신보다 타인을 위해 쓸 때 스스로가 더 '풍족하다는 느낌'을 받는 현상이 나타나는데 시간도 누군가에게 나눠줄 때 자신의 시간이 더 풍족하고 여유로운 것첯럼 느끼게 된다는 것이다.

흔히들 시간에 쫓길수록 특히 다른 사람들을 위해 쓰는 시간을 줄이려는 듯 보인다. 하지만 그럴수록 다른 사람에게 시간을 내주는 것이 마음의 여유를 줄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해 보자."

- 263쪽 "마음의 여유를 가져라"


집단주의 문화의 장점 중 하나는 개인의 리스크가 분산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연구들에 의하면, 개인주의 문화보다 집단주의 문화에서 더 의무적으로 가족이나 친구에게 사업자금을 빌려준다거나, 빚을 대신 갚아주는 일들이 흔하게 일어난다고 한다. 개인이 (특히 금전적으로)실퍃나 경우 그 책임을 개인이 고스란히 다 떠안기보다 책임이 특히 가족구성원들 같은 주변 사람들에게도 분산되는 경향이 비교적 크게 나타난다. 또한 개인들의 행동을 집단과 사회 전체에 유익한 방향으로 통제할 수 있기 때문에 나라 경제발전 같은 사회적 목표를 달성하는 데에는 집단주의 문화가 큰 도움이 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다른 건 몰라도 개인의 자유를 제한한다는 면에서 '행복'은 집단주의 문화보다 개인주의 문화가 훨씬 이득인 경향이 나타나게 된다.

- 274쪽 "한국이 불행한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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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해자


  이십 년만에 만난 그녀의 말이었다.

  양명숙. 그렇게도 사랑하던 명숙이가 술집 마담이 되어 내 앞에 서서 한 말이었다.

  그녀는 늙었었다. 그러나 그녀의 그 눈만은 아직도 옛날처럼 맑고 고왔다. 처음 보는 세상에 놀라는 갓난 송아지의 그것처럼 까맣고 윤기 있는 그 순한 두 눈, 어딘가 먼 먼 곳을 바라보던 꿈꾸는 듯한 그 눈.

  그녀의 커다란 두 눈에는 마침내 샘물처럼 치렁치렁 눈물이 고이는 것이었다.

  나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였다.

  그녀의 말대로 나는 아무 것도 가지고 있지 못했다.

  열정도 용기도, 또 지성도 신앙도, 아니 하다못해 허위나 악덕마저도 내게는 없었다.

  완전한 등신이었다.

  - 61쪽


  "용서하게. 나 술 못 마시는 걸 자네도 알지 않나."

  "알지. 아니까 마시라는 거야. 목사, 장로, 집사, 술만 안마시면 별짓 다해도 천당 간다고 생각하는 그 작자들, 교회를 무슨 자기네 고리대금 연락소로 아는 그런 장로들. 난 자네도 그런 축이 될까봐서 그러는 거야. 그래, 깔고 앉아서라도 술을 먹이고 싶단 말이야. 집어치우란 말이야. 하나님을 집어치우라는 거 아니야. 오해 말어. 그 국산 예수 좀 집어치우란 말이야."  

  - 75쪽


  그런데 내가 속해 있는 사회, 소위 기독교 사회를 생각하자 나는 술 안 마신 얼굴이 술츃나 그들 앞에서 아무도 모르게 확 달아올랐다.

  그저 손가락 하나를 들고 내리는 것까지도 그것이 죄냐 아니냐로 따지려드는 사회.

  왜 그들은 세상만사를 죄냐 아니냐로만 따지려드는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예수님은 분명히 서로 사랑하라고 하셨다. 그러나 그들은 남을 사랑하기에 노력하기보다 남을 해치지나 않을까 두려워할 뿐이고, 선을 행하고자 하기보다는 죄를 범하지나 않을까만 두려워하는 것이다.

  모든 일에 소극적이고 이기적인 그들.

  아버지 하나님 앞에 안타까이 원할 줄도 모르고, 진심으로 감사할 줄은 더구나 모르고, 그저 귀신 딱지 앞에 엎드려 두 손을 삭삭 비는 무당과 흡사한 자세로 항상 죄만 사해달라고 빌고 있는 -그러면서도 막상 죄가 무엇인지도 모르는.

  - 80쪽


  갑자기 어떤 외로움이 꽉 가슴에 찼다. 그것은 내가 집을 떠날 때 아내가 없었다는 사실보다도, 딱히 약속은 한 것도 아니었고 또 그러리라고 꼭 믿고 있었던 것도 아니면서 명숙이 역에 나타나지 않았다는 데서 오는 마음의 그늘이었다.

  모슨 게임을 하는지 저만치 모여 앉은 애들이 떠들썩 웃었다.

  나는 그 학생애들이 부러웠다. 다시 한번 쟤들 같은 학창시절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정말 하루의 공백도 만들지 않고 청춘을 꽉 채워 살겠다고 생각하였다.

  나는 인생을 연극이라고 한 사람이 누구였는가 하고 생각하였다. 인생은 결코 연극이 아니었다. 그렇게 지루하고 권태로워도 중간에서 그만둘 수 없는 것이 인생이기 때문에, 또 그렇게 안타까이 후회를 하여도 다시 할 수 없는 것이 인생이기 때문에.

  나는 또 한번 뼈저리게 공허를 느꼈다. 텅빈 나의 지난날들. 자고 깨고 자고 깨고 그저 단조로운 짓을 용케도 사십 년간이나 계속해왔다고 나는 생각하였다.

  회색 청춘, 아니 완전히 블랭크 그대로인 청춘, 다시는 채울 수 없는 그 블랭크.

  - 122쪽


  그러기에 나는 생각하였다. 인간이란 나의 아버지가 생각하듯이 하나님 아버지의 종으로 태어난 것도 또 나의 아내가 생각하는 것처럼 영원히 아담과 이브의 원죄를 면할 수 없는 그런 지옥 같은 죄 속에 던져진 죄인도 아니고 실은 무한히 너그럽고 크신 은총으로 주어진 것이라고.

  우리의 일생은 아버지께서 주신 축복의 선물이라고.

  우리는 아버지 하나님에게 빚진 자가 아니라 아버지 하나님께 상받은 자라고. 그것은 결코 교만은 아니라고 나는 생각하였다. 그러나 나는 이 아버지가 나에게 주신 즐거워야 할 청춘을, 저 한껏 아름다웠어야 할 청춘을, 성경에 있는 불충한 종이 주인이 맡기고 간 돈을 실수할가 두려워한 나머지 아무 사업도 하지 않고 그대로 땅속에 묻어두었다 도로 돌리드싱 혹시나 더럽힐까, 또 혹시나 죄지을까 하는 마음에서 예배당에 맡겯누 채 아무 것도 못하고 지낸 것이었다. 이제 만일 내가 하나님께 받았던 청춘을 아무런 보람도 더함이 없이 그대로 그에게 돌릴 때 과연 하나님 아버지는 나를 두고 

  "이 어리석은 자식아"

하고 웃지 않으리라고 누가 단언할 수 있을까.

  - 125쪽



오발탄


  "저도 형님을 존경하고 있어요. 고생하시는 형님을. 용케 이 고생을 참고 견디는 형님을. 그렇지만 형님은 약한 사람이야요. 용기가 없는 거지요. 너무 양심이 강해요. 아니 어쩌면 사람이 약하면 약한 만치, 그만치 반대로 양심이란 가시는 여물고 굳어지는 것인지도 모르죠."

  "양심이란 가시?"

  "네. 가시지요. 양심이란 손끝의 가십니다. 빼어버리면 아무렇지도 않은데 공연히 그냥 두고 건드릴 때마다 깜짝깜짝 놀라는 거야요. 윤리요? 윤리. 그건 나이롱 빤쯔 같은 것이죠. 입으나마나 불알이 덜렁 비쳐 보이기는 매한가지죠. 관습이요? 그건 소녀의 머리 위에 달린 리본이라고나 할까요? 있으면 예쁠 수도 있어요. 그러나 없대서 뭐 별일도 없어요. 법률? 그건 마치 허수아비 같은 것입니다. 허수아비. 덜 굳은 바가지에다 되는대로 눈과 코를 그리고 수염만 크게 그린 허수아비. 누더기를 걸치고 팔을 쩍 벌리고 서 있는 허수아비. 참새들을 향해서는 그것이 제법 공갈이 되지요. 그러나 까마귀쯤만 돼도 벌써 무서워하지 않아요. 아니 무서워하기는커녕 그놈의 상투 끝에 턱 올라앉아서 썩은 흙을 쑤시던 더러운 주둥이를 쓱쓱 문지러도 별일 없거든요. 흥."

  - 184~185쪽


  영호는 푹 고개를 떨구었다.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 한숨이 후르르 떨고 있었다. 철호는 한참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윗목에 앉아 있던 철호의 아내가 방바닥에 떨어진 눈물을 손끝으로 장난처럼 문지르고 있었다. 영호도 훌쩍훌쩍 코를 들이켜고 있었다.

  - 190쪽


  "어쩌다 오발탄 같은 손님이 걸렸어. 자기 갈 곳도 모르게."

  운전사는 기어를 넣으며 중얼거렸다. 철호는 까무룩히 잠이 들어가는 것 같은 속에서 운전사가 중얼거리는 소리를 멀리 듣고 있었다. 그리고 마음 속으로 혼자 생각하는 것이었다.

  '아들 구실. 남편 구실. 애비 구실. 형 구실, 오빠 구실. 또 계리사 사무실 서기 구실. 해야할 구실이 너무 많구나. 너무 많구나. 그래 난 네 말대로 아마도 조물주의 오발탄인지도 모른다. 정말 갈 곳을 알 수가 없다. 그런데 지금 나는 어디건 가긴 가야 한다.'

  - 20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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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속사회

저자
엄기호 지음
출판사
창비 | 2014-03-17 출간
카테고리
정치/사회
책소개
나는 접속한다, 고로 차단된다2014년 우리 사회에서 가장 주목...
가격비교



모두 병들었는데 아무도 아프지 않은 이유 1

 - 초조한 나르시시스트끼리 

   서로 징징대기만 하니까.


사실 우리가 다른 사람의 말을 듣는 것에 질려버린 큰 이유는 서로 징징거리는 소리만 하고 있기 때문이다. 자신의 사적인 경험을 자기만의 고통으로만 말할 줄 알지 남들도 들어줄 만한 '공적인 이슈들을 다루는 언어'로 전환해내진 못한다. 또한 이를 뒤집으면 우리는 남들의 이야기를 공적인 이야기로 들을 줄 모른다는 뜻도 된다. 말하는 입이나 듣는 귀나 모두 사적인 것을 공적인 것으로 번역해내는 능력이 없는 셈이다. 

  - 프롤로그, 26쪽


초조함은 지금까지 이야기한 것처럼 자신의 삶을 총체적으로 점검하는 것 자체를 불가능하게 한다. 삶의 목표와 방향에 댛나 총체적 점검에서 초조함을 대체한 것이 '관리'다. 내 삶 그 자체에 대해서는 돌아보지 않는 대신 이미 설정된 목표와 방향 내에서 제대로 과업이 수행되는지 아닌지를 감시·관리하는 일만이 남게 된다. 이 자기 감시와 관리의 기술이 발달하고 이에 충실할수록 정해진 트랙 바깥으로 내려오거나 트랙의 바깥을 상상하는 것을 불가능하게 하는 것이 통치의 전략이다. 

  두번째로 통치는 개인이 이 초조함을 자신의 개인적인 감정 상태로 받아들이게 함으로써 초조함의 원인으로 자신의 부족을 탓하게끔 조장한다. 사람들은 만성적인 초조함의 상태에 있으면서도 왜 자신 뿐만 아니라 거의 모든 사람이 초조해하는지를 돌아보지 못한다... 적어도 세 사람 이상이 동일한 문제를 겪고 있다면 이는 사적인 것을 넘어 공공의 문제라 할 수 있다. ...개인이 자신의 문제를 사회적인 것으로 보편화하지 못하고 자기의 문제로 환원시키는 것, 이 또한 통치 전략 중 하나다. 

  - 237~238쪽, 제3부 / 제1장 성장은 가능한가


타자와의 만남을 차단하고 그 만남을 구경으로 전환하며 자신의 세계에 만족하고 안도할 때 만남은 나르시시즘으로 포획된다. 타자는 나에게 내 세계의 협소함을 깨닫게 해줄 뿐 아니라 내 세계의 안온함을 일깨워 주는 존재다... 나르시시즘이라는 삶의 태도에서 타자에 대해 사람이 가질 수 있는 마음의 최대치는 '동감-연민'(sympathy)에 불과하다.

  이런 감정 이입에는 치명적인 위험이 숨어 있다. 내가 일시적으로 그 사람과 하나가 되긴 하지만 그 바닥에는 나와 그 사람의 처지는 다르고 '공통된 것'(the common)이 없다는 인식이 깔려 있다... 대개 우리가 사회적 약자를 보며 느끼는 연민은 나는 그렇지 않다는 안도감과 쌍을 이룬다. 연민의 결과가 나르시시즘으로 귀결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근대 서구가 주목해 왔던 주체의 성장 과정이 왜 기본적으로 타자를 도구화하는 나르시시즘인지...

  낯선 것과 대면하여 그 매혹에만 휩쓸려 버릴 때, 우리는 모든 것을 자기 자신의 관점에서만 바라보게 된다. 이처럼 상황 판단을 전혀 내리지 못하고 자기 자신에 도취하면 결국 자아의 상실로 치닫게 되지만 우리는 한사코 자신이 문제를 해결해 냈으며 전혀 문제가 없다고 여기게 된다. 그런 점에서 나르시시즘의 갖아 큰 무기는 바로 '정신승리'라고 할 수 있다. 

  - 249~252쪽, 제3부 / 제2장 무엇이 우리의 우정을 가로막는가


모두 병들었는데 아무도 아프지 않은 이유 2

 - 각자도생의 시대, 외로움에 파묻힌 사람들


이 사회에서 우리 모두는 외로워졌다. 그리고 외로움이 곧 인간의 실존이라고 착각하게 되었다. 마리프랑스 이리구아얭에 따르면 외로움은 남에게 거절당하거나 자신의 존재 가치가 부정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다. 사람이 옆에 있거나 없거나 따로 떨어져 나 혼자인 것 같은 감정이며, 내가 세상으로부터 전혀 이해받지 못하고 고립되어 있다는 느낌이다. 이 외로움의 상태에서 인간은 "자신에 대한 신뢰를 상실"하게 되고 "자아와 세계를 생각하고 경험할 수 있는 능력"을 상실하게 된다. 무엇을 경험하더라도 그것이 무엇에 대한 실감과 체험이며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를 보증할 방법이 없다. 이 상태가 되면 인간에게는 세계도, 타자도 필요 없어지게 된다. 

  - 제2장 단속사회의 출현: 타자와 차단하고 표정까지 감춘다, 82쪽


근대사회는 오디세우스 같은 개인이라는 독특한 인간의 존재 양식을 두루 퍼뜨렸다. 개인이란 다른 누구도 아닌 '나'를 말한다. '나'가 되기 위해서는 자신의 생활을 지금까지 존재하던 전통이나 습관에 그저 맞추고 따라해서는 안 된다. 따라서 근대적 개인에게 성찰성은 필수적이다. 성찰성이란 "새로운 정보나 지식에 비추어 이루어지는 항상적인 수정"을 의미한다. 개인의 자아정체성은 바로 '성찰하는 자아'로서 규정된다. 여기서 개인의 삶의 연속성은 집단에 의해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개인이 수행해야 하는 과제이며 자아 실현이라는 이름으로 완성된다...

  그렇다면 과연 모든 인간이 사회적 사슬로부터 해방되어 자신의 삶을 스스로 기획하는 서사적 주체가 되었을까. 오히려 우리는 사회가 붕괴함과 동시에 개인도 붕괴하는 역설을 맞이했다. 살아가며 자신이 참조할 만한 준거 자체가 소멸해 버렸고 공중에 무중력 상태로 흩뿌려졌다... 근대 자본주의 초기에 농노가 땅으로부터 '해방'된 것이 오히려 '굶어죽을 자유'를 의미했던 것처럼 모든 사회적 관계에서 해방된 개인에게 주어진 것은 '아무 것도 아닌 존재'가 될 자유밖에 없다. 사회가 붕괴함과 동시에 절대 다수의 사람들은 썸바디(somebody)가 아니라 노바디(nobody)로 전락한 것이다.

  - 283~284쪽, 에필로그


모두 병들었는데 아무도 아프지 않은 이유 3

"너 죽고 나 살자" 

...남의 고통에 대한 외면·망각·무감각은 능력

   - 유흥주점형 경제모델


바우만은 이것을 '의자뺏기 게임'이라고 부른다. 자리는 언제나 늘 모자라고 게임이 반복될 때마다 누군가는 탈락하고 추방되어야 한다. 마지막 한명이 남을 때까지 게임은 계속된다. 따라서 모두가 탈락의 공포에 시달린다. 최후의 승자라고 예외가 아니다...

  이 과정에서 노동의 세계는 "이익은 위로, 위험은 아래로 쏠리는" 형태로 변모했다. 류동민은 이것을 유흥주점형 경제모델이라고 부른다.

  ...문자 그대로 내가 '팔아먹을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되는가이며, 이는 유흥주점형 경제모델에서 살아남는 핵심요건이 된다... 그렇기에 이 유흥주점형 모델에서 노동자에게 요구되는 단 하나의 덕목은 타인의 고통을 외면하는 능력이다.

  - 209~211쪽, 제2부 / 제3장 노동: 타인의 고통을 외면하라



나와 남의 고민이 맞닿는 것

 - 공적인 이야기가 오가는 '공론장'


말로 해결하는 사회, 이것이 근대국가의 특징이며, 이 말을 통해 사회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의 토대를 흔히 공론장이라고 부른다.

  ...물론 이 공론장에서 나와는 별개인 사회 문제만을 다루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바우만에 따르면 공적 공간이란 "개인의 고민과 공공의 현안들에 대해 만나서 의논하는 장소"다. 즉 이곳에서는 사적인 문제와는 별개로 공적인 이슈들만 다뤄지는 것이 아니다. 이곳은 "사적인 문제들이 공적인 이슈들을 다루는 언어로 새롭게 해석되고 사적인 곤란들에 대해서 공공의 해결책을 모색하고 조정하며 합의"하는 공간이다. 사적인 일상과 공적인 토론이 별개의 것이 아니라 사적인 일상에서 겪는 여러 어려움들을 공적인 언어로 바꾸어내는 것이 바로 공론의 과정이다. 따라서 '말로 하자'라는 근대의 이상은 근대사회가 공론장의 존재 유무에 존폐를 건 사회라는 사실을 단적으로 드러내준다.

  - 170~171쪽, 제2부 / 제2장 소통: 위로를 구매하라


이야기는 끊임없이 이어져야 한다. 이야기의 힘은 경험의 전승에서 나온다. 경험의 전승을 통해 개개인의 경험은 갱신되고 확장되며 연속성을 부여받으며 이로써 공동체는 지속 가능한 공간이 된다. 경험에 갱신이 일어나기 위해서는 그 경험이 이후의 경험을 이해하고 해석하는 틀이 되어야 한다. 이야기가 전승되면서 그 이야기가 우리 모두의 공동소유가 되는 것, 즉 듀이가 말한 "의사소통은 경험이 공동소유가 될 때까지 경험에 참여하는 과정"이 가리키는 바가 바로 이것이다. 

  - 187쪽, 제2부 / 제2장 소통: 위로를 구매하라 


자기만의 색깔을 가지려면?


인간은 세상에 질문을 던지는 존재다. '왜?'라는 질문은 인간이 남이 시키는 대로 그저 따르지 않고 제 주관을 갖고 살아가겠다는 의지의 표명이다. 이럴 때 비로소 인간은 세상에 둘도 없는 존재로서의 개별적 자아가 될 수 있다. 세상과 자기 자신에 대해 독특한 답을 갖고 있기 때문에 유일한 존재가 되는 것이 아니다. 질문을 던지며 호락호락하게 세상과 타협하지 않겠다고 선언하는 순간부터 그는 세상에 둘도 없는 바로 그 사람이 될 수 있다. 

  - 제2부 쓸모없어진 곁, 몽상이 된 사회 / 제1장 관계: 질문하면 '죽는다' 130~131쪽


근대의 이상적 인간형은 내성적인 사람?

  - 리더 아닌 팔로워로서 내성적인 사람의 힘. (책 "콰이어트"의 맥락, introvert)


우리가 살아가는 2010년대의 눈으로 보면 이처럼 질문을 던지고 자신의 내면으로 들어간다는 근대사회의 세계관은 수동적이며 정적인 존재가 됨을 의미하기도 한다. 내면 속으로 들어간 자는 세상에 참여하지 않으며 아무 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능동성을 중시하는 현대사회에서 이런 침묵과 수동성은 '뭔가 문제가 있는 것'처럼 여겨진다. 그러나 이런 정적이며 수동적인 존재야말로 의미를 불러일으킨다. 존 듀이(John Dewey)에 따르면 능동성과 수동성이 합해질 때 비로소 경험은 경험으로서 가치를 얻게 되고 의미가 발생한다. 즉 '함'만 통한다고 해서 인간에게 의미가 발생하지 않는다. 오히려 '당함', 즉 수동성이야말로 의미를 불러일으키는 원천이다. 듀이는 이것을 불에 손을 집어넣는 행위로 설명한다... 이 당함을 통해 사람은 다시는 불에 손을 넣어서는 안 된다는 교훈을 얻게 되고 이 교훈이 다음 행위를 해석하고 통제하는 바탕이 된다. 어느 행위가 다음 행위의 바탕이 되는 경험으로 바뀌는 것은 이처럼 함이 아니라 당함으로부터 비롯된다. 

  - 136~137쪽


근대의 독보적 권력은 '시각', 

그러므로 근대 권력은 '전시'를 통해 작동한다


우리 일상은 이러한 '하는 척의 함'으로 가득 차 있다. 사람들은 바쁘지 않지만 바쁜 척해야 하고 내가 없으면 회사가 곧 망할 것처럼 굴어야 한다. 미국의 언론인 바버라 에런라이크(Barbara Ehrenreich)는 청소용역회사의 청소부로 위장 취업했을 때 이것을 깨달았다. 청소를 하더라도 구석구석 지나치게 깨끗이 청소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아니 회사에는 도리어 손해다 .묵은 때인 경우에는 청소를 열심히 하면 오히려 더러움이 드러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청소부에게 중요한 임무는 청소를 깨끗이 하는 것이 아니라 깨끗이 보이게끔 하는 것이다. 개끗한 척하는 것이 깨끗한 것보다더 중요한 덕목이 되었다.

  ...많은 연구자들은 전시가 사실 근대사회에 내재된 권력의 작동방식이라고 지적한다. 사실 전시 역시 진정성을 출현시킨 내면과 외부의 분리와 깊은 연관이 있다. 근대인은 내면으로 물러나 외부와 긴장을 유지한 채 그 외부를 바라볼 줄 알게 되었다. 바라본다는 것은 거리를 둔다는 것이며, 이 거리를 창조함으로써 세계를 전시의 대상으로 구현하게 된다. 근대사회의 독보적 권력은 시각 그 자체다. 근대는 애초부터 보는 권력의 시대였고 세계를 전시하는 장이었다.

  - 144~146쪽


비국민의 정치

 - 신자유주의는 정치 대신 치안으로 

   법질서를 유지한다


자끄 랑시에르는 정치 바깥에서 배제된 자들이 정치 안의 몫을 주장하는 것, 이것이 진정한 의미에서의 정치라고 말한다. 

  - 제1부 악몽이 된 곁, 말 걸지 않는 사회 - 제1장 정치공동체의 파괴:폭로하고 매장한다, 41쪽


신자유주의는 법질서 바깥의 것에 대해 정치적 해결을 시도하는 것이 아니라 엄격한 사법적 규율과 통제로서 통치하려는 시도다. 이에 따라 법질서 바깥의 것이 정치적 과정을 통해 법질서 안으로 들어오는 것은 허용되지 않는다.

  랑시에르의 개념에 따르면 이는 법질서에 의해 셈되지 않던 사람들이 셈해 달라고 요구하는 것에서 출발하는 본래적 의미의 정치의 원천적 봉쇄다. 또한 이미 법질서 내부에 포함된 세력들 간 분쟁이라 하더라도 정치적 타협에 의해 해결을 시도하기보다는 사법적 판단에 의한 일방적 해결을 선호한다는 의미에서 사회의 불화를 조정하는 차원의 정치 또한 설 여지를 좁힌다. 따라서 신자유주의 법치 아래서 허용되는 것은 정치가 아니라 단지 치안일 뿐이다.

  - 229~230쪽, 제2부 / 제4장 국가 폭력 : 껍데기까지 발가벗겨라


혼자만의 공간을 갖는 것의 의미


사생활이 '세상으로부터 사라질 자유'를 뜻한다면, 기숙사에서 윤숙이 박탈당한 것이 바로 이 자유였다. 윤숙은 말한다. "기숙사에 살면서 이 자유를 대신한 것은 '죄책감'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대한민국 모든 이가 들어가 살기를 선망하는 아파트야말로 사생활이 죽은 공간이다.

...아파트에서는 이처럼 타인의 사생활은 알 수 있지만 정작 '관계'는 거의 이뤄지지 않는다.

  - 제4장 사생활의 종언: 고독조차 허락되지 않는다, 118~119쪽


Posted by Daesung Ju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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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라도 되겠지

저자
김중혁 지음
출판사
마음산책 | 2011-10-05 출간
카테고리
시/에세이
책소개
인생의 비밀은 쓸데없는 것과 농담에 있다!악기들의 도서관, 좀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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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때문에 산 책. 소설가 김중혁의 산문과 삽화가 함께 담긴 책이다. 표지 그림도 저자가 그린 거다. 뒤표지에는 소설가 김연수가 "이 책에 건질 게 있으려나. 그건 나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래도 추천사니 이렇게 쓸 수밖에. 건지겠지, 뭐라도 건지겠지. 마음이 착잡하다"라고 썼다. 삽화의 재기발랄한 발상이 좋고 글이 가벼워서 좋다. 똥폼 잡지 않고 산책하는 기분으로 쓴 것 같은 글 모음이다. 사실 글보다 삽화가 더 좋았다. 


(그런데 일러스트와 삽화의 차이가 뭐지? 씨푸드와 해산물의 차이인가?)





  얼마 전 <놀러와>에 출연한 그룹 백두산과 부활을 보고 마음이 짠했다. 나의 전설들은 근근이 살아가고 있었다. 모텔을 운영하며 카운터에 앉아서 기타를 연습하는 베이시스트와 각종 아르바이트로 돈을 벌며 음악 활동을 하는 드러머 얘기를 듣고 있자니 세월의 무상함이 느껴졌다. 하긴, 요즘 누가 헤비메탈 음악을 듣나. 불러주는 데가 없을 것이다.

  그래도 그들은 포기하지 않았다. 좋아하는 일을 하기 위해서, 다른 무엇을 포기하고 있었다. 시간을 포기하고, 돈을 포기하고, 또 다른 어떤 것을 포기한 다음, 자신들이 좋아하는 일을 하고 있었다. 결국 인생은 어떤 것을 포기하는가의 문제다. 선택은 겉으로 드러나지만 포기는 잘 보이지 않는다. 돈을 많이 벌기로 선택하고, 결국 돈을 많이 벌게 된 사람이 어떤 걸 포기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얼마나 기분 좋게 포기할 수 있는가에 따라 인생이 즐거울 수도 있고 괴로울 수도 있을 것이다. 나는 돈과 성공과 권력을 포기하고 (글쎄, 포기하지 않았어도 거머쥐긴 힘들었겠지만) 시간을 선택했다. 바쁘게 사는 대신 한가한 삶을 선택했다. 즐겁게 포기할 수 잇었다. 남는 시간에 기타도 칠 수 있으니 부러울 게 없다. 

    - 102~104쪽 "돈과 성공을 포기하고?"



  <무모한 도전>의 도전처럼 승부 근성을 발휘해보고 싶다. 아예 승리의 목표를 무모하게 잡는 것이다. 불가능하다 싶을 정도로 높게 잡는 것이다. 성공하면 좋은 거고, 실패하면 할 수 없는 거다. 그러면 승부 근성을 발휘하면서도 세상 살기가 참 편할 것 같다. 세계 신기록을 세우며 올림픽 금메달을 거머쥔 김연아 선수도 앞으로 고민이 많을 텐데 나의 승부 근성을 본받아 228.56점에 만족하지 말고 만점에 도전해보는 것은 어떨까 싶다.

    - 119쪽 "평행봉이 아니라 시소"



사람들 머리 위에 그들의 온도계가 달려 있다면, 

얼마나 화가 났는지, 아프지는 않은지,

모두 알 수 있을 텐데…

    - 129쪽 일러스트 문구



사적인 공간에서의 의견을 광장으로 끌어오는 것은 반칙이다. 광장으로 끌고 와서 그걸 공론화하고 '우리'에게 어떤 여론이 있는 것처럼 포장하는 것은 폭력이다. 우리는 우리의 폭력을 여론이라는 이름으로 포장하여 그를 밀어냈다. 재범이 꼭 '우리'여야 했을까. 그가 '우리' 중 한 명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욕했다는 이유로 우리는 '우리'로부터 재범을 밀어내버렸다. 나는 우리가 무섭다. 

    - 280쪽 "우리가 무섭다"



Posted by Daesung Ju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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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모난 못

저자
폴 콜린스 지음
출판사
양철북 | 2006-06-26 출간
카테고리
인문
책소개
역사적 인물을 통해 자폐증의 세계를 보여주는 네모난 못. 역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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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 저자의 아들 모건은 자폐인이다.)


    자폐인을 위한 변명


다른 사람들이, 아니 자폐인 스스로도 자폐인을 사람들 사이에 섞여 있는 외계인으로 묘사하곤 한다. 그러나 모순인 것은, 사실은 정확히 그 반대라는 점이다. 자폐인은 곧 우리이고, 자폐인을 이해하는 것은 인간이란 어떤 존재인가를 이해해 나가는 길이기도 하다. 생각해 보라. 장애란 일반적으로 무엇이 부족한 상태로 정의된다... 자폐증은 능력이자 동시에 장애다. 무엇이 부족할 뿐 아니라 무엇이 풍부하기도 한 것이다. 인간을 인간이게 만드는 고유한 특성이 지나치게 많이 발현된 경우다. 동물 중에도 사회성이 있는 동물이 있지만, 추상적 추론을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인간 뿐이다. 자폐인은 인간보다 더 인간적인데, 우리는 그 존재를 이해조차 하지 못한다.

  - 209~210쪽

    너무 외로워어어

나는 모건을 꼭 끌어안는다. 
"쉬 쉬 쉬. 아빠가 여기 있잖아."
"너무 외로워어어어."모건이 큰 소리로 노래한다.
  고개를 들어보니 우리를 보는 사람은 없다. 그렇지만 나는 식은땀을 흘린다. 모건이 처음으로, 어디에서 들은 말이 아니라 자기 스스로 내뱉은 첫마디가 이거다.
  - 220쪽

   늑대소년 피터의 즐거움

제임스 펜 농장에서 피터는 행복하게 지냈다. 피터가 노래를 부르거나 콧노래를 하는 것이 마을 사람들의 눈에 자주 띄었다. 자연이 가까이 있었다. 따뜻한 태양, 서늘한 밤공기, 계절의 변화가 야생 소년에게 절절한 기쁨을 줬다. 어떤 사람이 한 말에 따르면 "피터는 봄이 오자 정말 신이 난 것 같았다. 하루 종일 노래를 부르고 맑은 날에는 밤 시간에도 노래를 부르고 있다. 달과 별을 보고 좋아한다. 어떨 때는 햇살 아래에 서서 눈이 부신 듯 불편해 하면서도 해를 마주 보고, 별이 빛나는 밤에는 춥지만 않으면 집 밖에 나가 있으려 한다." 대신 날씨가 좋지 않으면 괴로워했다. 비가 내리기 한참 전부터 피터는 불안해하며 울부짖었다.
  - 51~52쪽

    장애인 부모의 보편적인 마음


이제는 사람들 시선에도 익숙해진 것 같다... 사람들이 우릴 이해하지 못한다면, 그래도 괜찮다. 우린 서로를 이해하니까. 그리고 사실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하고는 다르다. 이건 비극도 아니고, 슬픈 이야기도 아니고, 주말의 영화도 아니다. 그냥 우리 식구다.
  - 299쪽

모건은 내가 본 아이 가운데 가장 행복한 아이다. 그렇지만 하루도 걱정하지 않고 지나가는 날이, 가슴에 무엇이 찔린 것처럼 아프지 않은 날이 없다. 우리가 죽은 뒤에, 모건이 나이가 들었을 때, 그때는 정말 외로울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이다... 자기만의 세계 속에 사는 자폐인은 외로움, 절망, 처절한 소외감을 느낄 수 있을 텐데 부모가 곁에서 도와줄 수 없게 될 때는 어떻게 될까. 다른 누가 옆에서 도와줄 수 있을까?

"그래. 아무튼 모건이 형제 없이 혼자 자라게 하고 싶진 않아."
  - 227쪽

나는 모건이 세상에 적응하기를, 모건이 다르다고 느끼지 않을 수 있기를 바랐다. 특수학급에서 교육을 받고, 전문가의 도움을 받으면 일반 학교에 들어갈 수 있을 것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물론 그럴 수만 있다면 적응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적응하기만 한다면 살아가기가 훨씬 쉬울 테니 말이다. 그렇지만 만약에 적응하지 못한다면?

이 아이들은 어디로 갈 것인가? 알 수 없다. 자폐인은 스스로를 만들어 간다. 우리가 어떤 존재로 만들려고 아무리 애를 써 봤자 그렇게 되지 않을 것이다... 이 아이들을 성공이나 실패와 같은 일반적 범주로 가를 수나 있는가?
  자폐인은 근본적으로 네모난 못이나 다름없다. 네모난 못을 둥근 구멍에 넣으려 할 때, 문제는 망치질이 힘들다는 것만이 아니다. 못이 망가지는 것이다. 정상 학교가 나를 비정상적으로 불행하게 만든다면? 정상 사회에서 자라면서 불행한 어른이 된다면? 그것이 성공일까? 그게 정상일까? 그 안에서 빠져 죽을 것 같더라도 주류 안에 들어가고 싶은가?
  - 293~294쪽

우리는 십중팔구 모건을 떠나보내지 않을 것이다. 자폐인은 생산과 독립에 대해 알게 된 뒤에도, 부모가 주입해 주어야 할 여러 복잡한 기능을 이해한 뒤에도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의 절반은 알아차리지 못한다. 자폐인은 이용당하기도 쉽고, 스스로를 방치해 버리기도 하고, 아니면 사라져 버린다 할지라도 아무도 모를 것이다. 그런 상태로 세상에 내보낼 수는 없다. 그래서 여러 세대가 계속 한 집에서 같이 사거나 아니면 이웃에 나란히 산다. 
  - 255쪽


    자폐인의 정신 세계

모건은 손을 흔들 때 손등을 밖으로 하고 손바닥을 자기 쪽으로 한다. 그렇게 해야 손을 흔들면서 자기 손바닥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나도 자기와 똑같은 것을 보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어떤 면에서는 말이 된다.
  - 296쪽

모건은 삶도 아직 그다지 잘 이해하지 못하는데 죽음을 어떻게 이해하겠는가?
  철학자 이폴리트 텐은 1876년에 아장아장 걷는 아기 한명을 관찰하고 이렇게 놀라움을 표현했다. "아이가 제일 먼저 묻는 거시은 항상 이런 것이다. '뭐라고 말해? 토끼는 뭐라고 말해? 새는 뭐라고 말해? 말은 뭐라고 말해? 저 나무는 뭐라고 말해/' 동물이건 나무건 아이는 사람처럼 취급하여 그것이 무슨 생각을 하고 뭐라고 말하는지 알고 싶어 한다." 이 아이는 세상 모든 것이 살아 있다고 느끼니 당연히 아무것도 죽은 것으로 생각되지 않았을 것이다.
  - 251쪽

대부분 자폐아는 자기 생각과 다른 사람의 생각을 구분해서 생각하지 않는다. 다른 사람은 다르게 생각한다거나 다른 관점에서 사물을 본다는 생각을 하지 못한다. 자기가 아는 걸 샐리는 모른다는 걸 상상할 수 없다. 또 자폐아는 다른 사람의 시선이나 손가락이 가리키는 데를 따라가지도 않는다. 그 사람이 자기와 다른 걸 생각하거나 보고 있을 리가 없는데, 시선이나 손가락이 향하는 데를 뭐 하러 굳이 보겠는가.

자폐인은 다른 범주 안에서 다른 문제를 해결하려 하고 있으니, 틀릴 수조차 없는 것이다. 우리는 너와 나로 이루어진 세계에 살지만 자폐아는 나로 이루어진 세계에 산다. 자폐아의 언어를 전부 옮겨 써 보면, 아이의 어휘에서 어떤 부류의 동사는 완전히 빠져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예를 들면 다른 사람의 정신적 상태를 묘사하는 단어인 믿다, 생각하다, 알다... 같은 단어는 없다. 이런 개념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다른 사람이 자기와는 다른 의도와 생각을 갖고 있다는 걸 이해하지 못할 때 또 개념 한 가지가 사라진다. 속임수. 이 아이드리은 자기 눈앞에서 벌어지는 속임수도 알아차리지 못한다.
  - 112~113쪽

자폐인은 과거에 야생 인간이나 동물에 가까운 사람으로 치부되었는데, 사실 자폐인은 실제로 동물으 감정과 유대를 느낄 수 있다. 집중력이 아주 강하고 민감하고 대화를 좋아하지 않아 사람보다는 동물의 감정에 공감하는 것이다. 

자폐인은 자기 감정에 압도될 때가 많다. 자폐아가 다른 사람과 접촉할 때 오는 압도적인 감각의 물결을 극복하려고 발버둥치는 것은 조금도 이상스런 행동이 아니라고 그랜딘(자서전을 쓴 자폐인)은 설명한다.말이 겁을 먹었을 때 하는 행동이나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 232쪽


    자폐인의 모습

"여기 회사에는 프로그래머들이 바깥 나들이를 하게 하는 일만 전담하는 직원이 있어요. 프로그래머드리은 마이크로소프트에서 살아요. 그 밖에는 다른 삶이 없지요. 회사에 일하러 가고, 회사 마당 한쪽에 있는 아파트에서 잠을 자고, 일어나서 다시 회사로 가지요. 그것 말고는 아무것도 하지 않으려 해요. 그 밖에 뭘 해야 하는지조차 몰라요. 그래서 그 일만 맡아서 하는 직원이 있는 거예요. ㅣ프로그래머들과 수학 이론가들이 외출할 수 있도록 장소를 예약하는 일이지요...
하루는 마이크로소프트 직원만을 위해서 교향악단 연주회를 통째로 예약했어요. 프로그래머들만을 대상으로 연주하는 거지요. 그런데 청중들이 휴대전화를 비롯한 온갖 기계를 가지고 가서 연주하는 중에도 계속 켜 놓고 사용한 거예요... 그래서 다시는 연주회에 가기 어렵게 됐죠...
하지만 프로그래머들은 그걸 몰랐어요. 정말로요. 연주회에서 그러면 안 된다는 걸 진짜 몰랐던 거라구요...
마치... 마치 실제 사람들 사이에서 행동하는 법을 가르쳐 주지 않으면 모르는 것처럼요. 그러지 않으면 정말 모르거든요."
  - 141쪽

나는 손으로 모건의 턱을 부드럽게 쥐고 얼굴을 돌리려 한다. 모건은 이제 나와 정면으로 마주보고 있지만 눈길은 여전히 나를 피한다. 물론 모건은 날 볼 수 있다. 늘 하는 일이다. 모건은 갑자기 나한테 고개를 돌려 두 눈을 맞추고, 내 손가락을 쥐고 자기가 모르는 단어를 가리키기도 한다. 때로는 안아달라는 뜻으로 나를 보기도 하고, 꼭 껴안고 노래 불러 달라고 그러기도 한다. 어떨 때는 단지 날 보고 웃기 위해서 자기가 하던 일을 멈추기도 한다. '아빠, 나 여기있어.'
  - 248쪽

거의 대부분 남자아이다. 아주 세부적인 것에 집요하게 몰두하고, 전차 노선도와 달력을 외우고, 실 조각이나 성냥갑 같은 물건을 강박적으로 수집하고, 다른 아이들과 같이 놀지 않지만 끝없이 장난감을 바닥에 한 줄로 늘어놓는 아이. 또래 아이들보다 글은 훨신 잘 읽지만 말은 하지 않는 아이도 있고, 수 계산은 놀랍게 잘하지만 옷을 갈아입거나 씻지 못하는 아이도 있다. 추상 세계에 빠져서 "얼빠진 교   수처럼 실제 삶의 문제에는 무기력하다."고 아스퍼거는 고찰했다.

  그중 한 아이는 "마치 막 하늘에서 내려온 것처럼" 행동했다고 아스퍼거 박사는 기록했다.
  - 83쪽

생후 2년 동안에 인간의 뇌 안에서는 신경이 엄청난 속도로 서로 연결된다. 이런 신경 통로 가운데 상당수는 필요 없거나 부적절한 것으로, 유아의 뇌 안으로 엄청난 분량의 데이터가 들어오고 뇌가 급격한 속도로 물리적으로 성장하기 때문에 만들어진 것이다. 놀랍게도 두 살에서 세 살 사이에 뇌 안의 뉴런 수는 감소한다. 유용한 신경 통로가 자리 잡으면 반복되거나 비논리적인 것은 제거하는 '신경 가지치기'가 진행된다. 물론 서로 다른 감각 사이를 연결하는 신경 통로도 사라진다. 가지치기 이전에는 모든 사람이 다 공감각을 갖고 있는 셈이다. 공감각이나, 절대음감, 투렛증후군 같은 증상이 나타나는 경우는 신경 가지치기가 일부 일어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공감각이란 부엌 불을 켜면 동시에 믹서가 작동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자폐증으로 말하면 전등 스위치를 켜면 전구가 나가는 것과 마찬가지다. 자폐인이 손을 퍼덕거리며 마구 휘젓는 것은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서다. 자기 감각에 의해 쇼크를 받고 있는 것이다.
  - 178~179쪽

자폐인은 전부 극도로 내향적이고, 개들은 극도로 외향적이다. 개는 무리짓기를 좋아하고 누군가를 사귀려 든다. 끝없이 주변 세계를 의식한다. 개는 책을 읽지도, 아무도 안 볼 때 피아노를 분해하지도, 컴퓨터에 새 프로그램을 깔지도 않는다. 하지만 개는 누가 자기 주인에게 친절하게 대하는지 아니면 위협적으로 대하는지 아주 잘 알아차린다. 자폐인이 잘하지 못하는 게 바로 그런 것이다. 자폐인과 개는 서로 딱 맞는 짝이다.
  - 246쪽

    

    자폐인 부모의 인구학적 구성

자폐증의 기원에 대한 의문은 자폐증 연구가 처음 시작되었을 무렵부터 제기되었다... 자폐인의 가족 안에서 자폐증의 희미한 전조를 찾을 수 있다면, 그것이 가족 구성원의 정신과 재능에 영향을 미친다면 어떤 결과로 나타날 것인가? 한가지 일에 몰두하고, 집중력이 남다르고, 논리적 체계에 마음을 뺏기는 사람은 대개 사회적으로 어설프지 않은가?
  "이런 인지적 특징을 가진 인물의 전형적인 직업은 엔지니어링이다." 하고 배런 코헨은 말했다.
  배런 코헨은 영국에서 자폐아를 둔 부모 천 쌍을 조사했는데, 아버지가 엔지니어링 분야에 종사하는 경우가 전국 평균보다 두 배나 웃돌았다. 과학자나 회계사처럼 집중력과 추상화 능려기을 요구하며 주로 혼자 일하는 직업을 가진 사람의 빈도도 자폐아 가정에서 훨씬 높았고, 예술가는 평균보다 네 배 가까이 많았다. 배런 코헨과 다른 연구자들은 학문적으로 가장 뛰어난 집단으로 범위를 좁혀 다시 조사했는데, 즉 이곳 케임브리지 대학 학생을 상대로 조사한 결과, 과학 전공자 식구 중에 자폐인이 있을 확률이 문학 전공자 식구에 비해 여섯 배나 높았다.
  - 118쪽
  

    자폐증(autism)이란 단어의 탄생


카너는 이런 증상을 지칭하기 위해 자폐증이라는 단어를 만들었고, 카너가 쓴 논문은 자폐증 연구라는 새 장을 열었다. 그러나 카너는 몰랐지만 빈에 있는 카너의 옛 학교에서 한스 아스퍼거도 똑같은 이상에 대한 논문을 제출했다. 전쟁 중이라 전혀 교류가 없던 두 나라에서 두 사람이 각각 동시에 같은 발견을 했다는 것은 역사 속의 기이한 우연 가운데 하나다. 더욱 신기한 것은 두 사람이 똑같은 단어를 만들어 냈다는 것이다.
  - 86쪽


    기술 발달 사회의 단면

우리 가운데 우리가 '어떻게' 그걸 하는지 아는 사람은 몇이나 될까? 우리가 '뭘' 하는지는 안다. 기차역에서 전광판에 들어온 신호를 읽고, 거대한 디젤엔진이 끄는 기차를 타고, 좌석에 앉아 위성을 통해 이야기를 나눈다. 그러나 컴퓨터로 관리하는 기차역의 신호나, 기차 엔진이나, 무선전화나, 위성 또는 내가 앉아 있는 좌석 덮개에 무늬를 짜 넣은 기계가 어떻게 작동하는지 이해하는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그걸 이해하는 사람은 대체 어떤 사람일까? 우리는 기이하게 복잡하고 우리가 전혀 알지 못하는 과정을 통해 옷을 입고 밥을 먹고 이동한다. 우리 세대는 일상생활에서 부딪치는 모든 물체가 만들어지는 과정을 전혀 모르고 사는 최초의 세대일 것이다. 우리는 전문가들의 세상에서 오도가도 못하게 좌초한 불운한 일반인이고, 그냥 이렇게 얼렁뚱땅 헤쳐 나간다. 그게 최선이므로, 그게 가장 쉬운 방법이므로.
  - 123~124쪽




Posted by Daesung Ju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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