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님은 이 병을 몰라요


인생에서 정말 힘든 상황을 맞았을 때 이것을 혼자 극복하는 것은 사실상 거의 불가능하다. 만약 혼자서 극복할 수 있다면, 그 사람은 매우 운이 좋은 사람이거나 혹은 그가 처한 상황이 진정 힘든 상황은 아니었을 가능성이 더 크다.




죽고 싶은 사람은 없다


사람들은 고통스러운 상황을 벗어나길 간절히 바라며 그것에서 벗어날 방법이 없다고 느낄 때 자살을 시도하는 것일 뿐, 결코 죽음 그 자체를 원하는 것은 아닌 셈이다.


냉정할 정도로 객관적이고 과학적인 사고에 근거해 의학적 판단을 내리는 훈련을 받아왔고, 내가 가르치는 의과 대학생과 전공의 들에게도 늘 이러한 면을 강조해 왔던 내가 장모님이 보내 주신 한약을 먹고 한의원에 가서 침을 맞는다는 것은 정말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내가 통제하거나 예측할 수 없는 외부의 무언가가 있을 때 그것에 따라 행동을 결정할 경우, 나의 생활 자체가 스스로도 예측 불가능해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상황이 좋지 않을수록, 미래를 예측하기 힘들수록, 오히려 자기 생활을 규칙적으로 잘 유지할 수 있어야 한다. 약속과 계획은 신중하게 세우고, 한번 무언가를 하기로 결정하고 나면 가능한 한 바꾸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제 나는 ‘루틴routine’을 유지하려고 노력한다.


요즘 나는 분명히 느낀다. 살면서 위기를 겪게 되면 누구나 한 번쯤 자살 생각을 할 수 있지만, 이는 죽음 자체에 대한 갈구가 아니라 삶의 괴로움을 더는 견디기 힘들다고 느끼는 상황에서 필연적으로 경험하게 되는 우울감이 만들어 낸 것일 가능성이 훨씬 더 크다는 것을. 그러므로 그 우울감을 다스릴 수 있다면, 자살 생각 역시 지나갈 수 있다는 것을. 내 마음이 진짜 죽음을 원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불안할수록 원래 계획대로


도저히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 때에는 원래의 계획대로 밀고 나가야 한다. 이는 불안 그 자체의 속성 때문이다. 불안은 기본적으로 예측 불가능성 또는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에서 나온다. 그런데 역설적으로 불안한 사람들은, 자신의 선택을 자꾸 변경함으로써 미래를 더 예측 불가능하게 만드는 오류를 범하곤 한다. 애매하고 불안한 상황이라면 한번 내린 결정을 자꾸 바꾸기보다는 계획대로 밀고 나가는 편이 훨씬 더 나은데도 말이다. 계획대로 해 보다가 잘 되지 않으면 그때 방향을 바꾸어도 늦지 않다.


우리의 뇌는 생각보다 아주 훌륭하다. 결과 예측이 어렵거나 애매한 상황일 때에는 여러 가지 대안들 중 첫 번째로 드는 생각이 가장 나은 선택일 가능성이 크다. 첫 번째로 드는 생각은 뇌가 그 시점까지의 여러 정보들을 근거로 가장 적합하다고 판단한 것이기 때문이다.


나의 환자들이 이러한 상황에 처해 내게 직장을 그만두겠다고 한다면, 나는 무엇이라고 할 것인가? 아마 나는 주저 없이, 감정이 생각에 영향을 주는 기전에 대해 설명하고, 우울한 감정 상태에서는 단지 현재의 두려움에서 벗어나기 위해 대책 없는 결정을 저지르게 될 가능성이 크다고 말하며, 그분들의 우울 증상이 개선될 때까지는 결정을 미루라고 조언했을 것이다.


가장 힘든 순간, 포기하고 싶은 순간에 무언가를 그만두려고 해선 안 된다. 그러한 상황에는 우리의 판단이 충분히 이성적이지 못하기 때문이다. 무언가를 그만두려면 적어도 지금 이 순간, 내 이성이 감정을 충분히 통제하고 있다는 자기 확신이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처음 계획했던 대로 하던 것을 계속하는 편이 훨씬 더 낫다.



 

'왜'에서 '어떻게'로


하지만 사고로 인해 골절이 되거나 피부가 찢어지는 일이 아닌 이상, 질병의 원인을 정확히 말할 수 있는 경우는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우울증을 비롯한 다양한 정신과적 질환은 전체 인구의 20퍼센트 정도가 경험하게 되는 매우 흔한 질병이지만, 그 원인이 무엇인지 쉽사리 설명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자꾸 원인을 찾으려고 머릿속이 작동할 때 그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생각을 싹둑 자르고, 냉정하게 ‘원인 따위는 없다’는 점을 받아들여야 한다. 불행에는 이유가 없다. 세상 모든 일은 그 원인을 찾아야 해결할 수 있지만, 그럴 수 없는 일이 한 가지 있다면 그것은 불행일 것이다. 아프지만, 이것을 인정해야 한다. 상황은 상황대로 두고, 지금 이 순간 할 수 있는 일을 해야 한다.




행복의 시뮬레이션


흔히 사람들은 우울이 가장 힘든 감정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거의 모든 경우 우울 이전에 불안이라는 감정이 존재한다. 불안은 기본적으로 예측 불가능성에서 시작된다. 하지만 일단 우리는 불안해지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부정적인 결과를 예측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머릿속으로 부정적인 결과, 그 중에서도 가장 나쁜 결과를 끊임없이 반복해 상상하기 시작한다. 앞서 이야기한 ‘두 번째 화살’을 만들어 스스로에게 쏘는 셈이다. 이러한 상태에까지 이르면, 어느새 가장 나쁜 결과는 수많은 경우의 수 가운데 하나가 아닌 현실적인 위협으로 느껴지게 된다. 구체적인 두려움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우리 삶의 어떤 상황에서 최악의 경우를 맞이하게 될 가능성은 최고의 경우를 맞이하게 될 가능성만큼이나 적다. 다시 말해, 일어날 수 있는 최악의 불행은 로또에 당첨될 확률만큼이나 낮은 것이다.





한번 더 생각해보기 - 자살을 하면 안 되는 이유


최근 발표된 한 연구에 의하면, 기분장애(우울증 및 조울증) 환자 334명의 자녀들 701명을 5.6년간 추적 관찰한 결과, 가족 내 우울증 전이의 영향을 통제하고 나서도 부모의 자살 시도가 우울증이 있는 자녀의 자살 시도 가능성을 다섯 배나 증가시키는 것으로 나타났다.





현실 직시 : 답이 없음이 답일 때


“답이 없다고 절망할 것이 아니라, 그 상황을 받아들이고 견뎌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답입니다.”  


하지만 거듭 강조하다시피 나쁜 일이 우리 삶에 미치는 영향은 그 자체의 크기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사건에 대한 나 자신의 반응으로 인해 결정된다.


일상을 유지해야 한다. 이것은 정말로 중요한 일이다. 끼니를 거르지 않고, 친구들을 만나고, 가족들과 나들이를 하고, 운동이나 산책을 하고…. 이런 일들을 포기해선 안 된다. 그래야만 정말로 답답하고 괴로운 상황조차 마침내 받아들일 수 있게 된다. 받아들인다는 것은 포기한다는 것과 완전히 다르다. 받아들인다는 것은 내 인생에서 나의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부분이 존재한다는 것을 인정하지만, 그것이 단지 내 인생의 작은 조각이 되도록 하겠다는 것이다.





인내 : 한계를 인정하면서 한계를 넓히기


진정한 ‘인내’는 무조건 참고 견디는 것이 아니라 당장의 변화가 나타나지 않는다 하더라도 무언가 해야 할 일을 계속하는 것이라고 믿는다.





지금 그리고 여기 : 미래와의 관계 형성하기


삶이 고통스러울 때 사람들은 현재를 외면하고, 앞으로 더 좋아질 것이라며 미래를 향한 막연한 기대를 품게 된다. 하지만 아무리 고통스러워도 현재를 받아들이지 못한 상태에서 갖는 이러한 기대는 희망이 아니다. 희망은 오히려 고통 속에서 고통을 직면하게 함으로써, 우리가 현재에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다.


하지만 우울증에서 조금 더 회복된 지금의 나에게는 오늘 하루가, 지금 이 순간의 현재가 너무나 소중하다.





희망에게 시간을


삶의 어느 순간, 고통이 아주 커져 버려 감당하기 힘든 크기가 되면, 이 ‘삶의 이유’는 보이지 않고 ‘죽음의 이유’만 수백 가지 떠오르기도 한다. 세상이 나에게 죽어라, 죽어라 하는 것처럼 느껴지는 날도 있다. 그럴 때마다 ‘삶의 이유’나 ‘죽음의 이유’ 같은 것을 생각하고 있다는 것 자체가, 지금 내가 우울해서 그런 것일 가능성이 크다는 점을 상기했으면 한다. 평소 ‘살아야 할 이유’ 같은 것을 심각하게 고민하는 사람은 그것이 직업인 철학자 말고는 없을 것이다. 내 삶이 행복하다거나 불행하다고 생각할 수는 있지만, 그저 평범하게 살아가는 보통 사람들은 전혀 그런 생각을 하지 않고 주어진 인생을 ‘그냥’ 살아간다.





한번 더 생각해 보기 - 트라우마를 극복하려면


트라우마는 과거의 반복이므로, 이를 이겨 내는 방법은 아주 간단하다. 바로 ‘그것이 끝나게 하는 것’이다. 이 말의 의미는 간단하다. 트라우마는 과거에 끝나 버린 사건이므로, 현재의 자신에게는 영향을 주지 않는다는 사실을 스스로 정확히 인식해야 한다는 것이다. 과거의 사건을 회상할 수는 있다. 생각은 ‘하는’ 것이 아니라 ‘나는’ 것이므로. 그러나 사건이 떠오르는 것과 동시에 ‘그 사건은 지금의 나에게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생각을 의식적으로 꺼내는 것은 확실히 가능하다. 즉,   그땐 그때고, 지금은 지금이다.  이러한 자세를 갖는 것이 트라우마 극복에는 매우 바람직하다는 것이다.


일상을 회복하는 것이 트라우마 극복의 시작이자, 거의 전부다





YOLO! 1년차의 마음 가져보기


새로운 것에 대해 많은 호기심을 갖고 있고 함께할 친구와 가족이 있는 사람들은 고난을 슬기롭게 견뎌 낸다. 그리고 그렇게 고난을 견뎌 내고 나면, 심리적으로 더욱 굳건해져 다른 사람들을 포용하고 도와줄 수 있는 큰 그릇으로 성장하기도 한다. 그러므로 아무리 아프고 힘들고 괴로워도, 나와 내 가족 그리고 친구와 동료들의 삶에 대한 관심, 새로운 것에 대한 호기심의 끈을 놓쳐선 안 된다.






잘잘못 따지지 않기


누군가를 떠올리며 그의 잘못을 되새김질하고, 분노하고, 상황을 이렇게 만든 그를 미워하고 원망하는 것도 내 정신 건강에 이로울 게 하나도 없다.





가족을 웃게 만들기


괴로움으로 인해 관계가 단절되고 삶의 영역이 좁아진 사람들의 특징 중 하나가 어떤 일에 있어서든 쉽게 서운해한다는 것이다.


 


팬으로 살아가기


삶의 어느 순간 몸과 마음이 지치고 아플 때, 나는 누군가(아이돌 가수든 배우든, 운동 선수든 스포츠팀이든 상관없다)의 진심 어린 팬이 되어 보라고 권하곤 한다. 우울한 상태에 놓인 사람들에게는 좋은 것이라곤 없다. 어느 순간부터인가 즐거움을 주는 것은 모두 사라져 버린 듯하고, 다른 사람들이 웃거나 기뻐하는 상황에도 아무런 감흥을 느끼지 못하는 상태가 되기도 한다. 누군가의 팬이 된다는 것은 누군가를 좋아하게 된다는 의미다. 삶의 위기 상황에 처했을 때 좋아할 수 있는 누군가가 남아 있다는 것은, 깜깜한 밤에 켤 수 있는 촛불 하나가 아직 남아 있는 것과 같다. 비록 하나의 촛불은 매우 약한 불빛을 내뿜을 뿐이지만, 그 촛불 하나가 있음으로 해서 우리는 어둠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을 찾아볼 수 있게 된다.


사람들과 어울려 살아가고 조금씩 나이를 먹어가는 과정에서, 나는 점점 삶의 목표 그 자체보다는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이 긴 여행길 자체가 더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고 있다. 아무리 이 여행길이 험하다 하더라도, 함께하는 누군가가 있다면 혹은 함께하지는 못한다 하더라도 멀리서나마 응원받을 수 있고 내 편이 되어 줄 수 있는 누군가가 있다면, 이 힘들고 거친 여행길에 상처받거나 실망하거나 때로 주저앉게 되더라도 다시 일어나기가 훨씬 수월해진다는 것을 믿는다. 팬이 된다는 것은 바로 그런 누군가를 만드는 일이 아닐까.




도움을 줌으로써 도움 받기


2013년 4월 혼자서 귀국해 수술을 마친 후 다시 미국으로 돌아갔던 나는 오랫동안 미루어 왔던 가족과의 장거리 여행을 마침내 실행에 옮기게 되었다. 여행지는 캘리포니아에 인접한 애리조나 주의 ‘세도나’였다. 세도나는 여러 편의 서부 영화 촬영지이기도 했으며, 미국에서 가장 영적spiritual인 곳으로 알려져 있는 데다, 많은 예술가들이 찾는 아름다운 휴양 도시로도 유명하다.


그리고 돌려받을 것을 기대하지 않으며 타인을 돕고 친절을 베푸는 사람이 되겠다고도 다짐한다. 내가 먼저 그렇게 했을 때 타인은 물론 나 자신의 선함을 이끌어 낼 수 있다고 믿기에. 그리고 그것이 궁극적으로 나 자신을 구원할 것이라고 믿기에.




한번 더 생각해 보기 - 고통을 겪는 가족과 함께 살아가기


세상의 모든 것이 변해도 우리 가족은 ‘함께’라는 것을 상대가 느끼게 해 주고, 스스로도 그렇게 느낄 수 있어야 한다. 그렇게, 가족은 함께 고난을 견디며 더 단단해지는 법이다.




마치는 글 1


지금 이 순간 소멸하지 않고 살아 숨 쉬는 나의 존재는 희망에 대한 가장 분명한 근거가 아닐까.  


우리는 스스로 희망을 만들 수 있다. 희망의 근거가 우리 자신의 존재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스스로의 희망에 의해 구원될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삶은 자신의 길을 찾아 낼 것이다.




마치는 글 2


“순순히 어둠을 받아들이지 마오.”   이 책 맨 처음에도 인용했던 이 말은 영화 <인터스텔라>에 나와 더 유명해진 시인 딜런 토마스의 시 제목이다

Posted by Daesung Ju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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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행복은 생각인가


우리는 의식적인 부분이 자기 행동의 원인이라고 굳게 믿는다. 큰 오해다. 사실 일상의 수많은 선택과 행동은 의식의 손길이 닿지 않는 곳에서 조용히 이루어진다.


이성적 통제가 항상 생존에 도움이 되었다면, 극도의 위험에 놓인 인간은 더욱 합리적으로 행동하도록 진화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4. 동전탐지기로 찾는 행복


자연은 기막힌 설계를 했다. 내 생각에, 개에게 사용된 새우깡 같은 유인책이 인간의 경우 행복감(쾌감)이다. 개가 새우깡을 얻기 위해 서핑을 배우듯, 인간도 쾌감을 얻기 위해 생존에 필요한 행위를 하는 것이다.


"행복감을 인간이 왜 느낄까?"라는 질문으로 이 챕터를 시작했다. 여러분은 어떤 대답을 했을지 궁금하다. 나의 간결하고도 건조한 답은 "생존, 그리고 번식"이다.


행복하기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 생존하기 위해 필요한 상황에서 행복을 느껴야만 했던 것이다.


생존에 유익한 활동이나 생각을 하고 있을 때, 그 일에 계속 매진하라고 알리는 것이 쾌의 본질적 기능인 것이다(Nesse & Ellsworth, 2009)


5. 결국은 사람이다


물소들은 사자들이 우글거리는 아프리카 초원을 수십만 마리의 동료들과 함께 횡단한다. 서로 잡담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살아남기 위해서. 매가 혼자 있는 비둘기를 습격할 때 사냥에 성공할 확률은 약 80%다. 하지만 비둘기가 다른 친구 10마리와 함께 있을 때는 60%, 50마리와 함께할 때는 10% 이하로 사냥 성공률이 떨어진다(Trivers, 1985). 사람도 마찬가지다. 시카고 대학의 카시오포(Cacioppo) 교수 팀의 오랜 연구에 의하면 현대인의 가장 총체적인 사망 요인은 사고나 암이 아니라 외로움이다(Cacioppo & Patrick, 2008).


인간의 본성을 압축한다면 나는 "The ultimate SOCIAL machine"이라고 표현하고 싶다. 사회성은 인간의 생사를 좌우하는 가장 독보적인 특성이다. 최근 여러 분야의 석학들이 이구동성으로 주장하는 결론이다.


인간의 뇌는 도대체 무엇을 하기 위해 설계되었을까? 일평생의 연구를 토대로 그가 내린 결론은 '인간관계를 잘하기 위해서'다(Gazzaniga, 2008).


인간의 뇌가 급격히 커진 시기는 함께 생활하던 집단의 크기가 팽창할 때와 맞물려 있다.


인간의 뇌를 성장시킨 기폭제는 타인의 존재였다는 것이 최근 널리 각광받는 던바 교수의 '사회적 뇌 가설(social brain hypothesis)'의 핵심이다.


내 생각엔, 행복한 사람은 바로 이 고지식한 사회적 뇌를 잘 '이용'하는 자들이다.


이런 '사회적 영양실조'를 막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왕성한 '사회적 식욕'을 갖는 것이다. 식욕의 근원은 쾌감이다. 그래서 사람(특히 이성)을 만나고, 살을 비빌 때 뇌에서는 사회적 쾌감을 대량 방출한다. '강추'한다는 뜻이다. 우리는 이런 사회적 쾌감을 예민하게 느꼈던 자들의 유전자를 지니고 산다. 그래서 지금도 사람을 절실히 찾는 것이고, 가장 강렬한 기쁨과 즐거움을 사람을 통해 느끼는 것이다. 사람과 무관해 보이는 감정들도 사실 대부분 사람 때문에 생기는 것이다.


극도의 사회성. 하버드 대학의 에드워드 윌슨(Edward O. Wilson) 교수가 최근 저서에서 내린 결론이다(Wilson, 2012). 지구에서 최고의 생존 성공담을 가진 동물은 개미와 인간이다. 두 생명체의 공통된 특성은 유별날 정도로 사회적이라는 것이다. 한 개체로서는 그다지 탁월한 능력이 없지만, 서로 돕고 나누고 이용하는 복잡한 사회적 능력 덕분에 두 종은 지구에서 유례가 없는 성공신화를 썼다. 그래서 윌슨은 인간의 지구 정복을 '사회적 정복(social conquest)'라고 표현했다.


행복감을 발생시키는 우리 뇌는 이처럼 사람에 '중독'되어 있다는 사실을 놓쳐서는 안 된다. 그래서 사회적 경험과 행복은 불가분의 관계를 맺는다. 사회적 경험이 행복에 중요한 것은 물론이고, 나는 한 발 더 나아가 행복감(쾌감)은 사회적 과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존재하게 되었다고까지 생각한다.


첫째, 행복은 객관적인 삶의 조건들에 의해 크게 좌우되지 않는다. 둘째, 행복의 개인차를 결정적으로 좌우하는 것은 그가 물려받은 유전적 특성, 조금 더 구체적으로는 외향성이라는 성격 특질이다.


6. 행복은 아이스크림이다


스칸디나비아 행복의 원동력은 넘치는 자유, 타인에 대한 신뢰, 그리고 다양한 재능과 관심에 대한 존중이다(Bormans, 2010). 그들 사회는 돈이나 지위같은 삶의 외형보다 자신에게 중요한 일상의 즐거움과 의미에 더 관심을 두고 사는 곳이다.


복권 당첨 같은 일확천금의 경험은 장기적인 행복의 관점에서 보면 저주가 될 수도 있다. 실제로 위의 복권 연구에서 보면, 복권에 당첨된 자들의 행복 더듬이는 둔해진다. 복권 당첨 후 그들은 TV 시청, 쇼핑, 친구들과의 식사 같은 일상의 작은 즐거움에서 이전 같은 기쁨을 더 이상 느끼지 못했다. 큰 자극의 후유증이다.


돈은 마음만 먹으면 무엇이든 얻을 수 있다는 착각을 심어준다. 그래서 초콜릿 같은 시시한 것에 마음 두지 않게 하고, 이런 자극을 음미하는 능력을 감소시킨다. 심지어 사람이라는 자극에도 관심을 덜 갖게 한다. 돈을 생각할수록 카페에서 다른 사람과 대화를 덜 하고(Mogilner, 2010), 어려움을 당해도 다른 사람의 도움을 사양한다는 연구 결과들이 있다(Vohs, Mead, & Goode, 2006).


자료들을 보면 행복한 사람들은 이런 '시시한' 즐거움을 여러 모양으로 자주 느끼는 사람들이다(Diener, Sandvik, & Pavot, 1991).


객관적으로 얼마나 많이 가졌느냐보다 이미 가진 것을 얼마나 좋아하느냐가 행복과 더 깊은 관련이 있다(Diener, Lucas, Oishi, & Suh, 2002).


정서학자들의 중요한 발견 중 하나는 불행의 감소(예: -4에서 0)와 행복의 증가(예: 0에서 4)에 기여하는 요인들이 서로 다르다는 것이다. 이것을 긍정-부정 정서의 독립성(independence)이라고 하며(Diener&Emmons, 1984), 정신 병리에 몰두했던 심리학이 행복 연구를 시작하게 된 이론적 배경이다. 이 말을 쉽게 푼다면, 불행의 감소와 행복의 증가는 서로 다른 별개의 현상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화려한 변신의 순간에만 주목하지, 이 삶을 구성하는 그 뒤의 많은 시간에 대해서는 미처 생각하지 않는다. 그래서 성공하면 당연히 행복해지리라는 기대를 하지만, 실상 큰 행복에 변화가 없다는 사실은 살면서 깨닫게 된다. 그제야 당황한다.


프랑스 사상가 라 루시프코(La Rouchefecould)가 400년 전에 지적한 대로 우리는 "상상하는 만큼 행복해지지도 불행해지지도 않는다".


많은 사람이 미래에 무엇이 되기 위해 전력 질주한다. 이렇게 'becoming'에 눈을 두고 살지만, 정작 행복이 담겨 있는 곳은 'being'이다.


그래서 행복은 '한 방'으로 해결되는 것이 아니다. 모든 쾌락은 곧 소멸되기 때문에, 한 번의 커다란 기쁨보다 작은 기쁨을 여러 번 느끼는 것이 절대적이다. 유학 시절, 지도 교수가 쓴 논문을 읽은 적이 있다. 제목은 '행복은 기쁨의 강도가 아니라 빈도다(Happiness is the frequency, not the intensity, of positive affect'. 나는 이것이 행복의 가장 중요한 진리를 담은 문장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7. '사람쟁이' 성격


행복에 절대적인 영향을 비치지만, 대부분이 미처 생각지 않는 요인에 대해 살펴보려 한다. 어떤 것이 그렇게 중요할까? 오랫동안 행복을 연구한 석학들을 한 자리에 모아놓고 그 질문을 한다면 대답은 거의 비슷할 것이다.

"유전. 더 구체적으로는 외향성."


"행복해지려는 노력은 키가 커지려는 노력만큼 덧없다(Lykken & Tellegen, 1996)." 다소 극단적인 표현이지만, 그래도 행복에 있어서 유전적 개입을 부인하는 학자는 없다.


유전의 힘은 강력하다. 하지만 냄새도 모양도 없는 이 유전적 요인을 일상에서 간파하기란 쉽지 않다. 그래서 선천적으로 행복한 성향을 가지고 태어난 사람의 외적 '증상'에 주목하게 되고, 그것이 행복의 원인이라고 착각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기침이 감기의 증상이지 원인은 아니다.


유전과 행복을 각각 하나의 대륙이라고 한다면, 이 둘을 연결하는 보스포러스 다리가 있다. '외향성'이라는 성격 특질이다. 유전적 영향에 의해 외향성 수치는 어느 정도 정해지며, 그 외향성의 정도가 개인의 행복수치와 깊은 관련을 맺는다.


두 그룹 간의 차이는 오직 두 가지 영역에서만 나타났다. 첫째, 성격. 행복한 사람들은 월등히 더 외향적이고 정서적 안정성이 높았다. 둘째, 대인관계. 행복지수 상위 그룹의 사회적 관계의 빈도와 만족감이 월등히 높았다. 사실 두 가지 특징의 공통분모는 '사회성'이다. 그래서 이 논문의 저자들은 행복을 보장하는 충분조건은 없지만, 없어서는 안 될 필요조건이 사회적 관계라는 결론을 내렸다.


내향적인 사람들도 혼자일 때보다 누군가와 함께 있을 때 더 높은 행복감을 느꼈다(Diener & Biswas-Diener, 2008). 그래서 내가 농담처럼 하는 말이 있다. 회식 3차로 노래방에 갈 때, 배려한다는 마음으로 평소 조용한 김 양을 먼저 보내지 말라고. 노래방에서 그녀는 속으로 웃으며 좋아할 수 있다.


최근 주목받는 콜로라도 대학의 리프 반 보벤(Leaf van Boven)교수의 연구에 의하면, 행복한 이들은 공연이나 여행 같은 '경험'을 사기 위한 지출이 많고, 불행한 이들은 옷이나 물건 같은 '물질' 구매가 많은 것으로 나타난다(Van Boven & Gilovich, 2003). 행복과 관련해 경험보다 물질 구매가 불리한 점은 무엇일까? 경험(여행)에 비해 물질(신상 백)에서 얻는 즐거움은 더 빨리 적응되어 사라지고, 타인과의 상대적 비교를 더 자주하게 된다((누군가 반드시 더 좋은 가방을 들고 다닌다!).


외향성은 일종의 '사회성 위도'다. 이 값이 높을수록 사회적 관계의 양과 질이 높고, 바로 이 점이 행복에 절대적 기여를 한다.


레바논에 이런 속담이 있다. "사람이 없다면 천국조차 갈 곳이 못 된다."


8. 한국인의 행복


행복감을 예측하는 가장 중요한 문화적 특성은 개인주의다(Diener, Diener, & Diener, 1995).


개인주의는 국가의 경제 수준과 행복을 이어주는 일종의 '접착제' 역할을 한다(Inglehart, Foa, Peterson, & Welzel, 2008). 역으로 이 접착제(개인주의)가 부족한 사회는 경제적 발전을 이룩해도 거기에 상응하는 행복감이 뒤따라오지 않는 경우가 있다. 한국과 일본이 그 예다.


이렇듯 과도한 타인 의식은 집단주의 문화의 행복감을 낮춘다. 행복의 중요 요건 중 하나는 내 삶의 주인이 타인이 아닌 자신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알베르 카뮈는 이런 말을 남겼다. "행복해지려면 다른 사람을 지나치게 신경 쓰지 마라(To be happy, we must not be too concerned of others)."


본인의 경제 수준과 상관없이, 사랑보다 돈을 중요하게 생각할수록 그의 행복도는 낮다(Diener & Biswas-Diener, 2002). 반대로 사랑에 더 많은 가치를 두는 사람일수록 행복하다.


9. 오컴의 날로 행복을 베다


철옹성 같던 매슬로우의 이론도 최근 위아래가 뒤바뀌고 있다(Kenrick, Griskevicius, Neuberg, & Schaller, 2010).


행복한 사람일수록 미래에 더 건강해지고, 직장에서 더 성공하며, 사회적 관계도 윤택해지고, 더 건강한 시민의식을 갖게 된다(구재선, 김아람, 서은국, 2009; 구재선, 서은국, 2012, 2013 신지은, 최혜원, 구재선, 서은국, 2013 Diener, Kanazawa, Suh, & Oishi, 2014; Lyubomrisky, King, & Diener, 2005). 한국과 미국 사회에서 동일하게 나타나는 현상이다. 이런 연구들에서 어떤 사람을 '행복한 사람'으로 정의했을까? 남의 칭송과 칭찬을 받으며 사는 사람이 아니라, 일상에서 긍정적인 정서(기쁨 등)를 남보다 자주 경험하는 사람이다.


휴대전화를 이용해 현재 무엇을 하고 있으며 얼마나 즐거운지를 대학생, 직장인, 주부, 노인 등 다양한 사람들에게 물어보았다(구재선, 서은국, 2011). 한국인이 하루 동안 가장 즐거움을 느끼는 행위는 두 가지로 나타났다. 먹을 때와 대화할 때.



Posted by Daesung Ju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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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까운 사이일수록 경계를 지켜주어야 합니다. 지신의 일과 타인의 일, 자신의 생각과 타인의 생각, 자신의 감정과 타인의 감정을 분리ㅏ해서 봐야 합니다.


자신이 실시간으로 느끼는 감정을 더 구체적으로, 더 상세하고 명확하게 알아차리는 것을 심리학에서는 '정서입상(Emotional Granularity)' 또는 '정서분별(Emotion Differentiation)'이라고 합니다.


노벨생리의학상을 수상한 신경과학자 제럴드 에덜먼(Gerald Maurice Edelman)의 말을 빌리자면, 우리에게 현재란 본질적으로 '기억된 현재(remembered present)'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내 감정을 안다는 것은 그 순간의 '내 상태'를 알아차린다는 것이면서 동시에 내 과거의 의미와 미래의 의도를 알아차린다는 것입니다. 굉장히 거창하죠? 철학적 느낌도 많이 풍기고요. 실제로 정서분별은 일차적으로 심신의 건강에 보탬이 되는 역량이지만, 더 나아가 삶의 나침반이 되어주는 실존적 작업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보통 우울증이라고 표현하는 것은 우울장애의 한 유형인 '주요 우울장애(Major Depressive Disorder)'를 말합니다. 주요 우울장애로 진단받았다면 다른 사람보다 우울을 더 많이 느낄 뿐 아니라, 건강한 사람보다 부정적인 정서를 분별하는 수준이 낮다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사회적 불안장애로 진단받은 환자는, 사람을 만날 때 느끼는 부정적인 감정을 구체적으로 분별하지 못했기 때문에 전체적인 느낌을 불안이라고 애기하는 것일 수 있지요.


하나의 실험 결과를 일반화하는 것은 무리가 있지만, 이 연구는 아무리 불편하고 불쾌한 경험이라 하더라도 억지로 피하거나 별것 아니라고 애써 그 영향을 축소하기보다 최대한 구체적으로 맞닥뜨리는 학습을 하느 ㄴ것이 오히려 고통을 줄여줄 수 있다는 가능성을 시사합니다. 게다가 이러한 학습효과는 일시적이지 않았습니다. 불편한 마음을 구체적으로 표현해서 내가 느끼고 있는 감정에 대해 분별하는 훈련을 받았던 사람들은, 이후 거미와 맞닥뜨리더라도 불편감이나 고통을 전보다 덜 느꼈습니다.


강한 감정을 느끼는 순간을 위해 기억해둘 것이 있습니다. 그 감정을 드러내지 않으려고 애쓰거나 일단 덮어둔 채 다른 활동을 하면서 잊어버리려고 하기보다는 이런 마음으로 다가가는 것이 좋습니다. 그 감정은 내게 뭐라고 말하고 있지? 그 감정에 어떤 이름을 붙일 수 있을까? 그 감정은 왜 일어났을까? 내가 무엇을 놓친 것일까? 이 감정 안에 나의 어떤 소망(욕구, 의지)가 들어있을까? 이러한 질문들을 던져보면서 이해하는 시간을 가져보는 겁니다. 걷기 좋은 공원이나 강변, 숲길을 혼자 천천히 걸으면서 자문자답하는 것도 좋습니다.


아무리 강렬하고 불쾌한 감정이라 하더라도 무시하거나 잊어버리지 않고 그 즉시 들여다보는 작업을 시작한다면 그 감정이 오래 지속되지 않습니다. 게다가 스스로 조절하는 힘이 늘어나 적절한 행위를 선택할 수 있는 여지가 많아집니다.


정서와 연관된 신경들은 내장운동 영역에 포함되어 있어서, 감정은 몸의 생리적 반응을 동반합니다. 평소에 몸에서 일어나는 반응을 민감하게 느끼고 잘 들어주는 연습을 하면 특히 강렬한 감정을 겪을 때 크게 도움이 됩니다.


원인을 알지 못하는 감정은 오래간다.


감정이 일어나고 조절되는 것은 대개 우리가 알아차리지 못하는 사이에 매우 빠른 속도로 일어나지요. 우리가 주어진 상황에서 지금 무엇을 해야 하는지, 뇌는 자동적으로 알아냅니다. 정서분별이 잘될수록 이러한 과정이 더 매끄럽고 적절하게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뇌에게 좀 더 정교한 도구들을 안겨주는 셈이죠. 이것이 우리가 정서를 가능한 한 구체적으로, 그리고 실시간으로 잘 알아야 하는 이유입니다.


미국의 인지심리학자 제럴드 클로어(Gerald Clore)와 캐런 개스퍼(Karen Gasper)에 따르면 귀인이 덜 된 부정적 감정일수록 더 오래 지속된다고 합니다. 내가 왜 이런 감정을 느끼는지 잘 알지 못하면, 그때 느끼는 부정적 감정은 더 오래가고 다른 일에도 광범위하게 영향을 끼칠 가능성이 높아집니다. 따라서 그냥 우울하다고 하더라도 슬픔이나 짜증, 불안이나 화 등 구체적 감정으로 쪼개고 쪼개어 각각의 원인을 들여다볼 필요가 있습니다.


감정은 어쩔 수 없는 것이라는 당신에게, 감정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이해하면, 내가 느끼는 감정 자체를 바꿀 수 있습니다.


이처럼 우리는 몯느 정보를 실시간으로 일일이 처리하지는 않습니다. 그보다는 과거 경험을 토대로 곧 다가올 미래를 예측하는데, 현실과 예측의 차이, 곧 오차를 제거해가면서 적절한 행위를 고릅니다. 이것이 뇌가 지각하는 방식입니다. 뇌는 단순히 외부 자극에 반응하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가설을 갖고 예측하면서 실제 경험에 대비해 예측 오차들을 줄여나가는 '예측코딩(Predictive coding)' 프로세스를 돌리고 있죠. 이를 통해 우리는 시각, 청각, 촉각 등 다양한 지각을 경험합니다. 뇌는 실시간으로 들어오는 데이터를 가지고 과거 경험에 비추어 끊임없이 가설을 만들어냅니다. 그래서 오늘날의 신경과학은 뇌를 일종의 '예측기계(Predictive machine)'라고 부릅니다.


한마디로 정리하면 우리가 경험하는 감정은 물론이고, 타인의 감정에 대해 이렇다 저렇다 읽는 것도 모두 뇌가 예측한 결과물입니다. 틀릴 수 있을까요? 물론입니다. 예측이기 때문에 당연히 빗나갈 수 있습니다.


일단 예측오류가 최소화되면 예측은 하나의 지각이 도비니다. 이런 방식으로 뇌는 과거 경험을 현재 상황에서 적절한 행위로 갖아 잘 이끌어줄 하나의 범주를 구성하는 데 사용하지요. 뇌는 지속적으로 개념을 구성하고 감각 입력이 무엇인지 식별하기 위해 범주를 만들어내며, 무엇이 그것을 일으켰는지 원인을 추론하고, 그것에 대해 어떻게 하면 좋을지 행위 계획을 세웁니다. 참 복잡해 보이는 일들이 순식간에 이루어지죠. 내부 모델이 하나의 정서 개념을 만들 때, 그 결과는 하나의 정서 사례가 됩니다. 감정은 이렇게 해서 일어납니다. 정서구성론을 한마디로 정리하면, 정서가 시각이나 청각처럼 여타 지각이 구성되는 방식과 같은 방식으로 구성된다는 것입니다. 정서가 선천적으로 뇌 안에 들어있어서 상황에 맞게 튀어나오는 것이 아니라, 눈으로 보고 귀로 들으며 그게 무엇인지 알아차리는 방식으로 만들어진다는 사실은 기존의 심리학 교재로 정서에 관해 공부한 이들에게는 매우 충격적인 내용입니다.


감정이 어떻게 일어나는지 조금 더 쉬운 설명이 필요할 것 같군요. '행복'을 예로 들어볼까요? 언제 행복하다고 느끼나요? 사랑하는 사람이 나를 향해 활짝 웃을 때, 시원한 숲속을 걸어갈 때, 소중한 친구와 맛있는 음식을 먹을 때 우리는 행복에 대한 다양한 사례들을 경험합니다. 어려운 시험을 통과했을 때, 시합에서 기대하지 못한 우승을 거두었을 때, 계획대로 목표를 달성했을 때에도 우리는 행복하다고 느낍니다. 두꺼운 책을 다 읽은 뒤에도, 누군가를 도와주었을 때에도 뿌듯한 행복감을 느낍니다. 각 경험들은 서로 종류가 다릅니다. 이때 뇌는 이 정보들을 하나의 범주로 모아놓기 위해 행복이라는 개념을 만듭니다. 그리고 그 개념 덕분에 앞으로 다가오는 감각적 사건들에 의미가 생깁니다. 

새로운 경험을 맞닥뜨리면 이것이 '행복'이라고 분류된 이전 경험들과 얼마나 비슷한지 신속하게 비교하면서 현재 경험을 해석합니다. 물론 이 과정에서 중요한 것은 내 기준입니다. 절대적인 '행복'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죠. 지금 내가 갖고 있는 목표들, 예를 들면 가족과 함께 즐거운 시간 많이 보내기, 꾸준히 운동하기, 사회에 참여하기 등이 반영됩니다. 이 모든 것은 나의 생존과 생체적응, 곧 알로스타시스가 효과적으로 이루어지는 데 기여합니다.


지금까지 말했듯 감정이란, 내 과거 경험과 맥락에 따라 실시간 만들어지고 변화하고 흘러가는 것이니까요. 상황이 조금만 바뀌어도 달라지는 것이 감정인데 우리는 거기에 지나치게 많은 의미를 부여해온 게 아닌지 모르겠어요.


어떤 감정을 느꼈든, 얼마나 강렬하든 상관없이 그것이 무엇이고 어떤 맥락에서 나온 것인지 의미를 구체적으로 알게 된다면 생각과 행동을 조절할 수 있습니다. 갑자기 분노가 폭발해서 소리를 지르는 사람에게 '감정조절'이 안 된다고 말하지만, 사실은 말과 행동의 조절이 안 되는 것이지요.


감기에 걸리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바이러스에 감염되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바이러스는 종류도 많고 감염되는 경로도 다양합니다. 하지만 어떤 이유로든 감기에 걸리면 '코가 막히고 열이 나고 기침을 하는 등' 거의 동일한 결과가 나타납니다. 이처럼 구조적으로 다른 요소들이 같은 기능 또는 같은 결과를 내는 것을 '축중(degeneracy, 縮重)'이라고 합니다. 우리에게는 좀 낯설게 들리지만 물리학이나 화학에서는 이미 널리 쓰이는 개념이자, 우리 뇌를 이해하려면 꼭 알아야 할 신경작용입니다. 배럿 박사는 저서 '감정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How emotions are made)'에서 이 '축중' 개념을 가지고 정서를 설명합니다. 슬픔이나 화 같은 정서 경험도 그와 다르지 않다는 얘기지요. 갖가지 원인으로 인해 드러난 결과 또는 현상을 슬픔, 화, 기쁨으로 우리가 해석하는 것이지 애초에 화와 슬픔, 기쁨을 일으키는 신경학적 기제가 따로 있지 않습니다. 


혹시 '파충류의 뇌' '포유류의 뇌' 같은 말을 들어봤나요? 폴 매클린(Paul MacLean)이라는 신경과학자가 제안한 '삼위일체 뇌(Triune Brain)'이론에서 나온 말입니다. 인간의 뇌는 가장 깊은 곳의 파충류의 뇌, 그다음 층인 포유류의 뇌를 거쳐 진화했으므로 뇌가 세가지 층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주장이었지요. 1950년대에 처음 발표된 이래로 이 이론은 매우 널리 알려졌습니다. 하지만 최근 신경과학자들은 우리 뇌가 이처럼 층을 이루어 진화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밝혔습니다. 인간의 뇌가 다른 동물과 다른 것은 구조가 달라서가 아니라 더 미세하게 신경 배선(wiring)이 되어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지요.


'이성으로 감정을 통제한다'는 말은 뇌신경과학의 입장에서 보면 틀린 말입니다.


하지만 감정에 대해 제대로 이해하려면, 이렇게 생각과 감정을 대립 구도로 보는 시각부터 버려야 합니다.


아주 오랫동안 심리학은 뇌가 '자극(Stimulus) --> 반응(Response)' 기관, 즉 자극을 받아야 반응하는 기관이라고 가정해왔지만, 신경과학의 발견들로 이 역시 사실이 아님이 밝혀졌습니다. 동물의 신경계는 외부 자극이 있어야 반응하는 것이 아니라, 먼저 감각이 예측되고 그 뒤에 바깥에서 들어오는 감각 입력들에 의해 교정되는 순서로 작동합니다. 끊임없이 움직이는 뇌 활동이 들어오는 감각정보 처리에 영향을 끼치기 때문에, 엄밀히 말해서 이전에 내가 경험한 것과 무관하게 '중립적' 또는 '객관적'으로 지각한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도구적 접근에서 말하는 심리적 건강이란 무조건 긍정적인 기분을 많이 느끼고 부정적인 기분을 덜 느끼는 것이 아닙니다. 그보다는 유용한 정서를 더 많이 느끼고, 해로운 정서를 덜 경험하는 것을 뜻합니다.


그럼 사람들은 특정 정서가 유용한지를 어떻게 알까요? 특정 맥락에서 어떤 정서가 유용하다는 것을 학습한 사람은 비슷한 상황에 처할 때 그 정서에 대한 선호도가 높아집니다. 그러므로 정서에 대한 선호는 변할 수 있슶니다. 내 감정을 적절히 표현해 대인관계가 좋아지거나 당면한 목표를 성공적으로 이루었다고 판단되면 그 감정은 더 많이 느껴지고 더 빈번하게 표현될 수 있습니다. 반면 내가 느끼는 감정을 솔직하게 있는 그대로 표현했다가 예상치 못했던 불리한 경험을 했다면 그와 비슷한 감정은 통제될 수 있습니다. 표현만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덜 느낄 수도 있습니다.


마음챙김에 관한 중요한 경전 중 하나인 '사띠빳타나경(Satipatthana sutta, 念處經)'에서 부처는 신체긴으, 감각, 그리고 느낌과 의식, 의식의 내용 등의 무상한 본성을 명확히 바라보며 마음챙김을 유지할 것을 권했습니다. 반면 서구의 마음챙김 훈련들은 무아나 무상을 그만큼 가옺하지는 않습니다.


주의를 한곳에 붙들어매려고 애쓰는 것이 아니라, 지금 내게 들어온 자극에 대해 자동으로 해석(interpretation)하려는 경향을 자제하는 것입니다.


오랫동안 명상을 지도해온 기 암스트롱(Guy Armstrong)에 따르면, 마음챙김이란 "무언가를 경험하면서 그것을 경험하고 있다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감정이 격할 때, 또는 무언가 자극을 강하게 받았을 때에는 순간 내 몸과 마음에 일어나느 ㄴ느낌을 보면서 걷습니다. 마치 내 위에서 나를 내려다보듯 '아, 속이 부글부글 끓고 있구나' 또는 '배가 쿡쿡 쑤시는구나' '아주 뚜껑이 열렸다 닫혔다 하는구나' 하고 중얼거리기도 합니다. 머리가 뜨겁거나 어깨가 쑤실 때에는 그 부분을 만져주면서 따뜻한 마음으로 대합니다. 그리고 '어째서 그런 느낌이 드는 거니?' '이 느낌들은 어디에서 온 거야?' 하고 물어봐줍니다. 몸의 느낌에 대고 직접 물어보는 것입니다. 빨리 감정을 억누르려 하거나 일부러 다른 생각을 하려고 애쓰는 것보다 훨씬 효과적입니다. 몸은 종종 우리에게 직접 답을 건네주기도 합니다.


캐나다의 임상심리학자 랜디 패터슨(Randy Paterson)은 "자존감이라는 말은 시대가 만들어낸 신화다. 실제로 존재하지도 않는다"고 주장합니다.


박사는 저서 <비참해지는 법(How to be miserable)>에서 "'자기혐오'가 있을 뿐'자존감'이라는 것은 없다"고 주장합니다. 왜냐하면 자존감은 추구해서 어덩지는 대상이 아니라, 균형잡힌 삶을 잘 살아갈 때 결과적으로 느껴지는 전반적인 만족감에 지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한편 마음챙김의 연구로 유명한 심리학자 리처드 라이언ㅇ과 커크 워런 브라운은 <왜 우리에게 자존감이 필요없는가?(Why we don't need self-esteem)>라는 도발적인 제목으로 글을 발표했지요. 이들은 '나'를 대상으로 self-as-object 바라보는 서구 심리학의 오랜 관습 때문에 나에 대한 다른 사람들의 반응과 의견을 내면화한 것을 '나'로 착각하게 되었다고 설명합니다.


반면 '나'를 하나의 과정(self-as-process)으로 바라보는 사람들은 내가 가치있는지, 쓸모 있는지, 사랑받을 만한지 확인하려고 애쓰지 않기 때문에 자존감 같은 것이 필요 없어진다고 주장합니다.


내 이름이 지영이라면 "나 화났다"가 아니라 "지영이가 화가 났구나"라고 말을 걸어보는 겁니다. 내가 아끼는 조냊가 화가 났다고 하니, "지영아, 무엇에 화가 났니? 내가 어떻게 해주면 좋겠니?"라고 자연스럽게 물어보게 되겠지요. 이렇게 나 자신에게 3인칭 시점으로만 말을 걸어도 정서조절이 더 잘된다는 연구 결과도 있답니다.


오레곤대학교의 심리학자 엘리엇 버크먼(Elliot Berkman) 교수는 농사를 짓거나 병원에서 일하는 레지던트처럼 신체적으로 고단하게 일하는 상황이 아니라면 우리의 피로는 대부분 심리적인 것이라고 말합니다.


버크먼 교수에 따르면, 사람들이 항상 피곤하다고 느끼는 것은 대개 강도 높은 정서 때문입니다.


지나치게 긍정적인 감정도 사람을 피곤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결국 부정적이든 긍정적잉든 강도가 높은 감정은 몸에 부담을 준다는 말입니다. 

물론 정신적으로도 부담을 줍니다.


세팔라 박사에 따르면 행복은 성공해서 얻어지는 결과가 아니라, 오히려 성공으로 이끄는 원인입니다.

물론 이때의 행복이란 열정이나 흥분과 같이 강하게 일어나는 감정이 아니라, 차분함-만족감-평화로움과 같이 강도가 낮은 긍정적 정서를 말합니다. 이러한 정서들은 스트레스에 더욱 잘 대응하게 해주고 역경을 만나도 문제를 더 능숙하게 해결하도록 해줍니다.


내가 살아오면서 지금껏 보아온 사람들, 그리고 그리 길지 않은 시간 동안이지만 심리학과 뇌과학이 만나 빚어낸 수많은 최신 연구 결과들을 볼 때, 내 생각은 대략 한 방향으로 수렴됩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최선을 다하지만, 그 결과는 알 수 없지' 하고 마음을 먹는다면 어떨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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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정의 자세한 분화와 수치화는 자신의 마음을 매우 구체적으로 다룰 수 있게 해주어, 여러가지 상황에서 더 좋은 판단을 할 수 있도록 돕는다.


연인-가족 사이에 일어나는 사랑의 감정, 상대에게 내 모든 것을 의지하고 싶은 마음, 사랑이 배신당했을 때의 처절한 감정들은 이미지화하면 할수록 그 기저에 존재의 불안, 신에 대한 열망, 허무함 같은 깊은 욕망과 이어져 있음을 이해하게 된다. 그 욕망은 우리가 인지할 수 있는 것보다 거대해서, 왜 그런 것이 있어야 하는지, 무엇 때문에 그렇게 되는 것인지 이해하기도 힘들다. 게다가 그 흐름은 고고하고 도도하다. 아무도 모르는 숲속에서 흘러나온 위대한 강과 같은 느낌이다.


인간의 두뇌는 수학적 판단으로 움직인다. 우리의 마음이라는 것도 실은 마찬가지다.


치료자인 내 입장에서는 문제가 만성적인 경우 개입해야 하지만, 일시적인 경우 굳이 문제의 원인을 따질 필요가 없다. 문제가 있다고 해서 꼭 풀어야 하는 것은 아니니까.


자신의 문제를 스스로 파악할 때도, 마치 남을 분석하듯 질문을 던지고 경우의 수를 나누고 일일이 상황을 대입해 보아야 한다. 평소 논리적으로 생각하는 습관도 필요하겠지만, 더 중요한 것은 자신을 정당화하려는 무의식적인 방어기제들이다.


가족이나 친구와 대화를 할 때 걸핏하면 화를 내는 사람은 정상적인 대화론 상대를 이길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자신이 이런 사람이라면, 불편한 감정을 느끼는 순간 그 감정에 몰입하는 것을 스스로 방해하라. 자신을 관찰하는 제2의 자아를 끄집어내야 한다. 화난 나, 울고 있는 나를 객관적으로 관찰하는 눈을 떠올려보라. "화가 났는데 어떻게 떠올려요?"라고 할지도 모르겠다. 그때는 관찰하는 사람의 마음으로 나에게 말을 거는 것이다. 

'너 화가 많이 났구나.' 

이렇게 속으로 '분명하게' 말을 걸어라. 그 후에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흥분하지 마. 지금은 네가 화낼 때가 아니야. 우리 조금만 더 상황을 살펴보자.'

이렇게 되기까지는 훈련이 좀 필요한데, 평소에도 자신에게 말을 걸고 대화하는 버릇을 키울 필요가 있다.


단순하고 미숙할수록 병적인 카테고리화가 일어나는데, 내가 남자라는 이유만으로 '상남자 vs. 非상남자(여자, 게이, 트렌스젠더, 일부일처 남자, 허약한 남자, 고자 등 모두 포함)' 같은 구도를 만들기도 하고...


인간 역사에 있어 자신의 오류를 정당화시켜줄 존재는 항상 필요했다. 사람들은 범주화를 통해 존재의 불합리성을 '악'으로 규정했다. 종교적인 악에 대한 믿음이 사라진 지금은 그런 시선이 인간에게로 향하는 것 같다. 남녀 간에도 계층 간에도 이런 양상이 보이며, 외국인이나 소수자를 대하는 방식에서도 이런 점이 잘 드러난다.

이 방식은 참으로 편리하다. 특별한 회개나 성찰이 없어도 마음이 편해지니까. 혐오하는 대상이 있으면 분노 에너지는 좀 들지만, 그를 통해 얻는 정당성으로 안도감을 얻는다. 게다가 자신을 악에 희생된 피해자에 위치시켜 책임과 의무를 회피할 수도 있다. 그게 편안하고 따뜻하게 느껴지겠지만, 실제로 그것은 자신을 장작 삼아 태운 온기에 지나지 않는다.


어릴 때 왕따를 당했던 내담자에게 흔히 하는 말이 있다.

"트라우마에서 벗어나야 해요. 자신을 객관적으로 바라보세요."

이 말은 카메라를 자신의 머리 위쯤에 두라는 이야기다. 내담자들은 카메라를 자기 눈에 위치시키고, 옛날 자기를 괴롭힌 아이 앞에 서 있던 자신을 반복하려 한다. 시간도 어린 시절에 고착되어 있고, 스스로도 어린아이인 채로 남아있다. 상담자는 현재 시점에서 환자가 '과거의 일은 이미 지나가버린 것'임을 깨닫게 해주어야 한다. 그래서 내담자 스스로 머리 위의 객관적 시점에서 자기 자신과 가해 아동을 관찰하기를 권유한다. 이는 자신을 피해 아동이라는 틀에 갇히지 않게 해주며, 이미 다 지난 꼬마아이들 간에 일어난 일로 어린 시절의 사건을 재해석하도록 도와준다.

이렇게 시점 카메라를 이동시키면서 자신을 상상하고 관찰하다 보면 탄생하는 것이 있다. 첫번째는 상상 속 타인들의 시선에 대한 반응으로, 이는 '하부 인격'들을 형성하기 시작한다. 여기에 구체적인 대인관계, 사고 판단의 패턴들이 결합되면서 점차 정교한 인격이 된다. 두번째는 그보다 상위 개념인 '내면의 하부 인격들을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나', 즉 '관찰하는 자아(Observing Ego)'다. 이를 통해 자신과 타인, 사물을 냉정하게 거리를 두고 이해하는 것은 물론, 자기 내부의 여러 인격들의 움직임이나 감정도 관찰하며 조정할 수 있다. 이에 대해서는 이어지는 소인격체 이론에서 다시 다룰 것이다.


자신의 언행이 평소답지 않다거나 감정이 과격해 졌다거나 수줍어졌다거나 말투가 다른 사람처럼 변했을 때, 우리는 그 변화를 스스로 깨달아야 한다.


그 다음으로, 과연 그 상황에서 그 인격이 나오는 것이 적절한가 생각해본다.


이런 생각들을 해가며 자기 내면에서 불쑥 튀어나오는 여러 가지 인격들을 이해하다 보면, 그들을 관찰하는 새로운 자아가 발달하기 시작한다. 처음에는 그들이 밉거나 부끄럽지만, 내부의 부정적 자아도 긍정적 자아들과 함께 맡은 역할이 있음을 차차 이해하게 된다. 결국 자기 자신은 성장하고 있는 존재이며 아직 완벽하진 않더라도 내가 옳은 길을 가고 있음을 이해하고, 자애롭고 균형잡힌 눈으로 자기를 바라볼 수 있게 된다.


'자기 통합'이라는 말이 어렵게 들릴 수도 있다. 그러나 내면의 하부 인격들끼리 친근하게 대화를 진행한다고 생각하면 더 쉬울 것이다.


폭력적인 남자들은 실제로 내부의 열등감이나 불안감이 심한 편이다. 그래서 자신의 유일한 무기, 즉 폭력과 분노에 의지해 주변 사람을 대한다. 안타깝게도 가장 가까이 해야 할 자식들이 그 폭력의 대상이 되는 경우가 많고, 자신에 대해서도 자학적인 태도를 가지고 있어 심리적 접근이 어렵다. 이런 아버지의 아들-딸들은 왜 아버지가 그랬는지 이해하기 어려워하며, 아버지를 그저 정체를 알 수 없는 괴물로 느끼는 경우가 많다. 따라서 의사는 아버지가 왜 그런 행동을 했는지 심리적인 재해석을 해줘야 한다. 폭력성의 내면은 외로움, 열등감, 고집, 무지 등으로 가득하다는 것을 이해할수록, 폭력에 대한 두려움도 제어할 수 있게 된다.


인간이 가진 중요한 의무는, 부모가 가르쳐준(그게 좋든나쁘든) 인간에 대한 관점, 사회가 가르쳐준 관점을 극복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현재 자신의 위치와 삶의 목표를 돌이켜보는 과정이 필요하다. 이 과정에서 참자아가 발생하며, 부모와 사회를 넘어선 이후에는 또다시 자신이 만들어낸 관점을 극복하는 과정이 필요하게 된다. 이 모든 과정을 거치며 나라는 이상한 나라의 영토가 점점 더 확장되는 것이다. 


자기 취향을 세분화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느냐가 중요하다.


부정은 쉽다. 어떤 사실이나 존재를 그저"아니"라고만 하면 되니까. 없애는 것은 쉽고, 만드는 것은 노력을 필요로 한다. 우울증 환자가 쉽게 부정적 감정에 휩싸이는 것도 그것이 긍정적 감정을 갖는 것보다 힘이 덜 들어서다. 치료자인 의사도 환자의 분노, 짜증, 불안을 '제거'하는 것은 비교적 쉬운 반면, 화자에게 의욕이 생기도록 하려면 많은 노력을 해야만 한다.


긍정적 감정은 아주 작을 때가 많다. 친구에게 펜을 빌려주고 싶은 마음, 개미를 밟지 않으려는 마음, 하늘을 보고 든 '참 아름답구나' 하는 생각 등. 이를 남에게 굳이 말할 것 까진 없다고 해서 자기 자신에게까지 숨기지는 않아야 한다. 자기 자신에게 '내가 이런 생각을 했구나. 흠, 꽤 착한걸'하며 작은 칭찬이라도 꼭 하는 것이 좋다. 내가 말을 해놓고도 내가 더 기뻐질 것이다.


우울증에 숨어 있는 분노를 이겨내려면, 자신을 괴롭히거나 남을 비난하고 싶은 욕망에 지지 말아야 한다. 자꾸 스스로를 칭찬해주어야 한다. 헛말, 거짓말이란 걸 알더라도, 자기 글씨를 보며 "우리 ㅇㅇ 글씨 참 잘 썼네", 라면을 끓여놓고 "우리 ㅁㅁ 어디 가서 굶지는 않겠네" 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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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읽을 것인가 / 고영성 / 스마트북스 에서 읽은 인상깊은 구절 메모.

(전자책으로 본 거라 페이지 수는 따로 남기지 않았음)


습관의 사전적 정의는 '여러 번 되풀이함으로써 저절로 익고 굳어진 행동'을 뜻하지만, 나는 좀 다르게 말하고 싶다. 습관이란 특정 행동을 하지 않으면 이상한 감정이 드는 상태이다.


심리학자 토드 해서톤과 페트리샤 니콜스의 연구에 따르면, 인생에서 성공적인 변화를 이끌었던 사람들의 무려 36%가 '새로운 장소'로 이동한 것과 관련이 있었다. 게다가 변화를 위해서 새로운 장소로 이동했음에도 실패했던 확률은 13%에 불과했다. 성공적인 변화를 위해서 적절한 장소를 활용한다면, 열 명 중 아홉 명은 변화에 성공할 수 있다는 말이다.


파스칼은 "무지함을 두려워 말라. 거짓 지식을 두려워하라"라고 말했다.


초보자를 위한 다독 목록

독서 : 책은 도끼다, 책만 보는 바보, 읽는 인간

글쓰기 : 유시민의 글쓰기 특강, 대통령의 글쓰기

자기계발 : 스위치

창의성 : 스틱!, 탁월한 아이디어는 어디서 오는가

경영일반 : 경영학 콘서트

경영전략 : 당신은 전략가입니까

리더십 : 존중하라, 위대한 기업의 선택

세일즈 : 파는 것이 인간이다

마케팅 : 티핑 포인트, 컨테이저스-전략적 입소문

행복 : 행복의 기원, 당신이 지갑을 열기 전에 알아야 할 것들

의사결정 : 자신 있게 결정하라

육아 : 아기성장보고서, 베이비 위스퍼

공부 & 교육 : 어떻게 공부할 것인가

인지심리학 : 보이지 않는 고릴라

뇌과학 : 1.4킬로그램의 우주-뇌

투자 : 행운에 속지 마라, 돈 좀 굴려봅시다, 워런 버핏과의 점심 식사

재테크 : 월급쟁이 부자들, 당신이 속고 있는 28가지 재테크의 비밀

경제일반 : 유시민의 경제학 카페

경제학설사 : 부자의 경제학 빈민의 경제학

행동경제학 : 스마트한 선택들

거시경제 : 문명의 대가

환율 : 원화의 미래

부동산 : 부동산은 끝났다


물리학자인 아르망 투르소는 "최악의 과학자는 예술가가 아닌 과학자이며, 최악의 예술가는 과학자가 아닌 예술가이다"라고 했으며...


이것은 감정을 표출하는 것이 아니라 그 감정을 기술할 때 진짜 정화 효과가 나타난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것을 심리학 용어로 '정서 명명하기(affect labeling)'라고 한다. 매튜 리버먼 교수는 여러 연구를 실행한 끝에 감정 정화에서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정서 명명하기'이며, 특히 부정적인 정서일수록 효과가 크다고 한다.


'정서 명명하기'를 할 때, 뇌에서 전전두피질의 활동은 증가한 반면 편도체의 활동은 감소한다. 뇌가 동물에서 인간으로, 본능에서 이성으로 방향을 선회했다는 것이다. 자신의 감정을 표출하는 것이 아니라 감정 자체가 무엇인지를 서술할 때 자신도 모르게 '자기절제'가 되고 있는 셈이다.


루이스 캐럴은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서 이렇게 조언해 준다.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겠다면, 그냥 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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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나,지금이대로괜찮은사람 #박진영 #메모


이러한 이유로 학자들은 스스로에 대한 너그러움이야말로 높거나 낮은 자존감이 갖는 단점은 없으면서 장점은 가지고 있는 높거나 낮지만 건강하지 않은 자존감의 아주 좋은 대안이라고 이야기한다. 특히 자존감에 상처가 났을 경우 너그러움이 좋은 해결책이 된다고 이야기한다. 결국 진정한 자존감 또는 건강한 자존감을 갖고 싶다면 무엇보다 먼저 스스로에게 너그러워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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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행히도 우리에게는 우리의 자아에 대해 의식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 그래서 자아가 쓸데없는 소리를 할 때 "야, 좀 조용히 해"라고 말하는 것이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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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정은 특정 상황에서 나의 판단과 행동을 돕기 위한 알람일 뿐이다. 따라서 감정이 밀려올 때면 '알람이 울리는군'하고 받아들이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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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감정은 '알아주는 것'만으로도 해소되기도 한다. 한참 힘들어하거나 서운함을 느끼고 있을 때 누군가가 "힘들 만하네. 서운할 만해" 하고 알아주고 공감해주면 그것만으로도 힘듦과 서운함이 크게 가신다. 실제로 많은 연구들에서는, 문제를 객관적으로 해결하는 '도구적인 도움'(instrumental support)보다도 힘든 마음을 알아주고 이해해주는 '정서적 지지'(emotional support)가 스트레스와 부정적인 감정을 해소하는 데 더 좋은 효과를 낸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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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라서 감정이 찾아오면 가급적 바로 확인하는 게 좋다. 예컨대 부정적 정서인 경우 '아, 내가 이런 걸 힘들어하는구나. 특히 이런 점이 힘든 거구나. 힘들만 하다'며 그 메시지를 받아주면 된다. 팀원이 보고서를 올리면 그때그때 잘 확인하고 결정을 지시하는 유능한 팀장처럼 말이다. 반대로 읽지 않은 메시지 100건처럼 감정을 쌓아놓고 있으면 해소가 더딜 수밖에 없다.

  다시 말하지만, 감정의 이야기를 잘 들어주면서도 감정에 휘둘려 호들갑 떨기보다 최종 결정권자로서 균형 있는 시각을 가져야 한다. 그냥 아무 이유 없이 힘든 경우에도 스스로 감정을 돌아보며 따뜻한 말을 건네자. 긴장이 될 때에도 '나 지금 긴장하고 있구나. 그만큼 이 일이 나에게 중요하다는 거겠지? 그러니까 긴장되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야'라고 일단 이해해주자. 상황에 대한 판단과 대처는 그 다음에 해도 늦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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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스트레스 슬리퍼'(stress sleeper)라는 말이 있다. 스트레스를 받으면 잠을 자버리는 사람을 뜻하는데, 이 말처럼 실제로 잠이 특히 정서적 충격을 줄여주는 데 효과적이라는 발견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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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우리 자신에게 그것으로 됐다고, 그동안 참 잘해왔다고, 처음 사는 인생이라 앞으로도 계속 어렵겠지만 그래도 잘 부탁한다고 따뜻하게 이야기해주는 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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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eese Making: At Goat Lady Dairy from 7 Finger media on Vime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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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사 유감




추천의 글


"각자의 자리에서 욕심을 버리고 진심을 다해 최선을 다한다면 분명 살기 좋은 세상이 될 거야. 지금 우리에겐 그게 제일 필요해." - 유희열의 문유석 판사 회고 중에서


담담한 동심


이제 파산 문제는 특정 계층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들 자신을 포함한 모든 사람에게 닥칠 수 있는 문제이고,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파산제도와 개인회생제도는 일종의 사회적 보험인 것입니다.


어찌 보면 법원의 면책결정은 별 게 아닙니다. 원래 가치가 0원인 채권을 0원이라고 공식 확인해주는 것에 불과한 것이죠.


물론 파산 사건의 증가와 함께 이러한 악용 사례가 늘어날 가능성은 저희들도 항상 염려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적어도 아직까지 우리나라에서의 개인파산은 남용을 걱정하기보다는 이용하지 않는 것을 걱정해야 하는 걸음마 단계라고 생각됩니다.


파산한 기업은 청산되어 소멸하지만, 파산한 인간은 계속 살아가야 합니다. 도전하다가 쓰러진 인간에게는 무덤 대신 두 번째 기회가 주어져야 합니다. 이것이 활자가 아닌 사람을 통해 제가 배운 것입니다. 


한번도 용서받지 못한 사람


그런데 그 순간, 피고인의 마지막 한마디가 제 가슴을 찔렀습니다. "나는 단 한 번도 용서받아 본 적이 없습니다!"


희망이 인간을 고문한다


기성세대의 위선을 비웃고 가치를 전복하려 싸우다 보니 어느새 이제는 위악이 쿨한 것이고 날 것의 욕망이 솔직한 시대가 돼 버린 것 같습니다. 하지만 위악이 위선보다 나은 것이 도대체 뭐죠?


대중의 물질적 욕망의 배후에는 자본의 논리가 있습니다. 로버트 매닝 (Robert D.Manning)의 '신용카드 제국'이라는 책을 읽어보면 미국의 1970년대 장기불황 시대에 금융자본이 기업금융으로 수익을 창출하지 못하자 찾아낸 활로가 소비자 금융임을 알 수 있습니다. 열심히 일한 당신, 떠나라! BC 로 사세요~


지성과 반지성


요즘 새삼스레 드는 생각은 좌와 우, 보수와 진보 등의 편 가르기는 다 본질과 직결되지 않는 '이름 붙이기'에 불과하고, 진짜 대립하고 있는 것은 지성과 반지성이라는 것입니다.


자신이 안다고 생각하는 것도 절대적 진리가 아니라 상대적일 수 있음을 인식하고, 자신이 틀릴 가능성을 인정하고 유보적인 태도를 취할 수 있는 것 또한 지성적인 태도일 것이빈다. 이에 반하여 자신이 믿고 있는 것 또는 자신이 바라는 것을 아는 것과 혼동하는 것, 더 나아가 자신이 믿고 있는 것 또는 바라는 것에 저촉되는 것을 무조건 배척하는 것은 갈릴레이를 법정에 세웠던 바로 그 반지성 아닐까요.


매사에 꼭 선명한 결론을 내리려고 무리하는 것은 오만인 동시에 무지입니다. 근거 없는 확신을 유포하는 것은 무지를 넘어선 범죄일 수도 있는 것이고요.


의견과 지식의 한계를 스스로 인식하고 이를 전제로 자기 검증을 되풀이하며 자기가 말할 수 있는 부분까지 말하자는 것입니다. 결론을 내릴 만한 근거가 없으면 스스로 단정하지 말고 의문만 제기하면 되는 것 아닙니까. 결론을 사실상 내려놓고 반문하는 의문이 아니라, 진실에의 열린 가능성을 열어 둔 순수한 의문 말입니다.


서울 법대와 하버드 로스쿨 3


수강신청을 할 때는 우선 이렇게 쌓인 수년 치의 강의 평가를 정독한 후 실제 수업을 들어가 직접 판단하고 확정합니다. 성의 없이 수업하는 교수가 살아남을 수 있을까요?


기본적으로 한국의 법학 교육은 학생들의 머리 위에 거대하고 복잡한 개념의 탑을 쌓아놓고, 그 완결적 구조의 아름다움을 음미하도록 하고는 실제 지금 이 사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분쟁을 해결하는 방법에 대해서는 각자 일하면서 알아서 자기 머릿속에 들어있는 개념들에 꿰어 맞추든지 뭐 알아서 하라는 방식인 것 같습니다.

하버드 로스쿨의 법학은 그야말로 '실사구시'하는 학문입니다. 기본적으로 판례법이 중요한 소스인데, 판례라는 것 자체가 실제로 사회에서 일어난 분쟁이나 해결의 과정이니 현실적일 수 밖에 없고요, 성문법을 주로 가르치는 과목도 기본적인 개념과 법조문은 학생들이 읽어와야 하지요. 그리고 교수는 실제 주로 발생하는 사례들이나 이를 단순화한 연습 문제를 가지고 이 법조문이 도대체 무슨 소리고 어떨 때 써먹으라고 나온 것인지를 가르칩니다. 


그런데 개인적으로 느끼기에는 시스템의 차이, 학문 풍토의 차이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차이는 이곳에서는 '정성', '성실' 같은 평범해 보이는 가치를 우리보다 더 귀하게 여긴다는 것입니다. 자기가 맡은 일에 최선을 다하는 것에서 행복을 찾는 것이 당연한 문화인 것이죠. 교수들도, 학사 행정을 담당하는 직원들도, 도서관의 사서들도, 스쿨버스를 운전하는 기사들도 다들 자기 일에 최선을 다하고 거기서 즐거움을 찾는 것 같습니다. 밥벌이하려고 마지못해 하고 있다는 인상을 받을 수가 없습니다.

다들 정말 귀찮을 정도로 학생들 공부를 도와주려고 애를 씁니다. 학사 행정 담당 스태프가 밤이고 일요일이고 학생들에게 메일을 보내서 다음주 주요 행사와 세미나를 알리고 참석을 권유합니다. 도서관 사서는 제 논문계획서를 읽어보고는 큰 흥미를 느낀 포인트를 말하며 자료 찾는 것을 도와줄 테니 만나서 같이 토론해 보자고 연락해 옵니다. 


한국형 세미나 유감


판사들도 법원 행사로 이루어지는 세미나 때 보면 겸손, 미괄식, 문맹자 배려 증후군을 잘 보여줍니다. 그런데 묘한 것은 판사들이 재판부 내에서 사건 결론을 합의할 때나 동료 판사들끼리 공통의 현안인 사건 쟁점에 대해 톨노할 때에는 또 완전히 딴판이라는 겁니다. 굉장히 효율적으로 쟁점만 치열하게 토론하곤 하거든요? 한참 싸우다가도 상대방의 논거가 더 그럴듯하면 바로 "어, 듣고 보니 그러네? 난 의견 번복하여 그 설에 찬동!" 하고는 손바닥 뒤집듯 바로 입장을 바꾸는 것에 거리낌들이 없고요.

짐작컨대 이런 토론은 그야말로 일상적인 업무로서, 모두의 시간이 금인 상황에서 가장 합리적인 결론을 빨리 도출해 사건을 해결해야 하는 실무적 필요성이 압도적인 경우니까 효율적으로 이루어지는 듯해요. 


이유 같지 않은 이유로


저는 그냥 엄벌할 것이면 엄벌할 사유를 상세히 힘주어  쓰고, 선처할 것이면 유리한 정상을 상세히 써서 양형 이유만 읽어봐도 이 재판부가 무엇에 중점을 두고 판단했는지 납득이 가도록 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정치, 사회 어느 영역에서든 세상을 정말 의미있게 바꾸기 위해서는 원래 자기와 의견이 같은 사람들의 열광보다 자기와 의견이 다른 사람들의 수긍을 얻을 수 있는 방법으로 주장을 펴야 한다고 봅니다. 판결도 마찬가지지요. 항상 첨예하게 이해관계가 대립된 양측이 있기 마련인데 모두가 박수치는 판결이란 있을 수 없다고 봐요. 판결에 불만족 하는 쪽에서도 '마음에는 안 들지만 읽어보니 판사가 잘못했다고까지는 하지 못하겠네' 정도의 반응을 보인다면 성공적인 판결문이 아닐지요. 그러기 위해서는 최대한 중립적인 입장에서 보편적인 논리와 어느 누구도 부인하기 어려운 근거를 들어야 할 것입니다. 


법원 유모아


법정에서 치열함을 넘어 살벌하기까지 한 갈등의 양 당사자들과 함께 재판을 진행해야 하는 법관에게 유머를 구사할 수 있는 여유와 능력은 소중한 자질이라고 생각


제도 이전에 욕망이 있다


애덤 스미스는 개개인이 최선을 다해 경쟁하면 결과적으로 사회 전체가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이롭게 된다고 했는데, 내쉬 균형에 따르면 실제로는 각자가 최선 대신 차선을 선택하는 방법으로 경쟁을 줄인다면 최악의 사태를 피할 수 있다는 것이니까요.


나는 놀기 위해 태어났다


대법원장님이 인사청문회 때 이런 말씀을 하는 것을 TV 에서 본 적이 있습니다. "나는 개인에 대한 외부의 부당한 간섭을 배격하고 자유분방함을 추구하며 인간을 일정한 틀에 묶어두려는 어떠한 시도에도 반대한다. 법의 사명은 이런 사회를 조성하는 것이다."



Posted by Daesung Ju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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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적대화를 위한 넓고 얕은 지식


고대 노예제 사회 : 생산수단은 왕과 노예를 만들었다

생산수단은 소유자가 타인의 노동력을 이용하게 함으로써 사회적 관계를 왜곡시킨다.

신이 진짜 있는지 없는지의 문제는 지배자의 관심사가 아니다. 지배자 자신이 부를 수 있는 ‘신’이라는 언어만 있으면 된다. 왜냐하면 신은 지배자가 사회를 지배할 권리를 부여하기 때문이다. 독단적으로 지배하고자 하는 욕망을 지닌 자일수록, 그의 신앙은 절실하다.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역사적, 정치적으로 신의 문제를 고려했을 때, 신의 이름이 정치를 위해 사용되었을 혐의가 짙다는 것이다.

중세 봉건제사회 : 계급은 더욱 세분화되었다

쉽게 정리하면 서구는 두 가지 문화를 뿌리로 한다. 그리스-로마 신화와 그리스도교.

부르주아는 인간의 ‘이성’으로 신의 역할을 완벽하게 대체했다.

대치 구조가 명확해졌다. 구권력인 왕과 영주들은 장원을 생산수단으로 소유하고, 종교로부터 지배의 정당성을 얻었다. 반면 신권력인 부르주아들은 공장과 상업을 생산수단으로 소유하고, 이성으로부터 권력의 정당성을 얻었다.

근대 자본주의 : 새로운 권력이 탄생했다

부르주아는 자본가계급, 시민계급, 유산계급으로 불린다. 그리고 프롤레타리아는 이와는 대비되게 노동자계급, 무산계급으로 불린다.


근대 자본주의의 전개 : 공급과잉이 시작되었다

공장은 주문이 있기 전에 미리 물품을 대량으로 생산해낸다. 물품이 필요한 사람은 기다릴 필요 없이 시장에 가서 이미 생산된 물품을 구입하면 된다. 이러한 특성, 즉 물품을 구입하려는 욕구보다 이미 생산된 물품이 더 많은 상태가 자본주의의 특성이다.

제1차 세계대전 : 공급과잉이 전쟁을 일으켰다

사실 오늘날의 자본주의를 유지해주는 핵심 요소는 두 가지다. 하나는 전쟁이고, 다른 하나는 유행이다. 전쟁과 유행은 자본주의라는 어머니에게서 태어난 쌍둥이 형제라 할 수 있다. 전쟁이 공급 과잉의 문제를 단번에 해소하듯, 유행은 필요를 뛰어넘는 막대한 소비를 창출해서 공급과잉 문제를 해소한다. 충분히 사용할 수 있는 옷과 핸드백들이 매년 옷장 구석에 쌓여가거나 쓰레기통으로 향한다. 전쟁과 유행 없이 자본주의를 유지하기는 어렵다.

세계 경제대공황 : 가격 경쟁은 대공황으로 이어졌다
대공황 해결방안
1> 미국 : 뉴딜정책 - 자본주의 수정
2> 러시아 : 공산주의 - 자본주의 폐기
3> 독일 : 군국화 - 자본주의 유지

냉전시대 : 왜 자본주의와 공산주의는 대립하는가

공산주의 국가가 자본주의 국가와 무역 거래를 하지 않고 적대적인 관계를 갖는 것은, 공산주의 체제가 생산수단을 독점한 자본가의 존재를 인정하기 않기 때문이다. 

시장 확보가 필수적인 자본주의의 입장에서는, 자본주의와 무역 거래를 하지 않는 공산주의 국가가 늘어난다는 것은 시장의 축소를 의미한다. 시장의 축소는 수요량의 감소를 의미하고, 수요량의 감소는 자본주의의 생산 중단, 즉 공황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서, 공산주의 국가의 존재 자체가 자본주의에 위협이 되는 것이다.

‘국가’는 요청된다. 국가라는 개념은 신의 개념과 마찬가지로 지배를 정당화하는 역할을 수행한다. 그리고 특히 ‘애국’에 대한 강요는 지배자들을 편리하게 한다. 그래서 애국은 국가적 차원에서 장려되고 교육된다.

신자유주의의 탄생 : 새롭고 독특한 경제체제의 세계


자본주의와 공산주의 : 너에게 생산수단을 허하노라

공산주의는 개인이 생산수단을 소유하는 것을 금지하고, 모두 국가가 관리하는 체제를 말한다. 반면 자본주의는 개인이 사적으로 생산수단을 소유할 수 있게 하는 체제를 말한다.

자본주의와 공산주의의 차이는 ‘생산 수단의 개인적 소유를 인정하는지의 여부’가 된다. 자본주의는 생산수단, 잉여생산물 모두를 개인이 소유할 수 있는 체제다. 공산주의는 생산수단은  개인이 소유할 수 없지만, 잉여생산물은 개인이 소유할 수 있는 체제다.

공산주의 : 공산주의는 왜 실패했는가

공산주의는 모든 사람이 평등하고 평화롭게 살고자 한다는 인간 본성에 대한 낙관적이고 불가능한 전제에서 이야기를 시작한다.

 국가가 생산수단을 소유한다고 해도, 실제로 그 소유를 유지하고 분배하는 존재는 지극히 구체적인 사람이다. 즉 국유화된 생산수단을 관리하는 소수가 권력에 근접하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마르크스주의가 추구하는 노동자에 의한 프롤레타리아 독재는 실현되지 않는다. 국가의 이름으로 국가 전체의 생산수단을 통제하는 절대적 권한을 갖는 인물이 필연적으로 탄생한다.

공산주의와 사회주의의 구분

첫째, 혁명의 주체가 누구냐에 따른 구분이다. 이에 의하면 사회, 경제적 문제를 해결하고 노동자 중심의 세계를 만들어내는 주체를 노동자 스스로로 보는 입장을 공산주의라 한다. 반면 노동자는 실제로 스스로를 극복할 능력을 갖추지 못했으므로 엘리트계급 또는 부르주아들이 스스로의 권리를 내려놓고 노동자의 권리를 보장해나가야 한다는 입장을 사회주의라 한다. 이는 누가 사회를 바꿀 수 있는지에 대한 입장 차이로 공산주의와 사회주의를 구분하는 것이다.
둘째, 수단과 목적의 관계로 구분하는 방법이 있다. 이에 따르면 궁극적인 목표인 공산주의 사회는 노동자가 스스로 자신의 권리를 지키며 독재를 하는 사회다. 그런데 자본주의에서 갑자기 노동자 중심의 사회로 급격히 변화될 수는 없다.  따라서 과도기적 단계로서 노동자가 아닌, 국가와 정부를 대리하는 소수의 정치엘리트에 의해 운영되는 사회가 필요한데, 이를 사회주의라 부르는 것이다. 이 구분 방법은 공산주의를 궁극의 목표로, 과도기 단계를 사회주의로 설정함으로써 두 체제를 구분한다.
셋째, 내포의 관계로 보는 것이다. 사회주의를 국가가 주도하는 계획 경제라는 넓은 개념으로 파악하고, 공산주의는 그 중에서도 특히 노동자에 의한 계획경제라는 측면에서, 공산주의가 사회주의에 포함된다는 개념으로 판단하는 것이다.


보수와 진보의 현실적 구분 : 현실에서 보수와 진보는 어떻게 나타나는가
자본가의 이익을 우선할 것이냐, 노동자의 이익을 우선할 것이냐에 대한 정치적 입장이 보수, 진보 구분의 본질이다.

민주주의 : 민주주의는 어떻게 독재를 탄생시키는가

민주주의의 문제점이 발생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형식적 측면과 동시에 내용적 측면이 보강되어야 한다. 민주주의는 단순히 형식적 다수결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민주주의 정신이라는 내용적 측면까지 함께 고려되어야 한다. 다양한 의견의 수렴 과정과 절차가 보장되고, 각 구성원이 소수의의견에 귀 기울이는 관용적 태도가 전제되어야만 이상적인 형태의 민주주의가 비로소 가능할 것이다.

독재, 엘리트주의 : 독재와 엘리트주의는 나쁜 것인가

소크라테스가 질문하고 답변자가 대답하기를 반복하는데, 이 과정을 통해 소크라테스는 신탁의 의미를 깨닫는다. 자신은 자신이 잘 모른다는 것을 ‘아는’데, 사람들은 자신이 잘 모른다는 것을 ‘모른’다는 것을 말이다. 다시 말해서 자신은 다른 사람들보다 한 가지를 더 알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자신이 잘 모른다는 것’이다. 이것을 ‘무지의 지’라고 한다.

자유민주주의, 공산주의, 사회민주주의 : 경제와 정치는 어떻게 결합되는가

하지만 정부가 시장에 개입한다고 해서 군부독재기를 후기 자본주의나 사회민주주의 체제로 볼 수는 없다. 군부정권의 시장 개입은 산업을 육성하고 기업이 활동할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하기 위한 제한적인 개입이었기 때문이다. 정부가 시장에 개입해서 세금을 인상하고 규제를 확립함으로써 사회 전체의 복지를 추구한 적극적인 개입이 아니었던 것이다.

군부 정권의 시장 개입은 시장에 대한 국가의 간섭이라기보다는 국가에 의한 시장 투자라고 보는 것이 더 적절할 것이다.


이기주의와 전체주의 : 전체주의는 개인이 비윤리적 행위에 눈감게 한다

전체주의는 독립적으로 자생하는 하나의 이념이라기보다는, 사실 경제적 위기가 발생시키는 하나의 병리 현상으로 보인다.

전체가 위기에 처해있고 비윤리적인 방식으로 위기를 극복하고자 한다면 개인은 언제라도 자신에게 책임이 따르지 않는 것을 반긴다.

전체는 나의 이익을 위해 강력하게 행동하지만, 나에게는 책임이 없는 이상적인 사회가 전체주의다. 전체주의는 개인이 전체의 비윤리적 행위에 눈감게 한다.

윤리의 정의 : 윤리적 판단은 실제의 세계와 무관하게 존재한다

당위명제는 사실명제를 통해 증명될 수 없다. 당위명제는 사실명제와 무관하게 그 문장 자체의 내용만을 토대로 판단하고 평가해야 한다. 즉 윤리적 판단은 실제의 세계가 어떠한지와는 무관하게 독립적으로 존재한다.

의무론과 목적론 : 주어진 의무를 고려할 것인가, 미래의 결과를 고려할 것인가

정리하면, 의무론은 의무나 도덕 법칙을 준수하는 행위를 윤리로 보고, 목적론은 이익을 창출하는 행위를 윤리로 본다.

의무론과 칸트의 정언명법 : 절대적인 윤리법칙을 찾아라

정언명법이란 절대적이고 보편적이어서 누구나 따라야만 하는 도덕 법칙을 찾아내는 계산 기계 정도로 생각해볼 수 있다. 이 정언명법 기계에 내가 하려는 행위 X를 넣어본다. 그러면 계산을 거쳐서 이 행위 X가 보편적 도덕 법칙인지 아닌지를 구별해준다. 이 계산 기계가 작동하는 방식은 단순하다. 내가 하려는 특정 행위 X를 사회 구성원 모두가 동시에 한다고 가정해보는 것이다. 만약 그래도 사회가 붕괴하지 않는다면, 그 행위 X는 도덕적 행위가 되는 것이다. 


Posted by Daesung Ju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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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역에 관하여



2. 독감 백신에 대한 두려움

수은 화합물인 보존제 티메로살은 다회 용량 독감 백신을 제외하고는 모든 아동기 백신으로부터 2002년까지 완전히 제거되었다. 하지만 그로부터 십 년이 훌쩍 더 지난 지금까지도 백신 속 수은에 대한 두려움은 살아 있다.


3. 우리의 몸은 윌의 은유를 결정한다

영국인들은 <한 대 맞는다 jab>고 표현하고, 총을 좋아하는 우리 미국인들은 <한 발 맞는다 shot>고 표현한다. 어느 쪽으로 부르든, 백신 접종은 폭력이다. 그리고 백신 접종이 성 매개 감염병을 예방하기 위한 것일 때, 그것은 성폭력이 되는 듯하다.


백신 접종이 대개 흉터를 남기지 않는 지금도, 그 때문에 우리에게 영구적인 낙인이 찍힐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은 사라지지 않았다. 우리는 백신이 자폐증을, 혹은 오늘날 산업화된 나라들을 괴롭히는 여러 면역 장애 질병들(당뇨, 천식, 알레르기)을 일으킬지 모른다고 두려워한다. B형 간염 백신이 다발 경화증을 일으킬지 모른다고 두려워하고, 디프테리아-파상풍-백일해 백신이 영아 돌연사를 일으킬지 모른다고 두려워한다. 여러 백신을 동시에 접종하면 면역계에 부담이 될지 모른다고 걱정하고, 전체 백신 접종 수가 많으면 면역계가 압도되어 버릴지 모른다고 걱정한다. 일부 백신에 든 포름알데히드가 암을 일으킬지 모른다고 두려워하고, 다른 백신에 든 알루미늄이 뇌를 오염시킬지 모른다고 두려워한다.


그는 마크 트웨인을 언급한다. “어떤 미국인이 믿음이라는 것을 이렇게 정의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네. 즉, ‘믿음이란, 우리가 사실이 아니라고 알고 있는 것을 믿게 하는 능력’이라고 말이야.” 그리고 말한다. “그 사람 얘기는, 우리가 열린 마음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지. 작은 바위 덩어리가 철도의 화차를 막는 것처럼, 진실의 작은 조각이 커다란 진실이 나아가는 것을 막게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일세.”


4. 집단 면역

이웃이란 철학자들이 타자라고 부르는 것, 우리가 지닌 자기애의 이기성이 시험당하는 대상으로서의 존재 (키르케고르)


우리가 백신의 효과를 따질 때 그것이 하나의 몸에 어떤 영향을 미치느냐만 따지지 않고 공동체의 집합적 몸에 어떤 영향을 미치느냐까지 따진다면, 백신 접종을 면역에 대한 예금으로 상상해도 썩 괜찮을 것이다. 그 은행에 돈을 넣는다는 건 스스로의 면역으로 보호받을 능력이 없거나 의도적으로 그러지 않기로 결정한 사람들에게 기부하는 셈이다. 이것이 바로 집단 면역(herd immunity)의 원리이고, 집단 접종이 개인 접종보다 훨씬 효과적인 것은 바로 이 집단 면역 덕분이다. 


효과가 상대적으로 적은 백신이라도 충분히 많은 사람이 접종하면, 바이러스가 숙주에서 숙주로 이동하기가 어려워져서 전파가 멎기 때문에 백신을 맞지 않은 사람이나 백신을 맞았지만 면역이 형성되지 않은 사람까지 모두 감염을 모면한다. 자신을 백신을 맞았지만 미접종자가 많은 동네에서 사는 사람이 자신은 맞지 않았지만 접종자가 많은 동네에서 사는 사람보다 홍역에 걸릴 가능성이 더 높은 건 그 때문이다.


5. B형 간염 백신과 공중 보건 조치의 계급성

B형 간염 백신 접종의 한 가지 수수께끼는 최초의 공중 보건 전략이었던 <고위험군> 접종만으로는 감염률을 낮출 수 없었다는 것이다. 1981년에 B형 간염 백신이 처음 도입되었을 때는 수감자, 보건 노동자, 게이 남성, 정맥 주사를 쓰는 마약 복용자에게만 권유되었다. 그러나 B형 간염 감염률은 변함이 없었고, 그로부터 십 년 뒤에 모든 신생아에게 백신을 권장했을 때야 비로소 낮아졌다. 집단 접종만이 감염률을 낮출 수 있었던 것이다.


우리 시대가 철저히 취약한 존재로 여기도록 부추기는 아이들의 작은 몸도, 사실은 질병을 퍼뜨릴 능력이 있기 때문에 위험한 존재이기도 하다.

 

“백신은 다수 집단을 동원해서 소수 집단을 보호함으로써 효과를 발휘하지.” 아버지(의사)의 설명이다.


6. 우리에게는 병균이 필요하다

요즘도 위생 가설을 감염성 질병을 예방하지 말아야 할 이유로 해석하는 사람들이 있다. 한 친구는 내게 “아직 정확히는 모른다지만, 홍역 같은 질병이 건강에 꼭 필요할지도 모른대”라고 말했다. 하지만 아메리카 대륙의 선주민들은 몇천 년 동안 홍역 없이 살았고, 비교적 최근에 대륙에 홍역이 도입되었을 때 그 결과는 처참했다.


많은 바이러스는 우리가 없으면 번식하지 못하지만, 우리도 바이러스에게서 얻었던 것 없이는  번식하지 못하는 것이다.


7. 오염에 대한 두려움

옛날 한 수도원장은 어떻게 신자와 이단자를 구별하면 좋겠느냐는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고 한다. “모조리 죽여라. 신은 제 백성을 알아보실 것이다.”


이미 많은 연구에서, 항균 비누로 씻는 게 그냥 비누와 물로 씻는 것보다 세균을 더 잘 제거하진 않는다는 결과가 나왔다. 매스턴 박사가 넌지시 말한 바에 따르면, 트리클로산이 비누에 들어 있는 건 오로지 회사들이 세균을 씻어내기보다 죽인다고 약속하는 항균 제품에 대한 시장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홍역 환자 1,000명 중 약 1명 꼴로 뇌염이 따른다는 건 알고, MMR(홍역-볼거리-풍진) 백신 접종자 300만 명 중 약 1명꼴로 접종 후 뇌염 발생이 보고된다는 건 안다. 그런 사례는 워낙 드물기 때문에, 연구자들은 그런 뇌염이 정말 백신 때문에 일어난 건지 아닌지를 확실히 결론 내리진 못했다.


어떤 종류의 백신이든 주사 후 실신과 근육통을 일으킬 수 있는데, 그것은 백신 때문이 아니라 주사 행위 자체 때문


<위험 인식, 즉 사람들이 주변 환경의 위험 요소에 대해 내리는 직관적 판단은 전문가들이 제공하는 증거에 완강하게 저항하곤 한다.> 역사학자 마이클 윌리히는 그렇게 말했다. 우리는 우리를 해칠 가능성이 가장 높은 것들은 오히려 겁내지 않는 경향이 있다. 우리는 운전을 한다. 그것도 아주 많이 한다. 술을 마시고, 자전거를 타고, 너무 오래 앉아 있는다. 그러면서 오히려 통계적으로 따져서 별달리 위험하지 않은 것들을 걱정한다. 우리는 상어를 무서워하지만, 순 사망자 수로 따지자면 지구에서 제일 위험한 생물은 모기일 것이다.


슬로빅이 실험에서 확인했던 경우처럼 사람들이 자신의 믿음을 반박하는 정보를 접할 때, 우리는 자신이 아니라 정보를 의심하는 경향이 있다.


연구자들이 나 같은 사람에게서 목격하는 통계적 위험 무시 현상은, 부분적으로나마, 위험에 휘둘리는 삶을 살기 싫다는 마음 탓일 것이다.


독성학자들은 <용량이 독을 결정한다>고 본다. 어떤 물질이든 과잉으로 쓰이면 독이 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물이 아주 많은 용량일 때는 인체에 치명적이라, 2002년 보스턴 마라톤 대회에서 주자가 수분 과잉으로 죽은 사건도 있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물질을 용량과는 무관하게 안전한 것 아니면 위험한 것으로 생각한다. 그리고 이런 사고방식을 노출에 대해서까지 확장하여, 화학 물질에 노출되는 것은 아무리 짧거나 제한적이더라도 무조건 해롭다고 여긴다.


8. 자연은 선하다는 통념과 ‘침묵의 봄’

요즘 어떤 부모들은 아이가 백신 없이 ‘자연적으로’ 감염성 질병에 대한 면역을 발달시키도록 만든다는 발상에 매력을 느낀다. 그 매력은 백신이 본질적으로 부자연스러운 것이라는 믿음에 의지한 바가 크다. 그러나 백신은 인간과 자연 사이의 중간적 장소에 속하는 물질이다.


효과 없는 치료법, 독성 강한 예방약, 환경을 망치는 살충제가 여태 쓰이는데, 왜냐하면 말라리아에 쓸 수 있는 효과적인 백신은 아직 없기 때문이다. 안타깝게도 DDT는 현재 그런 장소에서 말라리아를 좀 더 효과적으로 통제할 수 있는 몇 가지 수단 중 하나다. 남아프리카 공화국 일부 지역에서는 일 년에 한 차례 집 안쪽 벽에 DDT를 바르는 것만으로도 말라리아가 거의 근절되었다. 미국에서처럼 비행기로 수백만 에이커에 뿌리는 방법과 비교할 때, 이 적용 방법은 환경에 주는 충격이 비교적 적다. 그러나 DDT는 여전히 완벽하지 않은 해법이다. DDT를 생산하는 화학 회사가 거의 없고, DDT를 살 돈을 기꺼이 후원하려는 기부자는 없으며, 많은 나라는 딴 나라에서는 금지된 화학 물질을 쓰기를 꺼린다.


13. 여성 치료사와 비난받는 엄마들

논문이 널리보도되자 홍역 백신 접종률이 뚝 떨어졌지만, 사실 논문의 결론은 <우리는 홍역, 볼거리, 풍진 백신과 앞서 말한 증후군 사이의 연관성을 증명하지는 못했다>라는 거였으며 논문의 주된 발견은 더 많은 연구가 필요하다는 거였다.


14. 우리는 모두 오염된 존재

백신 속 포름알데히드가 암을 일으킬지도 모른다는 공포는 미량의 물질에 대한 공포라는 점에서, 즉 사람들이 해당 물질의 다른 흔한 공급원들을 통해 접하는 양보다 상당히 더 작은 양을 두고 형성된 공포라는 점에서 수은이나 알루미늄에 대한 공포와 비슷하다. 포름알데히드는 자동차 배기가스와 담배 연기에 들어있을 뿐더러 종이 가방과 종이 타월에도 들어 있고, 가스 난로나 벽난로에서도 나온다.


고농도라면 정말 유독하지만, 포름알데히드는 인체가 만들어내는 물질인 데다가 대사 활동에도 꼭 필요한 물질이다. 게다가 애초에 우리 몸에서 순환하고 있는 포름알데히드의 양은 백신 접종으로 얻는 양보다 상당히 더 많다.


모유를 분석한 실험실들은 그 속에서 페인트 희석제, 드라이클리닝 용액, 내연제, 농약, 심지어 로켓 연료를 검출해냈다.


순수함, 특히 신체적 순수함은 언뜻 무해한 개념으로 보이지만, 실은 지난 세기의 가장 사악한 사회 활동들 중 다수의 이면에 깔린 생각이었다. 신체적 순수함에 대한 열정은 맹인이거나 흑인이거나 가난한 여자들에게 불임 시술을 실시했던 우생학 운동의 동기였다. 신체적 순수함에 대한 걱정은 노예제가 폐지된 뒤에도 한 세기 넘게 살아남았던 인종 혼합 결혼 금지법의 이면에 깔린 생각이었으며, 최근에서야 위헌으로 판정된 남색 금지법의 이면에 깔린 생각이기도 했다. 모종의 상상된 순수성을 보존하려는 노력 때문에, 그동안 인류의 유대는 적잖이 희생되어 왔다. 제대혈과 모유에 든 엄청나게 다양한 화학물질이 앞으로 아이들의 건강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는 아직 정확히 모른다지만, 최소한 우리는 우리가 출생 시점부터도 전반적인 주변 호나경보다 더 깨끗한 존재는 못 된다는 걸 안다. 우리는 모두 오염된 존재이다. 자기 몸의 세포보다 더 많은 수의 미생물을 장 속에 품고 있다. 우리는 세균으로 우글거리는 존재이고, 화학 물질로 포화된 존재이다. 한마디로 우리는 지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과 이어져 있다. 물론, 그리고 특히, 다른 사람들과도.


17. 백신 속 수은을 둘러싼 혼란

후속 연구를 통해서 에틸수은과 메틸수은은 <크나큰 차이>가 있다는 게 확인되었는데, 제일 중요한 점은 에틸수은에는 메틸수은이 일으키는 신경 독소효과가 없다는 점이었다. 2012년 ‘소아과학’에 실린 기사는 AAP의 티메로살 성명 이후 13년 동안 수행된 연구를 돌아보며, <백신 속 티메로살이 인체에 위험하다는 신뢰할 만한 과학적 증거는 없다>고 결론내렸다.


18. 자본주의와 백신

백신 접종 거부는 엄밀히 따져서 자본주의의 전형이라고는 할 수 없는 체계를 훼손하는 일이다. 이 체계에서는 온 인구가 부담과 이득을 함께 진다. 백신 접종은 자본주의의 산물을 자본의 압박에 대항하는 목적으로 사용하게끔 해주는 일이다.


19. 가부장주의 vs 소비자 중심주의

의사들의 가부장주의는 그동안 환자들의 소비자 중심주의로 교체되어 왔다. 우리는 소비자 수요 조사에 근거를 두고 작성된 메뉴를 들여다보면서 그중에서 검사와 치료법을 주문한다. 가부장주의 모형에서 아버지에 해당했던 의사는 여기에서는 웨이터다. 손님이 왕이라는 생각은, 의학에 도입될 경우 위험천만한 금언이 된다. 생명 윤리학자 아서 캐플런은 이렇게 경고했다. <사람들에게 의료는 시장일 뿐이고 그들은 의뢰인일 뿐이며 그들이 고객으로서 만족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환자의 자율성을 제공받아야 한다고 계속 말해준다면, 의료의 전문성은 소비자의 요구 앞에 붕괴하고 말 것이다.> 의사들은 환자들이 원하는 것을 주려는 유혹을 느낄 것이다. 그것이 설령 환자들에게 나쁘더라도.


21. 지나치게 많고 지나치게 이르다?

무균실에서 살지 않는 한, 모든 아기에게는 여러 차례의 백신 접종에서 얻은 약독화된 항원을 처리하는 것보다 매일 일상에서 감염을 물리치려고 싸우는 게 더 버거운 일일 것이다.


23. 양심적 거부와 도덕의 문제

“까다로운 부분은, 그냥 불편한 느낌과 양심이 말해주는 바를 어떻게 구별할 건가 하는 문제야”


법률은 일부 사람들이 의학적, 종교적, 철학적 이유에서 백신 접종으로부터 면제받을 수 있도록 허락한다. 하지만 우리 스스로 그런 사람 중 하나가 될 것인가 말 것인가 결정하는 문제는 정말로 양심의 문제다.


여동생은 이렇게 제안했다. “서로 의존하는 관계라고 생각해 봐. 우리 몸은 자기 혼자만의 소유가 아니야. 우리는 그렇지 않아. 우리 몸들은 서로 독립적이지 않지. 우리 몸의 건강은 늘 남들이 내리는 선택에 의존하고 있어.”  이 대목에서 동생은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몰라서 잠시 머뭇거렸는데, 그녀에게는 드문 일이었다.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지도 잘 모르겠지만, 요컨대 독립성이란 환상이 존재한단 거야.”


24. 자연적 몸과 정치적 몸

우리는, 우리 몸은, 독립적이면서도 의존적이다.


종류를 불문하고 모든 위험-편익 분석과 집단 면역 모형에서는 백신 접종이 대중 뿐 아니라 개인에게도 이득이라는 결론이 나오는 편이다.


26. 건강과 질병의 이분법

그녀가 조사했던 사람들 중 일부는, 그녀의 표현을 빌리자면 <면역 마초> 같은 태도를 보였다. 가령 자기 면역계가 <끝내준다>고 말하는 식이었다. 역시 마틴이 들은 말을 인용하자면, 어떤 사람은 <훌륭한 생활 기준을 따르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백신이 필요하지만, 중산층이나 상류층 사람들의 좀 더 세련된 면역계에는 백신이 방해만 될 것> 이라고 말했다.


면역 기능이 약화된 사람은 잘 기능하는 면역계를 가진 사람들이 면역을 지녀서 자신을 질병으로부터 보호해 주는 데 의존할 수 밖에 없다.


질병이 정말로 무언가에 대한 벌이라면, 그것은 오직 살아있는 데 대한 벌일 뿐이다.


어릴 때 내가 아버지에게 무엇이 암을 일으키느냐고 물었더니, 아버지는 한참 생각하다가 이렇게 대답했다. “생명, 생명이 암을 일으킨단다.” 암의 역사를 쓴 싯다르타 무케르지의 책을 읽기 전까지, 나는 아버지의 저 대답을 교묘한 둘러댐으로만 여겼다. 무케르지는 책에서 생명이 암의 원인일 뿐 아니라 심지어 암이 곧 우리라고 주장했다. “그 타고난 분자적 핵심까지 속속들이, 암세포는 과잉 활동적이고, 생존 능력을 타고났고, 공격적이고, 생식력이 뛰어나고, 창의적인 우리 자신의 복사본이다” 그리고 그는 덧붙였다. “이것은 결코 은유가 아니다.”


27. 과학 정보를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우리가 지식을 몸으로 상상한다면, 몸의 일부가 맥락으로부터 뜯겨 나갔을 때는 뻔히 해로울 것임을 알 수 있다. 백신을 둘러싼 토론에서는 이런 식의 절단이 상당히 자주 벌어진다. 전체 연구가 지지하지 않는 어떤 입장이나 생각을 지지하기 위해서 개별 연구를 내세우는 것이다.


우리가 과학적 증거를 알아볼 때는, 정보 전체를 고려해야 한다. 수역 전체를 조사해야 한다. 만일 그것이 방대하다면, 어느 한 사람이 하기에는 불가능한 일이 된다. 의학 한림원에 제출할 2011년 백신 부작용 보고서를 작성하기 위해서 동료 심사를 거친 논문 12,000편을 점검하는 일에는 의학 전문가 18명으로 구성된 위원회가 꼬박 2년을 들여야 했다. 그 위원회에는 연구 기법 전문가, 자가 면역 질병 전문가, 의료 윤리학자, 아동 면역 반응에 대한 권위자, 아동 신경학자, 뇌 발달 연구에 전념하는 연구자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들의 보고서는 백신이 비교적 안전하다는 사실을 확인한 것은 물론이거니와 오늘날 우리에게 주어진 정보를 항해하는 데 어떤 종류의 협동이 필요한지도 보여주었다. 우리는 혼자서는 알 수 없다.


28. 모르는 것이 주는 두려움

“두려움은 존중할 수 있어요. 백신에 대한 두려움은 이해할 만합니다. 하지만 그런 결정은 존중할 수 없어요. 그건 쓸데없는 위험을 지는 겁니다.”


아버지가 스토아 철학에 끌린 이유는, 내게 설명하신 데 따르면, 우리가 자신에게 벌어지는 일을 통제할 순 없지만 그 일에 대한 감정은 통제할 수 있다는 생각 때문이다. 장 폴 사르트르의 말을 빌리자면, “자유란 주어진 것에 대한 행함”이다.


29. 의학적 신중함과 사회적 편견

사람들이 편견으로 기우는 경향성은 스스로가 특히 취약하다고 느끼거나 질병에 대해서 위협을 느낄 때 좀 더 강화된다고 한다. 일례로 한 연구에 따르면, 임신한 여성은 임신 초기 단계에서 외국인 혐오를 좀 더 많이 드러낸다. 슬프게도 우리는 자신이 취약하다고 느낄수록 좀 더 편협해지는 것이다.


하지만 그래도, 나는 여전히 백신 접종에는 의학을 초월한 이유들이 있다고 믿는다.


30. 면역은 우리가 함께 가꾸는 정원이다

우리는, 마틴 루서 킹이 상기시켰던 것처럼 우리 모두가 ‘벗어날 수 없는 상호성의 그물에 얽혀 있다는 사실’을 종종 못 보곤 한다.


우리는 싸우지 않고 질병과 싸울 수 있을지도 모른다. 내가 이 이야기를 읽은 기사의 제목은 <몸 속 미생물 정원을 가꾸다> 였다. 이 은유에서, 몸은 이질적이고 낯선 것이라면 모조리 공격하는 전쟁 기계가 아니다. 우리가 적절한 환경에서 다른 많은 미생물과 함께 균형을 이루어 살아가는 정원이다. 몸의 정원에서, 우리가 제 속을 들여다볼 때 발견하는 것은 자기가 아니라 타자다.

  

우리가 사회적 몸을 무엇으로 여기기로 선택하든, 우리는 늘 서로의 환경이다. 면역은 공유된 공간이다. 우리가 함께 가꾸는 정원이다.



Posted by Daesung Ju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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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람학교 5 찬란한 이슬람 문명



인류학에 ‘박해를 당할수록 정체성은 강해진다’라는 이론이 있습니다. 다문화 정책에서 소수민족이나 이주민을 차별하면 점점 그들의 정체성이 돌덩이처럼 굳어집니다. 반대로 열어 주면 흐물흐물해져서 주류 사회에 스며들어 녹아 버립니다. 만고불변의 법칙입니다. 

- 이슬람이 이룩한 문명


문제는 메카라는 곳 자체가 원래부터 콘텐츠가 없는 곳입니다. 그래서 이슬람 문화는 기본적으로 텅 비어 있는 용광로 틀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문화적인 하부 구조를 빠른 시간 안에 만들려면 정복 전쟁을 하면서 정복한 지역의 문화를 온몸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태생적인 과제였습니다. 여기서 포용과 융합의 정신이 나옵니다. 이게 이슬람 문화의 특징입니다.


역설적이게도 문화는 잡탕일수록 우수합니다. 단일 문화는 오래 못 갑니다. 고이고 썩어서 경쟁력이 떨어집니다.


페르시아에서는 주로 제국 운영을 위한 행정 체계와 제도를 도입했고요, 유럽 쪽에서는 지중해의 광범위한 철학과 사상이 유입됩니다. 이것이 이슬람의 두 버팀목입니다.

- 페르시아와 비잔틴을 단번에 포용한 이슬람


그리스 로마의 지중해 문화에, 메소포타미아에서 축적된 오리엔트 문화, 인도의 대수학과 수학적 지식에, 중국의 제지술과 비단 직조술, 화약과 나침반 그리고 형이상학적 지식까지를 직접 접촉해서 받아들이잖아요. 상식적으로 생각해 봐도 인류 문명 5천 년 역사에 이런 때가 없었습니다.

이 같은 배경을 바탕으로 10~13세기에 바그다드를 중심으로 인류 최초의 르네상스가 일어납니다. 그때까지 그 누구도 경험하지 못했던 인류 최고 수준의 르네상스였습니다. 유럽보다 정확하게 500년 전에 일어났습니다. 


서구에서는 잊혔던 그리스 학자들의 업적이 왜 이슬람에서 받아들여지고 녹아들었을까요? 당시 서구는 적어도 종교개혁이 일어나기 전까지는 인간의 이성과 합리성을 신의 오묘한 섭리에 도전하는 오만불손하고 위험한 요소로 봤습니다.

- 이슬람 문명의 지식 엔진 바이툴 히크마와 이슬람 르네상스


이미 천년 동안 축적된 문화적 자양분과 지식의 하부 구조가 이슬람 사회에 존재해 왔고, 그것이 톨레도라는 매개를 거쳐 유럽에 유입된 겁니다. 그래서 톨레도가 인류 지성사에서 굉장히 중요한 의미를 갖습니다. 여러분 스페인에 가시면 톨레도에 일부러라도 가 보십시오. 마드리드에서 서남쪽으로 약 한 시간 거리밖에 안 됩니다.


티무르에서 일어난 르네상스가 원나라와 명나라를 거쳐 조선에 닿아 세종의 르네상스로 이어집니다.

- 바그다드발 르네상스가 유럽에 전파된 경로


어떤 정치 체제는 왕조(Dynasty)고, 어떤 정치 체제는 왕국(Kingdom)이고, 또 어떤 정치 체제는 제국(Empire)이라고 구분하는지 아시나요? 정복한 민족 수, 지배하고 있는 영토의 크기를 보고 분류하는 경우도 있지만, 더 정확하게는 문명을 받아들이는 크기에 따라 이 세 가지를 분류합니다.

- 왕조, 왕국, 제국


아리스토텔레스는 당시 오리엔트 남쪽에 있는 철학의 도시 밀레투스로 유학을 갑니다. 축적된 오리엔트 철학을 배우기 위해서였습니다. 그 오리엔트 철학을 바탕으로 아리스토텔레스가 아테네에 돌아가 독자적인 철학을 세웁니다.

- 아랍에서 꽃핀 학문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그리스 문화는 다분히 사변적입니다. 과학도 그랬습니다. 이론에 치우친 그리스 과학에 비해 이슬람 과학은 훨씬 실용적이었습니다. 끊임없는 실험과 관찰을 통해 정교하게 다듬어 갔습니다.


페르시아와 그리스 로마, 인도, 중국 이야기가 다 들어와 있습니다. 조금 전에 배웠던 문화의 방정식이 그대로 문학적 용광로에 적용된 것이 《아라비안나이트》입니다. 이야기의 중심 배경은 바그다드입니다만, 이야기 소스는 그리스 페르시아 중국 인도에서 가져온 거죠. 감정 이입 기법과 형식적인 면에서는 그리스 고전문학의 전형을 받아들입니다. 한  마디로 말하면 복합 문학 장르입니다.

- 받아들이되 자기 것으로 만들다


아랍은 본래 밤 문화입니다. 하루의 시작이 일몰이고 하루의 끝이 일출입니다. 우리와는 우주관이 다릅니다. 낮에 태양은 생명을 위협할 정도로 뜨겁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낮에는 조용히 쉬면서 낮잠을 잡니다. 낮잠 자는 문화가 뭐죠? 시에스타(siesta)입니다. 이슬람이 스페인을 800년간, 남프랑스와 이탈리아 남부를 200년간 지배하는 동안 당시 우월한 문화였던 낮잠 문화를 유럽권이 받아들인 겁니다.


...문제는 영국이었습니다. 영국은 유럽에서 가장 먼저 커피를 마신 나라이지만, 지금 영국은 커피보다는 차 문화가 발달해 있습니다. 물론 1662년 찰스 2세에게 시집 온 포르투갈의 캐서린 공주가 귀한 차를 가져오면서 궁정에서 차 문화가 발달한 탓도 있지만, 식민지 성격과도 무관하지 않습니다. 영국이 식민 지배한 나라가 인도, 스리랑카, 말레이시아입니다. 비가 많은 지역이고 생태조건도 안 맞아서 아무리 해도 커피 플랜테이션이 잘 안 됩니다. 결국 실패해서 ‘울며 겨자 먹기’로 중국의 녹차를 가져다가 인도남부와 스리랑카에서 차 플랜테이션을 했습니다.

  그런데 커피에 중독된 사람들 입장에서는 중국식 녹차가 심심할 수밖에 없겠죠? 약간의 카페인이 있지만 전혀 취향에 안 맞았습니다. 어쩔 수 없이 개발한 방법이 차를 진하게 우려내서 카페인을 많이 확보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너무 쓰니까 거기에 설탕과 우유를 많이 넣어서 밀크티를 만들어 먹게 된 거죠. 커피 플랜테이션에 실패한 처절한 슬픔을 밀크티로 달랬다고나 할까요.

  예멘의 모카 아라비카 원두를 가져다가 각 나라에 이식을 했는데, 그게 원래 맛이 날까요? 배추도 한 2년 심으면 맛이 바뀝니다. 제가 유학할 때 이스탄불에 한국 교민이 안 계셔서 종묘상에서 배추 씨앗을 사서 보내 달라고 집에다 부탁한 적이 있었습니다. 첫해, 두 번째 해는 그걸로 잘 먹었습니다. 그런데 3년째가 되니까 키가 엄청나게 자라기 시작했습니다. 속도 단단해져서 도저히 씹을 수가 없습니다. 3년쯤 되니까 현지 토양과 환경에 맞게 종이 바뀌는 거죠. 커피도 마찬가지였겠죠? 끊임없이 품종 개량을 해도 원래 아라비카 원두 맛이 안 나니까 로스팅 기술 쪽으로 방향을 선회합니다. 이름도 우아하게 붙이잖아요. 화이트 킬리만자로, 다크 나이트, 메디터레이니안 블루, 사프란볼루 튀르크 카웨등등.

- 이슬람과 커피 문화


이런 지적 바탕 위에서 토마스 아퀴나스라고 하는 탁월한 신학자가 등장합니다. 그는 스승인 알베르투스 마그누스나 아베로스의 아리스토텔레스 이론을 완전히 섭렵했습니다. 이때 쌓은 지식으로 기독교의 우월성을 증명하고 이슬람의 모순과 열등성을 강조하는 데 자기 인생을 바쳤던 사람입니다. 이후 유럽 신학은 토마스 아퀴나스를 태두로 해서 형성되었고, 이때부터 이슬람에 대해 가장 적대적인 관점이 유럽 신학의 정통으로 자리 잡게 됩니다.

  토마스 아퀴나스가 천명한 가장 대표적인 명제가 ‘한 손에 칼, 한 손에 꾸란’이었죠? 아퀴나스는 이슬람에 대해 해박한 지식을 갖추고 있었습니다. 본래 아는 사람이 하면 더 무섭잖아요. 당시 최고의 이슬람 전문가였습니다. 그는 이슬람의 네 가지 해악을 주창했습니다. 첫째는 진리를 왜곡했고, 둘째는 폭력과 전쟁의 종교이며, 셋째는 무분별한 성적 접촉을 허용했고, 넷째는 무함마드는 거짓 예언자라는 것입니다.

  지금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가 이슬람에 대해 가지고 있는 편견과 정확하게 일치하지요? 지성사를 공부하다 보니까 토마스 아퀴나스에서 딱 걸리더라고요. 이슬람에 대한 그의 견해는 이후 유럽 지성 사회에 그대로 전달되어서 서구 사회가 이슬람을 오해하고 적대감을 형성하는 데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습니다.

  모든 신학은 선악 구도입니다. 내 쪽으로 들어와서 녹든지 아니면 사라져야 한다는 게 신학의 기본적인 입장입니다. 물론 해방 신학이나 다종교 신학이 없지는 않습니다만, 아직까지도 우리 사회에서는 소수잖아요. 하물며 중세 시대에는 어떻겠습니까? 천 년간 이슬람에게 눌려 왔다는 인식이 깔려 있을 때 새로운 신학으로 자신감을 얻고 자기 신앙에 대한 열정을 불태우는 방법의 하나로 이슬람의 모순을 끄집어낸 건 어쩌면 자연스러운 시대적 상황이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일종의 선명성 경쟁이 필요했던 때라고 볼 수 있습니다.

  당시는 기독교가 약자였습니다. 약자는 상대방에게 관용을 베풀기가 쉽지 않습니다. 왜 이슬람이 포용과 융합과 똘레랑스를 실천할 수 있었을까요? 힘의 우위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약자가 강자를 어떻게 포용할 수 있겠습니까? 프랑스가 한때 똘레랑스로 소수 민족을 품었습니다만, 그들의 숫자가 10%를 넘어서니 가장 먼저 똘레랑스의 문을 닫아 버렸습니다.


...하지만 이런 노력이 무색하게 토마스 아퀴나스 이후 이슬람에 또 한 번 철퇴를 가한 사람이 바로 단테입니다. 단테의 ‘신곡’을 보시면 <천국>과 <지옥> 편에서 무함마드와 무슬림을 악마의 레벨로 다룹니다. 유럽에서 ‘신곡’을 읽지 않고 교양인이라 할 수 있나요? 교양 필수 중에 필수잖아요. 여기서 이슬람에 대한 인식의 철퇴를 가합니다. 그 이후에는 헤겔이 또 이슬람에 철퇴를 가합니다. 그리고 오늘날까지 오는 겁니다.

- 유럽의 이슬람 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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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리학 일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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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통제력을 발휘하기 위한 에너지가 고갈되어 자기통제력을 잘 바루히할 수 없는 상태를 ‘자아 고갈’ 상태라고 한다…

방전된 정신력에 필요한 이 연료의 정체는 과연 무엇일까? 많은 연구 끝에 이 에너지원이 포도당과 관련이 있음이 밝혀졌다. 연구에 의하면, 자기통제력을 발휘하고 난 후 설탕물을 마신 사람들은 자기통제력이 회복되는 모습을 보였으나 인공감미료로 단맛만 낸 물을 마신 사람들은 회복되지 않는 현상이 나타났다. 자기통제력을 발휘하고 난 후의 혈당 수치가 이후의 자기통제력과 관련성을 보이기도 했다.

-26쪽 “설탕이 의지력을 돕는다”


에너지 소모가 많은 상태에서는 관용을 잘 발휘하지 못하는 현상이 나타난다. 자기통제력이 필요한 과제를 하는 등 에너지를 많이 소모한 사람들은 그렇지 않은 사람들에 비해 자신의 입장(예컨대 정치적 입장)과 다른 의견을 듣는 것을 더 꺼려하는 현상이 관찰된 바 있다. 에너지가 소모된 상태에서는 내 의견과 다른 의견은 “별로 중요하지 않고 믿을 수 없다”고 응답하는 경향을 보인다. 역시 비슷하게 성별, 인종 특정 지역 출신에 따른 고정관념을 벗어나는 데에도 에너지가 필요하다는 사실이 밝혀지기도 했다…

이와 관련된 오류가 바로 ‘확증편향’이다. 우리는 어떤 말이 정말 옳기 때문에 지지하기도 하지만, 지지하기로 한 입장과 맘에 드는 결론을 먼저 정한 다음 거기에 맞는 증거들을 수집하기도 한다.

-42쪽 “생각을 조절하기”


감정을 억제한 참가자가 재해석을 한 참가자에 비해 대화를 하는 내내 혈압이 더 높았다. 감정을 억제한 사람이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다는 사실은 별로 새로울 게 없으나 좀 더 흥미로운 부분은 대화 ‘상대방’의 스트레스 수준이었다.

그래프에서 확인할 수 있듯 대화 도중 감정을 억제한 경우 당사자뿐 아니라 그 사람의  ‘파트너’ 또한 혈압이 상당히 올라가는 현상이 확인되었다… 대화 도중 한 사람만 감정을 억제해도 같이 있는 사람까지 스트레스를 받게 된다는 것이다.

반면 감정을 일으킨 경험에 대해 “이 일은 이렇게 생각해볼 수도 있지 않을까?”라며 재해석을 해본 참가자들(감정을 억제하지는 않았지만 적응적인 방법으로 조절한 사람들)의 경우 본인과 상대방 모두 마음의 평화를 비교적 잘 유지한 것으로 나타났다. 정리하면, 감정조절이 필요할 때에는 감정을 억누르기보다 적절히 표현하며 마음 속으로 재평가해보는 것이, 나와 상대방의 행복, 관계의 질에 도움이 될 것이다.

-47쪽 “감정을 다스리기”


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연구에서는, 학생들은 특히 스트레스가 맣은 시험기간에 자기통제력이 요구되는 다양한 일들에 실패하는 경향을 보인다는 것을 확인했다. 학생들은 평소보다 시험기간에 감정조절에 실패하고(갑자기 막 화를 낸다든가), 정크 푸드를 많이 먹고, 약속을 잘 안 지키며 과소비하는 경향을 보였다. 즉 신경 쓸 일과 스트레스가 많을 때 우리는 감정이나 생활 패턴을 잘 조절하지 못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도 마찬가지로 조절을 안 하고 싶어서라기보다 스트레스 때문에 중요한 에너지를 소모하게 되어 수행이 떨어졌다는 것이 포인트다...

스트레스를 해소하기 위해서는 친구들과 수다를 떨거나 재미있는 텔레비전 프로그램을 보면서 기분전환을 하는 것이 도움이 된다. 이렇게 만들어진 긍정적 정서는 스트레스를 해소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많은 연구들이 스트레스를 받았을 때 재미있는 영상을 봄으로써 긍정적 정서를 느끼게 되면 부정적 정서가 줄어들고 스트레스 또한 줄어든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긍정적 정서는 스트레스를 줄여줄 뿐 아니라 자아고갈 상태에서 우리를 회복시켜주는 등 떨어진 수행을 다시 회복시키는 효과도 있다. 따라서 학자들은 긍정적 정서가 마치 마법의 지우개처럼 스트레스나 에너지 고갈을 ‘취소’ 또는 ‘치료’하는 효과가 있다고도 이야기한다.

-56쪽 “스트레스 줄이기 연습”


자기통제는 불필요한 욕망을 꺾는 것, 즉 유혹에서 벗어나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다. 그런데 이 단계는 자기통제 과정을 통틀어 갖아 큰 난관이라고 할 수 있다. 왜냐히면 유혹을 이기는 것은 너무 힘든 일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애초에 쓸데업시는 유혹을 원천봉쇄하는 방법은 없을까? 그 방법으로 연구자들은 ‘ㅇㅇ하면 반드시 ㅇㅇ한다’는 식의 ‘무조건적 명령문 만들기 (if-then plan)’를 추천한다. 예컨대 ‘운동을 열심히 한다’같은 추상적인 목표 대신, ‘아침에 눈을 뜨면 팔굽혀펴기를 10번 한다’, ‘계단과 엘리베이터가 있다면 반드시 계단을 택한다’, ‘수학문제를 하나 틑릴 때마다 무조건 앞구르기 10회를 한다’와 같은 구체적인 조건과 행동을 만들어두라는 것이다…

연구에 의하면 if-then 전략을 쓰는 사람들은 그렇지 않은 사람들에 비해 비교적 적은 에너지를 들여서 자기통제를 하고 그 결과 자아고갈 현상도 덜 겪는다. 비교적 ‘지속 가능한’ 자기통제를 하게 되는 것이다.

-74~75쪽 “무조건적 명령문 만들기”


현실을 직시하기 전 순진무구한 우리들은 세상을 장밋빛으로 보는 경향이 있다. 연구에 의하면, 사람들은 내가 하는 일들이 처참하게 망하기보다는 어떻게든 잘 풀리게 될 거라고 생각하고 과거는 실패로 가득했을지 몰라도 미래에는 성공이 기다리고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런 막연한 긍정적인 예측은 사실 자신의 ‘바람’에 기초한 환상에 가깝다. 따라서 현실을 직시할수록 막연한 긍정적 사고는 점차 줄어들 수밖에 없다. 일례로 우울증 환자들이 일반인들에 비해 현실을 더 정확하게 예측하는 등 현실 직시는 우울증과 관련을 보이는데, 이를 ‘우울증적 현실주의(depressive realism)’라고 한다.

-114~115쪽 “현실 직시를 돕는 부정적 사고”


일반적으로 긍정적인 편인 사람들은 응원을 받았을 때 더 좋은 성과를 보였다. 하지만 비관적인 사람들은 응원을 받으면 오히려 성과가 떨어졌다. 이들에게는 응원을 받고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것이 오히려 독이 되었다. 이외에도 많은 연구들이 기본적으로 부정적인 사람들은 긍정적으로 생각할 때보다 “망하면 어쩌지”라며 걱정할 때 더 성과가 좋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왜 이런 현상이 나타나는 것일까? 연구자들은 긍정적인 사람들이 희망을 행동의 양분으로 삼는 반면, 비관적인 사람들은 자신들의 높은 불안을 행동의 양분으로 삼기 때문이라고 이야기한다. 긍정적인 사람들은 희망을 가짐으로써 의욕을 얻고 실패에 대한 불안이 줄어들어 성과가 올라가지만, 비관적인 사람들에게 이런 과정은 잘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118~119쪽 “비관주의자도 적응적일 수 있다”


...연구자들은 이러한 현상을 ‘맹목적인 축적(mindless accumulation)’이라고 부른다. 사람들이 자신이 원하는 바를 분명히 인식한 채 노력을 기울인다면 목표 달성 시점에 노력을 멈춰야 한다. 원하는 바를 다 얻고 난 후에는 굳이 노력을 기울일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노력을 하면서도 자신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왜 그 노력을 하는지 잘 모르거나 인식하지 못한다. 따라서 어느 시점까지 애써야 하는지도 잘 모른다. 결국 더 이상 노력을 쏟을 수 없을 때까지, 몸이 지치고 쓰러질 때까지 노력하게 된다.

노력을 멈추는 기준이 목표 달성이 아니라 신체적/정신적 피로가 된다는 것이다. 목적이 이끄는 삶이 아니라 피로가 이끄는 삶이 된다고나 할까? 안타깝게도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이런 삶을 살아가고 있다.

-126~127쪽 “무조건적인 노력에 대한 경고”


미주리대학의 심리학자 로라 킹과 동료들은 사람들이 어떨 때 가장 삶이 의미있다고 느끼는지를 조사했다. 여러 연구를 통해 일상 생활 속에서 다양한 활동들과 삶의 의미감 사이의 관계를 조사한 결과, 사람들이 실생활에서 의미감을 느끼는 겨이우는 고생 끝에 무엇을 성취했을 때보다 행복할 때였다. 객관적 성취보다도 행복감 같은 정서가 사람들이 느끼는 삶의 의미감을 더 잘 설명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사람들은 무엇보다 행복할 때 자신의 삶이 의미있다고 느끼며, 고생 끝에 대단한 것을 성취하더라도 그 과정에서 즐거움과 보람, 기쁨 같은 낙이 없다면 그 일을 통해 충만함을 느끼기는 어렵다는 것이다.

이런 현상이 나타나는 이유를 학자들은 긍정적 정서의 기능에서 찾는다. 학자들은 기분이 좋고 평온하다는 것은 다 잘되고 있다는 신호라고 이야기한다. 반면 뭔가 불안하다거나 짜증이 나는 것은 문제가 있다는 신호라고 본다.

-160쪽 “자아실현은 고통 끝에 오는 것일까?”


사람들의 자존감이 높아지거나 낮아지는 데에는 몯느 일이 동일한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따라서 스스로의 자존감이 삶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 이해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자존감이 걸려 있는 영역이 무엇인지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 자존감이 수반되는 영역이 어디인가에 따라 어느 부분에서 좌절을 느끼고 어느 부분에서 희열을 느끼는지가 달라지고, 삶의 크고 작은 목표들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연구에 의하면, 사람들이 자신의 자존감을 거는 분야는 외모, 사람들의 인정, 경쟁에서 이기는 것, 학문적 능력, 가족의 사랑과 지지, 도덕성, 신의 사랑 등 크게 일곱 가지라고 한다.

-180쪽 “내 자존감이 걸려있는 영역은?”


실제로 여니구에 의하면 자존감이 높든 낮든 실제 능력이나 자신의 능력에 대한 자신감에는 큰 차이가 나지 않는다. 다만 “다른 사람들도 내가 잘한다고 생각해줄까?”의 문제에서 큰 차이를 보인다. 자존감이 건강한 사람들은 “나도 내가 괜찮다는 걸 알고 다른 사람들도 나를 그렇게 생각한다”고 믿는 반면, 자존감이 건강하지 않은 사람들은 “나도 내가 장점이 있다는 건 알지만, 다른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것 같아”라고 믿는 것이다. 실제로 엄친아 수준으로 많은 것을 성취한 사람들도 자신이 성취한 것을 주변 사람들이 별로 인정해 줄 것같지 않다고 생각할 경우 자존감이 상당히 낮은 편이라는 연구가 있다.

이렇게 자존감이 건강하지 않은(지나치게 낮거나 불안정한) 사람들의 큰 특징 중 하나는 사람들이 자신을 받아들여줄 거라는 확신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때문에 이들은 특히 관계에서 불안을 많이 느낀다.

-198쪽 "소속감이 자존감을 돕는다"


이렇게 사랑과 인정을 부여해주는 가족, 친구, 연인 등의 안정적인 관계는 자존감의 매우 중요한 요소다. 만약 자신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부분에서 충분히 잘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자신에게 좀처럼 만족할 수 없고 자존감이 불안한 편이라면 나에게 부족한 것은 다름아닌 좋은 관계가 아닐지 생각해보자.

-200쪽 "건강한 자존감을 위한 운동법"


가난한 개인들이 부유한 개인들에 비해 행복도가 낮은 건 맞지만 일단 소득이 일정 수준 이상이 되면 개인 간 행복도에는 큰 차이가 나지 않는다.

대니얼 카너먼과 동료들이 2010년 미국에서 4만 명을 대상으로 한 대규모 조사 결과, 연소득 4~5만 달러를 기점으로 돈이 실제로 느끼는 '행복감(정서)'에 미치는 영향은 서서히 줄다가 7만 달러 즈음에서 멈추는 현상이 나타났다.

...긍정적 정서의 경우 소득 최하위 그룹과 최상위 그룹에서 행복감을 자주 느낀다고 한 사람들이 각각 약 70퍼센트, 90퍼센트로 생각보다 큰 차이가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부정적 정서를 별로 느끼지 않는다는 케이스도 각각 55퍼센트, 80퍼센트, 행복에 대한 인지적 평가도 20점 만점에 각각 5점, 7.5점으로 소득 최하위층과 최상위층의 행복도 차이가 어마어마하게 크지는 않았다.

-226~227쪽 "그래도 돈은 중요하다"


대니얼 길버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사람들은 돈을 많이 벌어서 여유를 즐기고 편하게 살면 행복해질 거라고 생각하지만 우리의 마음은 뭔가에 빠져 있을 때 행복하다. 친구와 수다를 떨어간, 뭔가를 만들거나, 성관계를 할 때가 대표적이다." 즉 우리의 삶은 큰 성취 후 더 이상 할 게 없을 때보다 뭔가에 빠져있을 때 더 행복하다는 것이다. 결국 성취의결과가 어떠한가, 어떤 타이틀을 다느냐는 것보다 매 순간을 누구와, 무엇을, 어떻게 하며 사는가, 즉 '어떻게 사느냐'가 훨씬 중요하다는 것이다.

-241쪽 "어떻게 살면 좋을까?"


그 결과 재미있게도 여가 시간을 갖거나 별일 없이 시간을 써버린 사람들, 무얼 하든 자신을 위해 시간을 쓴 사람들보다 남을 위해 시간을 쓴 사람들이 가장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이 넉넉하다고 지각하며 마음의 여유를 갖는 모습을 보였다. 따라서 연구자들은 많은 사람들이 시달리고 있는 만성적인 '시간 기근(time famine)'에 대한 한 해법은 남을 위해 시간을 보내는 것이라고 이야기했다.

이런 현상이 나타나는 이유로 연구자들은 타인을 위해 시간을 쓰고 있는 자신을 바라볼 때 더 "내 시간이 여유로운가 보다"라고 느기게 되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연구에 의하면, 돈의 경우도 자신보다 타인을 위해 쓸 때 스스로가 더 '풍족하다는 느낌'을 받는 현상이 나타나는데 시간도 누군가에게 나눠줄 때 자신의 시간이 더 풍족하고 여유로운 것첯럼 느끼게 된다는 것이다.

흔히들 시간에 쫓길수록 특히 다른 사람들을 위해 쓰는 시간을 줄이려는 듯 보인다. 하지만 그럴수록 다른 사람에게 시간을 내주는 것이 마음의 여유를 줄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해 보자."

- 263쪽 "마음의 여유를 가져라"


집단주의 문화의 장점 중 하나는 개인의 리스크가 분산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연구들에 의하면, 개인주의 문화보다 집단주의 문화에서 더 의무적으로 가족이나 친구에게 사업자금을 빌려준다거나, 빚을 대신 갚아주는 일들이 흔하게 일어난다고 한다. 개인이 (특히 금전적으로)실퍃나 경우 그 책임을 개인이 고스란히 다 떠안기보다 책임이 특히 가족구성원들 같은 주변 사람들에게도 분산되는 경향이 비교적 크게 나타난다. 또한 개인들의 행동을 집단과 사회 전체에 유익한 방향으로 통제할 수 있기 때문에 나라 경제발전 같은 사회적 목표를 달성하는 데에는 집단주의 문화가 큰 도움이 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다른 건 몰라도 개인의 자유를 제한한다는 면에서 '행복'은 집단주의 문화보다 개인주의 문화가 훨씬 이득인 경향이 나타나게 된다.

- 274쪽 "한국이 불행한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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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람학교 4 여성과 이슬람 문화




ㅁ 아랍과 이슬람은 다르다

그런데 교역을 통한 것이든 약탈과 전쟁에 의한 것이든 이 두 가지 생존방법 모두 철저하게 남성의 몫이었습니다. 문화인류학에서 보면 여권이 우세하거나 모계중심 사회는 대부분 농경정주사회였습니다. 남자의 노동력이 없이 여성의 노동력만으로도 살 수 있어야 여권신장이 가능한 거죠.


...인원만 남겨 놓고 나머지는 없애면 없앨수록 공동체의 생존이 유리해진다고 판단한 겁니다. 그래서 여아살해(femicide)라는 나쁜 풍습이 생겼습니다. 특히 쌍둥이를 낳으면 반드시 하나는 죽입니다.


...승리한 부족은 새로운 오아시스의 주인이 돼서 들어옵니다. 이때 승리한 부족은 패배한 부족의 아녀자들을 절대적으로 보호해줄 도덕적 책무가 있습니다. 이게 사막의 불문율입니다. 노예로 만들지 않고 정식 사회 구성원이 됩니다. 어차피 인구가 없기 때문에 다 거둬서 자식처럼 키워야 합니다. 남자가 없으면 도저히 살아갈 수 없는 상황에서 일부다처는 공동체를 유지하는 유일한 결혼방식이었습니다. 왜냐면 노예로 부려서는 안 되니까 그렇습니다.


...일부다처의 원칙은 이렇습니다. 능력이 있으면 있을수록 많은 가족을 보살펴야 합니다. 이게 아랍사회의 노블리스 오블리제입니다. 물론 좋게 말했을 때입니다. 악용되는 사례도 있습니다. 구약성경에도 보면 다윗이나 솔로몬 모두 처와 첩 수백명을 거느렸습니다. 재산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지도자이기 때문에 더 많이 베풀어야 하는 겁니다.


ㅁ일부 다처와 여성 할례


한 남자가 여러 명의 아내를 두면 먹고사는 것 못지않게 생식 본능도 중요하겠죠? 한 남자가 수십 명을 해결해 주지 못합니다. 그래서 어떡하나요? 사회 윤리와 도덕을 지키기 위해 그것을 억제하려는 사회적 기제가 작동합니다. 그게 여성 할례(FGM, Female Genital Mutilation)로 나타납니다. 남성 할례는 여러 여자를 거느릴 때 성적인 기능을 높이고 위생 면에서도 도움이 됩니다. 여성은 음핵을 제거함으로써 성감을 누그러뜨리는 효과를 노립니다. 이렇게 일부다처와 여성 할례는 같이 갑니다.

그런데 여성 할례는 꾸란과 하디스 그 어디를 뒤져 봐도 단 한마디도 나오지 않습니다. 그래서 꾸란과 하디스를 신봉하는 이슬람 원리주의자들은 여성 할례를 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아랍 국가에서는 할례가 없습니다.

여성 할례는 아프리카에서 번성합니다. 아프리카 사람들은 원래 다처주의였습니다. 이슬람을 받아들이기 전부터 다처주의였습니다. 아랍의 다처와 아프리카의 다처는 본질이 다릅니다. 아랍에서는 생태적인 생존을 위해 다처가 만들어졌지만, 아프리카에서는 노동력의 분산을 위해 만들어집니다. 남성은 철저하게 사냥과 전쟁의 기능을 갖고, 여성은 가사와 노동과 농사의 기능으로 정확하게 분화되어 있습니다. 직업의 분화가 절대적입니다.

아프리카 부족들의 성인식을 보면 몸을 최대한 단련시켜서 전사가 되어 전쟁을 수행하고 사냥을 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물론 남성의 몫입니다. 한번 사냥하고 오면 남성들은 다음 사냥에 나갈 때까지 꼼짝도 하지 않습니다. 모든 힘든 일을 여성들이 합니다. 밭 갈고 소 키우고 아이들 키우는 게 여성의 몫입니다.

여성의 노동량이 너무 큽니다. 과도합니다. 그런데 요즘은 전쟁이 없어졌잖아요. 남자가 전사와 사냥꾼으로서의 역할을 못하면 가사노동이나 농사일을 보충해 줘야 하는데 안 합니다. 수천 년간 내려온 전통이라서 그럽니다. 이런 사회에서 여성의 목표는 부지런히 일해 돈을 모아 남편에게 주고, 그 돈으로 신부를 구해 오게 하는 것입니다. 심지어 짝을 정해 주기도 합니다. 어느 마을 누구, 예쁘고 아이도 잘 낳을 아무개를 신부 삼아 데리고 오라고 합니다. 그럼 일이 반으로 줄겠죠? 또 새 부인에게는 일을 더 많이 주겠죠? 두 번째 부인도 가만히 있겠습니까? 열심히 일해서 돈을 모으면 세 번째 부인을 데려오게 합니다.

아프리카에서는 남자와 여자의 하는 일을 ‘영적인 직업’이라고 부르며 절대 침해해서는 안 됩니다. 이러한 아프리카의 토착적인 관념이 다처 사회를 만들어 가는 겁니다. 여성 할례를 철저히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여러 아내들을 통제하려는 수단입니다.

그런데 아프리카에서 기독교는 실패했는데 이슬람은 왜 최대 종교가 됐을까요? 기독교는 일부일처의 윤리를 철저하게 강조했고, 이슬람은 일부다처를 허용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아프리카 사람들에게 딱 맞았습니다. 본질적으로 보면 이슬람의 다처와 아프리카의 다처가 다릅니다만, 아프리카 사람들은 겉으로 보이는 형식이 유사하니까 이슬람을 더 선호했습니다.

율법으로는 다처의 조건이 무척 까다롭습니다. 네 사람까지로 제한되고, 모두를 공평하게 대해야 합니다. 아프리카 무슬림들도 그 형식은 따릅니다. 그런데 수천 년간 이어진 여성 할례는 살아남은 겁니다. 여성 할례는 그래서 이슬람이 아니라 아프리카적인 전통에 따른 겁니다. 이집트, 수단, 나이지리아 등 이슬람화된 아프리카 국가들에 아직 남아 있습니다. 이슬람을 믿으면서 여성 할례를 하니까 이슬람과 무슨 관련이 있는 것처럼 잘못 알려진 겁니다. 사우디 같은 GCC 국가들에서는 여성 할례를 하지 않고, 동남아에서는 아예 금지되어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다처 문화가 남성이 자기의 권력과 사회적 지위, 경제적 부를 과시하는 수단으로 금방 변질되어 버렸습니다. 성적으로 학대하고, 강제로 처녀성을 빼앗고, 상품가치가 떨어졌다고 판단되면 자기 아내를 노예시장에 팔아먹는 등 인간으로서는 용납할 수 없는 온갖 죄악이 횡행했습니다.


...만약 너희가 그들을 공정하게 대할 수 없다는 두려움이 있거든 오직 한 여자와 결혼하라. - 꾸란 4장 3절


...이슬람의 원칙은 일부일처입니다. 많은 이슬람 율법학자들이 만장일치로 유권해석을 내려놓았습니다. 이슬람의 기본원칙은 일부일처입니다. 그러나 특수한 상황에서 공동체 유지를 위해 네 사람까지 마지노선으로 허용해 놓은 겁니다. 무조건 네 명을 가지라는 뜻은 아니라는 거죠. 


ㅁ아내를 보호하기 위한 결혼 지참금, 마흐르


결혼에서 여자를 보호하는 제도도 만들었습니다. 유목 사회에서 남자 없이는 죽음과 동의어라고 말씀드렸죠. 그런데 남편이 죽어 버리면 큰일 나잖아요. 그래서 결혼할 때 ‘마흐르’라는 결혼지참금을 주게 돼 있습니다. 남편이 처가에다 줍니다. 신부에게 주면 안 됩니다. 반드시 처가에 줘야 합니다.

그 마흐르가 상당히 고가입니다. 우리 사회에 대입하면 억대입니다. 금액의 크기는 신부의 사회적 신분이나 교육, 미모 등에 따라 결정됩니다. 최종 금액은 양가가 합의하게 되어 있습니다. 기본적인 원칙은 비상시에 남편이 없어지더라도 여성 혼자서 최저 생계비를 가지고 노후를 견딜 수 있는 액수 이상이어야 합니다. 옛날 아랍에서는 낙타 열 마리 혹은 스무 마리, 이런 식으로 정했습니다.

지금도 이슬람 국가에서는 마흐르를 지급하지 않으면 결혼이 성립되지 않습니다. 이슬람 율법으로 정했습니다. 법원에 결혼 신고를 할 때 마흐르 액수를 기재하도록 합니다. 그게 있어야 판사가 결혼 증명에 사인을 하고 정식 부부가 됩니다.


ㅁ명예 살인을 하게 만드는 사회적 압박


그런데 우리가 잘 모르는 부분이 있습니다. 우리 언론에서는 주로 아버지와 오빠에 의해 명예살인 당하는 딸이 해외 토픽으로 알려지죠. 여자의 처녀성을 잃게 만든 남자는 어떻게 될까요? 그 남자도 반드시 죽입니다. 남자를 죽이는 게 뉴스거리가 안 돼서 잘 다뤄지지 않습니다만, 반드시 죽입니다. 처녀의 집안에서 그 남자를 죽입니다.


...물론 한 세대 정도 지나면 많이 약화되겠죠? 그러나 오랫동안 전해 내려온 뿌리깊은 관습들은 어떤 현대적인 법제도로도 쉽게 개선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명예살인도 이슬람과는 전혀 상관 없는 아랍의 부족 문화가 만들어낸 사회적 악순환입니다. 이슬람 율법에는 명예살인이 초창기부터 금지돼 있었습니다.


ㅁ여성의 머리를 가린다는 것


그러나 9·11테러와 이라크 전쟁 이후에 서구에서 공부한 사람일수록 히잡을 다시 쓰는 사람들 숫자가 빠르게 늘었습니다. 무조건 서구를 따라가지 않겠다, 서구와 차별화된 나만의 정체성을 찾겠다는 표현으로 그런 결과가 나타난 겁니다. 전체적으로도 히잡을 쓰는 여성의 숫자가 늘어나고 있습니다. 우려스러운 일인지 아닌지는 좀 더 두고 봐야겠지만 그만큼 이슬람 여성들의 민도와 자존심이 커졌다는 것입니다.

70년대와 80년대 기준으로 보면 히잡이 여성을 억압하는 상징적인 기제가 맞습니다. 자기 맘대로 벗지도 못하게 하고, 사회참여도 제한했으니까요. 그러나 21세기 오늘날 시점에서 히잡을 여전히 여성을 억압하는 기제라고 주장한다면 그것은 사우디와 이란에서만 적용될 수 있는 말입니다. 나머지 55개국에 그 주장을 적용하는 것은 맞지 않습니다.


ㅁ이슬람 여성의 미래


물론 종교적 율법을 악용하는 것도 하나의 문화적 현상이기는 합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본질적인 문제는 그 사회가 갖고 있는 개방성이나 성숙도, 그리고 문화, 경제, 복지 등의 수준입니다. 그것이 어느 수준에 도달한다면 사회도 바뀔 수밖에 없습니다. 제가 항상 강조합니다만, 사람이 가지고 있는 그릇은 어느 문명이나 비슷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고정관념 중에 하나가 이슬람 율법이 그 사회를 통제할 거라는 생각입니다.


ㅁ이슬람 사회의 통과의례


자유연애는 가족과 부족 간 명예살인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굉장히 위험한 행동입니다. 그래서 철저한 중매로 결혼이 이뤄집니다.


...사촌 결혼의 가장 큰 이점은 재산이 분할되지 않는 거겠죠? 거액의 마흐르를 줘도 집안 재산이죠. 재산이 외부로 유출되지 않는 겁니다. 굉장히 든든한 경제적 사회적 기반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지금까지 사촌 결혼이 근절되지 않고 남아 있습니다. 이 또한 이슬람 전통이라기 보다는, 부족이 전략적으로 선택한 결과라고 봐야겠죠.


ㅁ이슬람 세계의 이혼


네 번째 아내를 얻으려면 첫째, 둘째, 셋째 아내가 동시에 동의해줘야 합니다. 그중에 한 사람이라도 비토하면 그 결혼은 법적으로 성립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일부사처는 사실상 굉장히 어렵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탈라크(일방 이혼, 남자가 여자에게 “나는 당신과 살기 싫다”고 통보만 하면 이혼이 성립되는 제도)를 보면 여성에게 반드시 불리한 것은 아닙니다. 물론 객관적으로 불리합니다만, 여성으로서 그것을 상쇄해나갈 만한 시간과 사회적 전략이 존재하고 있습니다.


...막강한 친형제들이 포진하고 있어도 이복동생이 왕이 됩니다. 왕가에서도 적자와 서자 구분이 없는데 일반인들에게는 서열에 무슨 문제가 있겠습니까?


ㅁ 이슬람의 장례식


물론 죽은 사람에게서 빚을 받아야 할 사람이 있을 수 있겠죠? 그러나 죽음으로써 모든 채무 채권관계가 종식됐다고 봅니다. 그 빚이 자녀에게 대물림되지 않게 하는 사회적인 장치가 바로 장례입니다.


ㅁ 이슬람의 여성관


꾸란에서는 남녀의 창조가 평등하다고 말씀드렸죠? 흙으로 아담을 빚어 거기에 영혼을 불어넣어 남자가 되게 했는데 똑같은 방법으로 이브를 빚어서 여자가 탄생됩니다. 창조의 양성평등입니다. 아담이 잠들었을 때 갈비뼈를 빼내서 이브를 만들었다는 성경이야기에 비하면 창조관도 상당히 평등하죠?


ㅁ이슬람 여성의 일상


대구에 있는 한 섬유업체 사장님이 히잡 쓰고 수영하는 사진을 보고 아이디어를 냈습니다. 방수처리한 히잡을 팔 수 있다면 큰돈을 벌 수 있겠다 싶었던 거죠. 지금 아랍의 방수 히잡 시장 점유율 1위가 그 회사입니다. 히잡 쓰고 수영하는 모습을 답답하게 보면 8억 명의 시장이 안 보이지만 고정관념을 깨고 편견 없이 바라보면 새로운 시장이 열리기도 하는 겁니다.


...계약서에 혼인 기간과 그에 대한 보상액을 약속하면 계약혼 관계가 성립됩니다. 그런데 계약기간이 하루여도 가능합니다. 그냥 관계를 가지면 매춘이지만 당국에 신고하고 둘이서 합의하면 하루짜리라도 인정해줍니다. 간통이나 매춘은 걸리면 죽음이니 너무 극단적이잖아요. 이렇게 흘러가면 그 사회가 지속 가능성이 있을까요? 그래서 이런 제도를 통해 우회로를 만들어주는 겁니다.


...정식 결혼에선 반드시 두 명의 증인과 판관이 배석해야 하지만 무트아에서는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계약기간이 만료되면 여자는 45일간 유예 기간을 가지면서 임신 여부를 확인합니다. 만일 임신이 되지 않았다면 다른 남자와 새롭게 계약을 맺을 수 있습니다.


...이슬람 여성이라면 항상 떠올리는 억압과 폭력, 그리고 전근대성의 이미지는 종교적인 문제보다는 경제수준과 문맹률 같은 교육의 정도, 그리고 여성의 인식 변화와 사회 구조적인 문제에 더 많은 영향을 받습니다. 속도는 더딜지라도 이슬람 사회 역시, 가부장 사회에서 양성평등의 사회로 서서히 바뀌고 있습니다.






Posted by Daesung Ju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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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람학교 3 이슬람은 무엇을 믿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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ㅁ꾸란이 말하는 알라와 예수

이런 질문을 하시는 분들이 계세요. “이슬람으로 개종하지 않으면 죽인다는데, 어떻게 살아남았지?” 무려 2000년 동안 살아남았잖아요. 이슬람에서는 자기 신앙을 완벽하게 보호해 줍니다. 법으로 그렇습니다. 그러나 자기 신앙을 강제로 다른 사람에게 퍼트리는 행위, 즉 선교 행위는 실정법으로 금지돼 있습니다.

ㅁ기독교의 예수와 이슬람의 예수

오늘날 기독교가 존재하는 것은 세 가지 개념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의 죄를 대신 사하기 위해 독생자 예수를 보내 십자가 처형을 받게 합니다. 대속의 개념입니다. 그리고 3일 만에 부활하심으로써 기독교는 비로소 존재하게 됩니다. 굉장히 중요한 개념입니다. 원죄와 대속과 부활이라는 이 세 가지 개념에서 단 하나라도 부정되면 기독교는 존재할 수 없습니다. 이 과정을 통해 예수님은 신성화되었고, 아버지 하나님과 다르면서도 같은 존재가 됐습니다.

...신성은 인정하지 않고 인성만 받아들입니다. 하지만 그냥 평범한 인간으로 보지는 않습니다. 인성을 받아들이되, 인간이 가질 수 있는 최상의 위치에 놓고 받아들였습니다. 하나님의 복음을 인간 세상에 충실히 전파하고 오류를 범하지 않은 최상의 인격체로 믿습니다. 완벽한 인간으로 받아들이고, 존경하는 것이죠. 이것이 기독교와 이슬람의 근본적인 차이입니다. 그래서 이슬람에서는 예수를 예언자와 선지자로 봅니다.

...유대교에서는 예수를 예언자가 아닌 혹세무민하는 위선자로 봤고, 기독교에서는 신과 동일시하면서 예수 자체가 신앙의 대상이 됩니다. 이슬람에서는 신의 위대한 예언자 중 한 명으로 봤습니다. 따라서 무함마드도 한 줌의 신성도 가지지 않은 최상의 인격체에 불과합니다. 예수와 무함마드의 차이는 시대적인 차이입니다. 무함마드는 예수 이후에 신이 보낸 마지막 예언자라고 말합니다.

...구약의 기본에 신약에서 예수의 인성 부분이 상당히 들어가 있고, 또 610년부터 22년간 무함마드가 직접 계시를 받은 내용이 합쳐진 것이 꾸란이라고 이해하시면 되겠습니다.

ㅁ꾸란에 등장한 예수

그런데 예수께서 십자가 처형을 받았다는 것은 모든 책에 나오거든요. 성경 이외에 구전이나 유대 전승에서도 십자가 이야기는 많이 나와요. 역사적으로 십자가 처형이 있었다는 것은 모든 학자들이 인정합니다. 이슬람도 역사적으로 그런 사건이 있었다는 것은 인정합니다만, 그 십자가에 매달렸던 사람은 예수가 아니라 비슷한 사람이었다고 말합니다.

ㅁ이슬람과 기독교의 구원관

성직자 계급이 있고 출석을 매기면 그들에게라도 잘 보이기 위한 활동들이 있을 텐데, 내가 예배 보고 안 보고, 좋은 일 하고 안 하고는 하나님이 다 아시고 최후의 심판에서 판단하신다는 믿음이 있습니다. 때문에 여기에서 극도의 자율성이 나옵니다. 성직자도 없고 교황청도 없잖아요. 오로지 신과 자기 둘의 계약입니다.

...이렇게 보면 이슬람은 철저하게 예방 성격의 종교입니다. 다른 서구 사회에 비해 이슬람 사회에서 범죄가 현저히 낮은 이유이기도 합니다.

ㅁ메카 계시와 메디나 계시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신뢰의 크기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무함마드가 큽니다. 그러나 예수에 대해서도 상당히 높은 자리에 두고 있다는 걸 알고 계셔야 합니다. 이 점이 기독교에서 이슬람을 바라보는 관점과 이슬람에서 기독교를 바라보는 관점이 다른 핵심 요소입니다.

ㅁ순니와 시아

그때 알리를 추종했던 사람들이 지금의 바그다드로 이주해 갑니다. 이게 시아파가 됩니다. 시아파를 직역하면 ‘떨어져 나간 무리’라는 뜻입니다. 메카에 남아 있던 사람들은 우리는 잔존파다, 우리가 주류다, 정통이다 이렇게 말하죠. 이들이 수니파가 됩니다. 따라서 수니와 시아는 교리 논쟁에 따라 나뉜 종파라기보다는 정치적 이해관계를 달리하는 정파에 가깝습니다. 지금은 종교적으로도 많이 달라졌기 때문에 현재는 종파라 해도 무난하지만, 배경은 정파였습니다.

...미국식 민주주의는 51%가 49%를 무시해도 크게 문제되지 않잖아요. 사담 후세인의 수니파를 완전히 박살 내 제로 상태로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60%가 100을 다 차지하게 만들었습니다. 그 결과가 오늘날 IS로 나타난 겁니다. 쫓겨났던 사담 후세인의 군경 세력들이 모두 IS에 붙었습니다. 나머지 시아파 이라크는 기존 군경 하나 없이 모두 새롭게 모았기 때문에 민병대 수준입니다. 여전히 오합지졸인 겁니다.


Posted by Daesung Ju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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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람학교 2 선지자 무함마드 이야기




ㅁ몇가지 질문들

이슬람이 원래는 안 그랬는데 서구가 호전적인 모습으로 왜곡한다는 주장은 설득력이 약한 것 같습니다. 실제로 폐쇄적이고 호전적이 되어 버렸습니다. 이슬람이 원래 그런 종교가 아니라고 강변해도 설득력이 약합니다. 그보다는 원래 포용과 융합의 종교이던 이슬람이 왜 폐쇄적이고 호전적으로 바뀌었고, 그 내용은 무엇이고 어떤 역사적 배경에서 그렇게 됐을까를 설명하는 것이 좀 더 합리적이라고 하겠습니다.

ㅁ탈라스 전투와 중국 문명과의 만남

중국의 종이가 보편화되고 여기에 구텐베르크가 인쇄술을 접목시켜서 성경을 누구나 쉽게 접할 수 있게 되자 신앙혁명이 일어나잖아요. 이를 기반으로 종교개혁이 일어납니다. 신앙, 종교, 독점적 종교 권력에 대한 아래로부터의 거대한 혁명이 결국 유럽 사회를 뒤집어엎는 계기가 됩니다. 이게 다 종이가 전해지면서 일어난 일들입니다.

ㅁ동서남북으로 뻗어나간 이슬람 제국

탈라스 전쟁은 두 세력, 이슬람과 당나라가 파미르 고원을 조직적으로, 대규모로 넘는 계기가 됩니다. 고선지 장군이 파미르를 넘어서 지금의 파키스탄의 길기트와 펀자브를 공격하죠. 길기트가 파미르 고원 서쪽에 있습니다. 지금 파키스탄의 북쪽이죠.그래서 고선지를 나폴레옹보다 위대하다고 하잖아요. 나폴레옹이 알프스 산맥 넘었다고 대단하다 그러지만 나폴레옹은 18세기 사람이고 알프스는 3,000m밖에 되지 않습니다. 파미르 고원은 7,000m에다가 그보다 천 년 전에 넘었으니까 누가 더 위대한가요?

ㅁ이슬람의 성공 비결은 조세 혁명

이슬람은 예전에 가렴주구하던 세금 정책을 제대로 뜯어 고치고, 조세 시스템을 법제화 시켜 주고, 훨씬 가벼운 세금을 내게 했습니다. 그 세금을 거둬 일정 부분 중앙 정부에 내고, 나머지를 가질 수 있는 제도를 시행한 거죠.

ㅁ화합과 평등을 내세운 내치 시스템

어떤 부족이 우월하고 다른 부족이 열등하다? 못 받아들입니다. 다 자기가 최고입니다. 이런 성향들을 잘 이해해서 처음부터 성직자 제도를 따로 두지 않았습니다. 성직자도 일종의 카스트잖아요. 교회에서 보면 얼마나 철저합니까? 교황과 대주교와 주교와 신부, 수녀, 평신도로 이어지는 수직적인 구조가 있잖아요. 그런데 이슬람은 성직자 제도를 없애 버렸습니다. 지금도 그렇습니다.

ㅁ이슬람의 소수민족 포용 정책

라마단 아시죠? 무슬림들이 한 달 동안 단식하는 기간입니다. 그런데 이 시기에 갈라타 타워의 유대인들도 다 같이 단식하는 게 아니겠습니까?

...왜 유대인이 라마단을 하냐고 물었습니다. 그 사람들은 내 질문이 이상하다고 반응했습니다. 그 사람들 말이 “내 고객의 99%가 무슬림들인데, 내 고객이 사회적 정의를 실현하고, 가진 자나 갖지 못한 자가 고통을 공유하기 위해서 저렇게 절절하게 단식하고 있는데 내가 종교와 문화가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그 기간 동안에 배불리 먹고 내 고객을 대한다는 것은 장사의 기본 원칙에도 안 맞다.”라는 겁니다. 장사하는 사람이 그래서는 안 된다는 거였습니다. 그 고객들 때문에 자기가 먹고 살고 존재 가치가 있는데 고객의 고통과 정신에 동참하고 존중하는 것이 장사하는 사람의 기본적인 덕목이라고 말합니다. 왜 단식 하냐고 물어보는 것 자체가 이해가 안 된다는 겁니다.

ㅁ무함마드의 등장

무함마드가 가진 여러 가지 덕목 중에 아랍 사회에서 가장 칭송 받았던 것이 바로 ‘분쟁 조정자’ 역할이었습니다. 철저한 균형 감각과 객관성을 가지고 정말 예리하고 정확하게 분쟁을 해결했습니다.메디나의 두 부족이 싸우다가 도저히 안 되니까 메카에서 살해 위협을 받고 있다는 무함마드를 초청합니다. 우리끼리 해결이 안 되니 분쟁을 조정해 달라고 부탁하는 거지요. 이런 조건들이 맞아 떨어져서 메카에서 메디나로 옮기게 됩니다.

ㅁ무함마드의 부인들

고별 순례를 마치고 몸이 급속하게 쇠잔해집니다. 그러나 무함마드는 연명을 위한 치료와 투약을 거부합니다. 그래서 지금도 이슬람교도들은 산소 호흡기 안 꼽습니다. 예언자의 전통을 따르는 거죠. 죽음이란 것은 하나님이 주시는 것인데,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면서까지 굳이 구차하게 살겠다고 하는 것은 예언자가 따랐던 방식이 아니라는 겁니다. 요즘에 우리 논의하고 좀 닮아 있죠?

...무함마드를 신격화하려는 움직임이 여기서 꺾입니다. 아주 평범한 인간으로 나서 평범한 인간으로 죽고 죽어서 흙이 되어 사라진다고 합니다. 이것이 이슬람 성공의 결정적인 계기가 됩니다. 평범의 리더십입니다.아무런 기적도 행하지 않았고, 출생의 신비도 없었고, 살아가면서 기적 같은 초월적인 역할도 하지 못했고, 죽을 때도 보통사람처럼 절절이 앓다가 죽었고, 가난한 채로 재산을 비웠고 죽고 나서도 보통 사람처럼 흙으로 썩어 없어졌습니다. 재림하지도 않고, 앞으로 나타나지도 않고 그냥 사라져 버립니다. 그 덕에 지금까지 살아남은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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