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자와 하녀

저자
고병권 지음
출판사
메디치미디어 | 2014-05-20 출간
카테고리
인문
책소개
철학은 지옥에서 가능성을 찾는 일이다 위로와 도피의 인문학은 침...
가격비교




누구보다 초조함에 시달렸고 그것의 문제를 잘 알았던 작가 카프카. 그는 초조함이야말로 인간의 죄악이라고 했다. 그는 <죄, 고통, 희망 그리고 진실한 길에 관한 성찰>이라는 글에서 이렇게 말했다. "다른 모든 죄를 낳는 인간의 주된 두 가지가 있다면 그것은 초조함과 무관심이다. 인간은 초조함 때문에 천국에서 쫓겨났고 무관심 때문에 거기로 돌아가지 못했따. 그러나 주된 죄가 단 한 가지라고 한다면 그것은 초조함일 것이다. 인간은 초조함 때문에 추방되었고 초조함 때문에 돌아가지 못한다." 아마도 그의 문학은 이 초조함을 몰아내려는 치열한 탐구의 결과물이었을 것이다. 

   - 29쪽 '초조함은 죄다'



정말 중요한 사건, 우리에게 인류의 개선과 미래의 역사에 대해 말해주는 사건은 어찌 보면 너무 조용하게 일어난다. 그것은 사건의 당사자들에게 일어나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칸트는 구경꾼들, 어떤 사건이 일어나는 동안 그것을 지켜본 사람들의 맘속에서 일어난 일에 주목한다. "거대한 정치적 변동의 드라마가 일어나는 동안에 그것을 지켜본 사람들의 태도", 진짜 혁명은 거기서 일어난다. 

  이해당사자도 아닌 사람들이 어떤 불이익조차 감수하고 나서게 되는 순간이 있다. 아니 행동에 직접 나서지 않더라도 맘속에서 어떤 변화를 겪게 되는 순간이 있다. 내 일이 아니지만 그것을 지켜보며 맘속에 공감이 일어날  때, 우리는 '개인'이 아니라 '인류'를 느끼는 것이다. 그때만이 우리는 '개인'이 아니라 '인류'가 '나아지고 있는지'에 대해 뭔가를 말할 수 있다. 칸트는 프랑스 혁명이 바로 그런 사건이라고 생각했다. 그 혁명이 인류의 진보를 말해줄 수 있다면 그것은 그 혁명을 주도한 프랑스인들 때문이 아니라 그 혁명을 지켜보며 가슴 속에서 동참의 욕구를 느낀 사람들, 이를테면 프랑스에서 백 마일도 더 떨어진 독일인들의 맘속에 일어난 변화 때문일 것이다. 

    - 75쪽 '구경꾼 맘속에서 일어난 혁명'



  ...이처럼 사회적 약자들은 어떤 상황을 자기 식으로 해석하기보다 권력을 가진 자의 눈으로 보려고 한다. 어차피 상황은 권력자가 그것을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달렸기 때문이다. 

  인류학자 데이비드 그레이버(David Graeber)는 이를 '해석 노동'(interpretive labor)이라고 불렀다.

    - 161쪽 '해석노동과 공감의 능력'



하이데거는 말했다. "원자력이 평화적으로 사용되느냐, 전쟁을 위해 동원되느냐 등의 물음은 이차적인 겁니다. 우리는 그보다 먼저, 그 모든 것을 넘어 소급해서 물음을 던져야 합니다." 그는 원자력의 개발 때문에 드러나고 있는 것('탈은폐되고 있는 것'), 원자력 기술에 의해 각인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스스로 물었따. 그의 용어로 말하자면, 그것은 우리 '인간의 현 존재'이며, 오늘날 우리 삶이 처해 있는 어떤 '운명'이다. 항상 이런저런 요구에 쫓기고 '닦달당하면서', 전체 시스템의 한 부품으로 전락해 마침내는 "낭떠러지의 마지막 끝"에 서게 되는, 그런데도 정작 그 '위험'을 모르는 우리의 운명이 거기에 새겨져 있다는 것이다. 

    - 167쪽 '원자력으로부터의 잔향'



...다만, 나는 누군가 이 사회에서 소위 '정상적인 삶'을 살 수 없으 ㄹ때, 그의 신체든 정신이든 이 체제의 질서나 규칙들을 준수하기 어려운 상황에 있을 때, 그것을 곧바로 '죽음에 이르는 병약함'으로 몰고 가서는 안 된다는 점을 지적하고 싶다. 니체가 <즐거운 지식>에서 말하지 않았던가. 상식과 통념이 건강의 지표가 될 수 없듯이 광기도 그 자체로 질병이나 죽음과 동일시될 수는 없다. 니체는 미친 것과 아픈 것은 다르며, '광기'의 반대말은 '건강'이 아니라 '길들여진 두뇌'라고 했다. 고통을 느낀다고 해서 곧바로 '병약함'이 초래한 결과라고 말할 수도 없다. 역시 니체 식으로 말하자면, '병'은 종종 지나친 섬세함, 때로는 한계를 넘어서려는 과도한 건강 때문일 수도 있다. 

    - 174쪽 '고흐의 발작과 죽음 사이에서'



  아무리 대단한 권위를 가진 사람의 말이라 할지라도, 그리고 그 말이 아무리 올바른 것일지라도 환자가 체험하지 못하는 것은 아무런 효과도 없다. 앞서 말한 것처럼 치료의 관건은 환자가 현재의 증상을 유발한 과거의 사거능로 돌아가는 것에 있으며, 거기서 그 사건을 과거와는 다르게 체험해야 한다. 즉 과거를 반복하지만 다르게 반복하는 것이 핵심이다. 그런데 따지고 보면 치료만이 아니라 '깨우침' 일반이 그렇다. 과거에 내가 저지른 일을 그대로 떠올리지만, 그것을 달리 느끼고 달리 대할 수 있을 때, 우리는 뭔가를 깨우친 것이기 때문이다. 

  요컨대 옳은 말은 그저 옳은 말일 뿐이다. 그것이 내 것이 되려면 내 안에서 다시 체험되어야 한다. 내가 내 식으로 체험하지 않는 말이란 한낱 떠다니는 정보에 불과하다. 세상에는 여전히 옳은 말들을 찾아 나서는 사람들이 많지만, 나는 세상에 옳은 말들은 부족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그것들이 정처 없이 여기저기 흘러다니고 있을 뿐이다. 

    - 251쪽, 에필로그 '옳은 말은 옳은 말일 뿐이다' 


Posted by Daesung Ju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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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방과탈주대중의흐름/지식의운명/운동의선언
카테고리 정치/사회 > 사회학
지은이 고병권 (그린비, 200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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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주변', 비국민의 공간

    '주변' 개념 설명


주변은 주권이 강하게 작동하는 영역, 주권이 그 한계를 정하는 영역이다. 우리는 척도적 권력이 중심에 있다는 생각을 해왔다. 권력의 동심원적 공간, 즉 중심에는 핵이 있고 주변으로 갈수록 권력이 옅어지는 그런 공간을 상상해온 것이다. 하지만 정작 핵심은 중심에 있지 않고 내부에 있지도 않다. 그것은 내부를 규정하는 주변에 있다. 주변이야말로 어디까지 내부인지를 규정하는 척도가 가장 선명한 곳이다. 주변은 내부가 확장하다가 멈춘 곳이 아니다. 오히려 내부야말로 주변으로부터 안쪽 방향으로 자라난 상상의 공간일 뿐이다. 

한편으로는 살기 위해 주권에 매달리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거기서 탈주할 가능성이 공존하는 곳이 세계의 주변이다...
세계의 주변을 다루는 일은 세계를 다루는 일이다.
  - 46~47쪽


    '양극화'가 아닌 '비가산집합'이란 개념으로 사회를 볼 것


권력과 자본에 의해 추방된 사람들은 그야말로 곳곳에 있었다. 지난 십여 년간 권력과 부의 영역에서 대중들은 지속적으로 추방되어 왔다. 각종 양극화 지표들이 잘 보여 주고 있듯이, 1997년 이후 한국 사회는 권력과 자본의 핵심을 장악한 소수의 세력과 그렇지 못한 대중들로 뚜렷하게 구분되고 있다. 사실 '양극화'라는 말 자체는 최근 일어나고 있는 분화에 대한 적절한 표현이 아니다. 두 집단은 결코 대칭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체제의 핵심에서 추방된 사람들은 뚜렷한 정체성을 갖고 있지 않는 사실상의 '비가산집합(非可算集合)'이다. 이는 자본과  권력의 핵심에 있는 집단과 그렇지 못한 집단, 즉 한 집단과 그것의 여집합으로 존재하는 집단의 분화에 가깝다.   
  - 24쪽


    주권자로서의 국가 권력은 합법/불법을 나누는 유일한 합법적 존재
        - '주변'으로 추방된 대중들은 
           법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불법적 신분으로 국가의 폭력에 노출된다


칼 슈미트는 '주권'을 '예외상태(비상사태)에 대한 결정권'으로 이해했다. 그에 따르면 주권자란 합법적으로 법을 중지시킬 수 있는 권리를 가진 자이다. 그는 합법과 불법의 기준을 정할 수 있는 유일한 합법적 존재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법 안에 있으면서 동시에 법 바깥에 있다. "주권자인 나, 법의 바깥에 있는 나는 법의 바깥에 아무 것도 없음을 선포한다."(칼슈미트의 책 '정치신학' 중에서) 주권자로서의 국가 권력은 이 점에서 합법적으로 치외법권 지대에 존재한다고 할 수 있다. 주권의 이름 아래서는 어떤 끔찍한 폭력도 적법하게 행사될 수 있다.(06년 대추리의 유혈 강경 진압의 예) 
그러나 주권자만이 치외법권 지대에 서 있는 것은 아니다. 주변으로 추방된 대중들도 이런 치외법권 지대에 서는 경우가 있다. 물론 그 성격은 아주 다르다. 주권자는 합법적 신분으로 거기에서 있는 것이고, 대중은 불법적 신분으로서 거기에 서 있는 것이다. 전자가 법의 지배를 받지 않는다는 점에서 치외법권 지대에 있다면, 후자는 법의 보호를 받을 수 없다는 점에서 거기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치외법권 지대에서 이루어지는 행위를 두고 합법과 불법을 논하는 것은 별 의미가 없다. 한쪽은 법을 넘어설 수 있는 존재이고, 다른 한쪽은 법이 보호를 받을 수 없는 존재이다. 전자에게는 폭력이 합법적이고, 후자에게는 법 자체가 폭력적이다.
  - 34~35쪽


    국민과 '비국민'을 구분하는 것은 근대 국가의 통치 방식이다
    비국민으로서의 대중은 살아남기 위해 정치적 보수주의자가 된다


한국에 신자유주의 정권이 들어선 이래 국민국가의 성격에 큰 변화가 생기고 있는 것 같다...
국민은 세계시장에서의 승리와 패배, 긍지와 굴욕의 운명 공동체이다. 그리고 신자유주의 정부는 이런 운명 공동체를 상상하게 함으로써, 기업들이 세계시장에서 성공할 수 있는 최적의 환경을 제공할 수 있도록 사회를 재편한다. 
그러나 국민 통합 이데올로기의 이면에는 국민 분할 지표로서 양극화가 자리하고 있다...
국민 통합과 국민 해체의 동시적 진행이라는 역설.  

타자는 세계가 아니라 국내 차원에서, 지역 차원에서 발견될 가능성이 높다... 
'비국민'을 양산하면서도 여전히 '국민'이라는 강력한 표상을 통해 지배하는 국민주의의 가능성을 보여준다. 이 변증법의 한쪽에는 '내부-국민들'의 '주변-비국민들'에 대한 혐오와 반감, 거리두기, 비국민으로 전락할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있다. 그리고 다른 한쪽에는 '주변-비국민들'의 자기부정과 혐오, '내부-국민'에 대한 선망과 동일시가 있다.

푸코의 근대 생명권력(biopower)에 대한 설명은 이와 관련된 하나의 유용한 시각을 제공한다.(미셸 푸코의 책 '사회를 보호해야 한다' 중에서) 국가 권력은 사실 오래 전부터 자기 인구의 생사여탈을 결정해 왔다. 그런데 푸코에 따르면 고전주의 시기(17~18세기) 국가와 근대(19세기 이후) 국가가 생사여탈권을 행사하는 방식은 아주 다르다. 고전주의 시기에 국가가 가진 생사여탈권은 기본적으로 '살리는' 권리가 아니라 '죽이는' 권리였다. 푸코는 그것을 "죽게 만들고 살게 내버려 두는 권리"라고 불렀다. 군주가 누군가를 죽이기로 결심했을 때 그 권리가 행사된다...
고전주의 시기와 달리 근대의 생사여탈권은 "살게 하고 죽게 내버려 두는 권리"이다. 근대 생명권력은 전체의 건강을 위해 "살아야 하는 자"와 "죽어야 하는 자"를 구별한다. 전체를 살게 하기 위해 누군가를 죽이거나, 최소한 죽도록 방치한다.

존재의 불안을 느끼는 대중은 기본적으로 정치적 보수주의를 견지한다. 그들은 자기 삶의 불확실성을 키우는 사태를 견딜 수 없어 한다... 대중은 '내치는데도' 매달리며, '내치기 때문에도' 매달린다.
 - 51~52, 54~57쪽


     비국민은 절차적 정당성은 지닌 합의의 장에 '난입'하거나,
    스스로 비국민임을 선언하는 '탈퇴'를 통해 저항한다 
      - 난입과 탈퇴는 성찰을 자극한다


나는 신자유주의 시대 정치의 중요한 특징 중의 하나가 '합의를 통한 배제', '합의로부터의 배제'같은 말로 표현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앞서 말한 바 있는 '비국민' 내지 '내부 난민' 등은 자신들이 참여할 수 없는 자리('합의로부터의 배제')에서 내려진 결정에 의해 '추방된 삶', '배제된 삶'을 살아가게 된다('합의를 통한 배제').
이러한 합의 정치의 포기력성을 드러내는 중요한 사례가 재작년 가을에 있었다. 비정규보호법에 대한 재논의를 위해 소집된 노사정위원회 회의석상에 코스콤과 이랜드, 기륭전자의 노동자들이, 언론 표현을 빌리자면, '난입'한 사건이 일어났다. 당시 회의장에 뛰어든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왜 비정규 노동자들의 보호 문제를 다루면서, 비정규 노동자들의 목소리를 들으려 하지 않느냐"고 물었다.

옷장 속에는 골라 입을 수 있는 온갖 민주주의가 있다. 때로는 여론조사를, 때로는 국회 통과를, 때로는 노사정위원회의 타협을 민주주의라고 부르는 것은 쉬운 일이다. 합의의 장에서 배제된 대중들의 난입은 이런 합의 정치의 민주주의적 외관을 걷어 내고, 합의의 배제성을 그대로 폭로하는 정치적 실천이 된다. 

2006년 5월 전라도에서 서울까지 이어진 '연구공간 수유 너머'의 행진에 참여하면서 내가 만난 농민이나 어민들은 "우리는 대한민국 국민이 아니다"라는 말을 자주 했다. 그것은 한편으로 비국민 취급을 받는 것에 대한 자조였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일종의 '국민 탈퇴' 선언이기도 했다. 미군기지가 들어서는 평택 대추리의 경우, 주민들이 항의 표시로 행정관청에 주민등록증을 반납하는 운동을 펴기도 했다. 

대중들이 '비국민적임'을 부인하는 대신 오히려 그것을 적극적으로 선언할 때, 이 선언은 역설적으로 '비국민'의 양산에 대한 적극적 저항운동이 될 수가 있는 것이다... 이러너 실천은 대안적 사회질서의 발명을 위한 중요한 성찰의 기회를 제공한다. 이런 실천은 끊임없이 현 체제의 근본 문제들을 파고든다.
  - 67~70쪽


2> 불안
 
 
    불안은 시대적 숙명
      - 예외적 사태였던 사회의 구조조정이 
        상시적 구조가 되어버렸기 때문

 
정돈되고 구조화된 '공동체'와 미규정적이고 구조를 갖지 않은 광야로서의 '세계'라는 이분법은 더 이상 적절치 않다. 무엇보다 지난 십여 년간 한국 사회는 구조화와 탈구조화가 동시에 진행되는 영속적 구조조정(재구조화, restructuring)을 하나의 구조로 갖게 되었기 때문이다. 외환 위기가 닥치고 전 사회적으로 구조조정의 광풍이 몰아칠 당시만 하더라도, 사람들은 그것이 매우 예외적인 사태이기 때문에 감내해야 한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예외적 시간은 아주 길어졌고 결국 우리가 일상으로 살아가야 하는 시간이 되었다. 즉 예외성이 일상성이 되었고, 구조 전환기에 단 한 번 겪는 줄 알았던 구조조정(리스트럭처링)은 하나의 상시적 구조(스트럭처)가 되고 말았다.
이제 대중들은 영속적인 위기 속에서 살아가는 법을 배워야 한다.
  - 21쪽


    불안-공포 정치의 실패


권력은 대중의 삶을 불안정하게 만듦으로써 공포와 불안을 통한 지배를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지각불가능한 지대로 탈주하고 있는 대중들에 대한 통제불가능성의 문제가 새롭게 생겨났다. 스피노자가 말했던 것처럼, 공포를 통한 통치가 실패한 곳에서 공포를 잃은 대중에 대한 공포가 시작되는 것이다.("대중이 두려움을 갖지 않을 경우 대중은 두려운 존재가 된다." 스피노자의 책 '에티카' 중에서)
우리가 행진(글쓴이 고병권이 '연구공간 수유 너머' 동료들과 함께 신자유주의적 재편에 반대하며 벌인 행진을 말함) 중에 만난 대중들은 국가의 추방에 대해 자기 삶의 평면에 악착같이 머무르는 것을 투쟁 전략으로 삼고 있었다. '계속 살아가겠다'는 것이야말로 그들의 최대 투쟁 목표이다. 

법에 의해 보호된 삶, 법에 의해 추방된 삶만 있는 것이 아니다. 법으로부터 떨어져 있는 삶도 존재한다. 그러나 법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삶은 따로 어딘가에 고고하게 서 있는 게 아니다. 어쩌면 그것은 바이러스처럼 법의 가장 내밀한 곳까지 파고들 수도 있다. 그것은 법을 자주 어기므로 법에 의해 자주 처벌받는다. 법에 저항해서가 아니라 법과 관계하지 않기 때문에, 그들은 자주 법을 어긴다. 평택 대추리의 주민들도, 미등록 이주노동자들도 '앉은 채'로 범법자가 되었다. 그들이 법적 명령에도 불구하고 계속 살아가려고 하기 때문이다. 
  - 40~41쪽


    '비국민'을 만드는 감수성으로는 비국민을 이해할 수 없다 
     - 이해하려 하지 않기에 이해할 수 없는 것


내 생각에 신자유주의 시대의 '안전보장'은 이 시대에 고유한 '불안'과 상응하는 것처럼 보인다. '안전'에 대한 욕구는 '불안' 상황에 대한 증언이라고 할 수 있다. 안전보장 담론의 강화는 신자유주의 정부 역시 주변화된 대중들 만큼이나 어떤 불안을 겪고 있음을 보여 준다. 그것은 '대중의 불안'에 상응하는 '대중에 대한 불안'이 아닐까 싶다.

...이들(지배층)은 주변화된 대중들을 통제 불가능한 위험 집단으로 간주한다. 그래서 이들은 비효율적인 '퍼주기식' 복지보다는 치안 대책을 강화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말한다.
'테러와의 전쟁'을 치르면서 미국은 테러리스트들을 '악마'로서 묘사했다. 데이비스의 말처럼 '악마화의 수사'는 일종의 '인식론적 장벽 세우기'라고 할 수 있다.(마이크 데이비스의 책 '슬럼, 지구를 덮다' 중에서) 그것은 적에 대한 이해의 포기, 더 나아가 이해의 거부를 의미한다... 한미자유무역협정에 대한 반대에섭터 최근의 쇠고기 파동에 이르기까지, 대중들의 주장은 '괴담'으로 치부되고 대중들의 행동은 '난동'으로 묘사된다.
어찌 보면 '대중을 이해하기를 거부하는 자'가 '이해할 수 없는 대중'과 마주치는 것은 당연한지도 모른다.
  - 63~66쪽
 


3> 코뮨주의 선언

      "
우리가 진정으로 반대하는 것은 무력함이다." 


우리의 가장 내밀한 것, 우리를 가장 특별하게 만들어준 것은 우리로부터 가장 먼 데서 온다. 낯선 존재와의 마주침이 내 안의 낯선 존재를 불러낸다. 나로부터 가장 멀리 있는 그 존재가 바로 나이다. 내 안의 타자가 다시 내가 됨으로써, 우리는 다른 타자와 공통된 것을 생산하는 관계에 들어간다. 우리는 서로 다르기에 함게 하며, 함께 하기에 서로를 다르게 만든다.
  - 215쪽

부르주아지의 자리를 차지하기 위한 투쟁이 아니라, 부르주아지의 자리를 없애는 투쟁이 중요하다. 초월적 권력을 차지하려는 투쟁이 아니라, 초월적 권력의 작동을 멈추게 하는 투쟁이 중요하다.
  - 220쪽

우리가 진정으로 반대하는 것은 무력함이다. 원한, 죄의식, 양심의 가책... 본인에게 요구하든 타인에게 요구하든 그것들은 사람들을 노예로 만드는 장치들이다. 우리는 슬픔이 매개하는 공동체, 죽음이 매개하는 공동체에 반대한다.
  - 225쪽

우리는 우리의 사랑에 구체로서 전체를 이루기를 희망한다. 우리는 우리가 반대하는 삶에 추상적인 총체로서 대적할 생각이 없다. 우리는 구체적 삶의 형식을 실험하고 발명해낼 것이다...
우리는 일상에 대한 구체적 실험을 통해서만 코뮨주의를 주장할 것이다...
세상이 바뀌지 않는다는 말을 자신의 삶을 바꾸지 않는 변명으로 삼지 말라고. 중요한 것은 당신의 삶을 바꾸는 것이다. 그리고 여러 대안적 실험들을 소통시키고 확산시키는 것이다. "그렇게 하면 세상이 바뀐다."

코뮨주의는 언젠가는 도달해야 할 세상에 대한 이름이 아니라, 언제든 도달할 수 있고 언제든 실현할 수 있는 삶의 방식이다. 코뮨주의는 대안적 삶에 대한 끊임없는 물음과 시도 속에서 언제든 실현된다. 우리는 머무를 곳을 찾아 이행하는 사람이 아니라 이행 속에 머무르는 사람들이다.
  - 229~230쪽


4> 고병권의 인문학론
 

- 지금과 다르게 살고 싶다면 인문학을 공부하세요
- 인문학으로서 철학의 삶의 기술은 '생각하기'이며 
    이는 곧 다르게 생각한다는 것이며, 삶의 길을 창출해낸다
- 진리는 외딴 곳에 있는 게 아니라, 지금 여기 나와 이 사회의 어리석은 가치관 자체를 뜻한다
- 삶으로 구체화된 앎을 추구하자
 

결국 삶과 떨어지지 않으면 삶을 볼 수 없다는 것도 사실이고, 삶과 떨어져서는 삶을 이해할 수 없다는 말도 사실이다. 삶과 떨어져야만 삶을 바꿀 수 있다는 말도 사실이고, 삶과 떨어져서는 삶을 바꿀 수 없다는 말도 사실이다. 인문학을 위해서는 여가가 필요하다는 말도 사실이고, 어떤 절실함이 있어야 한다는 말도 사실이다.

인문학에 필요한 '여유'가 생계로부터의 분리를 지칭한다면 일반 민중들은 인문학을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정말로 필요한 것은 '삶으로부터 여유'가 아니라 '삶 자체의 여유'이다. 한 삶에서 다른 삶으로 변화될 수 있는 잠재성, 한 삶이 가진 변이의 폭이 바로 그것이다. 

삶의 절실함이나 긴급함은 무엇보다 현재의 삶에서 벗어나고 싶은 욕망의 강렬함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만약 당신이 다르게 살 수 있는 잠재력을 갖고 있거나 갖고 싶다면, 만약 당신이 지금과 다르게 살기를 간절히 바란다면, 당신은 인문학을 할 수 있고, 해야 한다. 
  
철학은 어떤 삶의 기술을 갖고 있는가. 바로 '생각하기'이다. 철학자들은 '생각하는 삶', '지혜로운 삶'을 좋은 삶이라고 본다. 문제가 되는 것은 '생각없음' 내지 '생각할 수 없음'이다. 가령 아렌트는 유대인 학살 혐의로 재판정에 선 아잏히만을 보고 이렇게 말했다. "악은 나쁜 생각에서가 아니라 생각없음에서 나온다." 여기서 '생각없음'은 정신적 해이를 뜻하지 않는다. 독일의 정보부서 고위 관료였던 아이히만은 아주 신경을 써서 유대인 학살이라는 임무를 수행했다. 다만 그는 자신이 하는 일이 무엇인지를 깨닫지 못했을 뿐이다.
습관적으로 살아갈 때, 편견이나 통념에 빠져 있을 때, 어떤 강제적 명령 아래 있을 때, 우리는 어떤 입력된 프로그램을 수행하는 기계와 다를 바 없다. '남들도 그렇게 사니까', '지금까지 그렇게 살아왔으니까', '그런 명령을 받았으니까', 우리는 이 경우 아무리 정성을 다해 산다고 해도 '생각없이' 사는 것이다.
그래서 '생각한다'는 것은 '다르게 생각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생각한다는 것은 몇 가지 선택지 중에 정답을 찾는 일이 아니다. 생각하는 힘은 삶의 길을 선택하는 데 있는 게 아니라, 삶의 길을 창출하는 데 있다.
  - 142~146쪽

철학의 목표는 '교정'이 아니라 '공부' 즉 깨우침에 있다... 철학자의 답이 없는 물음은 통념과 편견 아래서 무사안일한 상태의 내 정신을 깨뜨리는 망치와 같은 것이다. 
외부에서 낯선 것이 안으로 뚫고 들어올 때 우리는 비로소 생각을 하게 된다. 그리고 과거의 생각, 과거의 삶에서 낯설어질 때, 그때 우리는 뭔가를 깨닫는다. 그것이 공부다.
 -151~152쪽

슬로터다이크는 어원상 고대 견유주의(Kynismus)에서 나온 현대의 냉소주의(Zynismus)가 어떻게 견유주의의 계승이 아니라 타락이고 변질인지를 잘 보여주었다.(슬로터다이크의 책 '냉소적 이성비판' 중에서) 그 변질의 핵심에는 '앎'과 '삶'의 분리가 있다. 즉 '앎'과 '삶'이 분리된 곳에서만 '알지만 행하지 않는' 냉소주의가 가능하다. 그러나 고대 견유주의는 '삶'으로 구체화되지 않는 '앎'에 코웃음을 쳤다.
  - 168쪽

우리가 극복해야 하는 것은 '장애'가 아니라 '정상성'이라는 것, 우리는 우리 시대의 지각구조, 우리 시대의 공통 감각(sens commun)을 문제삼아야 한다는 것, 여기서 나는 인문학자의 자기 해방 과제가 드러난다고 생각한다. 

...오류는 진리의 협력자이며, 비정상은 정상의 다른 얼굴이다. 철학자들은 오류를 극복하고 진리에 도달해야 하는 것처럼 말하지만, 우리가 극복해야 하는 것은 진리 자체이다. 우리는 우리 시대의 진리를 극복해야 한다. 그것이 우리 시대의 어리석음을 극복하는 길이다. 진리란 한 사회가 가진 체계적이고 객관적인 오류이며, 그 사회에 고유한 어리석음이라고 할 수 있다. 
  - 174~175쪽


5> 2008년 촛불시위 평가

    "우리가 약간은 이겼다"
 


모든 시대는 자기 옷을 직접 지어 입어야 한다. 유감스럽게도 2008년 6월의 시위대는 벽을 돌파할 자기 형식을 발명해 내지 못했다. 많은 실험들이 있었고 놀라운 발견들이 있기는 했지만, 결과적으로는-정말 뒤늦게야 염치없이 할 수 있는 말이지만- 87년 6월을 흉내 내려 했던 이들에 의해 전체 분위기가 이끌리고 말았다. 그날 수십만 군중은 제 자리에 앉아서 가수들의 공연을 보고 연사들의 말을 들으며 그저 앉아 있었다...
이번 시위의 가장 큰 특징 중의 하나는 전체를 통제하거나 기획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데 있다.

솔직히 나는 사제들의 숭고한 행동이 촛불시위의 출구를 열어 주었는지 닫아 버렸는지 잘 모르겠다. 아니, 일반적 견해와는 달리 나는 후자 쪽에 좀더 무게를 두는 편이다. 확실히 사제들은 어떤 시위대도, 적어도 그 첫날에는 불가능했을 일, 바로 경찰의 원천봉쇄를 와해시켰다. 하지만 또한 사제들은 어떤 폭압적인 경찰력으로도 불가능했던 일, 바로 시위대의 분노와 공격성을 잠재우는 데도 성공했다. 

분노의 정서는 급격히 해체되었고 어떤 위안이 찾아왔다... 사제들은 분노했지만, 대중과 더불어 분노하기보다 대중을 대신해 분노해 주었다. 이번 시위에서 도저히 불가능했던 일, 즉 누가 누군가를 대신하고 대표하는 일'이 처음으로 가능했던 것은 사제들을 통해서가 아니었을까...
시위대는 이미 마음의 승리를 거두었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촛불이 현실적으로 승리할 가능성이 사라져 갔다는 것이다.
현실적 승리와 정신적 승리가 교환되었다고 말한다면 너무 과한 것일까.
  - 88, 94~95쪽

"폭력의 철학"을 쓴 사카이 다카시는 마틴 루서 킹 목사나 마하트마 간디의 비폭력 직접 행동이 동아시아 지역에서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다고 지적하며 다음과 같이 쓴 바 있다.
"킹 목사(혹은 간디)에 의하면 비폭력 직접행동 자체가 '평화'적인 것이라는 이미지는 완전한 오해이다. 일본에서 이라크 반전 시위가 벌어질 때 자주 접할 수 있는데, 요컨대 비폭력 시위라면 진압 경찰과도 평화적으로 (아주 사이좋게) 대치해야 한다는 식으로 긴장을 기피하는 것이 마치 비폭력 운동인 것처럼 생각하는 것은 킹과도, 간디와도 완전히 무관하다." 
...비폭력 직접행동은 충돌을 회피하는 운동이 아니라, 어떤 폭력에도 굴하지 않으며 결코 물러나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한국에서는 가령 중증장애인들의 이동권 투쟁이나 활동보조인 쟁취 투쟁에서 그런 것을 확인할 수가 있다.

하지만 과연 충돌은 피해야 했던 것인가. 충돌이 피해야만 하는 것이었다면 애당초 대중은 거리에 나서지 말았어야 하는 것 아닌가. 경찰의 잔인한 물리적 폭력이 행사되었다면, 비폭력적이지만 더욱 공격적인 행동으로 당당히 맞서야 했던 게 아닐까. 대중을 감싸 주는 존재보다 대중 앞에서 뚫어 주는 존재, 아니 대중 옆에서 대중이 되어 함께 당당하게 상황을 타개하는 존재가 6월 말과 7월 초 사이에 필요했던 게 아닐까.
  - 99, 101쪽

민주주의 모델의 혁신과 소통이라는 점에서 보자면 성취는 더 커 보인다. 운동조직의 대의를 통하지 않는 운동, 정치인의 대의를 통하지 않는 정치, 미디어의 대의를 통하지 않는 여론이, '매개 없이' 직접 생산되고 소통되었다... 아주 다른 커뮤니티들이 자신들의 색깔을 살린 채로 하나의 흐름을 형성할 수 있었다는 것, 그리고 국가와 개인의 이분법이 아니라, 비국가적이지만 공통적인 '공공성'을 형성할 수 있었다는 것은 앞으로 수십 년간 한국 사회의 방향을 크게 좌우할 성취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강조하고 싶은 것은 운동의 승패를 다루는 태도 자체가 운동의 진행에 큰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어떤 단절점, 어떤 명확한 척도로서 운동의 승패를 확정지으려는 태도는 지극히 위험하다는 점이다. 그레이버의 말처럼 "우리가 약간은 이겼다"는 점을 인식하는 것이 중요하다. 

어떤 단절적 목표를 제시하고 거기를 넘지 못하면 우리는 패배한 것이라는 근본주의자들의 태도는 바람직하지 않다. 그들의 단호함, 즉 현재로서 성취가 불가능한 기준을 제시하고 거기에 미달하는 어떤 성과도 받아들이지 못하겠다는 태도는 어떤 점에서 비관주의와 절망감을 예비하는 일이다.

승패를 확정하려는 열망은, 우리가 지금 '과정' 중에 있으며, 앞으로도 '과정 중의 존재'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부인하려는 태도, 더 정확히 말하자면 '과정을 빨리 끝내고 싶은' 피로감의 산물이다.
  - 107~108쪽


6> 고병권의 한국 지식인 비판


나는 90년대 이후 한국 진보 지식인의 가장 큰 문제가 '현장성의 상실'에 있다고 생각한다... '현장'이란 사건이 일어나는 장이고, 실천이 이루어지는 장이며, 운동이 이루어지는 장이다. 따라서 '현장'은 지식 세계 바깥을 지칭하는 개념이 아니다. 
문제는 '실천을 위한 이론이었는가' 혹은 '이론이 실천되었는가'가 아니라, '이론이 실천인가'에 있다. 그들의 이론이 투쟁하고 있는가. 그들의 이론이 운동하고 있는가. 

현장성의 상실은 달리 보면 지식인이 자기 해방의 과제를 상실한 것을 의미한다. 대중에 결합한 존재가 아니라, 자기 해방을 위해 싸우는 대중으로서 스스로를 자리매김하는 데 실패했음을 보여준다. 
  - 122~123, 125쪽

지식인이 사라진 시대, 지식을 둘러싼 투쟁은 어떻게 가능한가. 나는 그 가능성을 '대중지성'에서 발견한다. 
지식기반사회에서 지배권력과 자본은 한편으로 지식과 정보로부터 대중을 추방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대중들을 지적으로 훈련시킨다. 지식의 생산과 유통은 대중들의 지식 생산과 소통 능력에 의존하는 면이 있다... 자본주의 대공업이 발전할수록 생산은 점차 사회적 협력 형식을 띠며, 점차 생산자의 집합적 지성에 의존하게 된다. 

한국정부가 떠들어대고 있는 지식기반사회가 온다면 지식인이라는 범주는 사실상 무의미해질 것이다...
지식인이라는 범주는 새로운 지배세력으로 떠오른 테크노크라트의 형상과 새로운 저항세력으로 떠오른 대중지성의 형상 사이에서 해체될 것이다.
  - 135, 137쪽


7> '잃어버린 10년' 비판   

    '탈권위화', '작은 정부'라는 환상
     - 시장이 국가 권력을 장악했다


...우선 한국에서 복지국가의 후퇴 같은 것은 일어나지 않았다. 복지국가라는 것이 애당초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대신 자유주의 세력에 의한 '탈권위화'가 이루어졌다...
그러나 국가권력은 주류 세력들, 즉 통치 블록을 구성하는 세력들한테만 탈권위적으로 나타난다. 우리가 주목하고 있는 '주변' 영역에서 국가권력은 결코 나약하지가 않다. 아마 국가의 강력한 개입이 없었다면 사회의 신자유주의적 재편은 실현될 수 없었을 것이다. 국가의 '시장에 대한 개입'은 줄어들었을지 모르나 '시장을 위한 개입'은 훨씬 더 강화되었다.(그리고 이 개입은 최근 초국적 명령의 형식마저 취하고 있다.)
  - 3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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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김용규 님이 3월 15일(목) 청파교회에서 열린 '저자와의 만남'에서 말씀하신 내용 메모.
(1> 교회 강연이라 배려하신 부분도 있겠지만, 강연 내용으로 볼 때 기독교 신자이신 것 같다.
2> 아래 내용은 실제 말씀하신 순서와는 조금 다를 것이다.)

...

성서의 교훈은 '최종'이란 의미에서 궁극적인 경우가 많다. 그래서 지금 당장 실행하기 어려운 너무 무거운 십자가가 된다. 예수가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가르친 것은 가능할지 의문이다. 간결하고 지나치게 가혹하다.
진리는 끊임없이 추구해야 하는 것이다.

십계명은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하나의 계명으로 요약할 수 있다. 기독교 안의 유일한 진리가 있다면 이것일 것이다.
하나님 사랑은 이웃 사랑의 전제조건이며, 이웃 사랑은 진정한 자기사랑법이다. 그러므로 하나님 사랑만이 자기를 사랑하게 한다.

지옥은 물론 천국에서도 자기 팔보다 더 긴 수저를 갖고 있지만, 천국에선 서로 앞 사람의 입에 음식을 떠넣어 주기에 모두가 배불리 행복하게 산다. 이 이야기는 남을 행복하게 하는 내가 남에 의해 행복해지고, 남을 사랑하는 내가 남에게 사랑받는 나를 만든다는 진리를 말해준다. 프랑스 철학자 가브리엘 마르셀은 이같은 관계의 원리를 '상호주관적 매듭'으로 불렀다. 이것이 '철학카페에서 시읽기' 책에서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는 개념이다.

비논리적인 것은 무가치한 것일까?
논리로 설명할 수 있는 부분은 지극히 작은 분야에 불과하다. 논리를 벗어나야 하나님의 일을 설명할 수 있다.
모든 이데올로기는 논리적인 순환구조를 갖고 있고 순환논법으로 어떤 명제든 정당화한다. 그래서 수단과 목적이 전도된다. 그래서 허위의식이 생기고 우상화가 일어난다.
하지만 모든 수단은 목적 아래 있어야 정당성을 가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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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카페에서시읽기
카테고리 인문 > 철학
지은이 김용규 (웅진지식하우스, 201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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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랑은 무엇인가, 손해보지 않는 사랑이 가능할까
    다른 화분 속에서 같은 빛을 보는 것, 손을 놓지 않는 것

바디우가 <존재의 사건>, <조건들>, <철학을 위한 선언>과 같은 저서에서 말하는 ‘사건'이란 모든 종류의 평형 상태를 뒤흔드는 우연한 충격입니다. 사건은 언제나 우연으로 나타나 한 상황을 지배하는 기존의 법칙들, 즉 정치, 과학, 예술, 사랑의 법칙들을 파괴한다는 뜻이지요. 그가 <윤리학>에서 “사건은 우리로 하여금 새로운 존재방식을 결정하는 것이다"라고 말한 것도 그래서입니다. 이 같은 생각을 바탕으로 그는 “사랑은 세계의 법칙들에 의해서는 계산되거나 예측할 수 없는 하나의 사건입니다"라고 주장했지요. 바디우의 이 말은 적어도 다음 두 가지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하나는 사랑의 시작에 있어 ‘만남의 우연성'이고 다른 하나는 사랑에 의한 ‘법칙성의 파괴'입니다...

할인 매장에서 자기 몸에 맞는 옷을 고르거나, 중고차 시장에서 자기 수입에 맞는 자동차를 찾는 것같이 시작하는 연애는 바디우가 보기에 “사랑으로 촘촘히 짜여진, 타자에게서 비롯된 시련이나 심오하고 진실된 온갖 경험"을 회피하려는 것입니다. 사랑의 중요성을 처음부터 완전히 박탈한다는 겁니다. ‘사랑에 빠지는 위험을 감수하지 않고서도 사랑할 수 있다'는 쾌락주의적 사고로는 사랑이라는 집의 문턱조차 밟을 수 없다는 것이 바디우의 생각이지요...

그래서 바디우는 사랑의 만남도 필히 위험과 모험을 동반하는 우연에서 시작되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 68~70쪽

사랑이 동일한 사회 계층이나 동일한 집단, 동일한 파벌이나 동일한 국가를 고집하는 기존 세계와 그 세계의 법칙(진리)들을 깨트리고, 차이에서 출발하는 새로운 세계와 법칙(진리)들을 구축한다는 것이지요.
 - 77쪽

...이처럼 사랑하는 두 사람은 결코 동일한 하나의 관점에서 기존의 세계를 함께 경험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차이가 있는 둘의 관점에서 하나의 세계를 함께 바라보며 구축해가는 것이지요...
바디우는 프랑스 극작가 폴 크로델의 <정오의 공분>에 나오는 “멀리 떨어져서, 그러나 서로가 서로에게 기대면서, 우리의 영혼은 변화를 맞이하는가?”라는 대사를 인용해 둘이 등장하는 무대의 본질을 설명하기도 했는데, 바로 그것을 키비가 “우린 각자 화분에서 / 살아가지만 서로에게 기댄다는 것 // 서로에게 기댄다는 것"이라고 노래한 거지요...
사랑의 존재론적 거리는 사랑을 한편으로는 쓸쓸하고 허전하게 하기도 합니다. 영원히 좁히지 못하는 평행선처럼 하나가 될 수는 없기 때문이지요. 그렇지만 그것이 사랑의 본질이자 숙명입니다.
 - 79~81쪽

...바디우는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사랑의 지속성과 그 과정이 가진 의미와 가치를 사유합니다.
“우리가 사랑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은 무엇보다도 지속되는 하나의 구축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랑은 끈덕지게 이어지는 하나의 모험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최초의 장애물, 최초의 심각한 대립, 최초의 권태와 마주하여 사랑을 포기해버리는 것은 사랑에 대한 커다란 왜곡일 뿐입니다.”
 - 83쪽

프로이트 이후 정신분석학자들은 물론이고 오늘날 각광을 받는 진화심리학자들까지도 하나같이 입을 모아 연애에 대한 욕구(eros)가 인간의 다른 어떤 욕구보다도 강렬하다고 주장...
인간의 가장 절실한 욕구가 “고독이라는 감옥을 떠나는 것"
 - 89쪽

(소비사회가 충동질하는 욕망 대신, 사랑과 행복을 추구함으로써 소비사회를 극복할 수 있다.)
이제 우리가 외칠 새로운 구호는 “욕망보다 사랑을!”, “쾌락보다 행복을!”입니다.
  - 299쪽


    상호 주관적매듭, 나는 언제나 우리로서 존재한다

하이데거, 사르트르, 마르셀 등 실존주의 경향의 철학자들이 사용하는 ‘존재'라는 용어의 대부분의 경우 ‘존재의 의미(Sinn vom Sein)’라는 뜻으로 이해하는 것이 좋습니다. 왜냐하면 ‘존재라는 용어를 통해 ‘존재자의 본질'을 탐구했던 고대나 중세 철학자들과 달리, 그들이 탐구하려 했던 것은 ‘존재의 의미', 곧 어떤 존재자가 그것으로 존재하는 의미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만일 그들 가운데 한 사람이 당신에게 인간의 존재가 무엇인가를 묻는다면, 당신은 ‘인간이란 무엇인가'가 아니라 ‘인간이 인간으로 존재하는 의미가 무엇인지'를 대답해야 합니다.

모든 존재, 다시 말해 모든 존재자들이 가진 ‘존재의 의미'는 오직 ‘2인칙 관계'에서만 발생한다...

그대가 없으면 나도 없다! 마르셀은 ‘나'와 ‘그대' 사이에 존재하는 이런 관계를 ‘상호 주관적 매듭(le nexus intersubjeclif)’이라고 이름지었습니다. 사랑은 상호 주관적 매듭의 상징이지요. 나는 내가 ‘그대'라고 부르는 상대에게서 역시 ‘그대’라고 불릴 때만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사랑이라는 ‘상호 주관적 매듭' 안에서는 ‘우리가 존재한다(Dous sommes)’라는 명제가 ‘나는 존재한다(Je suis)’라는 명제보다 언제나 우선하며, ‘우리가 존재한다'라는 명제가 전제되지 않는다면 ‘나는 존재한다'라는 명제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말장난에 불과합니다... 내가 있어 우리가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있어 내가 있다는 말이지요.
 - 118~122쪽

1인칭인 ‘나'가 3인칭인 ‘그'나 ‘그녀'와 어떤 관계를 맺을 때, 드디어 ‘너', ‘그대'라는 2인칭이 기적과 같이 탄생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우리가 하루하루를 그냥 사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존재하는 의미를 느끼며 살게끔 합니다. 인간에게는 이것만이, 오직 이것만이 기적이지요.
 - 128쪽

가브리엘 마르셀은 한 인간을 ‘그대’로 대하는 일은 상대를 ‘판단하지 않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알랭 바디우가 그의 <윤리학>에서 적절하게 지적한 대로, 타자의 존재를 신의 윤리적 이름인 “전혀-다른-타자(Tout-Autre)”와 연결해 신성하게 인정하는 레비나스의 ‘차이의 윤리학'을 신봉하는 사람이라도, 타자를 판단의 대상으로 대할 경우 동일성의 폭력을 피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내가 상대를 판단하여 사랑하면 상대도 나를 판단하여 사랑하고, 내가 상대의 존재 자체를 사랑하면 상대도 나의 존재 자체를 사랑한다는 거지요. 바로 이것이 사랑이라는 ‘상호 주관적 매듭'의 근본 속성입니다.
 - 131~133, 135쪽

아우구스티누스를 따라 ‘사랑하는 것이 곧 사랑받는 것이 된다(amor amatur)’고 주장한 가브리엘 마르셀은 <존재의 신비>에서 상호주관적 매듭의 신비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했습니다.
“타인에 의한 매개는 자기 사랑을 정립시킬 수가 있과, 또 그 매개만이 자기중심주의의 위험에서 자기 사랑을 보호해줄 수 있으며, 오직 그 매개만이 자기 사랑이 상실하게 될 해맑음의 성격을 보증해줄 수 있다.”
오직 타자에 대한 사랑만이 자칫 그릇될 수 있는 자기에 대한 사랑을 위험에서 구하고 본래의 순수한 의미를 지켜줄 수 있다는 말이지요. 상호주관적 매듭은 자기중심주의(hauto-centrique)와 타자중심주의(hetro-centrique)가 가진 각각의 부작용들을 서로 해소시켜주는 역할을 합니다.
  - 296~297쪽


    우리를 진정 죽음에 이르게 하는 병은 과연 무엇일까요?

우리를 진정 죽음에 이르게 하는 병은 과연 무엇일까요?
키르케고르는 그것은 오직 절망이라고 했습니다. 그것도 다른 어떤 것에 대한 절망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 대한 절망이라고 했지요.
“자기 자신에 대하여 절망하는 것, 자기 자신에게서 빠져나오려는 것, 이것이 온갖 절망에 대한 공식이다”라고 그는 강조했습니다. 그리고 이 절망에는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종류가 있다고 했지요.

“첫째는 절망하여 자기를 의식하지 않는 경우이고, 둘째는 절망하여 자기 자신이려고 하지 않는 경우이며, 셋째는 절망하여 자기 자신이려고 하는 경우가 그것이다.”
 - 201쪽


     치명적인 병으로서의 절망을 극복하려면
    가치를 추구하는 관계 속에서 자기를 실현해야 한다
    이것이 자기 사랑!


키르케고르는 인간에게는 스스로 자기를 실현할 능력이 없다고 단정했습니다. 그에게 자기실현이란 육체와 영혼의 종합에 의해서만 이루어지는데, 영혼은 인간이 아닌 신의 소관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그는 인간의 진정한 자기실현은 오직 신에 의해서 “그에게 설정된 소명"을 알고 그것에 순응할 때에만 이룰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사람은 자기의 눈높이에서 볼 수밖에 없기 때문에 그가 실현하는 자기란 결국 “자기 이상의 것은 물론이거니와 이하의 것도 되지 않기” 때문이지요.

키르케고르는 우리가 아무 의식도 없이 무지몽매하게 살거나, 남들을 따라서 살거나, 또는 자기가 스스로를 창조해서 살면, 언젠가는 절망에 빠질 수밖에 없다고 강변했습니다. 오직 절대적 가치들을 받아들여 살아야만 스스로 온전해질 수 있고 죽음에 이르는 병인 절망에서도 벗어날 수 있다고 설파한 거지요.

이제 마침내 ‘자기 사랑법'을 귀띔할 차례입니다... 당신은 자신을 가치에 투사해야 합니다.

상호주관적 매듭이 모든 가치 있는 일을 그것을 행하는 사람에게 상응하는 기쁨과 대가를 어김없이 돌려주는 메커니즘의 실체입니다.
 - 230, 231, 235, 236, 238쪽


    시인은 뭐하는 사람인가?

사라져버린 신의 시대, 새로운 신이 오지 않은 시대, 세계의 밤의 시대, 이같이 특징지어지는 우리 시대를 하이데거는 “궁핍한 시대(diedrftige Zeit)”라고 불렀습니다. 그리고 이 시대를 사는 시인에게 사명을 부여했습니다. 모두가 신과 신성한 것의 결핍으로 말미암아 절망하며 비참한 삶을 이어가고 있을 대, 시인은 시 짓기를 통해 은폐된 존재의 진리를 열어 밝힘으로써 신성한 세계를 보여주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이때 하이데거가 말하는 신은 어떤 특정 종교의 신, 예컨대 기독교에서 숭배하는 신이나 무당이 부르는 주술적 신이 아닙니다. 시인이 이름 부르는 신은 존재의 진리를 전하는 신, 곧 모든 존재자들이 존재하는 의미를 참답게 열어 밝혀주는 신이지요. 하이데거는 이 신을 “마지막 신(Der letzte Gott)”이라고 불렀습니다.
시인은 이 마지막 신의 ‘은밀한 눈짓'을 포착하여, 즉 존재의 진리가 스스로를 열어 밝히는 ‘고요의 울림'을 듣고, 그의 “말씀(Sage)”을 시어로 보존하는 사람입니다. 그럼으로써 사회적·역사적 요구가 우러나오는 대지, 존재의 진리가 스스로 드러냄으로써 사람들이 살아가게 하는 토대, 곧 김수영 시인이 말하는 문화와 민족과 인류에 공헌하는 삶의 지향을 마련해주는 사람이지요.
 - 394~395쪽


    키르케고르는 실존주의를 제시하고 극복했다

자기 실현에 대한 키르케고르의 비판은 실존주의의 문을 연 철학자가 그것의 한계까지 미리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매우 흥미롭습니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난 1945년 이후 서구인들은 키르케고르가 예상한 대로 인간의 절망은 카뮈식의 ‘반항'이나 하이데거식의 ‘기획투사', 사르트르식의 ‘앙가주망'을 통해 극복할 수 없다는 새로운 젊아에 부딪혀 “저주받은 자유"라고 토로하기 시작했지요...

인간이 스스로 자기를 선택하여 구성한다는 의미에서의 기획투사나 앙가주망에는 자신이 하는 선택의 자유에 대한 책임이 따르지 않습니다...
20세기 실존주의 철학자들이 그토록 소리높여 외쳤던 실존은 우리의 삶을 ‘의미 있게’ 할지언정 ‘가치 있게' 하지는 못합니다!

하이데거가 인간이 자신의 선택에 의해 스스로 자기를 창조하는 ‘기획투사' 대신 자기에게 다가오는 존재의 진리에 순응하는 ‘내맡김(Gelassenheit)’을 강조하고, 본래적 자기로서 사는 ‘실존(Exsistenz)’ 대신 존재의 진리 안에서 자기 자신을 벗어나는 ‘탈존(Ex-sistenz)’을 주장하는 후기 철학에 몰두했던 것은 필수불가결한 일이자 당연한 귀결이었습니다.
 - 231~233쪽


    하이데거 철학 - 존재사건
    하이데거 예술론

우리말로 생기 또는 발현이라고 번역되는 하이데거의 존재사건이란, 스스로 자신을 드러내려는 존재의 진리와 그것을 열어 밝히려는 현존재(인간)가 만나는 사건입니다. 존재의 진리의 “말걸어옴(Zuspurch)”과 이에 대해 응답하는 현존재의 “대답함(Antwort)”의 만남이지요. 존재의 ‘생기하는 던져옴(der ereignende Zuwurf)’과 이에 대응하여 일어나는 현존재의 ‘생기되는 기획투사(der ereignete Entwurf)’의 만남이기도 합니다.

달리 표현하면, 존재사건이란 존재자들이 그것으로 존재하는 본래적 의미가 스스로 드러나는 현상이며, 인간이 이에 맞대응하여 그것들을 자신의 ‘사유'와 ‘언어', 그리고 ‘예술’로 표현하는 현상입니다. 그것은 존재가 인간에게 스스로를 드러내 열어 밝혀주는 ‘줌(Geben)’이 일어나는 사건이자, 동시에 인간이 존재에게서 존재의 진리를 ‘선물(Gabe)’로 받는 사건이지요.

존재가 존재의 진리를 주고 인간이 그것을 ‘사유’와 ‘언어', 그리고 ‘예술'을 통해 받는다는 것이 한마디로 간추린 하이데거 후기 철학의 근본 구조입니다... 그것들은 스스로 우리에게 다가오는 존재의 진리가 주는 ‘선물'로서, 우리는 그것을 증여받을 뿐이지요.
 - 373~374쪽

하이데거에게 ‘세계'는 객관적 세계, 곧 데카르트나 뉴턴의 물리적·연장적 시공간이 아닙니다. 그것은 사물을 그것의 ‘쓸모(Bewandnis)에 따라' 이해하고, 자신의 ‘처지(Befindlichkeit)에 따라' 해석하는 우리 각자가 구성해낸 의미들의 집합체에 불과하지요...
“현존재(인간)는 존재하는 한 언제나 이미 그리고 언제나 여전히 존재가능성들에 입각해서 이해한다.”

...이 같은 해석학적 관점에서 보면, 자신 앞에 존재하는 개개의 사물들을 이해하고 해석함으로써 그것들의 ‘의미'를 열어 밝히는 인간이 하이데거가 말하는 현존재(Dasein)이고, 그 현존재에 의해 이해되고 해석됨으로써 열어 밝혀진 ‘의미의 집합체'가 곧 ‘세계'입니다. 그러니 우리의 세계는 개개의 사물에 대한 이해와 해석을 통해 우리 스스로 얽어낸 ‘의미의 그물망'이자 우리 삶이 그려낸 한 폭의 ‘풍경화'인 셈이지요. 이것이 바로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의 속성이자 은유가 가진 힘의 비밀입니다.
 - 41~42쪽


Posted by Daesung Ju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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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박모모 2012.03.21 17:27 신고 Address Modify/Delete Reply

    요새는 블로그 업데이트를 전보단 훨 부지런히 하는구먼.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