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사 유감




추천의 글


"각자의 자리에서 욕심을 버리고 진심을 다해 최선을 다한다면 분명 살기 좋은 세상이 될 거야. 지금 우리에겐 그게 제일 필요해." - 유희열의 문유석 판사 회고 중에서


담담한 동심


이제 파산 문제는 특정 계층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들 자신을 포함한 모든 사람에게 닥칠 수 있는 문제이고,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파산제도와 개인회생제도는 일종의 사회적 보험인 것입니다.


어찌 보면 법원의 면책결정은 별 게 아닙니다. 원래 가치가 0원인 채권을 0원이라고 공식 확인해주는 것에 불과한 것이죠.


물론 파산 사건의 증가와 함께 이러한 악용 사례가 늘어날 가능성은 저희들도 항상 염려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적어도 아직까지 우리나라에서의 개인파산은 남용을 걱정하기보다는 이용하지 않는 것을 걱정해야 하는 걸음마 단계라고 생각됩니다.


파산한 기업은 청산되어 소멸하지만, 파산한 인간은 계속 살아가야 합니다. 도전하다가 쓰러진 인간에게는 무덤 대신 두 번째 기회가 주어져야 합니다. 이것이 활자가 아닌 사람을 통해 제가 배운 것입니다. 


한번도 용서받지 못한 사람


그런데 그 순간, 피고인의 마지막 한마디가 제 가슴을 찔렀습니다. "나는 단 한 번도 용서받아 본 적이 없습니다!"


희망이 인간을 고문한다


기성세대의 위선을 비웃고 가치를 전복하려 싸우다 보니 어느새 이제는 위악이 쿨한 것이고 날 것의 욕망이 솔직한 시대가 돼 버린 것 같습니다. 하지만 위악이 위선보다 나은 것이 도대체 뭐죠?


대중의 물질적 욕망의 배후에는 자본의 논리가 있습니다. 로버트 매닝 (Robert D.Manning)의 '신용카드 제국'이라는 책을 읽어보면 미국의 1970년대 장기불황 시대에 금융자본이 기업금융으로 수익을 창출하지 못하자 찾아낸 활로가 소비자 금융임을 알 수 있습니다. 열심히 일한 당신, 떠나라! BC 로 사세요~


지성과 반지성


요즘 새삼스레 드는 생각은 좌와 우, 보수와 진보 등의 편 가르기는 다 본질과 직결되지 않는 '이름 붙이기'에 불과하고, 진짜 대립하고 있는 것은 지성과 반지성이라는 것입니다.


자신이 안다고 생각하는 것도 절대적 진리가 아니라 상대적일 수 있음을 인식하고, 자신이 틀릴 가능성을 인정하고 유보적인 태도를 취할 수 있는 것 또한 지성적인 태도일 것이빈다. 이에 반하여 자신이 믿고 있는 것 또는 자신이 바라는 것을 아는 것과 혼동하는 것, 더 나아가 자신이 믿고 있는 것 또는 바라는 것에 저촉되는 것을 무조건 배척하는 것은 갈릴레이를 법정에 세웠던 바로 그 반지성 아닐까요.


매사에 꼭 선명한 결론을 내리려고 무리하는 것은 오만인 동시에 무지입니다. 근거 없는 확신을 유포하는 것은 무지를 넘어선 범죄일 수도 있는 것이고요.


의견과 지식의 한계를 스스로 인식하고 이를 전제로 자기 검증을 되풀이하며 자기가 말할 수 있는 부분까지 말하자는 것입니다. 결론을 내릴 만한 근거가 없으면 스스로 단정하지 말고 의문만 제기하면 되는 것 아닙니까. 결론을 사실상 내려놓고 반문하는 의문이 아니라, 진실에의 열린 가능성을 열어 둔 순수한 의문 말입니다.


서울 법대와 하버드 로스쿨 3


수강신청을 할 때는 우선 이렇게 쌓인 수년 치의 강의 평가를 정독한 후 실제 수업을 들어가 직접 판단하고 확정합니다. 성의 없이 수업하는 교수가 살아남을 수 있을까요?


기본적으로 한국의 법학 교육은 학생들의 머리 위에 거대하고 복잡한 개념의 탑을 쌓아놓고, 그 완결적 구조의 아름다움을 음미하도록 하고는 실제 지금 이 사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분쟁을 해결하는 방법에 대해서는 각자 일하면서 알아서 자기 머릿속에 들어있는 개념들에 꿰어 맞추든지 뭐 알아서 하라는 방식인 것 같습니다.

하버드 로스쿨의 법학은 그야말로 '실사구시'하는 학문입니다. 기본적으로 판례법이 중요한 소스인데, 판례라는 것 자체가 실제로 사회에서 일어난 분쟁이나 해결의 과정이니 현실적일 수 밖에 없고요, 성문법을 주로 가르치는 과목도 기본적인 개념과 법조문은 학생들이 읽어와야 하지요. 그리고 교수는 실제 주로 발생하는 사례들이나 이를 단순화한 연습 문제를 가지고 이 법조문이 도대체 무슨 소리고 어떨 때 써먹으라고 나온 것인지를 가르칩니다. 


그런데 개인적으로 느끼기에는 시스템의 차이, 학문 풍토의 차이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차이는 이곳에서는 '정성', '성실' 같은 평범해 보이는 가치를 우리보다 더 귀하게 여긴다는 것입니다. 자기가 맡은 일에 최선을 다하는 것에서 행복을 찾는 것이 당연한 문화인 것이죠. 교수들도, 학사 행정을 담당하는 직원들도, 도서관의 사서들도, 스쿨버스를 운전하는 기사들도 다들 자기 일에 최선을 다하고 거기서 즐거움을 찾는 것 같습니다. 밥벌이하려고 마지못해 하고 있다는 인상을 받을 수가 없습니다.

다들 정말 귀찮을 정도로 학생들 공부를 도와주려고 애를 씁니다. 학사 행정 담당 스태프가 밤이고 일요일이고 학생들에게 메일을 보내서 다음주 주요 행사와 세미나를 알리고 참석을 권유합니다. 도서관 사서는 제 논문계획서를 읽어보고는 큰 흥미를 느낀 포인트를 말하며 자료 찾는 것을 도와줄 테니 만나서 같이 토론해 보자고 연락해 옵니다. 


한국형 세미나 유감


판사들도 법원 행사로 이루어지는 세미나 때 보면 겸손, 미괄식, 문맹자 배려 증후군을 잘 보여줍니다. 그런데 묘한 것은 판사들이 재판부 내에서 사건 결론을 합의할 때나 동료 판사들끼리 공통의 현안인 사건 쟁점에 대해 톨노할 때에는 또 완전히 딴판이라는 겁니다. 굉장히 효율적으로 쟁점만 치열하게 토론하곤 하거든요? 한참 싸우다가도 상대방의 논거가 더 그럴듯하면 바로 "어, 듣고 보니 그러네? 난 의견 번복하여 그 설에 찬동!" 하고는 손바닥 뒤집듯 바로 입장을 바꾸는 것에 거리낌들이 없고요.

짐작컨대 이런 토론은 그야말로 일상적인 업무로서, 모두의 시간이 금인 상황에서 가장 합리적인 결론을 빨리 도출해 사건을 해결해야 하는 실무적 필요성이 압도적인 경우니까 효율적으로 이루어지는 듯해요. 


이유 같지 않은 이유로


저는 그냥 엄벌할 것이면 엄벌할 사유를 상세히 힘주어  쓰고, 선처할 것이면 유리한 정상을 상세히 써서 양형 이유만 읽어봐도 이 재판부가 무엇에 중점을 두고 판단했는지 납득이 가도록 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정치, 사회 어느 영역에서든 세상을 정말 의미있게 바꾸기 위해서는 원래 자기와 의견이 같은 사람들의 열광보다 자기와 의견이 다른 사람들의 수긍을 얻을 수 있는 방법으로 주장을 펴야 한다고 봅니다. 판결도 마찬가지지요. 항상 첨예하게 이해관계가 대립된 양측이 있기 마련인데 모두가 박수치는 판결이란 있을 수 없다고 봐요. 판결에 불만족 하는 쪽에서도 '마음에는 안 들지만 읽어보니 판사가 잘못했다고까지는 하지 못하겠네' 정도의 반응을 보인다면 성공적인 판결문이 아닐지요. 그러기 위해서는 최대한 중립적인 입장에서 보편적인 논리와 어느 누구도 부인하기 어려운 근거를 들어야 할 것입니다. 


법원 유모아


법정에서 치열함을 넘어 살벌하기까지 한 갈등의 양 당사자들과 함께 재판을 진행해야 하는 법관에게 유머를 구사할 수 있는 여유와 능력은 소중한 자질이라고 생각


제도 이전에 욕망이 있다


애덤 스미스는 개개인이 최선을 다해 경쟁하면 결과적으로 사회 전체가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이롭게 된다고 했는데, 내쉬 균형에 따르면 실제로는 각자가 최선 대신 차선을 선택하는 방법으로 경쟁을 줄인다면 최악의 사태를 피할 수 있다는 것이니까요.


나는 놀기 위해 태어났다


대법원장님이 인사청문회 때 이런 말씀을 하는 것을 TV 에서 본 적이 있습니다. "나는 개인에 대한 외부의 부당한 간섭을 배격하고 자유분방함을 추구하며 인간을 일정한 틀에 묶어두려는 어떠한 시도에도 반대한다. 법의 사명은 이런 사회를 조성하는 것이다."



Posted by Daesung Ju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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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역에 관하여



2. 독감 백신에 대한 두려움

수은 화합물인 보존제 티메로살은 다회 용량 독감 백신을 제외하고는 모든 아동기 백신으로부터 2002년까지 완전히 제거되었다. 하지만 그로부터 십 년이 훌쩍 더 지난 지금까지도 백신 속 수은에 대한 두려움은 살아 있다.


3. 우리의 몸은 윌의 은유를 결정한다

영국인들은 <한 대 맞는다 jab>고 표현하고, 총을 좋아하는 우리 미국인들은 <한 발 맞는다 shot>고 표현한다. 어느 쪽으로 부르든, 백신 접종은 폭력이다. 그리고 백신 접종이 성 매개 감염병을 예방하기 위한 것일 때, 그것은 성폭력이 되는 듯하다.


백신 접종이 대개 흉터를 남기지 않는 지금도, 그 때문에 우리에게 영구적인 낙인이 찍힐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은 사라지지 않았다. 우리는 백신이 자폐증을, 혹은 오늘날 산업화된 나라들을 괴롭히는 여러 면역 장애 질병들(당뇨, 천식, 알레르기)을 일으킬지 모른다고 두려워한다. B형 간염 백신이 다발 경화증을 일으킬지 모른다고 두려워하고, 디프테리아-파상풍-백일해 백신이 영아 돌연사를 일으킬지 모른다고 두려워한다. 여러 백신을 동시에 접종하면 면역계에 부담이 될지 모른다고 걱정하고, 전체 백신 접종 수가 많으면 면역계가 압도되어 버릴지 모른다고 걱정한다. 일부 백신에 든 포름알데히드가 암을 일으킬지 모른다고 두려워하고, 다른 백신에 든 알루미늄이 뇌를 오염시킬지 모른다고 두려워한다.


그는 마크 트웨인을 언급한다. “어떤 미국인이 믿음이라는 것을 이렇게 정의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네. 즉, ‘믿음이란, 우리가 사실이 아니라고 알고 있는 것을 믿게 하는 능력’이라고 말이야.” 그리고 말한다. “그 사람 얘기는, 우리가 열린 마음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지. 작은 바위 덩어리가 철도의 화차를 막는 것처럼, 진실의 작은 조각이 커다란 진실이 나아가는 것을 막게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일세.”


4. 집단 면역

이웃이란 철학자들이 타자라고 부르는 것, 우리가 지닌 자기애의 이기성이 시험당하는 대상으로서의 존재 (키르케고르)


우리가 백신의 효과를 따질 때 그것이 하나의 몸에 어떤 영향을 미치느냐만 따지지 않고 공동체의 집합적 몸에 어떤 영향을 미치느냐까지 따진다면, 백신 접종을 면역에 대한 예금으로 상상해도 썩 괜찮을 것이다. 그 은행에 돈을 넣는다는 건 스스로의 면역으로 보호받을 능력이 없거나 의도적으로 그러지 않기로 결정한 사람들에게 기부하는 셈이다. 이것이 바로 집단 면역(herd immunity)의 원리이고, 집단 접종이 개인 접종보다 훨씬 효과적인 것은 바로 이 집단 면역 덕분이다. 


효과가 상대적으로 적은 백신이라도 충분히 많은 사람이 접종하면, 바이러스가 숙주에서 숙주로 이동하기가 어려워져서 전파가 멎기 때문에 백신을 맞지 않은 사람이나 백신을 맞았지만 면역이 형성되지 않은 사람까지 모두 감염을 모면한다. 자신을 백신을 맞았지만 미접종자가 많은 동네에서 사는 사람이 자신은 맞지 않았지만 접종자가 많은 동네에서 사는 사람보다 홍역에 걸릴 가능성이 더 높은 건 그 때문이다.


5. B형 간염 백신과 공중 보건 조치의 계급성

B형 간염 백신 접종의 한 가지 수수께끼는 최초의 공중 보건 전략이었던 <고위험군> 접종만으로는 감염률을 낮출 수 없었다는 것이다. 1981년에 B형 간염 백신이 처음 도입되었을 때는 수감자, 보건 노동자, 게이 남성, 정맥 주사를 쓰는 마약 복용자에게만 권유되었다. 그러나 B형 간염 감염률은 변함이 없었고, 그로부터 십 년 뒤에 모든 신생아에게 백신을 권장했을 때야 비로소 낮아졌다. 집단 접종만이 감염률을 낮출 수 있었던 것이다.


우리 시대가 철저히 취약한 존재로 여기도록 부추기는 아이들의 작은 몸도, 사실은 질병을 퍼뜨릴 능력이 있기 때문에 위험한 존재이기도 하다.

 

“백신은 다수 집단을 동원해서 소수 집단을 보호함으로써 효과를 발휘하지.” 아버지(의사)의 설명이다.


6. 우리에게는 병균이 필요하다

요즘도 위생 가설을 감염성 질병을 예방하지 말아야 할 이유로 해석하는 사람들이 있다. 한 친구는 내게 “아직 정확히는 모른다지만, 홍역 같은 질병이 건강에 꼭 필요할지도 모른대”라고 말했다. 하지만 아메리카 대륙의 선주민들은 몇천 년 동안 홍역 없이 살았고, 비교적 최근에 대륙에 홍역이 도입되었을 때 그 결과는 처참했다.


많은 바이러스는 우리가 없으면 번식하지 못하지만, 우리도 바이러스에게서 얻었던 것 없이는  번식하지 못하는 것이다.


7. 오염에 대한 두려움

옛날 한 수도원장은 어떻게 신자와 이단자를 구별하면 좋겠느냐는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고 한다. “모조리 죽여라. 신은 제 백성을 알아보실 것이다.”


이미 많은 연구에서, 항균 비누로 씻는 게 그냥 비누와 물로 씻는 것보다 세균을 더 잘 제거하진 않는다는 결과가 나왔다. 매스턴 박사가 넌지시 말한 바에 따르면, 트리클로산이 비누에 들어 있는 건 오로지 회사들이 세균을 씻어내기보다 죽인다고 약속하는 항균 제품에 대한 시장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홍역 환자 1,000명 중 약 1명 꼴로 뇌염이 따른다는 건 알고, MMR(홍역-볼거리-풍진) 백신 접종자 300만 명 중 약 1명꼴로 접종 후 뇌염 발생이 보고된다는 건 안다. 그런 사례는 워낙 드물기 때문에, 연구자들은 그런 뇌염이 정말 백신 때문에 일어난 건지 아닌지를 확실히 결론 내리진 못했다.


어떤 종류의 백신이든 주사 후 실신과 근육통을 일으킬 수 있는데, 그것은 백신 때문이 아니라 주사 행위 자체 때문


<위험 인식, 즉 사람들이 주변 환경의 위험 요소에 대해 내리는 직관적 판단은 전문가들이 제공하는 증거에 완강하게 저항하곤 한다.> 역사학자 마이클 윌리히는 그렇게 말했다. 우리는 우리를 해칠 가능성이 가장 높은 것들은 오히려 겁내지 않는 경향이 있다. 우리는 운전을 한다. 그것도 아주 많이 한다. 술을 마시고, 자전거를 타고, 너무 오래 앉아 있는다. 그러면서 오히려 통계적으로 따져서 별달리 위험하지 않은 것들을 걱정한다. 우리는 상어를 무서워하지만, 순 사망자 수로 따지자면 지구에서 제일 위험한 생물은 모기일 것이다.


슬로빅이 실험에서 확인했던 경우처럼 사람들이 자신의 믿음을 반박하는 정보를 접할 때, 우리는 자신이 아니라 정보를 의심하는 경향이 있다.


연구자들이 나 같은 사람에게서 목격하는 통계적 위험 무시 현상은, 부분적으로나마, 위험에 휘둘리는 삶을 살기 싫다는 마음 탓일 것이다.


독성학자들은 <용량이 독을 결정한다>고 본다. 어떤 물질이든 과잉으로 쓰이면 독이 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물이 아주 많은 용량일 때는 인체에 치명적이라, 2002년 보스턴 마라톤 대회에서 주자가 수분 과잉으로 죽은 사건도 있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물질을 용량과는 무관하게 안전한 것 아니면 위험한 것으로 생각한다. 그리고 이런 사고방식을 노출에 대해서까지 확장하여, 화학 물질에 노출되는 것은 아무리 짧거나 제한적이더라도 무조건 해롭다고 여긴다.


8. 자연은 선하다는 통념과 ‘침묵의 봄’

요즘 어떤 부모들은 아이가 백신 없이 ‘자연적으로’ 감염성 질병에 대한 면역을 발달시키도록 만든다는 발상에 매력을 느낀다. 그 매력은 백신이 본질적으로 부자연스러운 것이라는 믿음에 의지한 바가 크다. 그러나 백신은 인간과 자연 사이의 중간적 장소에 속하는 물질이다.


효과 없는 치료법, 독성 강한 예방약, 환경을 망치는 살충제가 여태 쓰이는데, 왜냐하면 말라리아에 쓸 수 있는 효과적인 백신은 아직 없기 때문이다. 안타깝게도 DDT는 현재 그런 장소에서 말라리아를 좀 더 효과적으로 통제할 수 있는 몇 가지 수단 중 하나다. 남아프리카 공화국 일부 지역에서는 일 년에 한 차례 집 안쪽 벽에 DDT를 바르는 것만으로도 말라리아가 거의 근절되었다. 미국에서처럼 비행기로 수백만 에이커에 뿌리는 방법과 비교할 때, 이 적용 방법은 환경에 주는 충격이 비교적 적다. 그러나 DDT는 여전히 완벽하지 않은 해법이다. DDT를 생산하는 화학 회사가 거의 없고, DDT를 살 돈을 기꺼이 후원하려는 기부자는 없으며, 많은 나라는 딴 나라에서는 금지된 화학 물질을 쓰기를 꺼린다.


13. 여성 치료사와 비난받는 엄마들

논문이 널리보도되자 홍역 백신 접종률이 뚝 떨어졌지만, 사실 논문의 결론은 <우리는 홍역, 볼거리, 풍진 백신과 앞서 말한 증후군 사이의 연관성을 증명하지는 못했다>라는 거였으며 논문의 주된 발견은 더 많은 연구가 필요하다는 거였다.


14. 우리는 모두 오염된 존재

백신 속 포름알데히드가 암을 일으킬지도 모른다는 공포는 미량의 물질에 대한 공포라는 점에서, 즉 사람들이 해당 물질의 다른 흔한 공급원들을 통해 접하는 양보다 상당히 더 작은 양을 두고 형성된 공포라는 점에서 수은이나 알루미늄에 대한 공포와 비슷하다. 포름알데히드는 자동차 배기가스와 담배 연기에 들어있을 뿐더러 종이 가방과 종이 타월에도 들어 있고, 가스 난로나 벽난로에서도 나온다.


고농도라면 정말 유독하지만, 포름알데히드는 인체가 만들어내는 물질인 데다가 대사 활동에도 꼭 필요한 물질이다. 게다가 애초에 우리 몸에서 순환하고 있는 포름알데히드의 양은 백신 접종으로 얻는 양보다 상당히 더 많다.


모유를 분석한 실험실들은 그 속에서 페인트 희석제, 드라이클리닝 용액, 내연제, 농약, 심지어 로켓 연료를 검출해냈다.


순수함, 특히 신체적 순수함은 언뜻 무해한 개념으로 보이지만, 실은 지난 세기의 가장 사악한 사회 활동들 중 다수의 이면에 깔린 생각이었다. 신체적 순수함에 대한 열정은 맹인이거나 흑인이거나 가난한 여자들에게 불임 시술을 실시했던 우생학 운동의 동기였다. 신체적 순수함에 대한 걱정은 노예제가 폐지된 뒤에도 한 세기 넘게 살아남았던 인종 혼합 결혼 금지법의 이면에 깔린 생각이었으며, 최근에서야 위헌으로 판정된 남색 금지법의 이면에 깔린 생각이기도 했다. 모종의 상상된 순수성을 보존하려는 노력 때문에, 그동안 인류의 유대는 적잖이 희생되어 왔다. 제대혈과 모유에 든 엄청나게 다양한 화학물질이 앞으로 아이들의 건강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는 아직 정확히 모른다지만, 최소한 우리는 우리가 출생 시점부터도 전반적인 주변 호나경보다 더 깨끗한 존재는 못 된다는 걸 안다. 우리는 모두 오염된 존재이다. 자기 몸의 세포보다 더 많은 수의 미생물을 장 속에 품고 있다. 우리는 세균으로 우글거리는 존재이고, 화학 물질로 포화된 존재이다. 한마디로 우리는 지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과 이어져 있다. 물론, 그리고 특히, 다른 사람들과도.


17. 백신 속 수은을 둘러싼 혼란

후속 연구를 통해서 에틸수은과 메틸수은은 <크나큰 차이>가 있다는 게 확인되었는데, 제일 중요한 점은 에틸수은에는 메틸수은이 일으키는 신경 독소효과가 없다는 점이었다. 2012년 ‘소아과학’에 실린 기사는 AAP의 티메로살 성명 이후 13년 동안 수행된 연구를 돌아보며, <백신 속 티메로살이 인체에 위험하다는 신뢰할 만한 과학적 증거는 없다>고 결론내렸다.


18. 자본주의와 백신

백신 접종 거부는 엄밀히 따져서 자본주의의 전형이라고는 할 수 없는 체계를 훼손하는 일이다. 이 체계에서는 온 인구가 부담과 이득을 함께 진다. 백신 접종은 자본주의의 산물을 자본의 압박에 대항하는 목적으로 사용하게끔 해주는 일이다.


19. 가부장주의 vs 소비자 중심주의

의사들의 가부장주의는 그동안 환자들의 소비자 중심주의로 교체되어 왔다. 우리는 소비자 수요 조사에 근거를 두고 작성된 메뉴를 들여다보면서 그중에서 검사와 치료법을 주문한다. 가부장주의 모형에서 아버지에 해당했던 의사는 여기에서는 웨이터다. 손님이 왕이라는 생각은, 의학에 도입될 경우 위험천만한 금언이 된다. 생명 윤리학자 아서 캐플런은 이렇게 경고했다. <사람들에게 의료는 시장일 뿐이고 그들은 의뢰인일 뿐이며 그들이 고객으로서 만족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환자의 자율성을 제공받아야 한다고 계속 말해준다면, 의료의 전문성은 소비자의 요구 앞에 붕괴하고 말 것이다.> 의사들은 환자들이 원하는 것을 주려는 유혹을 느낄 것이다. 그것이 설령 환자들에게 나쁘더라도.


21. 지나치게 많고 지나치게 이르다?

무균실에서 살지 않는 한, 모든 아기에게는 여러 차례의 백신 접종에서 얻은 약독화된 항원을 처리하는 것보다 매일 일상에서 감염을 물리치려고 싸우는 게 더 버거운 일일 것이다.


23. 양심적 거부와 도덕의 문제

“까다로운 부분은, 그냥 불편한 느낌과 양심이 말해주는 바를 어떻게 구별할 건가 하는 문제야”


법률은 일부 사람들이 의학적, 종교적, 철학적 이유에서 백신 접종으로부터 면제받을 수 있도록 허락한다. 하지만 우리 스스로 그런 사람 중 하나가 될 것인가 말 것인가 결정하는 문제는 정말로 양심의 문제다.


여동생은 이렇게 제안했다. “서로 의존하는 관계라고 생각해 봐. 우리 몸은 자기 혼자만의 소유가 아니야. 우리는 그렇지 않아. 우리 몸들은 서로 독립적이지 않지. 우리 몸의 건강은 늘 남들이 내리는 선택에 의존하고 있어.”  이 대목에서 동생은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몰라서 잠시 머뭇거렸는데, 그녀에게는 드문 일이었다.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지도 잘 모르겠지만, 요컨대 독립성이란 환상이 존재한단 거야.”


24. 자연적 몸과 정치적 몸

우리는, 우리 몸은, 독립적이면서도 의존적이다.


종류를 불문하고 모든 위험-편익 분석과 집단 면역 모형에서는 백신 접종이 대중 뿐 아니라 개인에게도 이득이라는 결론이 나오는 편이다.


26. 건강과 질병의 이분법

그녀가 조사했던 사람들 중 일부는, 그녀의 표현을 빌리자면 <면역 마초> 같은 태도를 보였다. 가령 자기 면역계가 <끝내준다>고 말하는 식이었다. 역시 마틴이 들은 말을 인용하자면, 어떤 사람은 <훌륭한 생활 기준을 따르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백신이 필요하지만, 중산층이나 상류층 사람들의 좀 더 세련된 면역계에는 백신이 방해만 될 것> 이라고 말했다.


면역 기능이 약화된 사람은 잘 기능하는 면역계를 가진 사람들이 면역을 지녀서 자신을 질병으로부터 보호해 주는 데 의존할 수 밖에 없다.


질병이 정말로 무언가에 대한 벌이라면, 그것은 오직 살아있는 데 대한 벌일 뿐이다.


어릴 때 내가 아버지에게 무엇이 암을 일으키느냐고 물었더니, 아버지는 한참 생각하다가 이렇게 대답했다. “생명, 생명이 암을 일으킨단다.” 암의 역사를 쓴 싯다르타 무케르지의 책을 읽기 전까지, 나는 아버지의 저 대답을 교묘한 둘러댐으로만 여겼다. 무케르지는 책에서 생명이 암의 원인일 뿐 아니라 심지어 암이 곧 우리라고 주장했다. “그 타고난 분자적 핵심까지 속속들이, 암세포는 과잉 활동적이고, 생존 능력을 타고났고, 공격적이고, 생식력이 뛰어나고, 창의적인 우리 자신의 복사본이다” 그리고 그는 덧붙였다. “이것은 결코 은유가 아니다.”


27. 과학 정보를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우리가 지식을 몸으로 상상한다면, 몸의 일부가 맥락으로부터 뜯겨 나갔을 때는 뻔히 해로울 것임을 알 수 있다. 백신을 둘러싼 토론에서는 이런 식의 절단이 상당히 자주 벌어진다. 전체 연구가 지지하지 않는 어떤 입장이나 생각을 지지하기 위해서 개별 연구를 내세우는 것이다.


우리가 과학적 증거를 알아볼 때는, 정보 전체를 고려해야 한다. 수역 전체를 조사해야 한다. 만일 그것이 방대하다면, 어느 한 사람이 하기에는 불가능한 일이 된다. 의학 한림원에 제출할 2011년 백신 부작용 보고서를 작성하기 위해서 동료 심사를 거친 논문 12,000편을 점검하는 일에는 의학 전문가 18명으로 구성된 위원회가 꼬박 2년을 들여야 했다. 그 위원회에는 연구 기법 전문가, 자가 면역 질병 전문가, 의료 윤리학자, 아동 면역 반응에 대한 권위자, 아동 신경학자, 뇌 발달 연구에 전념하는 연구자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들의 보고서는 백신이 비교적 안전하다는 사실을 확인한 것은 물론이거니와 오늘날 우리에게 주어진 정보를 항해하는 데 어떤 종류의 협동이 필요한지도 보여주었다. 우리는 혼자서는 알 수 없다.


28. 모르는 것이 주는 두려움

“두려움은 존중할 수 있어요. 백신에 대한 두려움은 이해할 만합니다. 하지만 그런 결정은 존중할 수 없어요. 그건 쓸데없는 위험을 지는 겁니다.”


아버지가 스토아 철학에 끌린 이유는, 내게 설명하신 데 따르면, 우리가 자신에게 벌어지는 일을 통제할 순 없지만 그 일에 대한 감정은 통제할 수 있다는 생각 때문이다. 장 폴 사르트르의 말을 빌리자면, “자유란 주어진 것에 대한 행함”이다.


29. 의학적 신중함과 사회적 편견

사람들이 편견으로 기우는 경향성은 스스로가 특히 취약하다고 느끼거나 질병에 대해서 위협을 느낄 때 좀 더 강화된다고 한다. 일례로 한 연구에 따르면, 임신한 여성은 임신 초기 단계에서 외국인 혐오를 좀 더 많이 드러낸다. 슬프게도 우리는 자신이 취약하다고 느낄수록 좀 더 편협해지는 것이다.


하지만 그래도, 나는 여전히 백신 접종에는 의학을 초월한 이유들이 있다고 믿는다.


30. 면역은 우리가 함께 가꾸는 정원이다

우리는, 마틴 루서 킹이 상기시켰던 것처럼 우리 모두가 ‘벗어날 수 없는 상호성의 그물에 얽혀 있다는 사실’을 종종 못 보곤 한다.


우리는 싸우지 않고 질병과 싸울 수 있을지도 모른다. 내가 이 이야기를 읽은 기사의 제목은 <몸 속 미생물 정원을 가꾸다> 였다. 이 은유에서, 몸은 이질적이고 낯선 것이라면 모조리 공격하는 전쟁 기계가 아니다. 우리가 적절한 환경에서 다른 많은 미생물과 함께 균형을 이루어 살아가는 정원이다. 몸의 정원에서, 우리가 제 속을 들여다볼 때 발견하는 것은 자기가 아니라 타자다.

  

우리가 사회적 몸을 무엇으로 여기기로 선택하든, 우리는 늘 서로의 환경이다. 면역은 공유된 공간이다. 우리가 함께 가꾸는 정원이다.



Posted by Daesung Ju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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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리학 일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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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통제력을 발휘하기 위한 에너지가 고갈되어 자기통제력을 잘 바루히할 수 없는 상태를 ‘자아 고갈’ 상태라고 한다…

방전된 정신력에 필요한 이 연료의 정체는 과연 무엇일까? 많은 연구 끝에 이 에너지원이 포도당과 관련이 있음이 밝혀졌다. 연구에 의하면, 자기통제력을 발휘하고 난 후 설탕물을 마신 사람들은 자기통제력이 회복되는 모습을 보였으나 인공감미료로 단맛만 낸 물을 마신 사람들은 회복되지 않는 현상이 나타났다. 자기통제력을 발휘하고 난 후의 혈당 수치가 이후의 자기통제력과 관련성을 보이기도 했다.

-26쪽 “설탕이 의지력을 돕는다”


에너지 소모가 많은 상태에서는 관용을 잘 발휘하지 못하는 현상이 나타난다. 자기통제력이 필요한 과제를 하는 등 에너지를 많이 소모한 사람들은 그렇지 않은 사람들에 비해 자신의 입장(예컨대 정치적 입장)과 다른 의견을 듣는 것을 더 꺼려하는 현상이 관찰된 바 있다. 에너지가 소모된 상태에서는 내 의견과 다른 의견은 “별로 중요하지 않고 믿을 수 없다”고 응답하는 경향을 보인다. 역시 비슷하게 성별, 인종 특정 지역 출신에 따른 고정관념을 벗어나는 데에도 에너지가 필요하다는 사실이 밝혀지기도 했다…

이와 관련된 오류가 바로 ‘확증편향’이다. 우리는 어떤 말이 정말 옳기 때문에 지지하기도 하지만, 지지하기로 한 입장과 맘에 드는 결론을 먼저 정한 다음 거기에 맞는 증거들을 수집하기도 한다.

-42쪽 “생각을 조절하기”


감정을 억제한 참가자가 재해석을 한 참가자에 비해 대화를 하는 내내 혈압이 더 높았다. 감정을 억제한 사람이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다는 사실은 별로 새로울 게 없으나 좀 더 흥미로운 부분은 대화 ‘상대방’의 스트레스 수준이었다.

그래프에서 확인할 수 있듯 대화 도중 감정을 억제한 경우 당사자뿐 아니라 그 사람의  ‘파트너’ 또한 혈압이 상당히 올라가는 현상이 확인되었다… 대화 도중 한 사람만 감정을 억제해도 같이 있는 사람까지 스트레스를 받게 된다는 것이다.

반면 감정을 일으킨 경험에 대해 “이 일은 이렇게 생각해볼 수도 있지 않을까?”라며 재해석을 해본 참가자들(감정을 억제하지는 않았지만 적응적인 방법으로 조절한 사람들)의 경우 본인과 상대방 모두 마음의 평화를 비교적 잘 유지한 것으로 나타났다. 정리하면, 감정조절이 필요할 때에는 감정을 억누르기보다 적절히 표현하며 마음 속으로 재평가해보는 것이, 나와 상대방의 행복, 관계의 질에 도움이 될 것이다.

-47쪽 “감정을 다스리기”


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연구에서는, 학생들은 특히 스트레스가 맣은 시험기간에 자기통제력이 요구되는 다양한 일들에 실패하는 경향을 보인다는 것을 확인했다. 학생들은 평소보다 시험기간에 감정조절에 실패하고(갑자기 막 화를 낸다든가), 정크 푸드를 많이 먹고, 약속을 잘 안 지키며 과소비하는 경향을 보였다. 즉 신경 쓸 일과 스트레스가 많을 때 우리는 감정이나 생활 패턴을 잘 조절하지 못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도 마찬가지로 조절을 안 하고 싶어서라기보다 스트레스 때문에 중요한 에너지를 소모하게 되어 수행이 떨어졌다는 것이 포인트다...

스트레스를 해소하기 위해서는 친구들과 수다를 떨거나 재미있는 텔레비전 프로그램을 보면서 기분전환을 하는 것이 도움이 된다. 이렇게 만들어진 긍정적 정서는 스트레스를 해소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많은 연구들이 스트레스를 받았을 때 재미있는 영상을 봄으로써 긍정적 정서를 느끼게 되면 부정적 정서가 줄어들고 스트레스 또한 줄어든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긍정적 정서는 스트레스를 줄여줄 뿐 아니라 자아고갈 상태에서 우리를 회복시켜주는 등 떨어진 수행을 다시 회복시키는 효과도 있다. 따라서 학자들은 긍정적 정서가 마치 마법의 지우개처럼 스트레스나 에너지 고갈을 ‘취소’ 또는 ‘치료’하는 효과가 있다고도 이야기한다.

-56쪽 “스트레스 줄이기 연습”


자기통제는 불필요한 욕망을 꺾는 것, 즉 유혹에서 벗어나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다. 그런데 이 단계는 자기통제 과정을 통틀어 갖아 큰 난관이라고 할 수 있다. 왜냐히면 유혹을 이기는 것은 너무 힘든 일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애초에 쓸데업시는 유혹을 원천봉쇄하는 방법은 없을까? 그 방법으로 연구자들은 ‘ㅇㅇ하면 반드시 ㅇㅇ한다’는 식의 ‘무조건적 명령문 만들기 (if-then plan)’를 추천한다. 예컨대 ‘운동을 열심히 한다’같은 추상적인 목표 대신, ‘아침에 눈을 뜨면 팔굽혀펴기를 10번 한다’, ‘계단과 엘리베이터가 있다면 반드시 계단을 택한다’, ‘수학문제를 하나 틑릴 때마다 무조건 앞구르기 10회를 한다’와 같은 구체적인 조건과 행동을 만들어두라는 것이다…

연구에 의하면 if-then 전략을 쓰는 사람들은 그렇지 않은 사람들에 비해 비교적 적은 에너지를 들여서 자기통제를 하고 그 결과 자아고갈 현상도 덜 겪는다. 비교적 ‘지속 가능한’ 자기통제를 하게 되는 것이다.

-74~75쪽 “무조건적 명령문 만들기”


현실을 직시하기 전 순진무구한 우리들은 세상을 장밋빛으로 보는 경향이 있다. 연구에 의하면, 사람들은 내가 하는 일들이 처참하게 망하기보다는 어떻게든 잘 풀리게 될 거라고 생각하고 과거는 실패로 가득했을지 몰라도 미래에는 성공이 기다리고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런 막연한 긍정적인 예측은 사실 자신의 ‘바람’에 기초한 환상에 가깝다. 따라서 현실을 직시할수록 막연한 긍정적 사고는 점차 줄어들 수밖에 없다. 일례로 우울증 환자들이 일반인들에 비해 현실을 더 정확하게 예측하는 등 현실 직시는 우울증과 관련을 보이는데, 이를 ‘우울증적 현실주의(depressive realism)’라고 한다.

-114~115쪽 “현실 직시를 돕는 부정적 사고”


일반적으로 긍정적인 편인 사람들은 응원을 받았을 때 더 좋은 성과를 보였다. 하지만 비관적인 사람들은 응원을 받으면 오히려 성과가 떨어졌다. 이들에게는 응원을 받고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것이 오히려 독이 되었다. 이외에도 많은 연구들이 기본적으로 부정적인 사람들은 긍정적으로 생각할 때보다 “망하면 어쩌지”라며 걱정할 때 더 성과가 좋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왜 이런 현상이 나타나는 것일까? 연구자들은 긍정적인 사람들이 희망을 행동의 양분으로 삼는 반면, 비관적인 사람들은 자신들의 높은 불안을 행동의 양분으로 삼기 때문이라고 이야기한다. 긍정적인 사람들은 희망을 가짐으로써 의욕을 얻고 실패에 대한 불안이 줄어들어 성과가 올라가지만, 비관적인 사람들에게 이런 과정은 잘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118~119쪽 “비관주의자도 적응적일 수 있다”


...연구자들은 이러한 현상을 ‘맹목적인 축적(mindless accumulation)’이라고 부른다. 사람들이 자신이 원하는 바를 분명히 인식한 채 노력을 기울인다면 목표 달성 시점에 노력을 멈춰야 한다. 원하는 바를 다 얻고 난 후에는 굳이 노력을 기울일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노력을 하면서도 자신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왜 그 노력을 하는지 잘 모르거나 인식하지 못한다. 따라서 어느 시점까지 애써야 하는지도 잘 모른다. 결국 더 이상 노력을 쏟을 수 없을 때까지, 몸이 지치고 쓰러질 때까지 노력하게 된다.

노력을 멈추는 기준이 목표 달성이 아니라 신체적/정신적 피로가 된다는 것이다. 목적이 이끄는 삶이 아니라 피로가 이끄는 삶이 된다고나 할까? 안타깝게도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이런 삶을 살아가고 있다.

-126~127쪽 “무조건적인 노력에 대한 경고”


미주리대학의 심리학자 로라 킹과 동료들은 사람들이 어떨 때 가장 삶이 의미있다고 느끼는지를 조사했다. 여러 연구를 통해 일상 생활 속에서 다양한 활동들과 삶의 의미감 사이의 관계를 조사한 결과, 사람들이 실생활에서 의미감을 느끼는 겨이우는 고생 끝에 무엇을 성취했을 때보다 행복할 때였다. 객관적 성취보다도 행복감 같은 정서가 사람들이 느끼는 삶의 의미감을 더 잘 설명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사람들은 무엇보다 행복할 때 자신의 삶이 의미있다고 느끼며, 고생 끝에 대단한 것을 성취하더라도 그 과정에서 즐거움과 보람, 기쁨 같은 낙이 없다면 그 일을 통해 충만함을 느끼기는 어렵다는 것이다.

이런 현상이 나타나는 이유를 학자들은 긍정적 정서의 기능에서 찾는다. 학자들은 기분이 좋고 평온하다는 것은 다 잘되고 있다는 신호라고 이야기한다. 반면 뭔가 불안하다거나 짜증이 나는 것은 문제가 있다는 신호라고 본다.

-160쪽 “자아실현은 고통 끝에 오는 것일까?”


사람들의 자존감이 높아지거나 낮아지는 데에는 몯느 일이 동일한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따라서 스스로의 자존감이 삶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 이해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자존감이 걸려 있는 영역이 무엇인지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 자존감이 수반되는 영역이 어디인가에 따라 어느 부분에서 좌절을 느끼고 어느 부분에서 희열을 느끼는지가 달라지고, 삶의 크고 작은 목표들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연구에 의하면, 사람들이 자신의 자존감을 거는 분야는 외모, 사람들의 인정, 경쟁에서 이기는 것, 학문적 능력, 가족의 사랑과 지지, 도덕성, 신의 사랑 등 크게 일곱 가지라고 한다.

-180쪽 “내 자존감이 걸려있는 영역은?”


실제로 여니구에 의하면 자존감이 높든 낮든 실제 능력이나 자신의 능력에 대한 자신감에는 큰 차이가 나지 않는다. 다만 “다른 사람들도 내가 잘한다고 생각해줄까?”의 문제에서 큰 차이를 보인다. 자존감이 건강한 사람들은 “나도 내가 괜찮다는 걸 알고 다른 사람들도 나를 그렇게 생각한다”고 믿는 반면, 자존감이 건강하지 않은 사람들은 “나도 내가 장점이 있다는 건 알지만, 다른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것 같아”라고 믿는 것이다. 실제로 엄친아 수준으로 많은 것을 성취한 사람들도 자신이 성취한 것을 주변 사람들이 별로 인정해 줄 것같지 않다고 생각할 경우 자존감이 상당히 낮은 편이라는 연구가 있다.

이렇게 자존감이 건강하지 않은(지나치게 낮거나 불안정한) 사람들의 큰 특징 중 하나는 사람들이 자신을 받아들여줄 거라는 확신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때문에 이들은 특히 관계에서 불안을 많이 느낀다.

-198쪽 "소속감이 자존감을 돕는다"


이렇게 사랑과 인정을 부여해주는 가족, 친구, 연인 등의 안정적인 관계는 자존감의 매우 중요한 요소다. 만약 자신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부분에서 충분히 잘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자신에게 좀처럼 만족할 수 없고 자존감이 불안한 편이라면 나에게 부족한 것은 다름아닌 좋은 관계가 아닐지 생각해보자.

-200쪽 "건강한 자존감을 위한 운동법"


가난한 개인들이 부유한 개인들에 비해 행복도가 낮은 건 맞지만 일단 소득이 일정 수준 이상이 되면 개인 간 행복도에는 큰 차이가 나지 않는다.

대니얼 카너먼과 동료들이 2010년 미국에서 4만 명을 대상으로 한 대규모 조사 결과, 연소득 4~5만 달러를 기점으로 돈이 실제로 느끼는 '행복감(정서)'에 미치는 영향은 서서히 줄다가 7만 달러 즈음에서 멈추는 현상이 나타났다.

...긍정적 정서의 경우 소득 최하위 그룹과 최상위 그룹에서 행복감을 자주 느낀다고 한 사람들이 각각 약 70퍼센트, 90퍼센트로 생각보다 큰 차이가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부정적 정서를 별로 느끼지 않는다는 케이스도 각각 55퍼센트, 80퍼센트, 행복에 대한 인지적 평가도 20점 만점에 각각 5점, 7.5점으로 소득 최하위층과 최상위층의 행복도 차이가 어마어마하게 크지는 않았다.

-226~227쪽 "그래도 돈은 중요하다"


대니얼 길버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사람들은 돈을 많이 벌어서 여유를 즐기고 편하게 살면 행복해질 거라고 생각하지만 우리의 마음은 뭔가에 빠져 있을 때 행복하다. 친구와 수다를 떨어간, 뭔가를 만들거나, 성관계를 할 때가 대표적이다." 즉 우리의 삶은 큰 성취 후 더 이상 할 게 없을 때보다 뭔가에 빠져있을 때 더 행복하다는 것이다. 결국 성취의결과가 어떠한가, 어떤 타이틀을 다느냐는 것보다 매 순간을 누구와, 무엇을, 어떻게 하며 사는가, 즉 '어떻게 사느냐'가 훨씬 중요하다는 것이다.

-241쪽 "어떻게 살면 좋을까?"


그 결과 재미있게도 여가 시간을 갖거나 별일 없이 시간을 써버린 사람들, 무얼 하든 자신을 위해 시간을 쓴 사람들보다 남을 위해 시간을 쓴 사람들이 가장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이 넉넉하다고 지각하며 마음의 여유를 갖는 모습을 보였다. 따라서 연구자들은 많은 사람들이 시달리고 있는 만성적인 '시간 기근(time famine)'에 대한 한 해법은 남을 위해 시간을 보내는 것이라고 이야기했다.

이런 현상이 나타나는 이유로 연구자들은 타인을 위해 시간을 쓰고 있는 자신을 바라볼 때 더 "내 시간이 여유로운가 보다"라고 느기게 되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연구에 의하면, 돈의 경우도 자신보다 타인을 위해 쓸 때 스스로가 더 '풍족하다는 느낌'을 받는 현상이 나타나는데 시간도 누군가에게 나눠줄 때 자신의 시간이 더 풍족하고 여유로운 것첯럼 느끼게 된다는 것이다.

흔히들 시간에 쫓길수록 특히 다른 사람들을 위해 쓰는 시간을 줄이려는 듯 보인다. 하지만 그럴수록 다른 사람에게 시간을 내주는 것이 마음의 여유를 줄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해 보자."

- 263쪽 "마음의 여유를 가져라"


집단주의 문화의 장점 중 하나는 개인의 리스크가 분산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연구들에 의하면, 개인주의 문화보다 집단주의 문화에서 더 의무적으로 가족이나 친구에게 사업자금을 빌려준다거나, 빚을 대신 갚아주는 일들이 흔하게 일어난다고 한다. 개인이 (특히 금전적으로)실퍃나 경우 그 책임을 개인이 고스란히 다 떠안기보다 책임이 특히 가족구성원들 같은 주변 사람들에게도 분산되는 경향이 비교적 크게 나타난다. 또한 개인들의 행동을 집단과 사회 전체에 유익한 방향으로 통제할 수 있기 때문에 나라 경제발전 같은 사회적 목표를 달성하는 데에는 집단주의 문화가 큰 도움이 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다른 건 몰라도 개인의 자유를 제한한다는 면에서 '행복'은 집단주의 문화보다 개인주의 문화가 훨씬 이득인 경향이 나타나게 된다.

- 274쪽 "한국이 불행한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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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해자


  이십 년만에 만난 그녀의 말이었다.

  양명숙. 그렇게도 사랑하던 명숙이가 술집 마담이 되어 내 앞에 서서 한 말이었다.

  그녀는 늙었었다. 그러나 그녀의 그 눈만은 아직도 옛날처럼 맑고 고왔다. 처음 보는 세상에 놀라는 갓난 송아지의 그것처럼 까맣고 윤기 있는 그 순한 두 눈, 어딘가 먼 먼 곳을 바라보던 꿈꾸는 듯한 그 눈.

  그녀의 커다란 두 눈에는 마침내 샘물처럼 치렁치렁 눈물이 고이는 것이었다.

  나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였다.

  그녀의 말대로 나는 아무 것도 가지고 있지 못했다.

  열정도 용기도, 또 지성도 신앙도, 아니 하다못해 허위나 악덕마저도 내게는 없었다.

  완전한 등신이었다.

  - 61쪽


  "용서하게. 나 술 못 마시는 걸 자네도 알지 않나."

  "알지. 아니까 마시라는 거야. 목사, 장로, 집사, 술만 안마시면 별짓 다해도 천당 간다고 생각하는 그 작자들, 교회를 무슨 자기네 고리대금 연락소로 아는 그런 장로들. 난 자네도 그런 축이 될까봐서 그러는 거야. 그래, 깔고 앉아서라도 술을 먹이고 싶단 말이야. 집어치우란 말이야. 하나님을 집어치우라는 거 아니야. 오해 말어. 그 국산 예수 좀 집어치우란 말이야."  

  - 75쪽


  그런데 내가 속해 있는 사회, 소위 기독교 사회를 생각하자 나는 술 안 마신 얼굴이 술츃나 그들 앞에서 아무도 모르게 확 달아올랐다.

  그저 손가락 하나를 들고 내리는 것까지도 그것이 죄냐 아니냐로 따지려드는 사회.

  왜 그들은 세상만사를 죄냐 아니냐로만 따지려드는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예수님은 분명히 서로 사랑하라고 하셨다. 그러나 그들은 남을 사랑하기에 노력하기보다 남을 해치지나 않을까 두려워할 뿐이고, 선을 행하고자 하기보다는 죄를 범하지나 않을까만 두려워하는 것이다.

  모든 일에 소극적이고 이기적인 그들.

  아버지 하나님 앞에 안타까이 원할 줄도 모르고, 진심으로 감사할 줄은 더구나 모르고, 그저 귀신 딱지 앞에 엎드려 두 손을 삭삭 비는 무당과 흡사한 자세로 항상 죄만 사해달라고 빌고 있는 -그러면서도 막상 죄가 무엇인지도 모르는.

  - 80쪽


  갑자기 어떤 외로움이 꽉 가슴에 찼다. 그것은 내가 집을 떠날 때 아내가 없었다는 사실보다도, 딱히 약속은 한 것도 아니었고 또 그러리라고 꼭 믿고 있었던 것도 아니면서 명숙이 역에 나타나지 않았다는 데서 오는 마음의 그늘이었다.

  모슨 게임을 하는지 저만치 모여 앉은 애들이 떠들썩 웃었다.

  나는 그 학생애들이 부러웠다. 다시 한번 쟤들 같은 학창시절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정말 하루의 공백도 만들지 않고 청춘을 꽉 채워 살겠다고 생각하였다.

  나는 인생을 연극이라고 한 사람이 누구였는가 하고 생각하였다. 인생은 결코 연극이 아니었다. 그렇게 지루하고 권태로워도 중간에서 그만둘 수 없는 것이 인생이기 때문에, 또 그렇게 안타까이 후회를 하여도 다시 할 수 없는 것이 인생이기 때문에.

  나는 또 한번 뼈저리게 공허를 느꼈다. 텅빈 나의 지난날들. 자고 깨고 자고 깨고 그저 단조로운 짓을 용케도 사십 년간이나 계속해왔다고 나는 생각하였다.

  회색 청춘, 아니 완전히 블랭크 그대로인 청춘, 다시는 채울 수 없는 그 블랭크.

  - 122쪽


  그러기에 나는 생각하였다. 인간이란 나의 아버지가 생각하듯이 하나님 아버지의 종으로 태어난 것도 또 나의 아내가 생각하는 것처럼 영원히 아담과 이브의 원죄를 면할 수 없는 그런 지옥 같은 죄 속에 던져진 죄인도 아니고 실은 무한히 너그럽고 크신 은총으로 주어진 것이라고.

  우리의 일생은 아버지께서 주신 축복의 선물이라고.

  우리는 아버지 하나님에게 빚진 자가 아니라 아버지 하나님께 상받은 자라고. 그것은 결코 교만은 아니라고 나는 생각하였다. 그러나 나는 이 아버지가 나에게 주신 즐거워야 할 청춘을, 저 한껏 아름다웠어야 할 청춘을, 성경에 있는 불충한 종이 주인이 맡기고 간 돈을 실수할가 두려워한 나머지 아무 사업도 하지 않고 그대로 땅속에 묻어두었다 도로 돌리드싱 혹시나 더럽힐까, 또 혹시나 죄지을까 하는 마음에서 예배당에 맡겯누 채 아무 것도 못하고 지낸 것이었다. 이제 만일 내가 하나님께 받았던 청춘을 아무런 보람도 더함이 없이 그대로 그에게 돌릴 때 과연 하나님 아버지는 나를 두고 

  "이 어리석은 자식아"

하고 웃지 않으리라고 누가 단언할 수 있을까.

  - 125쪽



오발탄


  "저도 형님을 존경하고 있어요. 고생하시는 형님을. 용케 이 고생을 참고 견디는 형님을. 그렇지만 형님은 약한 사람이야요. 용기가 없는 거지요. 너무 양심이 강해요. 아니 어쩌면 사람이 약하면 약한 만치, 그만치 반대로 양심이란 가시는 여물고 굳어지는 것인지도 모르죠."

  "양심이란 가시?"

  "네. 가시지요. 양심이란 손끝의 가십니다. 빼어버리면 아무렇지도 않은데 공연히 그냥 두고 건드릴 때마다 깜짝깜짝 놀라는 거야요. 윤리요? 윤리. 그건 나이롱 빤쯔 같은 것이죠. 입으나마나 불알이 덜렁 비쳐 보이기는 매한가지죠. 관습이요? 그건 소녀의 머리 위에 달린 리본이라고나 할까요? 있으면 예쁠 수도 있어요. 그러나 없대서 뭐 별일도 없어요. 법률? 그건 마치 허수아비 같은 것입니다. 허수아비. 덜 굳은 바가지에다 되는대로 눈과 코를 그리고 수염만 크게 그린 허수아비. 누더기를 걸치고 팔을 쩍 벌리고 서 있는 허수아비. 참새들을 향해서는 그것이 제법 공갈이 되지요. 그러나 까마귀쯤만 돼도 벌써 무서워하지 않아요. 아니 무서워하기는커녕 그놈의 상투 끝에 턱 올라앉아서 썩은 흙을 쑤시던 더러운 주둥이를 쓱쓱 문지러도 별일 없거든요. 흥."

  - 184~185쪽


  영호는 푹 고개를 떨구었다.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 한숨이 후르르 떨고 있었다. 철호는 한참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윗목에 앉아 있던 철호의 아내가 방바닥에 떨어진 눈물을 손끝으로 장난처럼 문지르고 있었다. 영호도 훌쩍훌쩍 코를 들이켜고 있었다.

  - 190쪽


  "어쩌다 오발탄 같은 손님이 걸렸어. 자기 갈 곳도 모르게."

  운전사는 기어를 넣으며 중얼거렸다. 철호는 까무룩히 잠이 들어가는 것 같은 속에서 운전사가 중얼거리는 소리를 멀리 듣고 있었다. 그리고 마음 속으로 혼자 생각하는 것이었다.

  '아들 구실. 남편 구실. 애비 구실. 형 구실, 오빠 구실. 또 계리사 사무실 서기 구실. 해야할 구실이 너무 많구나. 너무 많구나. 그래 난 네 말대로 아마도 조물주의 오발탄인지도 모른다. 정말 갈 곳을 알 수가 없다. 그런데 지금 나는 어디건 가긴 가야 한다.'

  - 20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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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속사회

저자
엄기호 지음
출판사
창비 | 2014-03-17 출간
카테고리
정치/사회
책소개
나는 접속한다, 고로 차단된다2014년 우리 사회에서 가장 주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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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 병들었는데 아무도 아프지 않은 이유 1

 - 초조한 나르시시스트끼리 

   서로 징징대기만 하니까.


사실 우리가 다른 사람의 말을 듣는 것에 질려버린 큰 이유는 서로 징징거리는 소리만 하고 있기 때문이다. 자신의 사적인 경험을 자기만의 고통으로만 말할 줄 알지 남들도 들어줄 만한 '공적인 이슈들을 다루는 언어'로 전환해내진 못한다. 또한 이를 뒤집으면 우리는 남들의 이야기를 공적인 이야기로 들을 줄 모른다는 뜻도 된다. 말하는 입이나 듣는 귀나 모두 사적인 것을 공적인 것으로 번역해내는 능력이 없는 셈이다. 

  - 프롤로그, 26쪽


초조함은 지금까지 이야기한 것처럼 자신의 삶을 총체적으로 점검하는 것 자체를 불가능하게 한다. 삶의 목표와 방향에 댛나 총체적 점검에서 초조함을 대체한 것이 '관리'다. 내 삶 그 자체에 대해서는 돌아보지 않는 대신 이미 설정된 목표와 방향 내에서 제대로 과업이 수행되는지 아닌지를 감시·관리하는 일만이 남게 된다. 이 자기 감시와 관리의 기술이 발달하고 이에 충실할수록 정해진 트랙 바깥으로 내려오거나 트랙의 바깥을 상상하는 것을 불가능하게 하는 것이 통치의 전략이다. 

  두번째로 통치는 개인이 이 초조함을 자신의 개인적인 감정 상태로 받아들이게 함으로써 초조함의 원인으로 자신의 부족을 탓하게끔 조장한다. 사람들은 만성적인 초조함의 상태에 있으면서도 왜 자신 뿐만 아니라 거의 모든 사람이 초조해하는지를 돌아보지 못한다... 적어도 세 사람 이상이 동일한 문제를 겪고 있다면 이는 사적인 것을 넘어 공공의 문제라 할 수 있다. ...개인이 자신의 문제를 사회적인 것으로 보편화하지 못하고 자기의 문제로 환원시키는 것, 이 또한 통치 전략 중 하나다. 

  - 237~238쪽, 제3부 / 제1장 성장은 가능한가


타자와의 만남을 차단하고 그 만남을 구경으로 전환하며 자신의 세계에 만족하고 안도할 때 만남은 나르시시즘으로 포획된다. 타자는 나에게 내 세계의 협소함을 깨닫게 해줄 뿐 아니라 내 세계의 안온함을 일깨워 주는 존재다... 나르시시즘이라는 삶의 태도에서 타자에 대해 사람이 가질 수 있는 마음의 최대치는 '동감-연민'(sympathy)에 불과하다.

  이런 감정 이입에는 치명적인 위험이 숨어 있다. 내가 일시적으로 그 사람과 하나가 되긴 하지만 그 바닥에는 나와 그 사람의 처지는 다르고 '공통된 것'(the common)이 없다는 인식이 깔려 있다... 대개 우리가 사회적 약자를 보며 느끼는 연민은 나는 그렇지 않다는 안도감과 쌍을 이룬다. 연민의 결과가 나르시시즘으로 귀결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근대 서구가 주목해 왔던 주체의 성장 과정이 왜 기본적으로 타자를 도구화하는 나르시시즘인지...

  낯선 것과 대면하여 그 매혹에만 휩쓸려 버릴 때, 우리는 모든 것을 자기 자신의 관점에서만 바라보게 된다. 이처럼 상황 판단을 전혀 내리지 못하고 자기 자신에 도취하면 결국 자아의 상실로 치닫게 되지만 우리는 한사코 자신이 문제를 해결해 냈으며 전혀 문제가 없다고 여기게 된다. 그런 점에서 나르시시즘의 갖아 큰 무기는 바로 '정신승리'라고 할 수 있다. 

  - 249~252쪽, 제3부 / 제2장 무엇이 우리의 우정을 가로막는가


모두 병들었는데 아무도 아프지 않은 이유 2

 - 각자도생의 시대, 외로움에 파묻힌 사람들


이 사회에서 우리 모두는 외로워졌다. 그리고 외로움이 곧 인간의 실존이라고 착각하게 되었다. 마리프랑스 이리구아얭에 따르면 외로움은 남에게 거절당하거나 자신의 존재 가치가 부정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다. 사람이 옆에 있거나 없거나 따로 떨어져 나 혼자인 것 같은 감정이며, 내가 세상으로부터 전혀 이해받지 못하고 고립되어 있다는 느낌이다. 이 외로움의 상태에서 인간은 "자신에 대한 신뢰를 상실"하게 되고 "자아와 세계를 생각하고 경험할 수 있는 능력"을 상실하게 된다. 무엇을 경험하더라도 그것이 무엇에 대한 실감과 체험이며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를 보증할 방법이 없다. 이 상태가 되면 인간에게는 세계도, 타자도 필요 없어지게 된다. 

  - 제2장 단속사회의 출현: 타자와 차단하고 표정까지 감춘다, 82쪽


근대사회는 오디세우스 같은 개인이라는 독특한 인간의 존재 양식을 두루 퍼뜨렸다. 개인이란 다른 누구도 아닌 '나'를 말한다. '나'가 되기 위해서는 자신의 생활을 지금까지 존재하던 전통이나 습관에 그저 맞추고 따라해서는 안 된다. 따라서 근대적 개인에게 성찰성은 필수적이다. 성찰성이란 "새로운 정보나 지식에 비추어 이루어지는 항상적인 수정"을 의미한다. 개인의 자아정체성은 바로 '성찰하는 자아'로서 규정된다. 여기서 개인의 삶의 연속성은 집단에 의해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개인이 수행해야 하는 과제이며 자아 실현이라는 이름으로 완성된다...

  그렇다면 과연 모든 인간이 사회적 사슬로부터 해방되어 자신의 삶을 스스로 기획하는 서사적 주체가 되었을까. 오히려 우리는 사회가 붕괴함과 동시에 개인도 붕괴하는 역설을 맞이했다. 살아가며 자신이 참조할 만한 준거 자체가 소멸해 버렸고 공중에 무중력 상태로 흩뿌려졌다... 근대 자본주의 초기에 농노가 땅으로부터 '해방'된 것이 오히려 '굶어죽을 자유'를 의미했던 것처럼 모든 사회적 관계에서 해방된 개인에게 주어진 것은 '아무 것도 아닌 존재'가 될 자유밖에 없다. 사회가 붕괴함과 동시에 절대 다수의 사람들은 썸바디(somebody)가 아니라 노바디(nobody)로 전락한 것이다.

  - 283~284쪽, 에필로그


모두 병들었는데 아무도 아프지 않은 이유 3

"너 죽고 나 살자" 

...남의 고통에 대한 외면·망각·무감각은 능력

   - 유흥주점형 경제모델


바우만은 이것을 '의자뺏기 게임'이라고 부른다. 자리는 언제나 늘 모자라고 게임이 반복될 때마다 누군가는 탈락하고 추방되어야 한다. 마지막 한명이 남을 때까지 게임은 계속된다. 따라서 모두가 탈락의 공포에 시달린다. 최후의 승자라고 예외가 아니다...

  이 과정에서 노동의 세계는 "이익은 위로, 위험은 아래로 쏠리는" 형태로 변모했다. 류동민은 이것을 유흥주점형 경제모델이라고 부른다.

  ...문자 그대로 내가 '팔아먹을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되는가이며, 이는 유흥주점형 경제모델에서 살아남는 핵심요건이 된다... 그렇기에 이 유흥주점형 모델에서 노동자에게 요구되는 단 하나의 덕목은 타인의 고통을 외면하는 능력이다.

  - 209~211쪽, 제2부 / 제3장 노동: 타인의 고통을 외면하라



나와 남의 고민이 맞닿는 것

 - 공적인 이야기가 오가는 '공론장'


말로 해결하는 사회, 이것이 근대국가의 특징이며, 이 말을 통해 사회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의 토대를 흔히 공론장이라고 부른다.

  ...물론 이 공론장에서 나와는 별개인 사회 문제만을 다루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바우만에 따르면 공적 공간이란 "개인의 고민과 공공의 현안들에 대해 만나서 의논하는 장소"다. 즉 이곳에서는 사적인 문제와는 별개로 공적인 이슈들만 다뤄지는 것이 아니다. 이곳은 "사적인 문제들이 공적인 이슈들을 다루는 언어로 새롭게 해석되고 사적인 곤란들에 대해서 공공의 해결책을 모색하고 조정하며 합의"하는 공간이다. 사적인 일상과 공적인 토론이 별개의 것이 아니라 사적인 일상에서 겪는 여러 어려움들을 공적인 언어로 바꾸어내는 것이 바로 공론의 과정이다. 따라서 '말로 하자'라는 근대의 이상은 근대사회가 공론장의 존재 유무에 존폐를 건 사회라는 사실을 단적으로 드러내준다.

  - 170~171쪽, 제2부 / 제2장 소통: 위로를 구매하라


이야기는 끊임없이 이어져야 한다. 이야기의 힘은 경험의 전승에서 나온다. 경험의 전승을 통해 개개인의 경험은 갱신되고 확장되며 연속성을 부여받으며 이로써 공동체는 지속 가능한 공간이 된다. 경험에 갱신이 일어나기 위해서는 그 경험이 이후의 경험을 이해하고 해석하는 틀이 되어야 한다. 이야기가 전승되면서 그 이야기가 우리 모두의 공동소유가 되는 것, 즉 듀이가 말한 "의사소통은 경험이 공동소유가 될 때까지 경험에 참여하는 과정"이 가리키는 바가 바로 이것이다. 

  - 187쪽, 제2부 / 제2장 소통: 위로를 구매하라 


자기만의 색깔을 가지려면?


인간은 세상에 질문을 던지는 존재다. '왜?'라는 질문은 인간이 남이 시키는 대로 그저 따르지 않고 제 주관을 갖고 살아가겠다는 의지의 표명이다. 이럴 때 비로소 인간은 세상에 둘도 없는 존재로서의 개별적 자아가 될 수 있다. 세상과 자기 자신에 대해 독특한 답을 갖고 있기 때문에 유일한 존재가 되는 것이 아니다. 질문을 던지며 호락호락하게 세상과 타협하지 않겠다고 선언하는 순간부터 그는 세상에 둘도 없는 바로 그 사람이 될 수 있다. 

  - 제2부 쓸모없어진 곁, 몽상이 된 사회 / 제1장 관계: 질문하면 '죽는다' 130~131쪽


근대의 이상적 인간형은 내성적인 사람?

  - 리더 아닌 팔로워로서 내성적인 사람의 힘. (책 "콰이어트"의 맥락, introvert)


우리가 살아가는 2010년대의 눈으로 보면 이처럼 질문을 던지고 자신의 내면으로 들어간다는 근대사회의 세계관은 수동적이며 정적인 존재가 됨을 의미하기도 한다. 내면 속으로 들어간 자는 세상에 참여하지 않으며 아무 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능동성을 중시하는 현대사회에서 이런 침묵과 수동성은 '뭔가 문제가 있는 것'처럼 여겨진다. 그러나 이런 정적이며 수동적인 존재야말로 의미를 불러일으킨다. 존 듀이(John Dewey)에 따르면 능동성과 수동성이 합해질 때 비로소 경험은 경험으로서 가치를 얻게 되고 의미가 발생한다. 즉 '함'만 통한다고 해서 인간에게 의미가 발생하지 않는다. 오히려 '당함', 즉 수동성이야말로 의미를 불러일으키는 원천이다. 듀이는 이것을 불에 손을 집어넣는 행위로 설명한다... 이 당함을 통해 사람은 다시는 불에 손을 넣어서는 안 된다는 교훈을 얻게 되고 이 교훈이 다음 행위를 해석하고 통제하는 바탕이 된다. 어느 행위가 다음 행위의 바탕이 되는 경험으로 바뀌는 것은 이처럼 함이 아니라 당함으로부터 비롯된다. 

  - 136~137쪽


근대의 독보적 권력은 '시각', 

그러므로 근대 권력은 '전시'를 통해 작동한다


우리 일상은 이러한 '하는 척의 함'으로 가득 차 있다. 사람들은 바쁘지 않지만 바쁜 척해야 하고 내가 없으면 회사가 곧 망할 것처럼 굴어야 한다. 미국의 언론인 바버라 에런라이크(Barbara Ehrenreich)는 청소용역회사의 청소부로 위장 취업했을 때 이것을 깨달았다. 청소를 하더라도 구석구석 지나치게 깨끗이 청소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아니 회사에는 도리어 손해다 .묵은 때인 경우에는 청소를 열심히 하면 오히려 더러움이 드러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청소부에게 중요한 임무는 청소를 깨끗이 하는 것이 아니라 깨끗이 보이게끔 하는 것이다. 개끗한 척하는 것이 깨끗한 것보다더 중요한 덕목이 되었다.

  ...많은 연구자들은 전시가 사실 근대사회에 내재된 권력의 작동방식이라고 지적한다. 사실 전시 역시 진정성을 출현시킨 내면과 외부의 분리와 깊은 연관이 있다. 근대인은 내면으로 물러나 외부와 긴장을 유지한 채 그 외부를 바라볼 줄 알게 되었다. 바라본다는 것은 거리를 둔다는 것이며, 이 거리를 창조함으로써 세계를 전시의 대상으로 구현하게 된다. 근대사회의 독보적 권력은 시각 그 자체다. 근대는 애초부터 보는 권력의 시대였고 세계를 전시하는 장이었다.

  - 144~146쪽


비국민의 정치

 - 신자유주의는 정치 대신 치안으로 

   법질서를 유지한다


자끄 랑시에르는 정치 바깥에서 배제된 자들이 정치 안의 몫을 주장하는 것, 이것이 진정한 의미에서의 정치라고 말한다. 

  - 제1부 악몽이 된 곁, 말 걸지 않는 사회 - 제1장 정치공동체의 파괴:폭로하고 매장한다, 41쪽


신자유주의는 법질서 바깥의 것에 대해 정치적 해결을 시도하는 것이 아니라 엄격한 사법적 규율과 통제로서 통치하려는 시도다. 이에 따라 법질서 바깥의 것이 정치적 과정을 통해 법질서 안으로 들어오는 것은 허용되지 않는다.

  랑시에르의 개념에 따르면 이는 법질서에 의해 셈되지 않던 사람들이 셈해 달라고 요구하는 것에서 출발하는 본래적 의미의 정치의 원천적 봉쇄다. 또한 이미 법질서 내부에 포함된 세력들 간 분쟁이라 하더라도 정치적 타협에 의해 해결을 시도하기보다는 사법적 판단에 의한 일방적 해결을 선호한다는 의미에서 사회의 불화를 조정하는 차원의 정치 또한 설 여지를 좁힌다. 따라서 신자유주의 법치 아래서 허용되는 것은 정치가 아니라 단지 치안일 뿐이다.

  - 229~230쪽, 제2부 / 제4장 국가 폭력 : 껍데기까지 발가벗겨라


혼자만의 공간을 갖는 것의 의미


사생활이 '세상으로부터 사라질 자유'를 뜻한다면, 기숙사에서 윤숙이 박탈당한 것이 바로 이 자유였다. 윤숙은 말한다. "기숙사에 살면서 이 자유를 대신한 것은 '죄책감'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대한민국 모든 이가 들어가 살기를 선망하는 아파트야말로 사생활이 죽은 공간이다.

...아파트에서는 이처럼 타인의 사생활은 알 수 있지만 정작 '관계'는 거의 이뤄지지 않는다.

  - 제4장 사생활의 종언: 고독조차 허락되지 않는다, 118~119쪽


Posted by Daesung Ju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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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라도 되겠지

저자
김중혁 지음
출판사
마음산책 | 2011-10-05 출간
카테고리
시/에세이
책소개
인생의 비밀은 쓸데없는 것과 농담에 있다!악기들의 도서관, 좀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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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때문에 산 책. 소설가 김중혁의 산문과 삽화가 함께 담긴 책이다. 표지 그림도 저자가 그린 거다. 뒤표지에는 소설가 김연수가 "이 책에 건질 게 있으려나. 그건 나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래도 추천사니 이렇게 쓸 수밖에. 건지겠지, 뭐라도 건지겠지. 마음이 착잡하다"라고 썼다. 삽화의 재기발랄한 발상이 좋고 글이 가벼워서 좋다. 똥폼 잡지 않고 산책하는 기분으로 쓴 것 같은 글 모음이다. 사실 글보다 삽화가 더 좋았다. 


(그런데 일러스트와 삽화의 차이가 뭐지? 씨푸드와 해산물의 차이인가?)





  얼마 전 <놀러와>에 출연한 그룹 백두산과 부활을 보고 마음이 짠했다. 나의 전설들은 근근이 살아가고 있었다. 모텔을 운영하며 카운터에 앉아서 기타를 연습하는 베이시스트와 각종 아르바이트로 돈을 벌며 음악 활동을 하는 드러머 얘기를 듣고 있자니 세월의 무상함이 느껴졌다. 하긴, 요즘 누가 헤비메탈 음악을 듣나. 불러주는 데가 없을 것이다.

  그래도 그들은 포기하지 않았다. 좋아하는 일을 하기 위해서, 다른 무엇을 포기하고 있었다. 시간을 포기하고, 돈을 포기하고, 또 다른 어떤 것을 포기한 다음, 자신들이 좋아하는 일을 하고 있었다. 결국 인생은 어떤 것을 포기하는가의 문제다. 선택은 겉으로 드러나지만 포기는 잘 보이지 않는다. 돈을 많이 벌기로 선택하고, 결국 돈을 많이 벌게 된 사람이 어떤 걸 포기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얼마나 기분 좋게 포기할 수 있는가에 따라 인생이 즐거울 수도 있고 괴로울 수도 있을 것이다. 나는 돈과 성공과 권력을 포기하고 (글쎄, 포기하지 않았어도 거머쥐긴 힘들었겠지만) 시간을 선택했다. 바쁘게 사는 대신 한가한 삶을 선택했다. 즐겁게 포기할 수 잇었다. 남는 시간에 기타도 칠 수 있으니 부러울 게 없다. 

    - 102~104쪽 "돈과 성공을 포기하고?"



  <무모한 도전>의 도전처럼 승부 근성을 발휘해보고 싶다. 아예 승리의 목표를 무모하게 잡는 것이다. 불가능하다 싶을 정도로 높게 잡는 것이다. 성공하면 좋은 거고, 실패하면 할 수 없는 거다. 그러면 승부 근성을 발휘하면서도 세상 살기가 참 편할 것 같다. 세계 신기록을 세우며 올림픽 금메달을 거머쥔 김연아 선수도 앞으로 고민이 많을 텐데 나의 승부 근성을 본받아 228.56점에 만족하지 말고 만점에 도전해보는 것은 어떨까 싶다.

    - 119쪽 "평행봉이 아니라 시소"



사람들 머리 위에 그들의 온도계가 달려 있다면, 

얼마나 화가 났는지, 아프지는 않은지,

모두 알 수 있을 텐데…

    - 129쪽 일러스트 문구



사적인 공간에서의 의견을 광장으로 끌어오는 것은 반칙이다. 광장으로 끌고 와서 그걸 공론화하고 '우리'에게 어떤 여론이 있는 것처럼 포장하는 것은 폭력이다. 우리는 우리의 폭력을 여론이라는 이름으로 포장하여 그를 밀어냈다. 재범이 꼭 '우리'여야 했을까. 그가 '우리' 중 한 명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욕했다는 이유로 우리는 '우리'로부터 재범을 밀어내버렸다. 나는 우리가 무섭다. 

    - 280쪽 "우리가 무섭다"



Posted by Daesung Ju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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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모난 못

저자
폴 콜린스 지음
출판사
양철북 | 2006-06-26 출간
카테고리
인문
책소개
역사적 인물을 통해 자폐증의 세계를 보여주는 네모난 못. 역사 ...
가격비교

(참고 : 저자의 아들 모건은 자폐인이다.)


    자폐인을 위한 변명


다른 사람들이, 아니 자폐인 스스로도 자폐인을 사람들 사이에 섞여 있는 외계인으로 묘사하곤 한다. 그러나 모순인 것은, 사실은 정확히 그 반대라는 점이다. 자폐인은 곧 우리이고, 자폐인을 이해하는 것은 인간이란 어떤 존재인가를 이해해 나가는 길이기도 하다. 생각해 보라. 장애란 일반적으로 무엇이 부족한 상태로 정의된다... 자폐증은 능력이자 동시에 장애다. 무엇이 부족할 뿐 아니라 무엇이 풍부하기도 한 것이다. 인간을 인간이게 만드는 고유한 특성이 지나치게 많이 발현된 경우다. 동물 중에도 사회성이 있는 동물이 있지만, 추상적 추론을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인간 뿐이다. 자폐인은 인간보다 더 인간적인데, 우리는 그 존재를 이해조차 하지 못한다.

  - 209~210쪽

    너무 외로워어어

나는 모건을 꼭 끌어안는다. 
"쉬 쉬 쉬. 아빠가 여기 있잖아."
"너무 외로워어어어."모건이 큰 소리로 노래한다.
  고개를 들어보니 우리를 보는 사람은 없다. 그렇지만 나는 식은땀을 흘린다. 모건이 처음으로, 어디에서 들은 말이 아니라 자기 스스로 내뱉은 첫마디가 이거다.
  - 220쪽

   늑대소년 피터의 즐거움

제임스 펜 농장에서 피터는 행복하게 지냈다. 피터가 노래를 부르거나 콧노래를 하는 것이 마을 사람들의 눈에 자주 띄었다. 자연이 가까이 있었다. 따뜻한 태양, 서늘한 밤공기, 계절의 변화가 야생 소년에게 절절한 기쁨을 줬다. 어떤 사람이 한 말에 따르면 "피터는 봄이 오자 정말 신이 난 것 같았다. 하루 종일 노래를 부르고 맑은 날에는 밤 시간에도 노래를 부르고 있다. 달과 별을 보고 좋아한다. 어떨 때는 햇살 아래에 서서 눈이 부신 듯 불편해 하면서도 해를 마주 보고, 별이 빛나는 밤에는 춥지만 않으면 집 밖에 나가 있으려 한다." 대신 날씨가 좋지 않으면 괴로워했다. 비가 내리기 한참 전부터 피터는 불안해하며 울부짖었다.
  - 51~52쪽

    장애인 부모의 보편적인 마음


이제는 사람들 시선에도 익숙해진 것 같다... 사람들이 우릴 이해하지 못한다면, 그래도 괜찮다. 우린 서로를 이해하니까. 그리고 사실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하고는 다르다. 이건 비극도 아니고, 슬픈 이야기도 아니고, 주말의 영화도 아니다. 그냥 우리 식구다.
  - 299쪽

모건은 내가 본 아이 가운데 가장 행복한 아이다. 그렇지만 하루도 걱정하지 않고 지나가는 날이, 가슴에 무엇이 찔린 것처럼 아프지 않은 날이 없다. 우리가 죽은 뒤에, 모건이 나이가 들었을 때, 그때는 정말 외로울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이다... 자기만의 세계 속에 사는 자폐인은 외로움, 절망, 처절한 소외감을 느낄 수 있을 텐데 부모가 곁에서 도와줄 수 없게 될 때는 어떻게 될까. 다른 누가 옆에서 도와줄 수 있을까?

"그래. 아무튼 모건이 형제 없이 혼자 자라게 하고 싶진 않아."
  - 227쪽

나는 모건이 세상에 적응하기를, 모건이 다르다고 느끼지 않을 수 있기를 바랐다. 특수학급에서 교육을 받고, 전문가의 도움을 받으면 일반 학교에 들어갈 수 있을 것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물론 그럴 수만 있다면 적응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적응하기만 한다면 살아가기가 훨씬 쉬울 테니 말이다. 그렇지만 만약에 적응하지 못한다면?

이 아이들은 어디로 갈 것인가? 알 수 없다. 자폐인은 스스로를 만들어 간다. 우리가 어떤 존재로 만들려고 아무리 애를 써 봤자 그렇게 되지 않을 것이다... 이 아이들을 성공이나 실패와 같은 일반적 범주로 가를 수나 있는가?
  자폐인은 근본적으로 네모난 못이나 다름없다. 네모난 못을 둥근 구멍에 넣으려 할 때, 문제는 망치질이 힘들다는 것만이 아니다. 못이 망가지는 것이다. 정상 학교가 나를 비정상적으로 불행하게 만든다면? 정상 사회에서 자라면서 불행한 어른이 된다면? 그것이 성공일까? 그게 정상일까? 그 안에서 빠져 죽을 것 같더라도 주류 안에 들어가고 싶은가?
  - 293~294쪽

우리는 십중팔구 모건을 떠나보내지 않을 것이다. 자폐인은 생산과 독립에 대해 알게 된 뒤에도, 부모가 주입해 주어야 할 여러 복잡한 기능을 이해한 뒤에도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의 절반은 알아차리지 못한다. 자폐인은 이용당하기도 쉽고, 스스로를 방치해 버리기도 하고, 아니면 사라져 버린다 할지라도 아무도 모를 것이다. 그런 상태로 세상에 내보낼 수는 없다. 그래서 여러 세대가 계속 한 집에서 같이 사거나 아니면 이웃에 나란히 산다. 
  - 255쪽


    자폐인의 정신 세계

모건은 손을 흔들 때 손등을 밖으로 하고 손바닥을 자기 쪽으로 한다. 그렇게 해야 손을 흔들면서 자기 손바닥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나도 자기와 똑같은 것을 보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어떤 면에서는 말이 된다.
  - 296쪽

모건은 삶도 아직 그다지 잘 이해하지 못하는데 죽음을 어떻게 이해하겠는가?
  철학자 이폴리트 텐은 1876년에 아장아장 걷는 아기 한명을 관찰하고 이렇게 놀라움을 표현했다. "아이가 제일 먼저 묻는 거시은 항상 이런 것이다. '뭐라고 말해? 토끼는 뭐라고 말해? 새는 뭐라고 말해? 말은 뭐라고 말해? 저 나무는 뭐라고 말해/' 동물이건 나무건 아이는 사람처럼 취급하여 그것이 무슨 생각을 하고 뭐라고 말하는지 알고 싶어 한다." 이 아이는 세상 모든 것이 살아 있다고 느끼니 당연히 아무것도 죽은 것으로 생각되지 않았을 것이다.
  - 251쪽

대부분 자폐아는 자기 생각과 다른 사람의 생각을 구분해서 생각하지 않는다. 다른 사람은 다르게 생각한다거나 다른 관점에서 사물을 본다는 생각을 하지 못한다. 자기가 아는 걸 샐리는 모른다는 걸 상상할 수 없다. 또 자폐아는 다른 사람의 시선이나 손가락이 가리키는 데를 따라가지도 않는다. 그 사람이 자기와 다른 걸 생각하거나 보고 있을 리가 없는데, 시선이나 손가락이 향하는 데를 뭐 하러 굳이 보겠는가.

자폐인은 다른 범주 안에서 다른 문제를 해결하려 하고 있으니, 틀릴 수조차 없는 것이다. 우리는 너와 나로 이루어진 세계에 살지만 자폐아는 나로 이루어진 세계에 산다. 자폐아의 언어를 전부 옮겨 써 보면, 아이의 어휘에서 어떤 부류의 동사는 완전히 빠져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예를 들면 다른 사람의 정신적 상태를 묘사하는 단어인 믿다, 생각하다, 알다... 같은 단어는 없다. 이런 개념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다른 사람이 자기와는 다른 의도와 생각을 갖고 있다는 걸 이해하지 못할 때 또 개념 한 가지가 사라진다. 속임수. 이 아이드리은 자기 눈앞에서 벌어지는 속임수도 알아차리지 못한다.
  - 112~113쪽

자폐인은 과거에 야생 인간이나 동물에 가까운 사람으로 치부되었는데, 사실 자폐인은 실제로 동물으 감정과 유대를 느낄 수 있다. 집중력이 아주 강하고 민감하고 대화를 좋아하지 않아 사람보다는 동물의 감정에 공감하는 것이다. 

자폐인은 자기 감정에 압도될 때가 많다. 자폐아가 다른 사람과 접촉할 때 오는 압도적인 감각의 물결을 극복하려고 발버둥치는 것은 조금도 이상스런 행동이 아니라고 그랜딘(자서전을 쓴 자폐인)은 설명한다.말이 겁을 먹었을 때 하는 행동이나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 232쪽


    자폐인의 모습

"여기 회사에는 프로그래머들이 바깥 나들이를 하게 하는 일만 전담하는 직원이 있어요. 프로그래머드리은 마이크로소프트에서 살아요. 그 밖에는 다른 삶이 없지요. 회사에 일하러 가고, 회사 마당 한쪽에 있는 아파트에서 잠을 자고, 일어나서 다시 회사로 가지요. 그것 말고는 아무것도 하지 않으려 해요. 그 밖에 뭘 해야 하는지조차 몰라요. 그래서 그 일만 맡아서 하는 직원이 있는 거예요. ㅣ프로그래머들과 수학 이론가들이 외출할 수 있도록 장소를 예약하는 일이지요...
하루는 마이크로소프트 직원만을 위해서 교향악단 연주회를 통째로 예약했어요. 프로그래머들만을 대상으로 연주하는 거지요. 그런데 청중들이 휴대전화를 비롯한 온갖 기계를 가지고 가서 연주하는 중에도 계속 켜 놓고 사용한 거예요... 그래서 다시는 연주회에 가기 어렵게 됐죠...
하지만 프로그래머들은 그걸 몰랐어요. 정말로요. 연주회에서 그러면 안 된다는 걸 진짜 몰랐던 거라구요...
마치... 마치 실제 사람들 사이에서 행동하는 법을 가르쳐 주지 않으면 모르는 것처럼요. 그러지 않으면 정말 모르거든요."
  - 141쪽

나는 손으로 모건의 턱을 부드럽게 쥐고 얼굴을 돌리려 한다. 모건은 이제 나와 정면으로 마주보고 있지만 눈길은 여전히 나를 피한다. 물론 모건은 날 볼 수 있다. 늘 하는 일이다. 모건은 갑자기 나한테 고개를 돌려 두 눈을 맞추고, 내 손가락을 쥐고 자기가 모르는 단어를 가리키기도 한다. 때로는 안아달라는 뜻으로 나를 보기도 하고, 꼭 껴안고 노래 불러 달라고 그러기도 한다. 어떨 때는 단지 날 보고 웃기 위해서 자기가 하던 일을 멈추기도 한다. '아빠, 나 여기있어.'
  - 248쪽

거의 대부분 남자아이다. 아주 세부적인 것에 집요하게 몰두하고, 전차 노선도와 달력을 외우고, 실 조각이나 성냥갑 같은 물건을 강박적으로 수집하고, 다른 아이들과 같이 놀지 않지만 끝없이 장난감을 바닥에 한 줄로 늘어놓는 아이. 또래 아이들보다 글은 훨신 잘 읽지만 말은 하지 않는 아이도 있고, 수 계산은 놀랍게 잘하지만 옷을 갈아입거나 씻지 못하는 아이도 있다. 추상 세계에 빠져서 "얼빠진 교   수처럼 실제 삶의 문제에는 무기력하다."고 아스퍼거는 고찰했다.

  그중 한 아이는 "마치 막 하늘에서 내려온 것처럼" 행동했다고 아스퍼거 박사는 기록했다.
  - 83쪽

생후 2년 동안에 인간의 뇌 안에서는 신경이 엄청난 속도로 서로 연결된다. 이런 신경 통로 가운데 상당수는 필요 없거나 부적절한 것으로, 유아의 뇌 안으로 엄청난 분량의 데이터가 들어오고 뇌가 급격한 속도로 물리적으로 성장하기 때문에 만들어진 것이다. 놀랍게도 두 살에서 세 살 사이에 뇌 안의 뉴런 수는 감소한다. 유용한 신경 통로가 자리 잡으면 반복되거나 비논리적인 것은 제거하는 '신경 가지치기'가 진행된다. 물론 서로 다른 감각 사이를 연결하는 신경 통로도 사라진다. 가지치기 이전에는 모든 사람이 다 공감각을 갖고 있는 셈이다. 공감각이나, 절대음감, 투렛증후군 같은 증상이 나타나는 경우는 신경 가지치기가 일부 일어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공감각이란 부엌 불을 켜면 동시에 믹서가 작동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자폐증으로 말하면 전등 스위치를 켜면 전구가 나가는 것과 마찬가지다. 자폐인이 손을 퍼덕거리며 마구 휘젓는 것은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서다. 자기 감각에 의해 쇼크를 받고 있는 것이다.
  - 178~179쪽

자폐인은 전부 극도로 내향적이고, 개들은 극도로 외향적이다. 개는 무리짓기를 좋아하고 누군가를 사귀려 든다. 끝없이 주변 세계를 의식한다. 개는 책을 읽지도, 아무도 안 볼 때 피아노를 분해하지도, 컴퓨터에 새 프로그램을 깔지도 않는다. 하지만 개는 누가 자기 주인에게 친절하게 대하는지 아니면 위협적으로 대하는지 아주 잘 알아차린다. 자폐인이 잘하지 못하는 게 바로 그런 것이다. 자폐인과 개는 서로 딱 맞는 짝이다.
  - 246쪽

    

    자폐인 부모의 인구학적 구성

자폐증의 기원에 대한 의문은 자폐증 연구가 처음 시작되었을 무렵부터 제기되었다... 자폐인의 가족 안에서 자폐증의 희미한 전조를 찾을 수 있다면, 그것이 가족 구성원의 정신과 재능에 영향을 미친다면 어떤 결과로 나타날 것인가? 한가지 일에 몰두하고, 집중력이 남다르고, 논리적 체계에 마음을 뺏기는 사람은 대개 사회적으로 어설프지 않은가?
  "이런 인지적 특징을 가진 인물의 전형적인 직업은 엔지니어링이다." 하고 배런 코헨은 말했다.
  배런 코헨은 영국에서 자폐아를 둔 부모 천 쌍을 조사했는데, 아버지가 엔지니어링 분야에 종사하는 경우가 전국 평균보다 두 배나 웃돌았다. 과학자나 회계사처럼 집중력과 추상화 능려기을 요구하며 주로 혼자 일하는 직업을 가진 사람의 빈도도 자폐아 가정에서 훨씬 높았고, 예술가는 평균보다 네 배 가까이 많았다. 배런 코헨과 다른 연구자들은 학문적으로 가장 뛰어난 집단으로 범위를 좁혀 다시 조사했는데, 즉 이곳 케임브리지 대학 학생을 상대로 조사한 결과, 과학 전공자 식구 중에 자폐인이 있을 확률이 문학 전공자 식구에 비해 여섯 배나 높았다.
  - 118쪽
  

    자폐증(autism)이란 단어의 탄생


카너는 이런 증상을 지칭하기 위해 자폐증이라는 단어를 만들었고, 카너가 쓴 논문은 자폐증 연구라는 새 장을 열었다. 그러나 카너는 몰랐지만 빈에 있는 카너의 옛 학교에서 한스 아스퍼거도 똑같은 이상에 대한 논문을 제출했다. 전쟁 중이라 전혀 교류가 없던 두 나라에서 두 사람이 각각 동시에 같은 발견을 했다는 것은 역사 속의 기이한 우연 가운데 하나다. 더욱 신기한 것은 두 사람이 똑같은 단어를 만들어 냈다는 것이다.
  - 86쪽


    기술 발달 사회의 단면

우리 가운데 우리가 '어떻게' 그걸 하는지 아는 사람은 몇이나 될까? 우리가 '뭘' 하는지는 안다. 기차역에서 전광판에 들어온 신호를 읽고, 거대한 디젤엔진이 끄는 기차를 타고, 좌석에 앉아 위성을 통해 이야기를 나눈다. 그러나 컴퓨터로 관리하는 기차역의 신호나, 기차 엔진이나, 무선전화나, 위성 또는 내가 앉아 있는 좌석 덮개에 무늬를 짜 넣은 기계가 어떻게 작동하는지 이해하는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그걸 이해하는 사람은 대체 어떤 사람일까? 우리는 기이하게 복잡하고 우리가 전혀 알지 못하는 과정을 통해 옷을 입고 밥을 먹고 이동한다. 우리 세대는 일상생활에서 부딪치는 모든 물체가 만들어지는 과정을 전혀 모르고 사는 최초의 세대일 것이다. 우리는 전문가들의 세상에서 오도가도 못하게 좌초한 불운한 일반인이고, 그냥 이렇게 얼렁뚱땅 헤쳐 나간다. 그게 최선이므로, 그게 가장 쉬운 방법이므로.
  - 123~124쪽




Posted by Daesung Ju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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