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이 가하는 폭력과 혼란에 질서를 부여하는 시. 고통스러운 감정은 정확하게 묘사하는 순간 멈춘다고 했던가. 마치 혈관주사처럼 피로 직진하는 시 덕분에 기력을 챙겼다. 꿈같은 피안으로의 도피가 아니라 남루한 현실을 직시하는 것만으로도 이상하게 힘이 났다.


사는 일이 만족스러운 사람은 굳이 삶을 탐구하지 않을 것이다. 시가 내게 알려준 것도 삶의 치유불가능성이다.


내일의 불확실한 희망보다 오늘의 확실한 절망을 믿는 게 낫다는 것을 시는 귀띔해주었다.

Posted by Daesung Ju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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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 상자에 2만 원이요."

  요즘 포도 값이 참 비싸다. 복숭아가 제철인데 이 가게엔 없네. 바구니에 담아 파는 포도는 삼천 원, 사천 원 씩. ...요거요거 세 바구니 주세요. "에? 몇 명이나 드시게?" 서너명 돼요. 

  이수역 14번 출구 나와서 첫 골목으로 죽 올라가 사거리를 지나 지나 단독 주택. ...형, 문 열어 줘요. "아이고 딴따라들 다 모였네." ㄱ 선생님이 대신 문을 연다. ㅂ형과 막걸리를 한 잔, 아니고 몇 병 마신 상태다. 처음 간 집, 현관도 못 들어서고 마당 술자리에 합류했다.

  민중가요계의 대부, ㄱ샘의 작업실이다. 이번 휴가는, 생애 첫 휴가에는 ㅂ형과 함께 이 작업실에서 악기를 배우기로 했다. ㅂ는 트럼펫, 나는 색소폰. ㄱ샘은 애주가, 내 이럴줄 알았다. 금쪽같은 내 휴가 첫날은 술판으로 시작된다.

  2층 처마가 떨군 빗물을 1층 처마가 튕겨낸다. 비 내리는 것보다 더 거슬린다. 이미 반주 한 잔 걸치고 간 터라 막걸리가 영 안내켰다.   사들고 간 포도를 ㅂ가 씻어 왔다. 꽤 맛 좋다. 아마도 아무도 없을 집 안에서 부시럭대는 소리가 난다. ㄱ샘이 키운다는 그 퇴역 안내견인가 보구나, 아니 ㅅ이다. 후줄그레한 티셔츠를 걸친 ㅅ가 의자를 꺼내와 함께 앉는다. 스머프색 티셔츠 가슴팍에 K로 시작하는 이름이 있네. 

  케로로! ㄱ샘이 ㅅ을 부르는데 어째 익숙하다. 혹시 ㅇㅇㅇㅇ? "맞아요." 대학 동아리 선배다. 모임에선 한번도 볼 수 없던 작곡가. 세상 참, 아니 내 인간 관계 참 그 나물에 그 밥이네.

  안내견 자리에서 명퇴로 물러난 새봄이가 어슬렁거린다. 포도를 던져주니 잘 먹네. 주면 줄수록 애처로운 눈빛으로 애원한다. 주워먹는 걸 보니 흐뭇하다. "ㅅ! 얘 이거 포도 먹어도 되냐?"

  안 된단다. 당도가 너무 높아서 금물이라는데 미안하게 됐네. 포도 담긴 쟁반으로 머리를 들이밀기에 정수리를 지긋이 눌러 준다. 가 임마. 비가 다시 온다. 파라솔 하나 있음 딱이겠구만, 마당엔 잎 떨구는 감나무 뿐이다.

  자리를 작업실 안으로 옮긴다. 책이 탑처럼 쌓여 있다. 탑, 탑, 탑, 통로가 간신히 나 있다. 까만 계란판이 사방을 두른 작업실엔 테두리 누우우래진 모니터와 줄 없는 기타들, 그리고 셀 수 없는 의자들이 빼곡했다. 작업이 가능할지 영...

  거실에 있던 노란 원탁을 방으로 가져오고 그 위에 포도를 다시 놓고 막걸리를 새로 사왔다. 소리 없이 자리를 떴던 ㅅ이 나타나 나간다고 인사한다. "쟤는 밤이면 업소에 나가." 참... 개같다. 꽤나 이름 알린 작곡가의 현실이다. 근데, ㅅ 연줄로 나도 알바나 해 볼까 싶다. 짭잘할 것이다.

  포도 쟁반엔 포도 껍질이 한 가득. 포도 송이와 침 묻은 껍질이 부비부비. 쟁반엔 물이 흥건, 썅. 얼굴 처박은 포도 송이를 뒤집어 놓는다. 뒤집다가 껍질에 스쳤다. 취한 ㄱ샘이 거리낌 없이 포도를 뜯는다. 먹는다. 난 안 먹는다.

  "자네가 xx음악대에 도움을 줬음 좋겠어."

  장애인 음악대 말이다. 비장애인과 함께 어우러지는 모습을 설명하던 ㄱ샘이 멀쩡한 얼굴로 아까 얘기한 걸 또 얘기하고, 횡설수설하기 시작한다. 배 채우는 안주 없이 포도만 줄창 먹고 나니 속은 허하고 이빨엔 충치날 거 같고. ...선생님, 식사하러 가시죠! "아냐, 사나이는 그냥 마시는 거야..."

  결국 ㄱ샘은 고개를 떨구고 졸기 시작했다. 선생님보다 먼저 작업실에 온 ㅂ는 트럼펫을 딱 1분 연습했다고 했다. 1분 만에 ㄱ샘이 막걸리와 함께 등장, 내가 오기 전까지 세 병을 마셨다니, 취하고 졸리고 피곤할 때도 됐다. 잠에서 깨시길 기다리며 기타를 친다. 민중가요 명곡, 들불의 노래를 부른다.

  "타다 꺼지면 이 몸 마저도 재가 되도록 붉게 타오르리라..."

  원곡자는 고개를 푹 숙인 채 잠에 취해 있고, 뭔가 묘하게 재미있다. 통기타엔 역시 김광석, 그녀가 처음 울던 날을 부른다. 도입부 연주가 약간 까다롭다. 얼기설기 따라하니 졸던 ㄱ샘이 박수를 친다. 좋군. 

  노래, 노래, 노래, 결국 배고픔을 못 견긴 ㅂ이 선생님을 깨운다. 포도 그냥 두고 가면 파리 앵길까봐, 침 묻은 멀쩡한 포도를 까만 비닐 봉다리에 몰아 넣었다. 에라 모르겠다, 그냥 마당 한켠에 던져놓고 집을 나선다. 

  해진 밤, 시계는 8시. 참 일찍도 시작했구나, 막걸리. 선생님은 마누라가 기다린다며 식사를 사양하며 가신다. 결국 ㅂ과 둘이 식당으로 향했다.

  이제 포도가 네 송이 쯤 남았다. 휴가는 주말까지 치면 나흘 남았다. 색소폰 연습해야지, 근데 휴가 이틀째, 색소폰 갖고 오신다던 ㄱ샘은 소식이 없다. 기타나 치자, 포도 먹으면서.


2011.08.17 

수유너머R 글쓰기 수업 '글쓰기의 최전선' 2기 네번째 과제.


Posted by Daesung Ju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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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가정보원은 20일, 칼 마르크스란 아이디로 공산주의 서적을 출판하는 등 국가보안법을 위반한 혐의로 김모 씨(25세, 무직)를 검거했다고 밝혔다. 김 씨는 자신을 유럽에 사는 경제학자로 속여 자본론, 경제학-철학 수고, 공산당 선언 등의 책을 낸 것으로 알려졌다. 국정원은 경찰 등과 합동조사단을 꾸리고 김 씨에 대한 수사를 계속할 방침이다. 국정원 관계자는 김 씨가 "씨발 책을 존나 어렵게 써서 사람들을 짜증나게 만들었다"고 말했다.


  의무감으로 책을 읽는 건 고역이다. 글쓰기 수업 과제를 한번 쯤 빠져도 그리 티 안날 텐데 발표하겠다고 나서서 이런 책을 만났을까. 더욱이 사회학 전공한 놈이 졸업 뒤에야 마르크스를 접하고 낑낑대는 게 가관이다.

  토요일 밤에 술 약속도 안 잡고 책을 읽다가 집어 던질까 갈등하다 시계를 보니 8시. 밥은 먹어야 겠고 먹을 건 없고 해서 집을 나섰다. 동네 순대국집 말고는 마땅치 않았다.

  순대국 하나 주세요. 정죄 의식을 치르듯 물수건으로 손을 닦고 멍 때리던 참에 아저씨들 등장. 다들 목소리가 크다. 신경이 곤두선다.

  "순대국 여섯이요."

  "얘는 여자친구가 교통사고가 나서 가 봐야 된대, 결혼이 내일 모레라던데."

  "아줌마, 순대국 하나 빼줘요."

  "먼저 들어가 보겠습니다."

  "야, 만나서 올라타지 마라."

  여자친구가 말인가 보다. 그 막내 직원은 아랑곳하지 않고 식당 문을 나선다. 몇 초도 채 지나지 않아 돌아온 직원, "과장님!" 방금 말씀이 너무 지나치신 거 아닙니까? 라는 대사를 상상하며 조마조마했는데, "사무실 가실 거 아니면 문 잠그고 갈까요?" 성실한 직원이다. 돌아서는 얼굴이 굳어 있었다. 주말 근무 마치고 늦은 저녁도 못 먹고 상스런 농담 들어가며 다친 여자친구한테 가는 뒷모습이 안쓰러웠다.

  이윽고 나온 순대국엔 다대기가 숨어 있었다. 숟가락으로 눌러 국물에 풀고 순대가 몇 개인지 셌다. 여지없이 당면 순대였지만 짭짤한 게 맛이 괜찮았다. 뜬금없이 돼지가 안쓰러웠다. 순대엔 그동안 스쳐간 사료 대신 당면이 가득했지만 역겹진 않았다. 돼지와 나는 다른 시절을 살고 있다.

  마르크스 책은 영 마뜩찮았다. 당연한 소리를 왜 이리 어렵게 꼬아 놓았는지, 읽는 동안 김진숙이 떠올랐다. 요새는 김진숙도 귀찮다. 맞는 말을 왜 저리도 서럽게 외치는지, 옳은 말은 영 자극이 안 된다. 이렇게나 나는 무뎌졌다. 김진숙과 나는 같은 시절을 살고 있다.

  진보적 언론은 정보 유통의 사각 지대에 있는 사회적 약자의 목소리를 섹시하게 포장해 이슈로 만들어야 한다고 믿는다. 맞지만 뻔한 얘기들, 기본적 권리를 보장받지 못 하는 무수한 사람들. 나는 차차 기술자가 되어 간다. 기자는 직업인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지만 일이 고되고 몸이 지칠 수록 얄팍해진다.

  고민이 늘어간다. 장애인 운동, 이 바닥의 생리를 절감한다. 권리 보장을 외치는 조직 안에 권리가 없다. 소통을 호소하는 사람들끼리 소통이 안 된다. 나은 사회를 꿈꾸는 곳에 비전이 없다. 딱 하나만 톡 까놓고 얘기하면, 나는 4대 보험조차 적용 못받고 있다. 정규직으로서 근로 계약은 있되 실상은 비정규직인 셈.

  이 짓을 계속해야 하나 고민한 지 두 달째다. 관둘까 싶다가도 핸드폰과 아이패드 약정이 떠오른다. 그리고 주변의 더러운 시선.  “곧 있으면 서른인데 돈 못 버는 빨갱이 짓 하다가 제 풀에 지쳐 나가 떨어졌구나.” 당장 때려치워도 모자라겠으나 오기로 버티고 있다.

  개인도 풍요롭고 사회도 함께 풍요로운 길은 없다. 고되지 않은 밥벌이는 덥지 않은 여름 같은 거다. (올 여름을 생각하면 틀린 말도 아니지만.) 저마다 권리를 보장받고 사람답게 사는 일, 말 자체가 너무 뻔하고 옳아서 히마리가 없다. 도무지 그림을 그릴 수가 없다.

  글쎄, 넥타이 졸라 매고 번듯한 사무실서 긴장 타는 것보다 훨씬 건강한 길이라 믿고 시작한 일인데 잘 모르겠다. 유쾌하게 보란 듯이 살고 싶지만 내 신세가 참 기구하다. 언젠가 KBS 기자인 선배한테 메이저 방송에서는 왜 노동자 문제를 다루지 않냐고 물었더니 "기자들도 노동권을 보장받지 못하거든." 내가 김진숙을 보는 시선이 그렇게 비루하고 누추하다. 당장 코딱지만한 권리도 못 챙겨먹는 판에 남의 권리를 말하자니 맥이 풀린다. 나는 어제보다 작은 사람.

  구성원의 희생에 의존하는 조직은 망해도 싸다. 하지만 안 망한다. (ㅇㅇㅇㅇ 얘긴 아니다.) 꿈보다 스펙을 요구하는 사회에 미래는 없다. 하지만 잘 돌아간다. 냉소하지 않을 기력이 없다. 그래도 함께 살아 보자고? 견뎌 보자고?

  "국민경제학에서는 노동자의 욕구가 노동자 종족이 사멸되지 않는 범위 내에서 노동자가 노동하는 기간 중에 자신을 유지하는 욕구일 뿐이다."

  살아남으려면 나 자신을 배반해야 한다. 나를 휘감은 거대한 거짓말에 초라한 참말로 부딪쳐야 한다. 그래도 함께 살아 보자고? 견뎌 보자고?

  답 안 나오는 것이 인생이고 굳이 답을 찾자면 삶의 끝 외에 없는 거다. 막막하지, 길이라는 길엔 표지판 하나 없으니까. 달뜬 꿈도 섣부른 좌절도 겹따옴표로 싸서 던져버리자. 오늘 밤에도 구름 너머엔 별이 바람에 스치울 테니까.



2011.08.23 

수유너머R 글쓰기 수업 '글쓰기의 최전선' 2기 다섯번째 과제 - '경제학/철학 수고' 읽고 글쓰기.


Posted by Daesung Ju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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