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에 해당되는 글 3건

  1. 2012.06.16 사랑 사랑 누가 말했나 (1)
  2. 2012.04.30 "사랑이 뜸들이고 나면" (1)
  3. 2009.06.28 시대적 과제로서의 사랑에 대한 고찰

"여보세요. 거기 ㅇㅇ유치원이죠? 지금 CCTV 보고 있는데요, 왜 우리 아이는 안챙겨줘요?"

유아교육과에 다니는 지인은 유치원에 실습 나갈 때마다 카메라 위치를 확인한다고 했다. 사각지대가 곧 쉬는 곳이라고 했다. 유치원에 카메라 달 생각을 한 사람은 누굴까? 아이는 원형감옥, 아니 안전한 유치원에서 교육받을 수 있다. 그리고 사고가 나면 책임 소재도 가릴 수 있다.

주차장 알바 이틀째 되던 날이다. 여느 차와 같이 일방통행 도로로 굳이 역주행해 들어간 차는 이윽고 마주오던 차를 위해 후진해야만 했다. 30여 미터 후진하던 차는 뒤에 주차돼 있던 아우디와 부딪치고는 멈췄다.

나는 고민했다. 소리만 컸지 흔적은 티나지 않는데 그냥 가시라고 할까. 하지만 애먼 책임을 지게 되는 것도 걱정이었기에, 차 주인한테 전화해 보시라고 했다.

아우디 주인이 연락이 안되자 사고를 낸 이는 전화번호를 남기고 갔다. 처리가 끝나고 한시름 놓고는 이 일을 계속해야 하나 고민하는 와중에 사무실에서 연락이 왔다. 근무지 비우고 잠깐 오라는 전화였다.

"주차유도원 수신호 따르다가 사고 났다던데 사실이에요?"

물론 아니었다. 팀장님과 함께 CCTV 화면을 확인했다. 나는 사각지대에 있었고 아마 진실도 사각지대에, 아니 없었다. 어쨌거나 덤터기 씌우려는 수작임은 분명했고 팀장님과 가해 차량 주인의 통화로 사고 처리는 정말 마무리됐다. 그나저나 그 차는 교회 차였고 뒤에는 신자로 보이는 이들이 여럿 타고 있었는데, 할렐루야! 은총 대신 아우디 수리비를 내리셨구나.

"안아줘, 마지막으로 한번만 안아줘"

5년 전 집나간 엄마를 찾아낸 아들이 엄마와 헤어지기 직전 이렇게 말했다. 극심한 우울증으로 일상 생활마저 어려운 엄마는 소년 가장인 아들에게 다시는 자기를 찾지 말라고 했다. 장남은 끝내 엄마 품에 안기지 못한 채 집으로 돌아왔다. 어디 다녀왔냐고 캐묻는 둘째에게 짜증을 냈다. 동생들을 아프게 하고 싶지 않은 소년은 입을 닫았다.

TV에선 이 다큐와 함께 사람들의 시청 소감을 보여줬다. 새 사람이 된 듯한 표정의 어느 소년이 화면에 나왔다. 엄마는 곁에서 흐뭇하게 웃고 있었다.

"제 처지를 불평하기만 하고 공부도 잘 안했는데, 앞으로는 열심히 살아야 겠어요."

실로 역겨웠다. 가장 아픈 상처를 보여줬건만 사람들은 자신의 처지에 안도하기만 했다. 남보다 나은 것에 감사하는 마음이란 얼마나 구태의연한가. 내 몸이 온전해서, 우리집이 가난하지 않아서, 부모님이 모두 살아 계셔서... 퍽이나 감사할 일이다.

사랑한다는 말에는 얼마나 많은 비루함이 숨어 있을까. 진짜 사랑이라는 게 있을까. 알바하면서 내 곁을 바짝 붙어 레이싱하듯 지나가는 차를 볼 때면 상상한다. 저 사람은 마음 따뜻한 가장일 것이다. 저이는 금쪽같은 딸내미를 세워두고 차를 그렇게 몰지는 않을 것이다. 저이는 가족을 사랑한다.

내일 아침이면 피곤에 찌든 유치원 선생님이 카메라 사각지대에 웅크리고 앉아 친구한테 카톡을 보내고 있을 것이다. 교회에선 주님의 은총을 찬미하며 고운 목소리로 감사 기도를 드리겠지.

"거짓말이야 거짓말이야 거짓말이야
사랑도 거짓말 웃음도 거짓말"

사랑한다고 함부로 지껄이지 말자.

2012.6/5 처음 씀
6/6,9,13,15 수정

Posted by Daesung Jung

댓글을 달아 주세요

  1. 갈매나무 2012.06.16 12:36 신고 Address Modify/Delete Reply

    난 사랑이라는 것이 정말 있다고 믿지만,
    저마다 표현하는 방법이 다르기도 할거고,
    사랑이 아닌 것을 사랑이라고 착각하는 이들도 있을테고...ㅎㅎ

노들야학 박경석 교장샘이 페이스북에 멋진 사진을 공유하셨다. 

(원본은 "장애, 성과 적응"이란 뜻의 "Discapacidad, Sexualidad y Adaptacion" 페이스북 페이지에서 나온 건데, 어떤 성격의 공간인지는 모르겠다.) 

아무튼 사진 아래 달린 글을 읽을 수 없어 무척 아쉬웠다. 그래서 약간의 수고 끝에 뜻을 알아냈다.


  우선 스페인어 원문 (모음 위의 기호는 입력할 수 없었다)

ningun hombre esta realmente enamorado, hasta que guarda su orgullo, vence sus dudas, y confia en la mujer que su corazon eligio


  구글 번역 결과

no man is really in love, until you save your pride, overcome their doubts, and trust the woman who chose her heart

(chose her heart - 이 부분은 오역인 듯)


  spanishdict 번역 결과


any man really fallen in love, to save his pride, overcomes his doubts and trust in women than his heart eligio
Microsoft Translator
No man is really in love, until you save your pride, overcomes their doubts, and hopes in the women that their heart chose
SDL
no man is in love really, until he(she) keeps its pride, conquers its doubts, and trusts in the woman that its heart chose

PROMPT













  나의 번역

"남자가 온전한 자존심을 갖고 의심을 떨치고, 또한 본인의 마음 그대로인 여자를 신뢰하기 전까지 남자는 여자를 진정 사랑하는 게 아니다."



Posted by Daesung Jung

댓글을 달아 주세요

  1. Alyosha 2012.05.03 21:59 신고 Address Modify/Delete Reply

    좋아요 백 개 던집니다.

자본주의적 개인주의, 그리고 경쟁은 사람과 사람 사이에 벽을 세우고 사람들은 저마다 홀로 불안에 떤다. 씻지 못할 불안감을 해소할 방도는 사랑이다. 통속적 의미로 왜곡된 사랑의 본래 의미를 드러내고, 사랑이 개인적 차원에서는 물론, 사회적 차원에서도 과제라는 것이 이 보고서의 요지이다.

(재즈의 역사 수업 때 보고서로 냈던 것, 그러나 재즈에 관한 내용은 한줄도 없다.)

1. 문제제기

 

All you need is love…

 

연쇄살인범 강호순의 범행은 사람의 생명을 앗아갔을 뿐만 아니라, 전사회적인 공포 분위기 조성에도 큰 몫을 했다. 밤길을 걷는 무고한 남자들이 같은 길을 가는 여자에게 괜한 두려움을 주게 되었다. 근거없는 의심, 그리고 그것을 남자가 내면화하는 것은 신뢰가 무너진 모습이다. 여자는 뒤따라오는 남자가 무서워 걸음을 재촉해야 하고 남자도 여자를 앞지르기 위해 또한 발길을 서두른다. 귀가길의 경주, 블랙 코미디다.

장자연 리스트가 공개되었다. 안타까운 죽음으로 인해 공공연한 사실이 실제 일어난 것으로 확인되었다. 연예계는 정치판과 마찬가지로 재능보다는 윗사람에게 잘보이는 노력에 성공이 좌우되는 곳으로 판명되었다. 이제 연예인을 꿈꾸는 이들은 공포와 환멸, 그리고 거부감을 느낄 것이다. 대중 문화를 소비하는 대중도 스타의 성공을 곱지 않은 눈길로 보게 되었다.

한편, 실체를 규명하기 힘든 세계적 경제 위기, 당장 대학부터 학생들 간의 경쟁이 심화된다. 학생 운동은 관심 밖이고 학점과 어학 점수에 매몰된 일상이다. 취업을 한다 해도 끝이 아니다. 쳇바퀴처럼 돌아가는 하루하루, 이것은 마르크스가 일찍이 이야기한 소외.

이제 사람들 간의 관계에서 인간적인 느낌을 찾기 힘들다. 한국에서 서구화, 즉 개인주의화는 정감 어린 관계를 말살해 버렸다. 존재가 관계보다 우선하는 현실이다. 신영복 선생은 강의에서 동양과 서양의 가치관을 각각 관계론과 존재론으로 규정한다. 역사가 변증법적으로 발전한다면, 이제 한국인은 잊혀져가는 관계론과 작금의 존재론을 절충한 새로운 가치관을 모색해볼 시기를 맞았다.

이제는 한물간 포스트 모더니즘 또한 개인주의의 심화에 따른 것이라 볼 수 있다. 개인의 가치관이 여타의 ‘~주의의 수용을 거부하고 각자 자신만의 길을 걷기에 거대 서사는 성립이 불가능한 것이다. 개인주의는 존재간의 관계를 망각시키며 자아의 자유를 최상의 가치로 삼는다. 결국에 남는 것은 이기적인 개인들이다. 공동체의 개인은 존재만으로도, 관계만으로도 살 수 없다. 둘 중 하나를 부정하면 삶은 피폐해 진다. 모두가 자기 얘기만 하는 소통 불가능한 상황에 회의를 느낀 이들이 포스트 모더니즘의 포스트를 논하는 이 때, 우리가 갈 곳은 어디일까? 중용을 모색해볼 때다.

개개의 존재로 파편화된 사람들 사이를 잇는 끈은 사랑이다. ‘연대가 이성적 판단을 감성의 영역으로 전이시키기 위한 과정을 수반하는 데 비해, 사랑은 그 자체로 수단이자 결과다. 연대는 사랑으로 맺어지고 유지된다.

사랑에 우호적인 관계라는 단순한 의미만 있는 것은 아니다. 보통 사랑은 젊은 남녀 간의 낭만적 분위기를 지칭하지만 테레사 수녀의 아가페적 헌신도 사랑이고 부모 자식 간의 애틋함 또한 사랑이다. 신뢰와 정당한 사회 질서, 그리고 근본적 가치 등의 회복은 사랑으로 가능하다. 개인주의와 공동체의식의 조화 또한 여기서 시작된다. 이웃을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유언을 돌이켜볼 때다.

사람이 갖고 있는 그릇에 감정을 담고 그것이 메마르거나 흘러넘친다고 표현하는 게 일반적인 일이다. 하지만 감정은 3차원적 형용으로 끌어안을 수 없는 무한의 것이 아닐까 한다. 거대한 돌에 깔려 생명의 위기에 처한 인간은 순간적으로 엄청난 힘을 내서 돌을 밀쳐 내기도 한다. 존재가 의식을 규정하는 힘에 굴복하지 않고 저만의 독특한 의식 체계를 구성하는 것이 인간이다. 그것은 인간으로서의 긍지이다.

그 힘은 감정에서 나오는 것이라 본다. 긍정적인 심리로서 사랑은 무한한 것이고 또한 보다 깊이 있고 복합적인 인생을 살게 하는 근원적인 힘이다. 포스트 모더니즘의 포스트는 새로운 질서 모색이 아닌, 잊혀져가는 가치에 대한 재발견에 기반할 때 가치있는 논의가 될 것이다.

이 보고서는 존재와 관계를 포괄하여, 참살이(well-being)가 일상적 사랑에 의해 가능하다고 보는 문제의식에서 출발한다.

 

Love yourself ,  Love one another.

 

2. 이론적 배경

 

첫사랑은 왜 누구에게나 아련한 추억으로만 남아있을까. 왜 누구나 실패하는 걸까. 시절 인연이 아니었기 때문일까. 아니면, 사랑이 아니었던 건가.

철들기 전의 풋풋한 기억으로 미화되는 첫사랑은 환상이다. 시간이 갈수록 그 어떤 기억도 온전히 남지 못하고 저마다 나름대로 재구성되듯이 첫사랑 또한 각색되고 만다. 기실 그것이 사랑이 아니었을 수도 있고, 사랑할 만큼 성숙하지 못했던 탓일 수도 있다.

에리히 프롬[1] 사랑은 무엇인가에 대한 답을 인간 실존의 문제로부터 시작한다.

나 자신이 집단으로부터 독립된 존재라 자각할 때의 분리감, 사회와 자연에 비해 인간의 보잘 것 없음, 그리고 나와 주변인들에게 죽음이 절대적이라는 사실이 주는 불안감 등 인간 실존의 문제는 쉬이 해결할 수 없기에, 사람들은 그 불안감, 분리감으로부터 도피하고자 한다. 이는 가학증, 피학증이라는 도착적 형태로 나타난다. 하지만 환락의 순간 이후에 불안감은 더욱 크게 돌아오고야 만다. 이러한 도피가 아닌 극복, 즉 인간 실존의 문제에 대한 유일한 합리적 대답으로서 사랑은 의미를 갖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곡되지 않은 순수하고 성숙한 사랑은 무엇일까.

그것은 능동적 활동이다. 대상에 대한 이기적 욕구에 의해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그대를 사랑하기에 그대가 필요한 것이다. 스스로 끊임없이 각성하여 대상에 대한 관심을 유지한다. 그리고 그의 성장과 행복을 갈망하는 것이다.

한편, 자기애 없이는 어느 누구도 사랑할 수 없다. 사랑의 대상은 본래 불가분의 것이기 때문이다. 타인에 대한 사랑과 자신의 자아에 대한 사랑은 명백히 구분할 수 없는 것이다. 자신을 사랑하지 못하는 자는 연인에게 집착하는 미성숙한 모습을 보인다.

오래되었음에도 불구하고[2] 여전히 참신한 저자의 사랑관은 현대의 고정관념에 문제를 제기한다. 연인 간의 낭만적, 혹은 열정적 사랑은 진정한 의미의 사랑인가 하는 것이다. 낭만적 연인에게는, 실존적 분리감을 느끼는 외연이 연인 바깥으로 확대됐을 뿐, 상대방을 열렬히 탐닉한 뒤의 권태로운 익숙함이 새로운 대상을 찾게 한다. [3]

저자가 논하는 진정한 의미의 사랑은 두 사람이 서로 실존의 핵심으로부터 사귀고 그 핵심에서 자기 자신을 경험하는 것이다. 이 때, 둘의 관계는 휴식처가 아니라 함께 인격적으로 성장하는 공부의 장이다. 그리고 각자의 개성을 잃지 않는 관계이다.[4] 

이제 사랑에 대한 무수한 개념 논의 뒤에 사랑의 기술이 등장할 차례이다. 사랑의 기술을 익혀 성숙한 사랑을 하고자 하는 이는 생활의 모든 면을 통해 직업 이외의 자기훈련[5], 한가지 일로의 정신 집중, 결과를 기다리는 참을성으로서의 인내를 해야 한다. 그리고 항상 객관적으로 사고하는이성을 일깨워야 한다. 이때 객관적으로 사고한다는 것은 자아도취와 근친상간적 애착으로부터 탈피한다는 의미이다.

여기서 특히 주목해야 할 것은 정신 집중이다. 대상에 대한 관심을 유지하고, 그의 성장과 행복을 갈망하고자 스스로 끊임없이 각성한다는 것은 곧 정신 집중이다. 자기애의 일환으로서 자신의 심리 상태를 면밀히 관찰하는 것은 항상 깨어있을 때에 가능한 것이다. 타인을 사랑할 때, 일상의 각성으로서 정신 집중의 중요성은 더욱 부각된다.

한편, 저자에게사랑은 개인적 차원을 넘어서는 주제이기도 하다. 그는 근대 자본주의의 문제를 지적하면서 사랑의 역할을 강조한다.[6]

자본주의 체제에서 구성원에게 요구되는 역할상은 다음과 같다. 더욱 많이 소비하고 취미가 표준화되어 예측 가능한 사람이자, 자신이 자유롭고 독립되어 있다고 믿되 집단에 협력하고 명령에 순응하는 사람이 자본주의가 요구하는 현대인의 모습이다. 결국 현대인은 자기 자신은 물론, 동료, 자연으로부터도 소외된다. 스스로 상품이 되는 현대인은 노동의 규격화와 오락 산업을 통해 실존적 분리감을 잊는다. 그리고 분리감을 극복하는 합일에 대한 갈망 또한 잊게 된다.

서양 사회에서 주변적 현상으로 치부되며 의미가 축소된 사랑은 기실 분리감의 해결책이며, 인간의 사랑하는 능력을 일깨우려면 사회가 재조직되어야 한다고 저자는 역설한다. 사랑의 발달을 배제하는 사회는 인간의 본성과 모순을 일으키기에 결국 멸망하리라는 예언까지 내놓고 있다. 합일에의 욕구를 은폐시키는 것이 자본주의의 근본적 속성이라 보며 체제의 부조리함을 강조하는 것이다.

요약해 보면, 정신분석학자로서 프롬은 사회적으로 통용되고 있는 사랑의 허구적 속성을 지적하고 진정한 사랑은 무엇인가 강조하고 있다. 이것은 인간 관계는 물론, 개인 내면 또한 재구성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나는 그 사람을 정말 사랑했던가, 사랑하고 있는가, 앞으로 어떻게 사랑할 것인가.

연인의 낭만적 감정으로서만 부각되는 사랑이 진정한 의미로서는 자기애는 물론, 형제애, 모성애, 신에 대한 사랑 등 형태 상의 구분을 무색케 하는 불가분의 것이라고 한다. 하지만 근대 자본주의체제는 인간 실존의 문제도, 사랑도 잊게 한다.

저자는 체제의 변혁을 모색하지만, 사랑은 물론 인간의 모든 감정이 무한한 것이라는 내 입장으로서는, 사랑 앞에서는 어떠한 구분도 거대한 사회 체제도 무색해질 따름이다. 다만, 프롬의 긴요한 문제제기에 따라 사랑하는 관계를 포함한 모든 인간 관계의 허구성을 인정하고 인간적인 것은 무엇인가 포괄적으로 고민해볼 때가 되었다. 정치 견해를 막론하고 휴머니즘은 부정할 수 없는 가치이지만, 무엇이 인간적인가 하는 문제는 사랑 만큼이나 논외의 것이 되어 왔다. 그런데 인간적인 것은 사랑의 문제이기도 하다. 휴머니즘은 곧 사랑의 재발견이다.

 

3. 분석

 

모두 다 사랑하리

 

사랑은 대중 가요에서 지리멸렬하게 노래되는 소재이다. 노랫말의 애절함이 흥행의 조건이라도 되는 듯하다. 그런데 고고해 보이는 소설도 별반 다르지는 않다.

부재를 통한 존재 인식, 있을 때 진작 잘 하지 못하고 떠난 뒤에야 확인하는 이 안타까움. 소설도 가요 만큼이나 사랑, 그 구구절절함을 노래한다. 한편, 낭만적 사랑의 변주곡보다는, 허구성을 일깨우고 나아가 새로운 사랑의 방법을 제시하는 소설도 꽤 있다.[7] 여기에 사랑의 진면모, 다양한 모습이 드러난다. 우리가 생각해 왔던 사랑과 진짜 사랑은 무엇일까?

20대의 연인은 얼핏 보기에 낭만적 외양을 띄고 있으나 둘 사이에 치밀한 계산이 교차하고 있다. 인간적으로 미성숙하고 그래서 남을 대하는 것도 이기적인 이들의 경우’, 서로 스펙을 따진다. 무슨 대학의 어느 과를 다니고 어디에 살며 키는 몇에, 이 사람과 같이 다니면 쪽 팔리지 않을까 걱정한다. 열렬히 상품 교환의 시장에 투신한다. 남보다 나은 연애 상품이 되고자 노력한다.

낭만적 사랑과 사회[8]의 주인공 유리는 연애를 온전히 계산에 따른다. 된장녀 신드롬의 표상이다. 상대 남자의 집안과 경제력, 외모를 최고로 중시한다. 그리고 자신의 처녀성을 결혼할 남자에게 바치고자 구강 성교를 애용한다. 곧 꿈 같은 상대를 만나고 자기만의 거창한 공식대로 첫 관계를 준비하지만, 관계 후에 혈흔을 확인하지 못하고 그 남자도 끝내 천박함을 드러낸다. , 장구한 계획이 실패하고 만다.

극단적으로 통속적인 유리라는 모델은 인간 관계를 시장의 거래로 완전히 내맡겼다는 점에서 비극적이다. 기실 사람들과의 친교에 거래적 속성이 전무한 것은 아니다. Give and take, 가는 것 다음에는 오는 것을 기대한다. 하지만 그것만이 전부는 아니며, 이익을 취하는 것에만 골몰하면 그 관계는 피상적으로 겉돌게 된다. 명백하게 드러나지 않는 심리적 안정감, 행복감 등은 거래를 무색케 한다. 한없이 줄 수도 있고 한 없이 받을 수도 있는 것이다.

철저히 상품화된 인간은 처참할 따름이다. ‘낭만적 사랑과 사회라는 제목과 내용의 차이로서 작가는, 시장 구성원으로서의 인간이 타인과 맺는 관계에서, 상품 거래만을 지향하지 말고 중용을 지켜 보라 주문한다. ‘인맥 관리란 말로써 그 천박함이 드러나는 계산적 관계는 지양해야 한다. 자신의 성공을 위해 타인을 이용하여 사람이 결국 수단으로 전락하는 안타까운 일은 피하는 것이 옳다.

주인공 유리는 프롬이 강조한 자기애가 부족한 듯하다. 프롬에 따르면 이기적인 사람은 정작 자신을 사랑하지 못하고 있다.

명동이나 동대문의 밤은 사람들로 북적인다. 거기서 흔히 듣게 되는 말은, “여기 왜이렇게 사람이 많아?“ 라고 하는 것이다. 자신 또한 인파 속의 한 사람임을 잊거나 무시한 채로 내뱉는 말이다. 사람들은 왜 이럴까 하는 사회과학적 의문에는 나 또한 포함시켜야 한다. 너도 나도 그도 그녀도 모두 사람이다. 그러므로 사람에 대한 사랑은 자기애, 타인에 대한 사랑 모두를 포함하며 이들은 불가분의 것이다. 이기적인 사람은 자기 자신만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고, 그저 사랑하는 능력이 결여돼 있을 뿐이다.[9]

나는 완벽한 사람이어야 하기에 자신의 단점을 부정하는 것은 스스로 사랑하지 못하는 이의 또 다른 면이다. 그리고,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타인에게 사랑을 전하는 데에 미숙할 수밖에 없다. 성격이 온화하고 키가 몇이라서 남을, 나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다. 이런저런 단점에도 불구하고 사랑하는 것이 성숙한 모습이다.

소설 아기 부처[10]에서는 자기애에 실패한 남녀가 서로 고통받는 사연을 보여준다. 주인공이 반복해서 꾸는 꿈 속에서, 진흙으로 빚어진 아기 부처는 아무리 짓이겨도 제 얼굴을 되찾는다. 음흉하게 입꼬리를 들어올리고 눈꼬리가 찢어진 얼굴은 주인공의 어떠한 노력에도 변하지 않는다. 이것은 자기 부정이 소용 없는 일임을 상징하는 에피소드이다. 이 여인의 남편도 다르지 않다.

얼굴 아래 목덜미부터 손목을 제외한 전신에 화상을 입은 남자는 사회적으로 성공했다. 화상을 제 생의 부족한 면으로 인식하고 이를 극복하고자 노력한 끝에 프라임 타임의 앵커가 되었다. 하지만 여자를 대하는 그의 방식은 유치하기만 하다. 현재의 아내에게 구혼하던 날, 우선 옷을 벗어 온 몸의 상처를 보여주었다. 그 모습을 아내가 동정하며 받아들이자 안도한다. 하지만 아내는 얼마간의 결혼 생활 끝에 남편을 향한 자신의 마음이, 사랑이 아닌 동정이었음을 깨닫고 결국 이혼하려 한다. 이때 남편은 외도를 하는데, 젊은 여자는 그 상처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그는 절망하여 모든 여자를 저주하게 된다.

거부감을 동정으로 억누른 여자, 화상을 부정하기만 하는 남자는 이혼과 외도 소동을 겪은 뒤에야 서로를 인정한다. 여자의 꿈 속에서 아기 부처가 사라진 뒤에, 부부는 일상을 되찾는다. 자기애의 단초를 보인 뒤에야 평온한 부부 관계로 돌아갈 수 있는 것이다. 나를 사랑하지 못하면 남도 사랑하지 못한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남을 사랑하는 방식은 어떤 모습일까?

여행을 떠난 뒤에야 집의 소중함을 알듯이, 한 사람이 사라지고 나서야 그에 대한 나의 마음과 그의 역할이 뚜렷하게 드러난다. 한없이 사랑을 주기만 했던 엄마가 우연한 사고로 실종되자 한참을 찾아 헤매다 낙담한 딸은 마리아 상 앞에서 엄마를 부탁해[11] 라고 기도한다.

김정현의 소설 아버지[12]에서는 집안의 가장으로서 아버지가 떠맡은 과도한 부담을 안스럽게 바라보았다. 신경숙의 이 소설에서는 어머니를 주목한다. 엄마처럼은 안 살겠다는 다짐이 무너지고 자신도 같은 엄마가 되어가는 딸은 한없는 희생이 얼마나 위대한 것인지를 깨닫는다. 통화를 하다 퉁명스럽게 답하던 것을 후회하며, 엄마가 다시 돌아오면 잘 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저자는 파란색 슬리퍼를 신고 황망히 아들을 찾던 엄마를 새의 모습으로 바꾼 뒤에, 새의 입으로 이지적인 말들을 늘어놓는다. 자못 유치한 이 대비를 통해 엄마 또한 자식들과 다름없는 한 인간이라는 점을 상기시킨다. 엄마의 재인식을 통해, 있을 때 잘 하라는 단순한 진리를 각인시킨다. 소 잃고 외양간 고친다고 소가 돌아오는 것은 아니다. 소설에서, 실종된 엄마는 끝내 어디선가 세상을 떠나버렸고 자식들은 엄마를 사실상 잊고 살았던 과거를 반성한다.

엄마의 사랑은 날 때부터 변함없이 자식을 향한다. 엄마가 늙어간다는 것을 느끼는 가슴아픈 순간을 짚고 태도를 바꿀지, 아니면 명절 때에나 관심을 갖는 물리적 거리에 묻혀갈지는 자기 자신에 달려있다. 성장의 과정 중에, 엄마도 나처럼 나름의 욕망을 지닌 존재라는 것을 새삼스레 확인하고 달리 보게 되는 것은 하나의 터닝 포인트이다. 타인을 사랑하는 것은 물론 자기애를 기반으로 하며, 또한 내면이 성장하는 이 지점이 결정적인 계기가 된다. 자식으로서 받기만 했던 자신이 되돌려 주는 방법을 익히는 것은 엄마 또한 타인이라는 점에서 중요한 시작이다.

한편, 사랑을 나누는 제도적 틀로서 연애는 누구의 남자 혹은 여자친구라는 명백한 타이틀이 주어지는 관계이다. 이에 더해 두 집안의 만남이라는 부담과 지속 의무가 지워진 결혼 관계, 이들만이 사랑을 이루는유일한 방법일까?

결혼은 곧 독점적 관계이다. ‘아내가 결혼했다[13]에 등장하는 복혼[14]이라는 관계는, 일탈적 사랑을 제도적으로 정착시키는 방법이다. 남편, 그리고 또 다른 남자, 이 둘을 모두 사랑하고 그래서 두 남편을 두려는 아내 인아의 바람에 남편 덕훈은 점차 수긍한다. 이것은 내 여자를 나 이외의 또 다른 사람, 즉 또 다른 한 존재로 떼어놓고 보게 되는 과정이다. 소유적 사랑은 연대의 개념으로 변모한다. 결혼 관계에서는 서로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집착을 하고 이기심을 가린다. 덕훈과 인아, 그리고 재경, 세 사람이 시도하는 새로운 관계는 비루한 사랑이 자유로워질 여지를 보여준다.

사랑하는 사람과 꼭 결혼을 해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제도와 감정은 일치할 수 없다. 굳이 속박되지 않고도 사랑을 계속할 수 있지만, 결혼은 둘의 사랑을 상대방에게 고정시키는 것이다. 배우자 이외의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부정된다. 그리고 지속하도록 요구한다. 이러한 스트레스를 감안하고도 결혼을 하는 것은 안도감 때문이다. 여럿을 사랑하는 것을 서로 포기하는 것은 곧 불안감으로부터 탈피하는 것이다. 연인이 없는 이에 대한 비웃음, 결혼 적령기라는 사회적 압박 등은 독점적 관계로 개인을 유도하는 요인이 된다. 이때, 배우자를 얻는 것은 과제가 되어버린다.

사회화의 과정으로서 결혼은 사랑을 형해화한다. 이에 비해 복혼은 최소한 독점적이지 않다는 점에서 신선하다. 물론 이것은 소설에서나 가능할 관념적 공론일 수도 있다. 그리고 두 사람의 독점에서 세 사람의 독점으로 외연이 넓어졌을 뿐이라 볼 수도 있겠다. 하지만 결혼이 감정을 억압하는 허구성은 분명히 드러나고 있다.

감정이 제도에 우선한다는 사실을 상기시켜주는 이 소설은 미완성이다. 한 사람의 아내와 두 남편이 함께 사는 것은 어떤 모습일지는 결말 뒤로, 독자의 상상에 맡겨놓았다. 미완의 이야기는, 일처다부제라는 생소한 제도를 통해 독점하지 않고도 사랑하는 방법에 대한 모색을 가능케 한다. 나는 그를 진정 사랑하는가 하는 문제제기도 가능하다. 결혼은 사랑의 성숙이 아니라 하나의 방편에 불과하다.

사랑이 통용되는 일반적 관계로서 20대의 연인이 흠모하고 유지하는 관계의 허구성을 지적했다. 이것은 자기애의 부족에서 기인한 것으로 보이며, 자기애와 타인에 대한 사랑, 가족 구성원에 대한 사랑이 모두 불가분의 것이라는 프롬의 견해가 확인되었다. 부재를 통한 존재 인식에 이르기 전에 진작에 잘 해야 한다는 단순한 진리도 상기해 보았다. 그리고 결혼 관계의 허구성과 새로운 관계 모색의 가능성도 살펴 보았다.

현재 답습하고 있는 사랑은 진정한 사랑과 거리가 멀고, 개인주의가 강화되는 세태는 분리감과 불안감을 강화시킬 뿐, 인간 실존의 문제는 여전히 미해결인 상태에 머물고 있다.

 

4. 결론

 

만약 한 사람의 인간이 최고의 사랑을 성취한다면 그것은 수백만의 사람들의 미움을 해소시키는 데 충분하다.  - M.K.간디

 

남을 무작정 신뢰하는 것은 철부지나 하는 것이다. 우선 못 믿고 봐야 한다. 그의 말이 어떤 속내를 갖고 있을지 정신 차리고 파악해야 한다. 긴장을 늦추면 내 재산을 잃고 마음까지 잃는 수가 있다. 그렇게 너와 나 사이에는 뚜렷한 벽이 솟는다. 나는 내 할 일을 한다. 나만의 자유를 누린다. 혹 너의 영역을 침해하면? 별 수 없다. 내 알 바 아니다.

자본주의의 경쟁 구도는 사람들 간의 관계를 각박하게 한다. 입시, 취업, 실적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동료는 은연 중에 적이 된다. 나는 살고 너는 죽는다. 이러한 사고 방식을 철저히 내면화한 사람은 천박해 지며, 어쨌든 이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즐거운 듯 씁쓸한 듯 하루하루를 살아간다.

인터넷이 세계인을 연결시킬 때, 모니터 화면에 몰두하는 나와 가족의 사이는 그만큼이나 멀어진다. 또한 인터넷은 비난의 장이다. 욕하는 카타르시스 이면에 나의 올곧음을 확인한다. 나는 옳고 너는 틀렸다. 불편, 불익은 불의와 같은 것이 된다. 그도 나와 똑같은 인간임을 생각할 여유 따위는

그렇게 너와 나 사이의 벽은 한없이 높아져만 간다. 너의 숨결을 느낀 적이 오래다. 네가 들이키는 공기가 얼마나 차가운지 알 도리가 없다.

관계의 회복은 사랑의 재인식을 통해 가능하다. 나를 사랑하는 일이 너를 사랑하는 것과 다르지 않듯이, 나만큼이나 소중한 너를 다시 보게 된다. 적이기도 하지만 동료이자 친구라는 사실이 강조된다. 사랑은 무한 경쟁 구도를 인간화한다. 나아가, 왜 이렇게 더 나은 상태를 향해 무작정 걸어가야 하는지 돌이켜보게 한다.

너는 나의 또다른 이름이다. 너로서는 내가 너이다.

프롬이 인간 실존의 문제로서 지적한 분리감은, 엄마와의 탯줄이 끊겼을 때부터 존재해온 듯하다. 분리감, 불안감은 곧 감정이므로, 부정한다고 잊혀지는 것은 아니다. 이성의 힘으로 극복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사랑은 감정으로서 불안감을 치환한다. 나를 남과 이어준다.

유기농 먹거리에 한정되지 않은 웰빙, 인간의 실존적 참살이는 사랑에 대한 인식의 전환에서 가능하다. 나와 맘이 맞는 사람을 만났을 때에만 사랑을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지금 바로 나 자신을 사랑할 수 있고, 친구도 가족도 사랑할 수 있다. 성숙한 사랑은 이 모두를 포괄하는 것이다. 사람들 간의 벽을 무색케 하는 것이다.

의지가 하느님의 선물인 것처럼, 감정 또한 그렇다. 사랑, 즉 감정은 무한대이다. 감정이 과할 때, 지치는 것은 육체이다. 사랑은 지치지 않는다.

받을 줄 밖에 모르는 바다는 사해, 즉 죽은바다다. 감정의 물꼬를 트는 것은 바다로 나아가는 것이다. 마음의 좁은 그릇을 깨치는 것이다. 그래서, 사랑은 개인적 과제이자 시대적 과제이다.

한방울의 이슬은 고고하게 하늘로 타오르지만, 저 멀리 내려간 빗방울은 모두를 껴안는 바다가 된다. 우리가 갈 길이다.

 

사랑을 이야기하면 사랑을 하게 된다.  - W.G. 베넘



[1] 사랑의 기술, 에리히 프롬, 황문수 역, 문예출판사. (1997년판)

[2] 원작은 1956 9월에 발간되었다.

[3] 정이현의 단편소설 제목으로도 차용된 낭만적 사랑과 사회’ (재크린 살스비, 박찬길 역, 민음사. (1985년판) ) 에서 살스비는 사회적 지위가 낮은 여성이 결혼을 통해 지위 상승을 꾀하는 것으로 전근대의 낭만적 사랑의 의미를 드러낸다. 상대적으로 여성 권익이 신장된 현대 사회에서는 낭만적 사랑의 사회적 의미가 퇴색된다. 낭만적 사랑의 실존적 측면은 프롬에 의해 그 허구성이 지적되고 있다.

[4] 개성의 유지는 앤서니 기든스의 합류적 사랑개념에서도 발견된다. 여기서 기든스는 합류적 사랑이 관능의 기술을 결혼 관계에 도입한 최초의 사랑 형태이고, 성적 쾌락의 상호 성취가 결혼의 유지 또는 해소의 핵심 요소라 말하고 있다. (현대사회의 성, 사랑, 에로티시즘, 앤서니 기든스, 배은경, 황정미 역, 새물결 (2003년판), 110p. ) 사랑이 성적 만족의 결과가 아니고, 오히려 성적 행복이 사랑의 결과라고 지적하며 프로이트의 이론을 비판하는 프롬의 견해는 이 지점에서 기든스의 개념과 구분된다.

[5] 정신 집중을 논하는 부분에서 저자는 홀로 있는 법을 배우라 한다. (사랑의 기술, 130p.) 이는 명상의 한 방법으로서 저자의 동양 사상에 대한 관심을 드러내는 것같다. ‘대상에 따라 달라지는 사랑의 형태챕터의 신에 대한 사랑을 설명하는 부분에서 프롬은,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학과 대립되는 동양 유래의 역설적 논리학에 주목한다. (88p.)

[6] 사랑의 기술, 100p.

[7] 교양수업 문학과 사랑의 교재로 사용된 작품들을 참고하였습니다.

[8] 낭만적 사랑과 사회, 정이현, 문학과지성사, 2003.

[9]이기적인 사람은 자기 자신을 엄청나게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거의 사랑하지 않는다. 사실상 그는 자기 자신을 미워한다그는 지나치게 자기 자신을 돌보고 있는 것 같지만 사실은 그는 진정한 자아를 돌보는 데 실패한 것을 은폐하고 보상을 얻으려고 노력하고 있을 뿐이며, 이러한 노력은 실패로 끝난다.” - 사랑의 기술, 73p.

[10] 아기 부처 (25회 한국소설문학상 수상작품집), 한강, 개미, 1999.

[11] 엄마를 부탁해, 신경숙, 창비, 2008.

[12] 아버지, 김정현, 문이당, 1996.

[13] 아내가 결혼했다 (2회 세계문학상 당선작), 박현욱, 문이당, 2006.

[14] 배우자가 동시에 두 명 이상인 혼인 형태. 일부다처, 일처다부, 군혼(群婚) 따위가 있다. – 출처 : Daum 국어사전.

Posted by Daesung Jung

댓글을 달아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