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적대화를 위한 넓고 얕은 지식


고대 노예제 사회 : 생산수단은 왕과 노예를 만들었다

생산수단은 소유자가 타인의 노동력을 이용하게 함으로써 사회적 관계를 왜곡시킨다.

신이 진짜 있는지 없는지의 문제는 지배자의 관심사가 아니다. 지배자 자신이 부를 수 있는 ‘신’이라는 언어만 있으면 된다. 왜냐하면 신은 지배자가 사회를 지배할 권리를 부여하기 때문이다. 독단적으로 지배하고자 하는 욕망을 지닌 자일수록, 그의 신앙은 절실하다.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역사적, 정치적으로 신의 문제를 고려했을 때, 신의 이름이 정치를 위해 사용되었을 혐의가 짙다는 것이다.

중세 봉건제사회 : 계급은 더욱 세분화되었다

쉽게 정리하면 서구는 두 가지 문화를 뿌리로 한다. 그리스-로마 신화와 그리스도교.

부르주아는 인간의 ‘이성’으로 신의 역할을 완벽하게 대체했다.

대치 구조가 명확해졌다. 구권력인 왕과 영주들은 장원을 생산수단으로 소유하고, 종교로부터 지배의 정당성을 얻었다. 반면 신권력인 부르주아들은 공장과 상업을 생산수단으로 소유하고, 이성으로부터 권력의 정당성을 얻었다.

근대 자본주의 : 새로운 권력이 탄생했다

부르주아는 자본가계급, 시민계급, 유산계급으로 불린다. 그리고 프롤레타리아는 이와는 대비되게 노동자계급, 무산계급으로 불린다.


근대 자본주의의 전개 : 공급과잉이 시작되었다

공장은 주문이 있기 전에 미리 물품을 대량으로 생산해낸다. 물품이 필요한 사람은 기다릴 필요 없이 시장에 가서 이미 생산된 물품을 구입하면 된다. 이러한 특성, 즉 물품을 구입하려는 욕구보다 이미 생산된 물품이 더 많은 상태가 자본주의의 특성이다.

제1차 세계대전 : 공급과잉이 전쟁을 일으켰다

사실 오늘날의 자본주의를 유지해주는 핵심 요소는 두 가지다. 하나는 전쟁이고, 다른 하나는 유행이다. 전쟁과 유행은 자본주의라는 어머니에게서 태어난 쌍둥이 형제라 할 수 있다. 전쟁이 공급 과잉의 문제를 단번에 해소하듯, 유행은 필요를 뛰어넘는 막대한 소비를 창출해서 공급과잉 문제를 해소한다. 충분히 사용할 수 있는 옷과 핸드백들이 매년 옷장 구석에 쌓여가거나 쓰레기통으로 향한다. 전쟁과 유행 없이 자본주의를 유지하기는 어렵다.

세계 경제대공황 : 가격 경쟁은 대공황으로 이어졌다
대공황 해결방안
1> 미국 : 뉴딜정책 - 자본주의 수정
2> 러시아 : 공산주의 - 자본주의 폐기
3> 독일 : 군국화 - 자본주의 유지

냉전시대 : 왜 자본주의와 공산주의는 대립하는가

공산주의 국가가 자본주의 국가와 무역 거래를 하지 않고 적대적인 관계를 갖는 것은, 공산주의 체제가 생산수단을 독점한 자본가의 존재를 인정하기 않기 때문이다. 

시장 확보가 필수적인 자본주의의 입장에서는, 자본주의와 무역 거래를 하지 않는 공산주의 국가가 늘어난다는 것은 시장의 축소를 의미한다. 시장의 축소는 수요량의 감소를 의미하고, 수요량의 감소는 자본주의의 생산 중단, 즉 공황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서, 공산주의 국가의 존재 자체가 자본주의에 위협이 되는 것이다.

‘국가’는 요청된다. 국가라는 개념은 신의 개념과 마찬가지로 지배를 정당화하는 역할을 수행한다. 그리고 특히 ‘애국’에 대한 강요는 지배자들을 편리하게 한다. 그래서 애국은 국가적 차원에서 장려되고 교육된다.

신자유주의의 탄생 : 새롭고 독특한 경제체제의 세계


자본주의와 공산주의 : 너에게 생산수단을 허하노라

공산주의는 개인이 생산수단을 소유하는 것을 금지하고, 모두 국가가 관리하는 체제를 말한다. 반면 자본주의는 개인이 사적으로 생산수단을 소유할 수 있게 하는 체제를 말한다.

자본주의와 공산주의의 차이는 ‘생산 수단의 개인적 소유를 인정하는지의 여부’가 된다. 자본주의는 생산수단, 잉여생산물 모두를 개인이 소유할 수 있는 체제다. 공산주의는 생산수단은  개인이 소유할 수 없지만, 잉여생산물은 개인이 소유할 수 있는 체제다.

공산주의 : 공산주의는 왜 실패했는가

공산주의는 모든 사람이 평등하고 평화롭게 살고자 한다는 인간 본성에 대한 낙관적이고 불가능한 전제에서 이야기를 시작한다.

 국가가 생산수단을 소유한다고 해도, 실제로 그 소유를 유지하고 분배하는 존재는 지극히 구체적인 사람이다. 즉 국유화된 생산수단을 관리하는 소수가 권력에 근접하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마르크스주의가 추구하는 노동자에 의한 프롤레타리아 독재는 실현되지 않는다. 국가의 이름으로 국가 전체의 생산수단을 통제하는 절대적 권한을 갖는 인물이 필연적으로 탄생한다.

공산주의와 사회주의의 구분

첫째, 혁명의 주체가 누구냐에 따른 구분이다. 이에 의하면 사회, 경제적 문제를 해결하고 노동자 중심의 세계를 만들어내는 주체를 노동자 스스로로 보는 입장을 공산주의라 한다. 반면 노동자는 실제로 스스로를 극복할 능력을 갖추지 못했으므로 엘리트계급 또는 부르주아들이 스스로의 권리를 내려놓고 노동자의 권리를 보장해나가야 한다는 입장을 사회주의라 한다. 이는 누가 사회를 바꿀 수 있는지에 대한 입장 차이로 공산주의와 사회주의를 구분하는 것이다.
둘째, 수단과 목적의 관계로 구분하는 방법이 있다. 이에 따르면 궁극적인 목표인 공산주의 사회는 노동자가 스스로 자신의 권리를 지키며 독재를 하는 사회다. 그런데 자본주의에서 갑자기 노동자 중심의 사회로 급격히 변화될 수는 없다.  따라서 과도기적 단계로서 노동자가 아닌, 국가와 정부를 대리하는 소수의 정치엘리트에 의해 운영되는 사회가 필요한데, 이를 사회주의라 부르는 것이다. 이 구분 방법은 공산주의를 궁극의 목표로, 과도기 단계를 사회주의로 설정함으로써 두 체제를 구분한다.
셋째, 내포의 관계로 보는 것이다. 사회주의를 국가가 주도하는 계획 경제라는 넓은 개념으로 파악하고, 공산주의는 그 중에서도 특히 노동자에 의한 계획경제라는 측면에서, 공산주의가 사회주의에 포함된다는 개념으로 판단하는 것이다.


보수와 진보의 현실적 구분 : 현실에서 보수와 진보는 어떻게 나타나는가
자본가의 이익을 우선할 것이냐, 노동자의 이익을 우선할 것이냐에 대한 정치적 입장이 보수, 진보 구분의 본질이다.

민주주의 : 민주주의는 어떻게 독재를 탄생시키는가

민주주의의 문제점이 발생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형식적 측면과 동시에 내용적 측면이 보강되어야 한다. 민주주의는 단순히 형식적 다수결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민주주의 정신이라는 내용적 측면까지 함께 고려되어야 한다. 다양한 의견의 수렴 과정과 절차가 보장되고, 각 구성원이 소수의의견에 귀 기울이는 관용적 태도가 전제되어야만 이상적인 형태의 민주주의가 비로소 가능할 것이다.

독재, 엘리트주의 : 독재와 엘리트주의는 나쁜 것인가

소크라테스가 질문하고 답변자가 대답하기를 반복하는데, 이 과정을 통해 소크라테스는 신탁의 의미를 깨닫는다. 자신은 자신이 잘 모른다는 것을 ‘아는’데, 사람들은 자신이 잘 모른다는 것을 ‘모른’다는 것을 말이다. 다시 말해서 자신은 다른 사람들보다 한 가지를 더 알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자신이 잘 모른다는 것’이다. 이것을 ‘무지의 지’라고 한다.

자유민주주의, 공산주의, 사회민주주의 : 경제와 정치는 어떻게 결합되는가

하지만 정부가 시장에 개입한다고 해서 군부독재기를 후기 자본주의나 사회민주주의 체제로 볼 수는 없다. 군부정권의 시장 개입은 산업을 육성하고 기업이 활동할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하기 위한 제한적인 개입이었기 때문이다. 정부가 시장에 개입해서 세금을 인상하고 규제를 확립함으로써 사회 전체의 복지를 추구한 적극적인 개입이 아니었던 것이다.

군부 정권의 시장 개입은 시장에 대한 국가의 간섭이라기보다는 국가에 의한 시장 투자라고 보는 것이 더 적절할 것이다.


이기주의와 전체주의 : 전체주의는 개인이 비윤리적 행위에 눈감게 한다

전체주의는 독립적으로 자생하는 하나의 이념이라기보다는, 사실 경제적 위기가 발생시키는 하나의 병리 현상으로 보인다.

전체가 위기에 처해있고 비윤리적인 방식으로 위기를 극복하고자 한다면 개인은 언제라도 자신에게 책임이 따르지 않는 것을 반긴다.

전체는 나의 이익을 위해 강력하게 행동하지만, 나에게는 책임이 없는 이상적인 사회가 전체주의다. 전체주의는 개인이 전체의 비윤리적 행위에 눈감게 한다.

윤리의 정의 : 윤리적 판단은 실제의 세계와 무관하게 존재한다

당위명제는 사실명제를 통해 증명될 수 없다. 당위명제는 사실명제와 무관하게 그 문장 자체의 내용만을 토대로 판단하고 평가해야 한다. 즉 윤리적 판단은 실제의 세계가 어떠한지와는 무관하게 독립적으로 존재한다.

의무론과 목적론 : 주어진 의무를 고려할 것인가, 미래의 결과를 고려할 것인가

정리하면, 의무론은 의무나 도덕 법칙을 준수하는 행위를 윤리로 보고, 목적론은 이익을 창출하는 행위를 윤리로 본다.

의무론과 칸트의 정언명법 : 절대적인 윤리법칙을 찾아라

정언명법이란 절대적이고 보편적이어서 누구나 따라야만 하는 도덕 법칙을 찾아내는 계산 기계 정도로 생각해볼 수 있다. 이 정언명법 기계에 내가 하려는 행위 X를 넣어본다. 그러면 계산을 거쳐서 이 행위 X가 보편적 도덕 법칙인지 아닌지를 구별해준다. 이 계산 기계가 작동하는 방식은 단순하다. 내가 하려는 특정 행위 X를 사회 구성원 모두가 동시에 한다고 가정해보는 것이다. 만약 그래도 사회가 붕괴하지 않는다면, 그 행위 X는 도덕적 행위가 되는 것이다. 


Posted by Daesung Ju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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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속사회

저자
엄기호 지음
출판사
창비 | 2014-03-17 출간
카테고리
정치/사회
책소개
나는 접속한다, 고로 차단된다2014년 우리 사회에서 가장 주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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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 병들었는데 아무도 아프지 않은 이유 1

 - 초조한 나르시시스트끼리 

   서로 징징대기만 하니까.


사실 우리가 다른 사람의 말을 듣는 것에 질려버린 큰 이유는 서로 징징거리는 소리만 하고 있기 때문이다. 자신의 사적인 경험을 자기만의 고통으로만 말할 줄 알지 남들도 들어줄 만한 '공적인 이슈들을 다루는 언어'로 전환해내진 못한다. 또한 이를 뒤집으면 우리는 남들의 이야기를 공적인 이야기로 들을 줄 모른다는 뜻도 된다. 말하는 입이나 듣는 귀나 모두 사적인 것을 공적인 것으로 번역해내는 능력이 없는 셈이다. 

  - 프롤로그, 26쪽


초조함은 지금까지 이야기한 것처럼 자신의 삶을 총체적으로 점검하는 것 자체를 불가능하게 한다. 삶의 목표와 방향에 댛나 총체적 점검에서 초조함을 대체한 것이 '관리'다. 내 삶 그 자체에 대해서는 돌아보지 않는 대신 이미 설정된 목표와 방향 내에서 제대로 과업이 수행되는지 아닌지를 감시·관리하는 일만이 남게 된다. 이 자기 감시와 관리의 기술이 발달하고 이에 충실할수록 정해진 트랙 바깥으로 내려오거나 트랙의 바깥을 상상하는 것을 불가능하게 하는 것이 통치의 전략이다. 

  두번째로 통치는 개인이 이 초조함을 자신의 개인적인 감정 상태로 받아들이게 함으로써 초조함의 원인으로 자신의 부족을 탓하게끔 조장한다. 사람들은 만성적인 초조함의 상태에 있으면서도 왜 자신 뿐만 아니라 거의 모든 사람이 초조해하는지를 돌아보지 못한다... 적어도 세 사람 이상이 동일한 문제를 겪고 있다면 이는 사적인 것을 넘어 공공의 문제라 할 수 있다. ...개인이 자신의 문제를 사회적인 것으로 보편화하지 못하고 자기의 문제로 환원시키는 것, 이 또한 통치 전략 중 하나다. 

  - 237~238쪽, 제3부 / 제1장 성장은 가능한가


타자와의 만남을 차단하고 그 만남을 구경으로 전환하며 자신의 세계에 만족하고 안도할 때 만남은 나르시시즘으로 포획된다. 타자는 나에게 내 세계의 협소함을 깨닫게 해줄 뿐 아니라 내 세계의 안온함을 일깨워 주는 존재다... 나르시시즘이라는 삶의 태도에서 타자에 대해 사람이 가질 수 있는 마음의 최대치는 '동감-연민'(sympathy)에 불과하다.

  이런 감정 이입에는 치명적인 위험이 숨어 있다. 내가 일시적으로 그 사람과 하나가 되긴 하지만 그 바닥에는 나와 그 사람의 처지는 다르고 '공통된 것'(the common)이 없다는 인식이 깔려 있다... 대개 우리가 사회적 약자를 보며 느끼는 연민은 나는 그렇지 않다는 안도감과 쌍을 이룬다. 연민의 결과가 나르시시즘으로 귀결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근대 서구가 주목해 왔던 주체의 성장 과정이 왜 기본적으로 타자를 도구화하는 나르시시즘인지...

  낯선 것과 대면하여 그 매혹에만 휩쓸려 버릴 때, 우리는 모든 것을 자기 자신의 관점에서만 바라보게 된다. 이처럼 상황 판단을 전혀 내리지 못하고 자기 자신에 도취하면 결국 자아의 상실로 치닫게 되지만 우리는 한사코 자신이 문제를 해결해 냈으며 전혀 문제가 없다고 여기게 된다. 그런 점에서 나르시시즘의 갖아 큰 무기는 바로 '정신승리'라고 할 수 있다. 

  - 249~252쪽, 제3부 / 제2장 무엇이 우리의 우정을 가로막는가


모두 병들었는데 아무도 아프지 않은 이유 2

 - 각자도생의 시대, 외로움에 파묻힌 사람들


이 사회에서 우리 모두는 외로워졌다. 그리고 외로움이 곧 인간의 실존이라고 착각하게 되었다. 마리프랑스 이리구아얭에 따르면 외로움은 남에게 거절당하거나 자신의 존재 가치가 부정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다. 사람이 옆에 있거나 없거나 따로 떨어져 나 혼자인 것 같은 감정이며, 내가 세상으로부터 전혀 이해받지 못하고 고립되어 있다는 느낌이다. 이 외로움의 상태에서 인간은 "자신에 대한 신뢰를 상실"하게 되고 "자아와 세계를 생각하고 경험할 수 있는 능력"을 상실하게 된다. 무엇을 경험하더라도 그것이 무엇에 대한 실감과 체험이며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를 보증할 방법이 없다. 이 상태가 되면 인간에게는 세계도, 타자도 필요 없어지게 된다. 

  - 제2장 단속사회의 출현: 타자와 차단하고 표정까지 감춘다, 82쪽


근대사회는 오디세우스 같은 개인이라는 독특한 인간의 존재 양식을 두루 퍼뜨렸다. 개인이란 다른 누구도 아닌 '나'를 말한다. '나'가 되기 위해서는 자신의 생활을 지금까지 존재하던 전통이나 습관에 그저 맞추고 따라해서는 안 된다. 따라서 근대적 개인에게 성찰성은 필수적이다. 성찰성이란 "새로운 정보나 지식에 비추어 이루어지는 항상적인 수정"을 의미한다. 개인의 자아정체성은 바로 '성찰하는 자아'로서 규정된다. 여기서 개인의 삶의 연속성은 집단에 의해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개인이 수행해야 하는 과제이며 자아 실현이라는 이름으로 완성된다...

  그렇다면 과연 모든 인간이 사회적 사슬로부터 해방되어 자신의 삶을 스스로 기획하는 서사적 주체가 되었을까. 오히려 우리는 사회가 붕괴함과 동시에 개인도 붕괴하는 역설을 맞이했다. 살아가며 자신이 참조할 만한 준거 자체가 소멸해 버렸고 공중에 무중력 상태로 흩뿌려졌다... 근대 자본주의 초기에 농노가 땅으로부터 '해방'된 것이 오히려 '굶어죽을 자유'를 의미했던 것처럼 모든 사회적 관계에서 해방된 개인에게 주어진 것은 '아무 것도 아닌 존재'가 될 자유밖에 없다. 사회가 붕괴함과 동시에 절대 다수의 사람들은 썸바디(somebody)가 아니라 노바디(nobody)로 전락한 것이다.

  - 283~284쪽, 에필로그


모두 병들었는데 아무도 아프지 않은 이유 3

"너 죽고 나 살자" 

...남의 고통에 대한 외면·망각·무감각은 능력

   - 유흥주점형 경제모델


바우만은 이것을 '의자뺏기 게임'이라고 부른다. 자리는 언제나 늘 모자라고 게임이 반복될 때마다 누군가는 탈락하고 추방되어야 한다. 마지막 한명이 남을 때까지 게임은 계속된다. 따라서 모두가 탈락의 공포에 시달린다. 최후의 승자라고 예외가 아니다...

  이 과정에서 노동의 세계는 "이익은 위로, 위험은 아래로 쏠리는" 형태로 변모했다. 류동민은 이것을 유흥주점형 경제모델이라고 부른다.

  ...문자 그대로 내가 '팔아먹을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되는가이며, 이는 유흥주점형 경제모델에서 살아남는 핵심요건이 된다... 그렇기에 이 유흥주점형 모델에서 노동자에게 요구되는 단 하나의 덕목은 타인의 고통을 외면하는 능력이다.

  - 209~211쪽, 제2부 / 제3장 노동: 타인의 고통을 외면하라



나와 남의 고민이 맞닿는 것

 - 공적인 이야기가 오가는 '공론장'


말로 해결하는 사회, 이것이 근대국가의 특징이며, 이 말을 통해 사회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의 토대를 흔히 공론장이라고 부른다.

  ...물론 이 공론장에서 나와는 별개인 사회 문제만을 다루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바우만에 따르면 공적 공간이란 "개인의 고민과 공공의 현안들에 대해 만나서 의논하는 장소"다. 즉 이곳에서는 사적인 문제와는 별개로 공적인 이슈들만 다뤄지는 것이 아니다. 이곳은 "사적인 문제들이 공적인 이슈들을 다루는 언어로 새롭게 해석되고 사적인 곤란들에 대해서 공공의 해결책을 모색하고 조정하며 합의"하는 공간이다. 사적인 일상과 공적인 토론이 별개의 것이 아니라 사적인 일상에서 겪는 여러 어려움들을 공적인 언어로 바꾸어내는 것이 바로 공론의 과정이다. 따라서 '말로 하자'라는 근대의 이상은 근대사회가 공론장의 존재 유무에 존폐를 건 사회라는 사실을 단적으로 드러내준다.

  - 170~171쪽, 제2부 / 제2장 소통: 위로를 구매하라


이야기는 끊임없이 이어져야 한다. 이야기의 힘은 경험의 전승에서 나온다. 경험의 전승을 통해 개개인의 경험은 갱신되고 확장되며 연속성을 부여받으며 이로써 공동체는 지속 가능한 공간이 된다. 경험에 갱신이 일어나기 위해서는 그 경험이 이후의 경험을 이해하고 해석하는 틀이 되어야 한다. 이야기가 전승되면서 그 이야기가 우리 모두의 공동소유가 되는 것, 즉 듀이가 말한 "의사소통은 경험이 공동소유가 될 때까지 경험에 참여하는 과정"이 가리키는 바가 바로 이것이다. 

  - 187쪽, 제2부 / 제2장 소통: 위로를 구매하라 


자기만의 색깔을 가지려면?


인간은 세상에 질문을 던지는 존재다. '왜?'라는 질문은 인간이 남이 시키는 대로 그저 따르지 않고 제 주관을 갖고 살아가겠다는 의지의 표명이다. 이럴 때 비로소 인간은 세상에 둘도 없는 존재로서의 개별적 자아가 될 수 있다. 세상과 자기 자신에 대해 독특한 답을 갖고 있기 때문에 유일한 존재가 되는 것이 아니다. 질문을 던지며 호락호락하게 세상과 타협하지 않겠다고 선언하는 순간부터 그는 세상에 둘도 없는 바로 그 사람이 될 수 있다. 

  - 제2부 쓸모없어진 곁, 몽상이 된 사회 / 제1장 관계: 질문하면 '죽는다' 130~131쪽


근대의 이상적 인간형은 내성적인 사람?

  - 리더 아닌 팔로워로서 내성적인 사람의 힘. (책 "콰이어트"의 맥락, introvert)


우리가 살아가는 2010년대의 눈으로 보면 이처럼 질문을 던지고 자신의 내면으로 들어간다는 근대사회의 세계관은 수동적이며 정적인 존재가 됨을 의미하기도 한다. 내면 속으로 들어간 자는 세상에 참여하지 않으며 아무 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능동성을 중시하는 현대사회에서 이런 침묵과 수동성은 '뭔가 문제가 있는 것'처럼 여겨진다. 그러나 이런 정적이며 수동적인 존재야말로 의미를 불러일으킨다. 존 듀이(John Dewey)에 따르면 능동성과 수동성이 합해질 때 비로소 경험은 경험으로서 가치를 얻게 되고 의미가 발생한다. 즉 '함'만 통한다고 해서 인간에게 의미가 발생하지 않는다. 오히려 '당함', 즉 수동성이야말로 의미를 불러일으키는 원천이다. 듀이는 이것을 불에 손을 집어넣는 행위로 설명한다... 이 당함을 통해 사람은 다시는 불에 손을 넣어서는 안 된다는 교훈을 얻게 되고 이 교훈이 다음 행위를 해석하고 통제하는 바탕이 된다. 어느 행위가 다음 행위의 바탕이 되는 경험으로 바뀌는 것은 이처럼 함이 아니라 당함으로부터 비롯된다. 

  - 136~137쪽


근대의 독보적 권력은 '시각', 

그러므로 근대 권력은 '전시'를 통해 작동한다


우리 일상은 이러한 '하는 척의 함'으로 가득 차 있다. 사람들은 바쁘지 않지만 바쁜 척해야 하고 내가 없으면 회사가 곧 망할 것처럼 굴어야 한다. 미국의 언론인 바버라 에런라이크(Barbara Ehrenreich)는 청소용역회사의 청소부로 위장 취업했을 때 이것을 깨달았다. 청소를 하더라도 구석구석 지나치게 깨끗이 청소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아니 회사에는 도리어 손해다 .묵은 때인 경우에는 청소를 열심히 하면 오히려 더러움이 드러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청소부에게 중요한 임무는 청소를 깨끗이 하는 것이 아니라 깨끗이 보이게끔 하는 것이다. 개끗한 척하는 것이 깨끗한 것보다더 중요한 덕목이 되었다.

  ...많은 연구자들은 전시가 사실 근대사회에 내재된 권력의 작동방식이라고 지적한다. 사실 전시 역시 진정성을 출현시킨 내면과 외부의 분리와 깊은 연관이 있다. 근대인은 내면으로 물러나 외부와 긴장을 유지한 채 그 외부를 바라볼 줄 알게 되었다. 바라본다는 것은 거리를 둔다는 것이며, 이 거리를 창조함으로써 세계를 전시의 대상으로 구현하게 된다. 근대사회의 독보적 권력은 시각 그 자체다. 근대는 애초부터 보는 권력의 시대였고 세계를 전시하는 장이었다.

  - 144~146쪽


비국민의 정치

 - 신자유주의는 정치 대신 치안으로 

   법질서를 유지한다


자끄 랑시에르는 정치 바깥에서 배제된 자들이 정치 안의 몫을 주장하는 것, 이것이 진정한 의미에서의 정치라고 말한다. 

  - 제1부 악몽이 된 곁, 말 걸지 않는 사회 - 제1장 정치공동체의 파괴:폭로하고 매장한다, 41쪽


신자유주의는 법질서 바깥의 것에 대해 정치적 해결을 시도하는 것이 아니라 엄격한 사법적 규율과 통제로서 통치하려는 시도다. 이에 따라 법질서 바깥의 것이 정치적 과정을 통해 법질서 안으로 들어오는 것은 허용되지 않는다.

  랑시에르의 개념에 따르면 이는 법질서에 의해 셈되지 않던 사람들이 셈해 달라고 요구하는 것에서 출발하는 본래적 의미의 정치의 원천적 봉쇄다. 또한 이미 법질서 내부에 포함된 세력들 간 분쟁이라 하더라도 정치적 타협에 의해 해결을 시도하기보다는 사법적 판단에 의한 일방적 해결을 선호한다는 의미에서 사회의 불화를 조정하는 차원의 정치 또한 설 여지를 좁힌다. 따라서 신자유주의 법치 아래서 허용되는 것은 정치가 아니라 단지 치안일 뿐이다.

  - 229~230쪽, 제2부 / 제4장 국가 폭력 : 껍데기까지 발가벗겨라


혼자만의 공간을 갖는 것의 의미


사생활이 '세상으로부터 사라질 자유'를 뜻한다면, 기숙사에서 윤숙이 박탈당한 것이 바로 이 자유였다. 윤숙은 말한다. "기숙사에 살면서 이 자유를 대신한 것은 '죄책감'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대한민국 모든 이가 들어가 살기를 선망하는 아파트야말로 사생활이 죽은 공간이다.

...아파트에서는 이처럼 타인의 사생활은 알 수 있지만 정작 '관계'는 거의 이뤄지지 않는다.

  - 제4장 사생활의 종언: 고독조차 허락되지 않는다, 118~119쪽


Posted by Daesung Ju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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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명사회

저자
한병철 지음
출판사
문학과지성사 | 2014-03-11 출간
카테고리
인문
책소개
투명사회는 서로를 신뢰할 수 있는 사회가 아니라 만인이 만인을 ...
가격비교




"생산적인 관계의 깊이는 드러난 모든 마지막 진실 뒤에 아직 드러나지 않은 궁극의 최종적 진실이 있음을 예감하고 이를 존중하는 데서 나오며... 인격 전체로 연결된 가장 친밀한 관계에서조차 내면의 사유재산을 존중하고 질문의 권리를 비밀의 권리로 제한하는 섬세함과 자제력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는 것이다."

    - 17~18쪽, 긍정사회. 재인용 : Gustave Le Bon, Psychologie der Massen, Stuttgart, 1982 3쪽 


해적당은 反정당이며 색깔이 없는 최초의 정당이다.투명성은 색깔이 없다. 해적당에서 색깔은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몰이데올로기적인 의견인 한에서만 허용된다. 의견은 아무런 자취를 남기지 않는다. 의견은 이데올로기처럼 전체를 장악하고 전체를 꿰뚫는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한다. 의견에는 뒤집어 엎어버리는 부정성이 없다. 그리하여 오늘의 의견사회는 이미 존재하는 것을 건드리지 않은 채로 놓아둔다. '액체 민주주의(Liguid Democracy)'는 상황에 따라 색깔을 바꾸는 유연성을 발휘한다. 해적당은 색깔 없는 의견 정당이다. 정치는 기존의 사회경제적 관계를 건드리지 않은 채 그 속에 틀어박혀서 그저 다양한 사회적 욕구를 관리하는 역할로 위축된다. 해적당은 반정당으로서 정치적 의지를 천명하고 새로운 사회적 좌표를 정립할 능력이 없다.

    - 25쪽, 긍정사회


오늘날 시각적 커뮤니케이션은 전염, 긴장 해소 또는 반사의 양상으로 이루어진다. 이 과정에서 심미적 반성이 개입할 여지는 없다. 시각적 커뮤니케이션의 심미화는 비심미적이다. 예컨대 '좋아요'와 같은 취미판단을 위해 오랜 시간을 두고 대상을 감상할 필요는 없다. 전시가치로 채워진 이미지들은 복합성을 띠지 않는다. 그런 이미지들은 단순 명료하고, 그래서 포르노적이다. 여기서 살펴보고 성찰하고 숙고하게 만드는 굴곡진 구석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다. 복합성은 커뮤니케이션의 속도를 늦춘다. 비심미적인 과다 커뮤니케이션은 가속화를 위해 복합성을 축소한다. 그것은 의미의 커뮤니케이션보다 훨씬 빠르다. 의미는 느리다. 의미는 정보와 커뮤니케이션의 고속 순환에 방해 요인으로 작용한다. 따라서 투명성은 의미의 공허와 긴밀하게 관련된다. 정보와 커뮤니케이션의 거대한 더미는 공허에 대한 공포(Horror vacui)에서 생겨난다.

    - 35~36쪽, 전시사회


아감벤은 무엇보다 에로틱한 것과 포르노적인 것 사이의 본질적 차이를 간과한다. 벌거벗은 것의 직접적 전시는 에로틱하지 않다. 몸에서 에로틱한 부분은 바로 "옷의 벌어진 자리" "두 개의 가장자리 사이", 이를테면 장갑과 소매 사이에서 "빛나는" "피부"다. 에로틱한 긴장은 벌거벗은 몸을 지속적으로 전시할 때가 아니라 "빛의 점멸을 연출"할 때 생겨난다. 벌거벗은 몸에 광채를 더하는 것은 "중단"의 부정성이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벌거벗은 몸의 전시는 긍정적인 만큼 포르노적이다. 여기에는 에로틱한 광채가 없다. 포르노적인 몸은 매끄럽다. 그것은 무엇에 의해서도 중단되지 않는다. 중단은 양가성과 중의성을 낳는다. 바로 이같은 의미의 불명확성에 에로티즘이 있다. 더 나아가 에로틱한 것은 비밀과 은둔의 부정성을 전제한다. 투명성의 에로티즘은 존재하지 않는다. 전면적인 전시와 노출에 밀려 비밀이 사라지는 바로 그때부터 포르노는 시작된다. 침투하고 투과하는 긍정성이 포르노의 특징이다.

    - 55~56쪽, 포르노사회


바르트는 사진의 두 가지 요소를 구분한다. 첫번째 요소를 그는 "스투디움(studium)"이라고 부른다. 탐구해야 할 광대한 정보들의 영역과 "시름없는 소망, 방향 없는 관심, 일관성 없는 기호-좋다/싫다-의 영역"이 여기에 해당된다. 스투디움은 '사랑하다'가 아니라 '좋아하다'의 범주에 들어간다. '좋아요/싫어요'가 스투디움의 판단 형식이다. 스투디움에서 격렬함이나 열정 같은 것은 전혀 없다. 두번째 요소인 "푼크툼(punctum)"은 "스투디움"을 깨뜨린다. 그것은 호감이 아니라 어떤 상처, 격한 감동, 당혹감을 낳는다. 단조로운 사진은 푼크툼이 없는 사진이다. 그것은 스투디움의 대상일 뿐이다. "보도 사진들은 대체로 단조로운 사진에 속한다(단조로운 사진이 반드시 평화로운 것은 아니다)..." 푼크툼은 연속적인 정보들의 행렬을 중단시킨다. 그것은 균열, 단층으로서 모스비을 드러낸다. 푼크툼은 극도의 강렬함과 응축의 장소이며, 그 속에는 뭔가 정의할 수 없는 것이 내재한다. 푼크툼에는 스투디움에 특징적인 투명성과 명백성이 전혀 없다.

    - 57~58쪽, 포르노사회


오늘의 시간 위기는 가속화에 있는 것이 아니라 시간의 분산과 해체에 있다. 시간적 질서가 어지럽혀지면서 시간은 방향을 잃고 이리저리 마구 날아다닌다. 시간은 붕괴되어 점점이 원자화된 현재들의 연속으로 전락한다. 시간은 가산적으로 되고, 서사성을 완전히 상실하고 만다... 가속화 자체가 문제의 본질이 아닌 까닭에 문제의 해결책도 느리게 살기에서는 찾을 수 없다. 느리게 살기만으로는 어떤 박자도, 어떤 리듬도, 어떤 향기도 만들어지지 않는다. 느리게 살기는 공허로의 추락을 막을 수 없다.

    - 70~71쪽, 가속사회


루소는 비교적 작은 규모의 도시를 선호한다. "모든 개인이 언제나 공공의 감시하에 있고, 모두가 자연스럽게 타인의 풍기단속관이 되며, 경찰도 어렵지 않게 모두를 감독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루소의 투명사회는 전면적인 통제와 감시의 사회임이 드러난다. 투명성에 대한 요구는 더욱 첨예화되어 하나의 정언명령이 된다. "다른 모든 것을 대체할 수 있는 윤리학의 유일한 계율은 다음과 같습니다. 온 세계가 보거나 들어서는 안 되는 것은 절대로 말하지도 말고 행하지도 말라. 나 자신으로 말하면, 안에서 일어나는 일이 밖에서도 다 보이는 집을 짓고 싶어 했던 한 로마인이야말로 가장 존경할만한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커뮤니케이션과 정보가 일으키는 디지털 바람은 모든 것을 뚫고 들어와 투명하게 만든다. 투명사회 전체에 디지털 바람이 불고 있다. 그런데 투명성의 매체인 디지털 네트워크는 어떤 도덕적 명령에도 예속되지 않는다. 

...디지털 투명성은 또한 세계를 경제적 파놉티콘으로 만든다. 그것의 목표는 마음을 도덕적으로 교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이익을 최대화하는 것, 주목도를 최고로 높이는 것이다. 완전한 조명은 최대한의 착취를 약속한다.

    - 91~92쪽, 폭로사회 

                / 신상털기-마녀사냥, 조리돌림은 애시당초 도덕적 교화 - 대상의 변화를 촉구하는 것이 아니라 찌라시 언론의 장삿속에 불과한 것이다. 


벤담의 파놉티콘에 갇힌 수감자들이 감독관의 지속적인 현존을 의식한다면, 디지털 파놉티콘의 주민들은 자유롭다는 착각 속에 살고 있다.

오늘의 통제사회는 특수한 파놉티콘적 구조를 보여준다. 서로 격리되고 고립되어 있는 베네담식 파놉티콘의 수감자들과는 반대로 현대 통제사회의 주민들은 네트워크화되어 서로 맹렬하게 커뮤니케이션하고 있다. 고립을 통한 고독이 아니라 과도한 커뮤니케이션이 투명성을 보장한다. 디지털 파놉티콘의 특수성은 무엇보다도 그 속의 주민들 스스로가 자기를 전시하고 노출함으로써 파놉티콘의 건설과 유지에 능동적으로 기여한다는 사실에서 찾을 수 있다. 그들은 스스로를 파놉티콘적 시장에 전시한다. 포르노적 과시와 파놉티콘적 통제가 서로를 넘나든다. 노출증과 관음증이 디지털 파놉티콘인 인터넷을 살찌운다. 주체가 외적인 강제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가발전적인 욕구에 의해서 스스로를 노출할 때, 그러니까 자신의 사적이고 은밀한 영역을 잃게 될까 하는 두려움이 그것을 버젓이 드러내놓고자 하는 욕망에 밀려날 때, 통제사회는 완성된다.

    - 95~96쪽, 통제사회

                / SNS... 싸이월드부터 트위터, 페이스북 - "관음증과 노출증의 슬픈 교차점"(임종빈)이자 디지털 파놉티콘 - 통제사회를 완성하는 동력


격분의 물결은 사람들의 주의를 동원하고 묶어내는 데는 대단히 효과적이다. 하지만 매우 유동적이고 변덕스러운 까닭에 공적인 논의와 공적인 공간을 형성하는 역할을 감당하지는 못한다. 격분의 물결은 그러기에는 너무나 통제하기도 예측하기도 어렵고, 불안정하며, 일정한 형태도 없이 쉽게 사라져버린다... 여기서는 공적 논의를 위해 필수적인 안정성, 항상성, 연속성을 찾아볼 수 없다. 따라서 격분의 물결은 안정적인 논의의 맥락 속에 통합되지 못한다. 격분의 물결은 종종 아주 낮은 사회적, 정치적 중요성밖에 지니지 않는 사건들과 관련하여 발생한다...

자제력은 공론장의 본질적 요소다. 또한 거리는 공론장을 형성하는 데 필수적이다. 게다가 격분의 물결 속에서는 공동체와의 동일시 정도도 매우 낮게 나타난다. 격분 속에서는 사회 전체에 대한 염려의 구조를 갖춘 안정적인 우리가 형성되지 않는다. 이른바 분개한 시민의 염려라는 것도 사회 전체에 대한 것이라기보다는 대체로 자신에 대한 염려일 뿐이다. 따라서 그러한 염려는 금세 모래알처럼 흩어져버린다...

디지털적 격분은 행동도 이야기도 가능하게 하지 않는다. 그것은 어떤 강력한 행동의 힘도 펼치지 못하는 감정적 상태일 뿐이다. 전반적인 산만함을 특징으로 하는 오늘의 사회는 분노의 서사적 에너지를 생성하지 못한다. 강력한 의미에서의 분노는 감정적 상태 이상의 것이다. 분노는 기존의 상태를 중단하고 새로운 상태를 시작하게 하는 능력이다. 그렇게 해서 분노는 미래를 만들어낸다. 오늘날 격분하는 군중은 극도로 덧없고 모래알처럼 흩어져있다. 그들에게는 행동으로 나아가기 위해 필수적인 질량과 중력이 조금도 없다. 그들은 미래를 창출하지 못한다.

    - 124~126쪽, 격분사회

                   / 인터넷을 휘감는 정치인, 연예인에 대한 분노는 필자에게 '격분'으로 불리운다. 이명박에 대한, 박근혜에 대한 네티즌의 흔한 분노가 사회 변화를 이끌어낼 수 없으리란 전망


"손 없이 손가락질만 하는 미래의 인간," 즉 호모 디기탈리스는 행동하지 않는다. "손의 위축증"으로 인해 인간은 행동 능력을 상실한다. 뭔가를 손질하고 다듬는 것은 일정한 저항을 전제한다. 행동 역시 저항을 극복하지 않으면 이루어질 수 없다. 행동은 기존의 지배적인 힘에 새로운 것, 다른 것을 맞세우는 일이다. 행동에는 부정이 내포되어 있다. 행동은 적극적으로 무언가를 추구하지만, 그것은 동시에 다른 무언가에 대한 반대이기도 하다. 그러나 오늘의 긍정사회는 모든 저항적 형식을 회피하며, 이로써 행동을 소멸시킨다. 이 사회 속에는 그저 동일한 것의 다양한 상태들만 있을 뿐이다. 

    - 160~161쪽, 손에서 손가락으로


예전에 정당이나 협회를 통해 스스로를 조직하고 일정한 이념의 정신 속에서 뭉치던 군중은 순전히 단독자들, 즉 각자 고립되어 있는 디지털 히키코모리들의 무리로 해체되었다. 그들은 공중을 형성하지 않고 공적인 논의에 참여하지도 않는다. 자기지시적 시스템과 대면하고 있는 것은 정치적으로 행동하지 않는 고립된 개인들 뿐이다. 진정한 의미에서 행동할 수 있는 정치적 주체로서의 우리는 해체되어버렸다. 

    - 203쪽, 재현/대표의 위기


1970년대에 미국에서는 QUBE(question your tube)라는 쌍방향 기능을 가진 텔레비전 수상기가 발매되었다. 이름 속에 들어있는 질문이라는 말은 상호작용의 가능성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이 기기에는 키보드가 장착되어 있어서, 이를테면 모니터에 보이는 몇가지 옷 가운데 하나를 선택하는 것이 가능했다. 또한 간단한 선거도 이 텔레비전을 통해 치를 수 있었다...

플루서는 QUBE 시스템을 출발점으로 삼아 미래의 민주주의를 상상한다. QUBE 시스템은 "직접 민주주의"를 가능하게 할 것이다. 플루서는 오직 지식과 역량만이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탈이념적 민주주의"를 꿈꾼다.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다음과 같다. QUBE 시스템에서는 모든 참가자의 역량과 각 역량의 중요성이 어떤 이념과도 무관하게 명백히 드러난다." 이와 같은 탈이념적 민주주의에서 정치가는 시스템을 관리하고 최적화하는 전문가로 대체된다. 그렇게 될 때 정치적 대표자도 정당도 불필요해질 것이다...

플루서가 그리는 멋진 밀에 정치적 참여는 힘겹고 지루한 "토론" 없이 실현된다. 오늘날 플루서가 꿈꾸었던 것, "인류 대부분이 참여하는 훨씬 더 개선된 QUBE 시스템"은 현실이 되었다. 이제 얼마든지 디지털 선거가 치러질 수 있다. 그렇다면 정치는 그저 덤으로 행해질 뿐이다. 좋아요 버튼은 디지털 선거용지다. 인터넷이나 스마트폰은 신형 투표소다. 그리고 마우스 클릭이나 짧은 손가락질이 "토론"을 대신한다.

플루서가 말하는 "직접 마을 민주주의"는 네트워크에 관한 그의 사상만큼이나 유토피아적 경향을 보인다. 하지만 그의 믿음과 달리 본래 의미의 정치적 결정은 언제나 실존적인 결정일 수밖에 없다... 사람들은 쇼핑하듯이 선거한다...

쇼핑은 토론을 전제하지 않는다. 소비자는 마음에 드는 것을 사면 된다. 그는 개인적 취향을 따른다. 좋아요는 소비자의 구호다. 그는 시민이 아니다. 공동체애 대한 책임이 시민을 시민으로 만든다면, 소비자에게서는 그런 것을 찾아볼 수 없기 때문이다. 투표소와 시장, 폴리스(polis)가 하나가 되어버린 디지털 광장에서 유권자는 소비자처럼 행동한다...

선거운동은 상업광고와 뒤섞일 것이다. 통치도 마케팅에 가까워진다. 정치에 관한 여론조사는 시장조사를 닮아간다. 유권자들의 분위기는 데이터 마이닝으로 탐색된다. 부정적인 흐름이 발견되면 곧 좀더 매력적인 새로운 상품이 투입되어, 분위기를 바꾸어준다. 이때 우리는 더 이상 적극적으로 행동하는 시민이 아니라 수동적인 소비자일 뿐이다.

    - 205~208쪽, 시민에서 소비자로


디지털 파놉티콘에서는 신뢰가 불간으하다. 아니, 그 이전에 신뢰에 대한 필요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다. 신뢰는 믿음의 행위다. 그것은 어디서나 정보를 쉽게 구할 수 있게 된 현실로 인해 낡아빠진 관념이 되어버렸다. 정보사회는 모든 믿음을 불신한다. 과거에 사람들은 신뢰 덕택에 잘 알지 못하는 타인과도 관계를 맺을 수 있었다. 정보를 쉽고 빠르게 구할 수 있는 가능성은 신뢰에 타격을 입힌다. 그렇게 본다면 오늘날 신뢰의 위기는 매체적 조건과도 관련이 있다. 디지털 네트워크는 정보의 획득을 지극히 용이하게 만들고, 이로 인해 신뢰라는 사회적 관행은 점점 더 중요성을 상실하게 된다. 신뢰는 통제로 대체된다. 그래서 투명사회는 감시사회와 구조적 유사성을 보인다. 정보를 쉽고 빠르게 구할 수 있게 되면 사회 시스템은 신뢰에서 통제와 투명성으로 방향을 돌린다. 효율성의 논리가 그러한 전환을 요구한다.

    - 210~211쪽, 완전한 생의 프로토콜


'와이어드'지의 수석 편집위원인 크리스 앤더슨은 '이론의 종말(The End of Theory)'이라는 대단히 주목할 만한 글을 발표한 바 있다. 그는 여기서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엄청난 야의 데이터가 이론적 모델을 완전히 불필요하게 만들 것이라고 주장한다...

빅데이터의 분석은 행동 패턴을 알려주며, 이로써 미래의 예측까지 가능해진다. 가설적인 이론 모델은 직접적인 데이터 비교로 대체된다. 상관관계가 인과관계를 밀어낸다. 왜 그런가라는 질문은 그냥 그런 것이라는 확언 앞에서 의미를 잃어버린다...

"인간이 어떤 행동을 할 때 왜 그런 행동을 하는지 대체 누가 말할 수 있단 말인가? 인간은 그냥 그렇게 행동하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역사상 유례가 없는 정밀함으로 그것을 탐지하고 측정할 수 있다..." 이론은 하나의 구성물이며, 데이터의 결핌을 보완하는 보조 수단이다. 따라서 데이터가 충분하기만 하다면 이론은 쓸모없어진다. 빅데이터에서 대중의 행동 패턴을 읽어낼 수 있는 가능성으로부터 디지털 심리정치는 출발한다...


데이터 마이닝은 개인으로서는 의식조차 하지 못하는 집단적 행동 패턴을 가시화함으로써 집단적 무의식의 영역을 열어 보인다...

디지털 심리정치는 대중의 사회적 행동에 담긴 무의식적 논리를 파악하고 이를 통해 대중의 행동을 지배한다. 집단적 무의식을 파악하여 대중의 사회적 행동에 대한 예측까지 가능하게 된 디지털 감시사회는 전체주의적 경향을 발전시킨다. 그러한 사회는 우리를 심리정치적 프로그래밍과 통제의 대상으로 만든다. 이로써 생정치의 시대는 종언을 고한다. 오늘날 우리는 디지털 심리정치의 시대를 향해 나아가고 있다.

    - 219~222쪽, 심리정치

Posted by Daesung Ju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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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3/3 수정

길게 썼다. 한줄 요약
Do not pay for simplenote premium account! NEVER!!

오랫동안 메모 어플 쓸만한 것을 찾다가 
고민 끝에 심플노트 유료 구매를 해봤다.
(심플노트 프리미엄 서비스 정보는 )

광고하는 것마냥 다달이 2달러 돈으로 생각하면 적은 돈,
하지만 1년짜리 구매 20달러를 들였다. 
메모하는 데 2만원돈을 들이다니 젠장!

그러고도 말도 안되는 문제를 겪으니 속이 터질 지경이다.

어쨌든 나같은 사람이 또 없기를 바라며
글을 남긴다.

참고로 내가 바라는 메모 어플의 기준은...

1> 아이폰,데스크탑 양쪽에서 사용 가능
2> 빠르고 믿을 수 있는 동기화 (드롭박스 싱크라면 최고)
3> 메모 제목이 기억나지 않아도 검색으로 금방 찾을 수 있을 것

얼마전에 블로그에 글 올렸던 할일관리 어플처럼, 
이런 간단한 기준 충족시키는 어플도 의외로 없다.
심플노트가 거의 정답이긴 하다. 
(심플노트에서 드롭박스 싱크는 돈을 내야만 가능하다)

근데 며칠 전에, 심플노트 사용 중에 처음으로
싱크 오류를 겪은 뒤로는 불안해서 백업의 중요성을 새삼 느끼고 말았다.
데스크탑 버전에서 작업 중에 한없이 saving 만 뜨더니 결국
그 글의 맨 아래부분은 날라가 버린 거다. 
심플노트에서는 작업 시점 별로 해당 메모의 작업 사항을 확인할 수 있지만 
거기에마저 마지막 작업 내용은 없더군.

그래서! 심플노트 유료 구매를 결정했던 것이다.

심플노트가 위에 쓴 메모 어플 기준을 충족하지만
싱크 문제를 겪었으니, 드롭박스에 백업 겸 싱크도 하고
또 아이폰 어플 Plaintext 로 작성해둔 예전 메모도 함께 
심플노트로 관리하려는 계획이었건만...

(아래는 심플노트 유료 기능별로 평을 달은 것임)


DropBox SYNC
한마디로 최악. 싱크는 실시간이 아닐 뿐더러 엄청 느리다.
한참 뜸들였다 싱크랄 것이 되기는 하는데, 
(대략 10분정도 뜸들이는 것 같다)
수동으로 싱크를 하려면 심플노트 데스크탑 사이트 설정에 가야만 한다.
거기에만 sync 버튼이 있다.

아이폰 Plaintext 어플로 작성해둔 Dropbox 안의 메모들을
심플노트-드롭박스 싱크 폴더로 이동시켰다.
애초 의도한 대로 심플노트로 관리하려 함이었는데,
심플노트에서는 따로 제목을 지정하지 않고 첫줄을 제목으로 삼는데,
원래 플레인텍스트에서 작성했던 메모들이 제목이 싹 날라가버렸다.

(드롭박스로 가서 삭제된 파일 복구하는 거 없었으면 정말이지...
제목으로 관리하는 메모들이 제목이 싹 날라가버리면 어쩌라는 거냐)

이 문제로, 심플노트 프리미엄 전용 이메일 상담센터에 메일 보내고
트위터 멘션 날리고 했는데 일주일째 답이 없다.
Support level premium? 웃기고 있네.

참고 : 심플노트 설정에서 드롭박스 싱크해놓을 때 띄우는 메시지.

3rd-party simplenote apps and dropbox

Some people use 3rd-party apps like Notational Velocity that can sync with Simplenote while also storing notes as text files in a Dropbox directory.

If this applies to you, please exercise caution. When you link Simplenote to a Dropbox directory, make sure it’s a different directory than the one you're using with your 3rd-party Simplenote apps, otherwise you’ll encounter problems like note duplication.

듀플리케이션이라도 된다면 몰라, 제목이나 지우지 마라.


Edit notes in list view (iOS)

그냥 리스트 만들어주는 기능이라고 보면 된다.
그리고 말 그대로 iOS에서만 된다. 

일반 텍스트를 줄마다 개별 일정으로 인식해서, 그 순서를 쉽게 바꿀 수 있는 기능이다. 왼쪽이나 오른쪽 드래그하면 완료 표시(왼쪽에 X표 나타나고 일정에는 중간 줄이 그어짐) 가 된다.

문제는 이게 아이폰에서만 되고 데스크탑에서는 일반 텍스트로만 불러오니
유기적인 관리가 안된다는 거다. 데스크탑에서는 그냥 사용할 수가 없는 기능이다.

예를 들어 아이폰에서 완료 표시한 글은 일정 왼쪽에 X표가 그대로 일반 텍스트에 들어간 채로 읽어온다. 눈에 띄지는 않더군.
그리고 아이폰에서 일정 완료 이후에 삭제가 안된다. 영역 선택해서 삭제하는 거 말고는 방법이 없다. 알람 기능이나 DUE DATE 설정 따위도 없다. 


Create by Email Address


이건 Squarespace Note 어플과 함께 사용하면 편하다.
속도도 빠르다. 통신 환경에 문제 없다면 빠르게, 백업까지 해가며 메모하기엔 좋은 도구.

(에버노트에도 별도의 이메일로 보내서 메모 남기는 기능이 있다. 하지만 에버노트는 느리잖은가)


Private feed of your notes

RSS로 본인의 메모를 받아볼 수 있는 기능인데, 
구글 리더 등의 RSS 앱을 자주 쓴다면 
최근 메모를 훑어보기에는 좋을 듯. 
하지만 자주 쓸거 같지는 않은 기능

Posted by Daesung Ju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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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cuty&bear 2013.02.26 21:46 신고 Address Modify/Delete Reply

    저같은 경우에는 에버노트를 사용하는데
    에버노트도 괜찮더라고요~

    • 대성 2013.02.27 00:11 신고 Address Modify/Delete

      에버노트가 기능은 좋은데 로딩이 느려서 잘 안쓰게 되더군요

  2. 서울비 2013.02.27 11:00 신고 Address Modify/Delete Reply

    최근에 캐치노트를 재발견하고 있음. 심플노트 대용이라고 생각하면 괜찮은 듯?

    - 무료(한 달에 70메가)
    - 싱크 빠름
    - 모바일앱 직관적
    - 본문 검색
    - 크롬앱으로 접근 속도 괜찮음.
    - 크롬익스텐션으로 보고 있는 웹페이지 주소 포함해서 메모 가능한데.. 나는 그냥 ctrl+a 눌러서 다 지우고 아무 거나 바로 붙여서 캐치노트로 보내는 용도로 사용.


    본격적인 긴 문서 작성에는 좀 그렇지만.. 쪽글 메모로는 괜찮지 않나.. 생각.

1> 서비스

- 사람은 자기만의 생활 리듬과 공간을 유지하려 하는데, 서비스업 노동자는 그 리듬과 공간을 침해받는다. 서비스업은 추종에 굶주린 '고객님'들에게 안식처로서 값싼 위안을 주는 것 같다. 소비자로서 일시적인 권위를 확보하면 소비하는 동안 독자적인 리듬과 공간을 유지할 수 있으니.

- 서비스업 종사자는 약간 얕보이는 제복을 입는 게 좋은 거 같다. 하지만 안내원으로서는 조금 위압감을 주는 게 메시지의 효과적 전달을 돕는 거 같다. 안내원은 약간의 긴장을 유발해야 신뢰감을 주는 듯. 서비스업이더라도 기싸움은 필요하다!

- 서비스업 노동자는 상대방을 규정하려는 마음과 이해하려는 마음, 양가의 것을 동시에 지녀야 하는 것 같다. 고객의 성향을 판단하고, 이해하고자 하는 마음을 유지하려는 신실한 자세에서 좋은 서비스가 만들어지는 것 아닐까.


2>
추종에 굶주린 이들에게는 '넌 괜찮아'류의 위안이 유효할 것이다.
이에 비해, 추종에 목매도록 만드는 사회에 대한 문제 제기, 그리고 다른 세계를 꿈꿔 보자는 제안과 비교하면 무엇이 그 사람을 더 힘이 나게 할까?


3>
인간적인 시선이라는 건,
자신의 아이나 연인에게 품는 마음이 배타적이지 않고 모든 이에게 향하는 것
(내 곁을 쌩쌩 달리는 차들을 보며 든 생각)


4>
반복은 사람을 멍하게 만들고, 이것은 노동자와 경영자 모두가 극복해야 할 과제


5>
구조를 직관적으로 이해하기 버거울 만큼 무척 큰 건물 안에서는 길을 곧잘 헤매게 된다.
주차장이든 사무실이든 간에 쉽게 찾을 수가 없는 것. 하지만 명쾌한 표지판이 설치된다다면 안내원과의 짧은 대화마저 꺼리게 되고, 주차장 만차 표시가 자동화된다면 주차유도원은 배를 곯지요, 아니 밥그릇을 뺏긴다.

  → 절약(효율성 극대화)은 결국 누군가의 일자리를 없애는 것 아닐까? 
      → 착한 소비는 가능할까?
  → 직관 이상의 것은 인간에게 유익한가?
  → 편리할수록 삶과 괴리되는 것 아닐까

/ 어쨌든 주차한 곳을 잘 기억하도록 돕는 디자인은 중요하다.


6>

어떤 일을 하든 먹고 살만 해야 하고 그러려면 월급도 올라야 겠지만, 평균적 라이프스타일에 대한 추구를 모두가 반성해야 한다. (반성합니다)


7>

공장이나 지하철 등의 교대 근무 공간에서 화장실에 가는 것은 좀처럼 어려운 일이다.
쌀 권리가 곧 살 권리 아닌가!


8>
CCTV가 보지 못한 건 진실이 아니다. 감시사회... 권력만이 진실을 소유한다.
(운전 미숙으로 접촉 사고 내놓고는 주차유도원이 수신호 잘못했다며 변상 요구하던 새끼를 보고 든 생각)


9>
최저임금을 '인간적'인 수준으로 올리지 않는다면 팁 주는 문화라도 있어야 하지 않을까.(하지만 바람직한 방향은 아니다) 어쨌든 최저임금은 지금보다 많아야 한다.


▶ 기타 등등

- 차 대면 안되는 곳에 주차하는 걸 봐줬더니 오만원으로 보이는 황금색 무언가를 꺼내던 아저씨.
"
이거, 홍삼인데 차요. 이따 드세요" (팁 주는 줄 알았어)

- 쓰레기차 아저씨는 하루종일 주차장 이곳저곳을 오간다. 시지프스 같았다.

-  운전 습관 잘못 잡힌 놈들이 정말 많구나
동네 골목에서도 교차로에선 깜빡이 켜는 게 안전할 텐데 / 앞에 보고 운전해라 / 급발진 하지마라, 엑셀 콱콱 밟지 마라 / 교차로에선 제발 좀 속도 줄여라, 조마조마하다

- 똑같은 표현을 서로 다르게 알아듣는 사람들, 어떻게 말해야 모두에게 의미가 통할까 하는 잠깐의 고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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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트모더니즘>

진실로 능히 옛것을 본받으면서 변화할 줄 알고, 새것을 만들면서도 법도에 맞을 수만 있다면 지금의 글이 옛글과 같게 될 것이다. ...하늘과 땅이 비록 오래되었지만 끊임없이 생명을 내고, 해와 달이 비록 오래되었어도 그 광휘는 날마다 새롭다. 책에 실려 있는 것이 비록 방대하지만 가리키는 뜻은 제가끔 다르다. 때문에 날고 잠기고 달리고 뛰는 온갖 생물 가운데에는 간혹 이름이 드러나지 않은 것이 있고, 산천초목에는 반드시 비밀스런 영靈이 있게 마련이다. 썩은 흙에서 지초가 나오고, 썩은 풀이 반딧불로 화한다. ('초정집서'楚亭集序)

...언어가 어떻게 하면 '끊임없이 생명을 내고, 날마다 그 광휘가 새로운' 그래서 '썩은 흙에서 지초가 나오고, 썩은 풀이 반딧불로 화하는' 삼라만상의 무상한 흐름을 능동적으로 '절단, 채취'할 수 있을 것인가에 그 핵심이 있다.
...중요한 것은 외부와 내부를 넘나들면서 끊임없이 차이를 만들어내는 변이의 능력인 것이다. 
- 135~136쪽

말똥구리는 스스로 말똥을 아껴 여룡(驪龍)의 여의주를 부러워하지 않는다. 여룡 또한 여의주를 가지고 스스로 뽐내고 교만하여 저 말동을 비웃지 않는다. ('선귤당농소'蟬橘堂濃笑)

...요점은 척도를 고정시키지 말라는 것. 진리 혹은 가치란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놓이는 자리, 곧 배치에 따라 달라지는 까닭이다. 
- 319쪽

...결국 그가 말하고자 하는 바 요점은 간단하다. 세계를 주재하는 외부적 실체란 없다. 고정불변의 법칙 역시 있을 수 없다. 무상하게 변화해 가는 생의 흐름만이 있을 뿐!
...만물이 만들어내는 무수한 차이들, 거기에 눈감은 채 한 가지 고정된 형상으로 가두려는 모든 시도는 헛되다. 비유하자면, 그것 "화살을 따라가서 과녁을 그리"는 꼴에 다름아니다.

초월적인 중심을 전복하고 현실의 변화무쌍한 표면을 주시할 때 진리 혹은 선악에 대한 판단은 어떻게 가능한가? 만약 모든 것을 상대적으로만 본다면 허무주의로 나갈 수밖에 없지 않은가? ...그런 함정에 빠지지 않으려면? 변화하는 흐름을 예의주시하면서 때에 맞게 새로운 가치들을 생성시켜야 한다. 그 구체적인 방편이 바로 '사이에서' 사유하는 것이다. 
- 326~327쪽

이단을 배척함으로써만이 존립할 수 있는 이념이란 내용이 무엇이든 그것은 도그마다. 도그마란 원초적으로 배제와 부정의 메커니즘을 통해서 작동하기 때문이다. 서구 중세의 '마녀사냥'을 떠올리면 쉽게 이해될 것이다. 만약 그렇지 않고, 긍정적 생성을 통해 가치를 계속 증식해 나갈 수 있다면 굳이 이단을 두려워하거나 걱정할 필요가 없다. 아니, 이단이라는 개념 자체도 불필요할 것이다.
- 345~346쪽

'인성과 물성이 같다'는 것은 인간과 동물, 인간과 자연 사이의 경계를 설정하지 않는다는 뜻이기도 하다. 모든 것이 '먼지'로 이루어졌을 뿐인데, 인간과 '인간 아닌 것' 사이의 존재론적 차이가 대체 뭐가 그리 중요하단 말인가. 그리고 이렇게 되는 순간, 인간 내부의 경계 또한 무의미해진다. 즉 개별인간들에게 부과된 고유한 정체성 역시 불변의 위치를 고수할 이유가 없다. 인연조건에 따라, 배치에 따라 일시적인 주체로 호명될 따름이지, 근원적으로는 모두가 무상한 것이다. 이런 이치를 깨닫지 못하고, 인간은 자아의 영원성을 지키기 위해 안달한다. 무엇보다 이름이 그러하다. 이름이란 대체 무엇인가? 
-365쪽

천지만물은 천지만물의 성(性)이 있고, 천지만물의 상(象)이 있고, 천지만물의 색(色)이 있고, 천지만물의 성(聲)이 있다. 총괄하여 살펴보면 천지만물은 하나의 천지만물이고, 나누어 말하면 천지만물은 각각의 천지만물이다. 바람 부는 숲에 떨어진 꽃은 비오는 모양처럼 어지럽게 흐트러져 쌓였으나, 변별하여 살펴보면 붉은 꽃은 붉고 흰꽃은 희다. 그리고 균천광악(鈞天廣樂)이 우레처럼 웅장하게 울리지만 자세히 들어보면 현악은 현악이고 관악은 관악이다. 각각 자기의 색을 그 색으로 하고 각각 자기의 음을 그 음으로 한다. ('이언'俚諺)

이 텍스트는 '차이를 생성하는 장'으로서의 천지만물에 대한 전복적 언표이다. 위의 논리를 이어 그는 이렇게 단언한다. "만물은 문자 그대로 만 가지 물건이고, 하나의 하늘, 하나의 땅이라 해도 서로 같은 순간, 동일한 곳이 단 하나도 없노"라고. 항구성, 동일성의 표상이었던 자연이 이제 정반대로 무수한 변이의 장으로 변환된 것이다. 이 내재성의 평면에는 따로이 중심적 가치가 존재할 수 없고, 다만 '지금, 여기'를 구성하는 삶이 있을 따름이다.
- 396~397쪽

...

<포스트모더니즘과 시인의 감수성>
 
유목은 단순한 편력이 아니다. 그렇다고 유랑도 아니다. 그것은 움직이면서 머무르는 것이고, 떠돌아다니면서 들러붙는 것이다. '지금, 여기'와 온몸으로 교감하지만, 결코 집착에 사로잡히지 않는다. 어디서든 집을 지을 수 있어야 하고, 언제든 떠날 수 있어야 한다. 한마디로, 그것은 세상 모두를 친숙하게 느끼는 것이지만, 마침내는 세상 모든 것들을 낯설게 느끼는 것이다.

"고향을 감미롭게 생각하는 사람은 아직 허약한 미숙아다. 모든 곳을 고향이라고 느끼는 사람은 상당한 힘을 갖춘 사람이다. 그러나 전세계를 낯설게 느끼는 사람이야말로 완벽한 인간이다." - 신비주의 스콜라 철하가 '빅톨 위고'

에드워드 사이드의 '오리엔탈리즘'에 인용되면서 널리 회자된 구절이다. 친숙함과 낯섦의 끝없는 변주, 여행이 도달할 수 있는 최고의 경지가 바로 거기일 터, 이 아포리즘만큼 유목의 성격에 대해 잘 말해주는 것도 드물다.
- 26~27쪽

연애가 특별한 감정으로 공인(?)된 건 어디까지나 근대 이후이다. 도시문명의 발전과 더불어 사람들이 '개인'으로 파편화되면서 이른바 '내면'이니 '자의식'이니 하는 기제들이 특화되었고, 그 과정에서 오직 연애만이 그 자리를 채워줄 수 있다는 표상의 전도가 일어나게 된 것이다. 아울러 우정을 비롯한 다른 종류의 윤리적 관계들은 모두 이 연애의 주변물로 전락하고 말았다.
- 269쪽



열하일기웃음과역설의유쾌한시공간
카테고리 인문 > 한국문학론
지은이 고미숙 (그린비, 200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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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아무리 견고하다 해도 현실은 인간의 감각을 통해서만 드러나는 것이므로. 인간은 누구나 한번쯤 자신의 감각이 바뀌면서 현실이 무르게 되는 순간을 경험하게 마련인데, 이를 두고 십자가의 성 요한은 '존재의 가장 어두운 밤'이라고 불렀다. 모든 성인들은 자발적으로 고립을 택해 그 '존재의 가장 어두운 밤'으로 들어가는데, 이는 현실이 오직 감각을 통해서만 드러난다는 사실을 깨닫기 위해서다. 하지만 '존재의 가장 어두운 밤'을 경험한 그 다음 순간, 모든 성인들은 감각적 현실이 얼마나 아름다운 세계인지 깨닫게 된다. 현실이 감각적으로만 성립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면 모든 게 덧없을 뿐이라는 허무주의에 빠져야 할 텐데, 아이로니컬하게도 더욱더 그 감각적인 생생함을 즐기게 되니 놀라운 일이다. 그러므로 그 밤을 경험하지 못한 사람들은 최상의 행복이 무엇인지 이해하지 못한다.
-42p

<세기말의 풍경 묘사>
당시에는 미처 자각할 겨를이 없었지만, 6월 항쟁이 있었던 1987년부터 분신정국이 펼쳐졌던 1991년까지 사 년에 걸쳐, 그동안의 한국사회를 완강하게 지탱해온 뭔가에 불길이 지펴지면서 그 불꽃이 화려하게 타올랐다가 장엄한 모습 그대로 몰락해갔다. 그게 뭔지는 누구도 알지 못했다. 언론에서는 그게 공산주의적 세계관의 몰락일 것이라고 추측하고 속단하는 기사를 썼지만, 그들은 분신정국 이후 상실의 늪에 빠진 운동권을 향한 고소의 심정만으로 그 기사를 썼지, 그들 역시 돌이킬 수 없는 몰락 속으로 빠져들어가고 있다는 사실은 깨닫지 못했다. 그 몰락을 두고 어떤 사람들은 배신이라고 불렀고, 또 어떤 사람들은 패배라거나 승리라는 단어로 표현했고, 더 심각한 혹은 더 우스운 사람들은 포스트모던이라고 지칭했다. 뭐라고 부르든 그 단어들이 지시하는 바가 죽음, 상실, 몰락이라는 것만은 분명했다. 프랜시스 후쿠야마처럼 정체가 불분명한 프로파간다는 죽은 것은 바로 역사라고 재빠르게 선언함으로써 그 죽음을 입도선매하려 들었지만, 그와 마찬가지로 정체가 불분명한 다른 프로파간다들을 제외하고는 큰 호응을 얻지 못했다. 그들은 그 '죽음'을 독점하려 했으나 그들 역시 한 시대의 구성원인 이상 그것은 불가능했다. 그 '죽음'과 '상실'과 몰락'은 동시대인들에게는 절대적으로 주관적이이었다. 그러므로 애당초 선언 따위로 객관화될 수는 없었다. 동시대인들은 임상적으로 그 '죽음'과 '상실'과 '몰락'을 제 몸 안에서 앓는 수밖에 없었다. 그건 프랜시스 후쿠야마를 되뇌던 자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리하여 그들이 목도하게 된 것은 일찍이 황지우가 시 '이준태(1946년 서울생, 연세대 철학과 졸, 미국 시카고 주립대학 졸)의 근황'에서 쓴 것과 같이 "그리고 대뇌와 성기 사이"의 세계였다. 대뇌와 성기 사이의 경계가 허물어지면서 대뇌는 대뇌끼리, 성기는 성기끼리 서로 피곤할 정도로 싸우던 시절은 끝이 났다. "그리고 대뇌와 성기 사이"의 세계에서는 개인들이 저마다 한 시대의 몰락을 주관화하고 내면화시키면서 전면적으로 등장하기 시작했다. 이 말은 곧 한 시대의 상처가 각 개인의 내면, 그러니까 대뇌와 성기 사이에서 치유되어야만 한다는 사실을 뜻했다. 그 시점부터 대뇌의 언어와 성기의 언어가 혼재하기 시작하다가 한동안은 성기의 언어만이 사회를 휩쓸었다. 이 사실은 1992년부터 라캉 유의 정신분석학이나 오시마 나기사의 <감각의 제국>과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의 <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 따위의 영화가 크게 유행한 데에서도 잘 알 수 있다. 두말할 것도 없이 마광수 교수가 1991년 발표한 '즐거운 사라'로 구속된 것도, "모든 것이 이제 다 무너지고 있어도 환상 속에 그대가 있다"라고 노래한 '서태지와 아이들'이 데뷔한 것도 바로 1992년의 일이었다. 1991년 5월 이전까지만 해도 대뇌의 언어로 말하던 사람들이 1992년부터 모두 성기의 언어로 떠들어대기 시작했다. 그게 바로 1991년 5월 이후의 세상을 살아가던 사람들의 내면 풍경이었다.
-47~49p

...그건 나를 둘러싼 모든 것들이 너무나 비현실적이어서 마치 꿈속을 걸어다니는 것과 같았다는 뜻이었다. 걸어다니면 걸어다닐수록 그 느낌은 더욱 강해졌다. 반소매를 입고 초록 그늘이 드리워진 남산 소월길을 걸어가는 사람들과, 추적추적 비 내리는 어스름에 헤드라이트를 밝히고 줄지어 영동대교를 건너가는 자동차들과, 왕십리 어느 분식집 한쪽 낡은 14인치 TV 화면에 등장하던 정치인들의 모습이 하나같이 낯설어 걸음을 멈추고 망연자실 빤히 쳐다보는 일이 잦았다. 그 모든 것들이 언젠가 내가 보았던 꿈속의 풍경처럼 너무나 비현실적이었다. 사람들은 정신없이 길을 걸어가거나, 아이의 손을 잡고 노래를 부르거나, 좌판에 들러붙은 파리들을 파리채로 내리치거나, 견고한 콘크리트 바닥을 향해 곡괭이질을 하거나, 먼지 낀 하늘을 바라보며 담배연기를 내뿜거나, 버스 손잡이를 움켜잡은 채 차창 밖을 멍하니 내다보고 있었다. 그들이 나처럼 피가 흐르고 심장이 뛰고 희로애락을 느끼는, 정말 살아 있는 사람이라는 건 너무나 분명했지만, 나는 그 사실이 좀체 믿기지 않았다. 그래서 걸어다니다보면 하루에도 몇 번씩이나 그들을 붙잡고 "당신들, 정말 살아 있느냐? 정말 살아 있는 사람이 맞느냐?"고 묻고 싶은 충동을 억눌러야 했다.
-120~121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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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에게 기본소득을 -21세기 지구를 뒤흔들 희망 프로젝트
- 최광은, 박종철출판사

<기본소득 개념의 정의>
오늘날 가장 폭넓게 합의된 기본소득의 개념은 기본소득지구네트워크 웹사이트(http://basicincome.org)에서 볼 수 있는 다음과 같은 하나의 문장으로 요약할 수 있다.

기본소득은 자산 심사나 노동 요구 없이 모든 개인에게 조건 없이 지급하는 소득이다.

이렇듯이 기본소득은 사회 구성원 모두에게 단지 사회 구성원이라는 자격에만 근거하여 지급하는 소득이다. 보통 여기서 사회 구성원 자격은 시민권을 지니고 있는지 혹은 이보다 포괄적인 의미에서 거주를 인정받았는지의 여부로 판단한다. 예를 들어, 브라질의 '시민기본소득법'은 브라질 시민권을 지닌 사람들 뿐만 아니라 브라질에서 5년 이상 거주한 모든 사람을 그 대상으로 하고 있고, 미국 알래스카주의 영구기금 배당의 경우에는 알래스카에서 1년 이상 거주한 몯느 사람을 그 대상으로 하고 있다. 기본소득 지지자들의 상당수는 원칙적으로 이주민들에게도 기본소득이 보장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Bosoet al., 2006)
- 82~83p

<기본소득의 의의>
"...우리는 기본소득을 평등을 향해 나아가기 위한 하나의 장치로서, 경제적 안정과 더불어 자유를 제공하기 위한 하나의 장치로서 이해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191p

기본소득은 비정규직 노동자, 실업자, 여성, 장애인 등 모든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들이 전면에 함께 나설 수 있는 훌륭한 연결 고리가 될 수 있다.
-139p

<복지 예산과 조세 구조의 관계>
...일단 이와 관련하여 앤드루 글린의 중요한 지적 하나를 언급하고 넘어가자. 그는 복지 지출이 많은 나라가 그렇지 않은 다른 나라들에 비해 자본소득에 대한 과세가 오히려 적었다는 점을 지적한다. 그래서 지금까지 늘어난 복지 지출은 노동소득과 소비에 대한추가적인 과세에 주로 의존했다는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사회보장 기여금은 흔히 상한이 정해져 있고 간접세는 보통 역진적이어서 기존 소득세의 누진적 성격이 상쇄되기 때문에, 복지 지출이 많은 나라에서도 조세제도 전체가 누진적인 성격을 띠고 있다고 말하기는 어렵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Glyn, [2006]008: 246~247).
- 53p

...기본소득은 증세, 조세제도 개혁, 행정 비용의 절감 등을 전제한다. 따라서 필요 재원의 크기를 놓고 기본소득을 비판하는 것은 합당하지 않다.
- 90p

<기본소득의 철학 - '사회적 필요노동'과 '보편적 복지''>
기본소득 제도의 도입을 위한 패러다임 전환과 관련하여 중요한 두 가지 축은 앞에서 이미 살펴보았다. 하나는 기존의 임금노동형 완전고용 패러다임을 '사회적 필요노동 패러다임'으로 전환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기존의 선별적, 시혜적 복지 패러다임을 '보편적 복지 패러다임'으로 전환하는 것이다.
...이러한 패러다임 전환의 필요성을 강조하는 것의 밑바탕에는 대안 사회에 대한 갈망이 자리하고 있다. 기본소득 지지자 상당수는 '능력에 따라 일하고, 필요에 따라 분배받는' 사회로 다가갈 수 있는 디딤돌로 기본소득을 바라보고 있다. 한편, 진보 진영 내에서는 기본소득의 이러한 위상 때문에 여러 다양한 논재잉 불붙기도 한다. 아무튼, 상당수의 지지자는 기본소득이 대안 사회를 향한 '트로이의 목마'가 될 수 있다고 보며, 또 그렇게 되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역설한다.
-133~134p

<'사회적 필요노동' 개념 설명>
사회적 필요노동 개념은 노동 일반을 자본주의적 임금노동으로 환원하거나 역사성과 사회성을 사상한 채 노동을 인간의 특정한 유적 본질로 환원하는 모든 사고에서 벗어나 노동 개념을 새롭게 구성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여기서 사회적 필요노동은 자본주의적 임금노동, 즉 자본의 가치 증식 활동에 봉사하는 노동만을 의미있는 노동으로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필요, 즉 한 사회를 유지하고 발전시키기 위해 필요한 모든 활동을 필요노동으로 새롭게 정의함으로써 노동의 성격의 변화를 도모하려는 것이다.
다니엘 라벤토스도 이와 비슷한 맥락에서 노동을 새롭게 정의하고 있다. 그는 기존의 지배적인 노동 개념은 상품과 서비스의 생산과 비교적 엄격하게 연계된 것이었다면서, 이제 노동을 더 이상 특별히 고된 것으로만 이해하지 말고 각 개인의 이해에 따라 수행하는 자기 목적적인 활동으로 정의하자고 제안한다. 이에 따르면, 노동은 어떤 외부적인 요인에 의해 그 중요성이 좌우되지 않는 특정한 종류의 활동으로 간주될 수 있다. 한편, 그는 사회적 유용성이라는 기준은 노동의 정의에 포함시키지 않는데, 왜냐하면 이 유용성의 판단에 있어서 정치적 요소가 크게 작용하는 등 여러가지 문제가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그가 제시하는 새로운 노동의 정의 속에는 세 가지 형태의 노동이 포괄된다. 그것은 바로 지불노동remunerated work, 가사노동domestic work, 자발노동voluntary work이다. 그는 이 각각의 노동 형태와 그 변화 가능성을 기본소득과의 연관 속에서 서술한다. (Raventos, 2007: 75~93)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필요노동'은 아직까지 임금노동의 완전 철폐를 전제하고 있는 것은 아니며, 임금노동 이외의 다양한 노동 범주를 포괄하기 위한 과도기적인 노동 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사회적 필요노동 패러다임이 지배적으로 된다 하더라도, 자본 관계 자체가 일소되지 않는 한, 임금노동은 그 속에서 여전히 일정한 지위를 차지할 것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이때의 임금노동은 그 이정 패러다임 속에서의 지위나 성격을 그대로 온전하게 유지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기본소득의 실현이 노동자의 협상력을 높여 계급 역관계의 변화를 불러오고 노동 자체를 포함한 노동 사회 전반의 혁신을 앞당길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주기 때문이다.
그리고 여기서 사회적 필요를 강조하는 것은, 노동과 가치의 직접적인 연결 고리를 끊는 것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이 정해진 틀의 노동을 해야만 모든 사람의 필요를 충족시킬 수 있다는 가정에 의문을 제기하고 자본주의의 발전과 함께 모든 사람에게 더욱더 뿌리깊게 각인된 '노동 윤리', '노동 신화', '노동 중심성'과도 비판적 거리를 유지하기 위함이다. 또한, 사회적 필요에 대한 강조는 실제의 사회적 필요와는 무관하게 오로지 이윤을 동기로 작동하는 자본주의적 생산과 가치증식 활동의 맹목성에서 벗어나기 위한 최소한의 준거를 마련하기 위한 것이다.
-102~103p

[가이 스탠딩 기본소득지구네트워크 명예공동대표의 말]

<기본소등 운동 시작의 계기>
"(기본소득 운동) 시작의 계기를 말씀들면, 1980년대 유럽에서는 고용 보장이나 노동 안정성, 그리고 이와 함께 있는 사회보장 등의 낡은 모델에 대한 거부 반응이 일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움직임은 노동시장 유연화를 향한 움직임이었습니다. 당시에 저는 노동시장을 유연화하려는 이러한 경향이 노동자들에게 불안정한 삶을 가져다줄 것이고, 그렇게 된다면 낡은 사회보장 모델은 더 이상 작동할 수 없을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는 모두에게 공통되는 기초가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동시에 저는 시장이 그런 분배를 더 이상 담당하지 못할 것이라고 예상했습니다. 따라서 최초에 저의 입장은 기본소득으로 모든 사람에게 최소한의 보장을 해줌으로써 노동시장 유연화의 폐해를 막고, 이를 통해 저소득 노동자들에 대한 소득재분배 효과도 기대해 보자는 것이었습니다."
-190p

<젊은 세대에 대한 진보적 전략으로서의 기본소득>
"우리는 메시지를 가져야 합니다. 프레카리아트에게 전할, 젊은 사람들에게 전할, 옛날 같았으면 노동조합을 지지했을 그 사람들에게 전할 메시지를 말입니다. 지금은 그 사람들이 그렇지 않습니다. 노동조합을 지지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노동조합이 내세우고 있는 과제는 자신들을 위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니까요. 들어 보았자 흥미가 생기지도 않고, 뭐랄까, 자유와 창의와 자기 삶에 대한 자기 통제와 같은 비전을 발견하지 못하는 겁니다. 반면에 제가 보기에 기본소득에는 바로 이런 게 있습니다. '당신이 당신의 삶을 스스로 다스리고자 한다면, 당신에게 이것이 필요할 것이다. 그리고 동시에, 당신은 이 사회의 당당한 일원으로서 자긍심을 갖게 될 것이다.' 기본소득에는 이런 호소력이 있다는 말입니다. 이거시은 진보적인 전략의 일부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좌파를 끌어들일 수 있습니다. 낡은 노동조합주의는 이렇게 할 수 없을 겁니다."
-193p

<프레카리아트 개념 설명>
'프레카리아트(precariat)'는 '불안정한'이라는 뜻의 'precarious'와 'proletariat'의 합성어이다. 이 용어는 2003년 이탈리아의 한 길거리 낙서에서 처음 등장한 후에 전 세계로 확산되었다. 신자유주의의 확산이 프레카리아트라는 새로운 노동자 계층을 낳았는데, 이는 불안정한 노동을 하고 있는 비정규직 노동자 뿐만 아니라 정규직이라 하더라도 매우 열악한 처지에 있는 노동자 모두를 포괄한다. 따라서 '비정규직 노동자'라는 용어보다 '프레카리아트'가 더 적절한 표현이라고 보기도 한다. 한국에서는 '프레카리아트' 대신에 '불안정 노동자'라는 표현을 쓰기도 한다.
- 192~193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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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인>
사랑이 없는 욕망 88
  지섭은 말했다.
  "사람들은 사랑이 없는 욕망만 갖고 있습니다. 그래서 단 한 사람도 남을 위해 눈물을 흘릴 줄 모릅니다. 이런 사람들만 사는 땅은 죽은 땅입니다."

"사랑이 없는 세계" ( 욕망만 ) 188 중상
...나는 아버지에게 물려받은 사랑 때문에 괴로워했다. 우리는 사랑이 없는 세계에서 살았다. 배운 사람들이 우리를 괴롭혔다. 그들은 책상 앞에 앉아 싼 임금으로 기계를 돌릴 방법만 생각했다.
...그들은 우리와 전혀 다른 배를 탄 사람으로 행동했다. 그들은 우리의 열 배 이상의 돈을 받았다. 저녁 때 그들은 공업지대에서 먼 깨끗한 주택가, 행복한 가정으로 돌아갔다. 그들은 따뜻한 집에서 살았다...
223
...나는 회사의 높은 사람들이 우리 모두가 한배에 타고 있다는 것을 깨달아 주기를 바랐다. 그들은 안 그랬다. 그들은 그들만의 다른 배를 탔다고 고집했고, 일방적으로 원하기만 했다.

현실과 대비되는, 난장이와 아들이 꿈꾼 유토피아 - 사랑 : 법 강제 (난장이) / 교육으로 도모 (영수) 182
...아버지는 사랑에 기대를 걸었었다...지나친 부의 축적을 사랑의 상실로 공인하고 사랑을 갖지 않은 사람네 집에 내리는 햇빛을 가려 버리고, 바람도 막아 버리고, 전깃줄도 잘라 버리고, 수도선도 끊어 버린다...
아버지가 꿈꾼 세상에서 강요되는 것은 사랑이다. 사랑으로 일하고 사랑으로 자식을 키운다. 사랑으로 비를 내리게 하고 사랑으로 평형을 이루고, 사랑으로 바람을 불러 작은 미나리아재비꽃 줄기에까지 머물게 한다. 그러나 아버지가 그린 세상도 이상 사회는 아니었다. 사랑을 갖지 않은 사람을 벌하기 위해 법을 제정해야 한다는 것이 문제였다. 법을 가져야 한다면 이 세계와 다를 것이 없다. 내가 그린 세상에서는 누구나 자유로운 이성에 의해 살아갈 수 있다. 나는 아버지가 꿈꾼 세상에서 법률제정이라는 공식을 빼버렸다. 교육의 수단을 이용해 누구나 고귀한 사랑을 갖도록 한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었다.
  아버지가 나에게 사랑이라는 기반을 주었다. 나도 아버지처럼 사랑에 기대를 걸었다. 그런데 우리 네 식구가 살기 위해 온 은강시는 머릿속 이상 사회와 너무나 달랐다. 우리는 참고 살았다...

내외부의 구분 '클라인 씨의 병' (무진기행 맥락) 221
..."내부와 외부의 구분이 있으면 이런 현상은 없지."
...더욱 알 수 없는 것은 그림 3의 실체가 내 눈앞에 있는데 그 실체를 무시하고 상상의 세계에서만 그 존재가 가능하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림 3을 들고 "그럼 이것은 뭡니까?" 내가 물었는데 그는 간단히 "그것은 없다"고 잘라 말했다.

2 / 3차원 230
...우리의 제도는 이제 안에서부터 파괴될 것이라고 그는 말했다. 우리는 3차원의 세계에 살고 있지만 칼을 품었던 사람과 그의 동료들, 그리고 그들의 식구들은 2차원의 세계에 살고 있다는 말까지 했다. 현실이 한 차원을 빼앗아 버렸다는 것이었다. 2차원이라면 일정한 한도와 경계가 있다.

부자의 빈자 사이의 심리적 괴리 - 모짜르트 95
햄릿을 읽고 모차르트의 음악을 들으면서 눈물을 흘리는 (교육받은) 사람들이 이웃집에서 받고 있는 인간적 절망에 대해 눈물짓는 능력은 마비당하고, 또 상실당한 것은 아닐까?

"하나의 생산자" 인간 전체로 생각 251
...난장이의 큰아들은 결국 자기가 가졌던 이상 때문에 많은 고생을 했고, 그가 지금 피고석에 서 있는 것도 그가 가졌던 이상이 깨어지며 나타난 반대 현상으로 생각한다고 지섭이 말했다. 나는 이때부터 심증을 굳혔다. 지섭은 계속해 난장이의 큰아들이 상대한 것은 어떤 계층 집단이 아니라 바로 인간이었다고 말했다. 자기와 난장이의 큰아들은 처음부터 평범한 상식에 속하는 것이지만 일깨워 분명히 해둔 게 있는데 그것은 노동자와 사용자는 다 같은 하나의 생산자이지 이해를 달리하는 두 등급의 집단은 아니라는 것이었다고 설명했다.
...저희는 사랑이 기본이 되는 같은 이상을 가졌다... 

인간생각  X 245
"그분은, 인간을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근대인의 집단 격리 제도> 부자의 빈자 차별 248
...우리가 인간의 존엄과 가치를 파괴해 버렸고, 법 앞에 평등한 사람들을 사회적 신분에 따라 차별하는 사회적 특수 계급을 인정하였으며, 많은 사람들에게서 인간적인 생활을 할 권리를 빼아았다.


......

<부자와 빈자>
(난장이와 큰아들 영수에 대한 편견어린 상상) 239
246-7
* 부자가 빈자를 보는 선입견과, 모든 이가 자유 의지에 따라 선택하리라는 환상이 드러난다.
유토피아에 대한 열망을 불가능하다고 단정지으며 부자의 착취는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

(가시고기 257)
*소유계급의 노동자에 대한 시각이 드러난다. (약물투여) 254, 5
  "그들이 행복한 마음으로 일만 하게 하는 약을 만드는 거예요..."

*근대, 정상인과 광인의 구분과 같은 맥락.
  "정말 끔찍한 건 이 세계라구요. 몇몇 나라들이 그들의 사회제도로부터 이탈하려는 사람들에게 이미 약물을 투여하기 시작했어요."
  "병이 난 사람들이겠지."
  "질병하곤 상관이 없는 일예요."



Posted by Daesung Ju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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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르크스와 레닌의 무관심에 따라 소련의 농업 정책이 실패했다고 분석하고 있다. >

 

... 소련이 처한 모든 곤란의 뿌리에는 조작된 통계 증거에 근거를 둔 이론과 완전한 무지가 자리잡고 있었다. 마르크스주의자는 누구도 농업에 관해 분별 있는 견해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마르크스와 레닌 둘 다 농업에는 진심으로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마르크스주의는 본질적으로 도시에 맞는 종교다.  - 671p

 

< 일본의 경제 성장이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이루어졌다며 예찬하고 있다. 시장만능주의 같다. >

 

일본이 이룬 기적에 정말 기적 같은 일은 없었다. 일본은 애덤 스미스 경제 이론을 그대로 보여주는 실례일 뿐이다. 물론 여기에 케인스주의가 어느 정도 가미되어 있기는 했지만...

...하지만 일본 정부가 가장 잘한 일은 애덤 스미스의 모델에 따라 강력한 내부 경쟁의 기틀을 세우고 기업에 자비로운 풍토를 조성한 것이다.

...일본 기업은 의인화의 원칙과 새로운 반집산주의 가족 중시 사상으로 산업 공정을 인간적인 과정으로 변모시키고, 이를 통해 계급투쟁의 파괴적인 영향을 줄일 수 있었다.  -  682~3p

 

< 시장 경제 체제에서 개인에게 주어진 자유는 민주화를 도모한다고 보고 있다. >

 

시장 경제 아래서는 원칙적으로 국가가 거대한 의사 결정 영역에서 손을 떼고 개인에게 결정권을 위임한다. 경제적 자유와 정치적 자유는 불가분하게 연결되어 있다. 시장의 자유는 정치적 억압을 약화시킬 수 밖에 없다. 이것이 타이, 대만, 한국의 사례에서 배울 수 있는 교훈이다.  - 691p

 

< 경험론적 과학으로서 자연 과학이 사회과학에 비해 우위에 있다는 견해인 것 같다. 형이상학과 경험 과학의 권력 주고받기 패턴이 반복되는 것 아닐까? >

 

그(에드워드 윌슨)의 저서는 곤충을 대상으로 하고 있지만, 방대하고 상세한 경험적 연구를 근거로 뉴턴이나 아인슈타인의 법칙과 비슷한 일반 이론이 태어날 시기가 되었다는 사실을 보여주었다. ...그동안의 생물학적 성과가 시사하는 바는, 그 과정이 형이상학이 아닌 경험론적 과학을 통해, 칼 포퍼가 대단히 명석하게 규정한 방법론을 통해 연구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칼 포퍼의 방법론에 따르면, 이론은 매우 한정적이고 구체적이고 경험적인 자료로 논박이 가능해야 한다. 그것은 마르크스, 프로이트, 레비 스트로스, 라캉, 바르트, 그 밖의 예언가들이 얘기하는, 검증할 수 없으며 언제든 자기 합리화가 가능한 만능 이른과는 다르다.  - 758~9p

 

< 책에서 줄곧 논의된 20세기 역사의 부정적 근원을 지적하고 있다. >

 

20세기가 끝나면서 인류는 분명 몇 가지 교훈을 얻었다. 하지만 파멸적인 실패와 비극을 가능케 했던 근본적인 악 - 도덕적 상대주의의 등장, 개인적인 책임감의 소멸, 유대 기독교적 가치의 거부, 인간이 지적 능력을 통해 우주의 모든 신비를 해겨할 수 있다는 오만한 믿음 - 이 사라져가는 과정에 있는지는 아직 확실치 않다. 21세기가 과거와 달리 인류에게 희망의 시대가 될 수 있을지는 여기에 달려 있다.  - 764p

Posted by Daesung Ju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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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상 완료된 전쟁임에도 불구하고 굳이 일본에 원자 폭탄을 투하한 것은 미국의 비인간적 핵 실험에 불과했다는 견해와 상반된다. 원자폭탄을 썼기에 전쟁이 끝났다는 얘기다.>

 

일본 정부는 공개적으로 스위스 대사관을 통해 세계를 상대로 항의문을 보냈다. 20년간 국제법을 무시해온 그들이 미국 정부가 국제법을 무시했다고 비난했던 것이다. 그들은 특히 히로시마에 투하한 새로운 폭탄의 무자비함에 대해 얘기했다. 하지만 일본 정부는 뒤로는 다른 일을 꾸미고 있었다. 그들은 은밀하게 원자폭탄 프로그램의 책임자였던 니시나 요시오를 도쿄로 불러 히로시마에 떨어진 폭탄이 진짜 핵폭탄인지, 만약 그렇다면 6개월 내에 똑같은 폭탄을 만들 수 있는지 물어보았다. 따라서 원자폭탄 하나로는 충분치 않았다는 게 분명해진다... - 111p

 

...이런 상황을 종합해 볼 때, 원자폭탄을 사용하지 않고 일본의 항복을 받아낼 수 있었을 것 같지는 않다. 원자폭탄을 사용하지 않았다면, 본토가 아니라도 만주에서 엄청난 전투가 벌어졌을 것이고, 재래식 폭탄을 사용한 폭격은 더욱 심해졌을 것이다. (이미 폭격은 하루에 티엔티 1만톤의 위력으로 핵폭탄 수준에 도달해 있었다.) 따라서 핵무기가 사용되어 연합군 병사들 뿐만 아니라 일본인들도 목숨을 구했다고 볼 수 있다.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서 죽은 사람들은 사실 영미 과학 기술의 희생자라기보다 극악한 이데올로기에 마비된 정부 시스템의 희생자였다. 일본은 그러한 이데올로기 때문에 절대적인 도덕적 가치 뿐만 아니라 이성마저 달아나버렸던 것이다. - 113p

 

 

<추앙받는 간디를 우스꽝스러운 모습으로 묘사하고, 또한 인도 현실과 괴리된 인물이었다고 평가한다.>

 

그는 어머니와 아버지에게서 만성적인 변비를 물려받았다. 그래서 신체 기능에 집착했으며, 음식물의 섭취와 배설에 큰 관심을 보였다...

...간디는 매일 아침 일어나자마자 시중드는 여인에게 이렇게 물었다. "자매여, 오늘 아침 대장 운동은 어땠는가?" 그가 가장 좋아하는 책은 '변비와 우리의 문명'이었다. 그는 그 책을 읽고 또 읽었다...

...그는 이른바 바라흐마차리아를 실험하며, 단순히 온기를 얻기 위해 벌거벗은 여자들과 함께 잠을 잤다. 중년이 된 뒤로는 1936년 잠을 자고 있을 때 단 한 번 사정했다. 그때 나이 66세였고, 이 때문에 큰 정신적인 혼란에 빠졌다.

 

  간디의 기행은 신성한기인을 숭배하는 인도인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하지만 그의 가르침은 인도의 문제나 인도의 소망과는 전혀 관련이 없었다. 물레를 돌리는 일은 직물을 대량 생산하는 나라에서는 아무 의미도 없었다. 그가 생각한 식량 정책을 추진했다면, 아마 많은 인도인이 굶어 죽었을 것이다. 사실 간디의 아슈람은 퍽 비싸게 먹히는 그의 '단순한' 식사 취향과 수많은 '비서'와 하녀로 이루어져 있었다. 따라서 부유한 상인들이 엄청난 돈을 대주어야 했다. 그를 곁에서 지켜보았던 한 사람은 이렇게 말했다. "간디의 가난한 생활을 유지하는 데는 엄청난 돈이 든다" 간디 현상에는 20세기적인 사기의 냄새가 강하게 풍긴다. 그의 방식은 극도로 자유로운 사회에서나 가능한 일이다.   - 196~8p

 

<허울 좋은 민주주의에서 시민은 주인일까?>

 

식민지 해방 과정에서 이어져 내려온 이런 통념과 여기에 따라오는 복잡한 법률은 '진정한' 국민과 '정치적' 국민 사이의 괴리를 넓혀 놓았다. 게다가 '정치적' 국민을 매우 좁고 분파적인 개념으로 한정지었다. 따라서 탈식민지화 과정의 수혜자는 투표 조종자들이다. 여기에는 거대한 기만의 씨가 뿌려져 있다. 직업 정치가들은 국가를 표의 관점에서 생각하고, 보통 사람들은 국가를 정의의 관점에서 생각한다. '진정한' 국민에게 민주주의는 법치보다 중요하지 않다. 민주주의는 형식이고 법치는 내용이다. 식민지를 경험한 국민들에게 독립이 주어졌을 때, 그들은 정의가 주어진 것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그들이 얻은 것이라고는 정치인들을 뽑을 수 있는 권리가 전부였다. 물론 식민지 시대에는 정치적 평등도 없었다. 기껏해야 법 앞의 평등을 얻을 수 있을 뿐이었다. 어쨌든 권력 이양의 과정에서 투표권이 진보의 척도가 되었고, 법은 그저 되는 대로 방치되었다. 그리하여 대다수의아프리카인은 오랜 독립 과정에서 아무 역할도 하지 못했다.   - 272p

 

< 70년대 국제적 테러리즘 증가의 지역별 요인을 설명하고 있다. 나치 친위대의 테러리즘이 철학적 토대를 실존주의에 두고 있다고 분석한다. 색다른 시각으로서 주목할 만한 부분이다. >

 

...하지만 실제로 1970년대의 세계는 핵전쟁의 가능성보다는 여러 가지 다른 형태의 폭력이 증가하는 현실에 혼란을 겪어야 했다. 1970년대 30차례 이상 재래식 저쟁이 일어났다. 대부분은 아프리카가 전장이 되었다. 또 인명의 희생은 더 적지만 정치적으로나 심리적으로 세계를 더 큰 혼란에 빠뜨린 것은 국제적인 테러리즘의 증가였다.

이 새로운 현상에는 전통적인 폭력의 네 가지 요소가 혼합되어 있다.

우선 회교도의 정치 종교적 테러리즘 전통이다...

두번째로 러시아의 테러리즘 전통이다. 레닌은 이를 국가 테러리즘으로 탈바꿈시켰다...그의 국가 테러리즘은 국내에서 이용되었을 뿐만 아니라 외국에 수출되기도 했다...

세번째로 유럽, 특히 독일에는 폭력을 도덕적으로 합리화하는 전통이 존재했다... 독일의 테러리즘 전통은 실존주의에서 철학의 옷을 입었다. 실존주의는 전쟁이 끝난 뒤 사르트르가 널리 퍼뜨렸다. 사르트르는 평생 동안 폭력에 매료되어 살았고, 제자 프란츠 파농은 1961년 '자기 따에서 유배당한 사람들'을 출판했다. 이 책은 테러리즘의 안내서로 가장 큰 영향력을 미친 책이다...

네번째로 지중해 해적들의 비정치적인 폭력의 전통이다. - 600~1P

 

< 구조주의를 마르크스주의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고, 사실을 부정하고 이론적 세계를 중시하는 엘리트주의적 사상이라며 비판한다. >

 

모든 구조주의자들에게 공통적인 것은 인간의 속성과 활동이 법칙의 지배를 받는다는 마르크스주의의 가정이다. 과학 법칙이 무생물의 세계를 지배하는 것과 비슷했다. 따라서 이런 법칙을 발견하는 것이 사회 과학의 역할이었다. 사회는 사회 과학이 발견한 법칙에 따라 움직여야 했다. 이 새로운 형태의지적 유토피아는 그 여정의 끝에 강압적인 사회공학을 강하게 암시하고 있다...

구조주의의 전성기는 미국이 쇠퇴하고 소련의 세력과 영향력이 꾸준히 확대되고 있던 시기와도 일치한다... 구조주의는 그 원류인 마르크스주의처럼 반경험적이고, 실제 세계보다는 이론 세계를 옹호하고, '설명'을 위해 사실을 부정하기 때문이다...

구조주의는 국제연합이라는 가상의 카드로 만든 집에 잘 어울렸다. 이곳에서는 사실이 중요하지 않았다. 여기서는 북반구가 남반구였고, 남반구는 북반구였으며, 부가 빈곤을 낳았고, 시온주의는 인종주의였고, 죄를 저지른 건 전부 백인이었다. 국제적인 부정과 불평등의 사악한 하부 구조였던 다국적기업은 본질적으로 구조주의식 개념이다. 구조주의는 마르크스주의처럼 영지주의의 한 형태다. 엘리트들만 알 수 있는 비밀스런 지식의 체계가 구조주의였다.   - 616~7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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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대성 2009.08.08 15:30 신고 Address Modify/Delete Reply

    111,3 나가사키
    196 간디
    272 식민민주
    521 학생 소요
    601 폭력 사르트르
    616 구조주의와 맑스
    636

    집산주의 671
    도시농업과 맑스
    682 일본
    691
    시장정치 자유
    752 사과 758
    경험과학 764

참다운 안락과 자유는 거창한 이념의 내면화를 통한 방법적 해소에 있는 것이 아니라,

주어진 삶의 통증과 적극적으로 대면하면서도 그것을 희망과 내접시키는, 적극적 삶의 태도를 통해 가능해질 수 있다는 결론이 도출된다. "안락을 구하고자 자유를 반납하고 자유가 내게 오면 쓸쓸해진다는 그 엄연한 사실을 알게 된 지금, 필순은 좀 얼얼하긴 하지만 고요한 마음으로 밭으로 가는 산길로 올라간다." 그 산길의 끝에는 수수밭이 있으며, 필순은 그곳에서 옥수수씨를 심는다. 이 씨앗이, 깨달음이 응결된 희망의 상징인 것은 자연스럽다.

 

  - 마음은 소금밭인데 오랜만에 도서관에 갔다, 이명원, 새움, 40페이지, 공선옥 소설 - '수수밭으로 오세요'를 얘기하면서.

 

 

Posted by Daesung Ju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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