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쓴이 김용규 님이 3월 15일(목) 청파교회에서 열린 '저자와의 만남'에서 말씀하신 내용 메모.
(1> 교회 강연이라 배려하신 부분도 있겠지만, 강연 내용으로 볼 때 기독교 신자이신 것 같다.
2> 아래 내용은 실제 말씀하신 순서와는 조금 다를 것이다.)

...

성서의 교훈은 '최종'이란 의미에서 궁극적인 경우가 많다. 그래서 지금 당장 실행하기 어려운 너무 무거운 십자가가 된다. 예수가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가르친 것은 가능할지 의문이다. 간결하고 지나치게 가혹하다.
진리는 끊임없이 추구해야 하는 것이다.

십계명은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하나의 계명으로 요약할 수 있다. 기독교 안의 유일한 진리가 있다면 이것일 것이다.
하나님 사랑은 이웃 사랑의 전제조건이며, 이웃 사랑은 진정한 자기사랑법이다. 그러므로 하나님 사랑만이 자기를 사랑하게 한다.

지옥은 물론 천국에서도 자기 팔보다 더 긴 수저를 갖고 있지만, 천국에선 서로 앞 사람의 입에 음식을 떠넣어 주기에 모두가 배불리 행복하게 산다. 이 이야기는 남을 행복하게 하는 내가 남에 의해 행복해지고, 남을 사랑하는 내가 남에게 사랑받는 나를 만든다는 진리를 말해준다. 프랑스 철학자 가브리엘 마르셀은 이같은 관계의 원리를 '상호주관적 매듭'으로 불렀다. 이것이 '철학카페에서 시읽기' 책에서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는 개념이다.

비논리적인 것은 무가치한 것일까?
논리로 설명할 수 있는 부분은 지극히 작은 분야에 불과하다. 논리를 벗어나야 하나님의 일을 설명할 수 있다.
모든 이데올로기는 논리적인 순환구조를 갖고 있고 순환논법으로 어떤 명제든 정당화한다. 그래서 수단과 목적이 전도된다. 그래서 허위의식이 생기고 우상화가 일어난다.
하지만 모든 수단은 목적 아래 있어야 정당성을 가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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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은이 김용규 (웅진지식하우스, 201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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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학교 졸업 무렵에 집안 사정으로 돈 안 들고 오래 머물 곳이 필요했다. 그래서 두달 쯤을 신기학교에서 보냈다.

  운동장에는 땔감으로 쓸 나무가 통나무 채로 쌓여 있었다. 며칠동안 끊임없이 도끼질을 했다. 땔감이 되었다. 속이 다 시원했다. 밤이 되면 술을 마셨다. 기타 치고 노래도 부르고 이야기도 나눴다. 원석샘과 은하였던가, 아무튼 두 사람이 노래에 맞춰 춤을 추던 밤, 그 모습이 참 아름다워 보였다. 원석샘과 사이 형은 진심으로 생애 최초로 백수가 된 나의 고민을 들어주셨다. 
  고향에서 살고 있는 사람에게는 고향이 없다. 낡아빠진 모습 그대로인 고향이 아니라 마음이 쉴 수 있는 공간. 신기학교는 그런 곳이다. 현실적으로는 돈 걱정 안하고 쉬어갈 수 있는 곳이기에 '우리집'이 된다. 
  가치를 추구하는 공간에서는 가치가 중요하지 않다. 함께한다는 사실이 진짜배기다. '철학카페에서 시 읽기'의 글쓴이는 '상호 주관적 매듭'을 강조한다. 
  "바로 이 상호 주관적 매듭이 모든 가치 있는 일이 그것을 행하는 사람에게 상응하는 기쁨과 대가를 어김없이 돌려주는 메커니즘의 실체입니다." (238쪽) 중요한 것은 관계다. 가치와 기쁨과 대가가 머무는 플랫폼으로서의 관계. 관계를 만드는 구심점으로서, 가치를 추구하는 공간으로서 제 2의 고향은 중요하다. '우리집'은 하숙집이 된지 오래, 고향은 재개발된지 오래라면 집도 고향도 만들어야 한다. 가족 같은 공간에서 관계를 가꿔야 한다. 경쟁하지 않는 공간에서는 속내를 털어놓을 수 있다. 저의를 파악하느라 애쓰지 않아도 된다. 진정한 위로가 가능하다. 
  하지만 가치를 부정할 수만은 없다. 나침반으로서 가치는 불투명하다. 무언가 만들어내야 한다. 만들어내는 힘은 관계와 공간에서 나온다. 신기학교와 기연이네는 그런 곳이다. 
  며칠 전 청파교회에서 열린 저자와의 대화에서 글쓴이 김용규 씨는 책을 쓰게 된  계기를 말했다. 돈이 궁하던 터에 출판사의 독촉을 이겨낼 도리가 없더라고 했다. 질은 낮아질지언정 판매량은 늘어나는 책을 쓰게 되었다고도 했다. 언더그라운드의 고충을 오버그라운드에서 해결하는 모습이었다. 반대로, 오버그라운드의 고충은 언더그라운드로서의 고향이 해결해주는 것 아닐까.
  고향에 가자, 살맛 나는 세상을 만드는 피로감은 살맛 나는 작은 세상이 풀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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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랑은 무엇인가, 손해보지 않는 사랑이 가능할까
    다른 화분 속에서 같은 빛을 보는 것, 손을 놓지 않는 것

바디우가 <존재의 사건>, <조건들>, <철학을 위한 선언>과 같은 저서에서 말하는 ‘사건'이란 모든 종류의 평형 상태를 뒤흔드는 우연한 충격입니다. 사건은 언제나 우연으로 나타나 한 상황을 지배하는 기존의 법칙들, 즉 정치, 과학, 예술, 사랑의 법칙들을 파괴한다는 뜻이지요. 그가 <윤리학>에서 “사건은 우리로 하여금 새로운 존재방식을 결정하는 것이다"라고 말한 것도 그래서입니다. 이 같은 생각을 바탕으로 그는 “사랑은 세계의 법칙들에 의해서는 계산되거나 예측할 수 없는 하나의 사건입니다"라고 주장했지요. 바디우의 이 말은 적어도 다음 두 가지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하나는 사랑의 시작에 있어 ‘만남의 우연성'이고 다른 하나는 사랑에 의한 ‘법칙성의 파괴'입니다...

할인 매장에서 자기 몸에 맞는 옷을 고르거나, 중고차 시장에서 자기 수입에 맞는 자동차를 찾는 것같이 시작하는 연애는 바디우가 보기에 “사랑으로 촘촘히 짜여진, 타자에게서 비롯된 시련이나 심오하고 진실된 온갖 경험"을 회피하려는 것입니다. 사랑의 중요성을 처음부터 완전히 박탈한다는 겁니다. ‘사랑에 빠지는 위험을 감수하지 않고서도 사랑할 수 있다'는 쾌락주의적 사고로는 사랑이라는 집의 문턱조차 밟을 수 없다는 것이 바디우의 생각이지요...

그래서 바디우는 사랑의 만남도 필히 위험과 모험을 동반하는 우연에서 시작되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 68~70쪽

사랑이 동일한 사회 계층이나 동일한 집단, 동일한 파벌이나 동일한 국가를 고집하는 기존 세계와 그 세계의 법칙(진리)들을 깨트리고, 차이에서 출발하는 새로운 세계와 법칙(진리)들을 구축한다는 것이지요.
 - 77쪽

...이처럼 사랑하는 두 사람은 결코 동일한 하나의 관점에서 기존의 세계를 함께 경험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차이가 있는 둘의 관점에서 하나의 세계를 함께 바라보며 구축해가는 것이지요...
바디우는 프랑스 극작가 폴 크로델의 <정오의 공분>에 나오는 “멀리 떨어져서, 그러나 서로가 서로에게 기대면서, 우리의 영혼은 변화를 맞이하는가?”라는 대사를 인용해 둘이 등장하는 무대의 본질을 설명하기도 했는데, 바로 그것을 키비가 “우린 각자 화분에서 / 살아가지만 서로에게 기댄다는 것 // 서로에게 기댄다는 것"이라고 노래한 거지요...
사랑의 존재론적 거리는 사랑을 한편으로는 쓸쓸하고 허전하게 하기도 합니다. 영원히 좁히지 못하는 평행선처럼 하나가 될 수는 없기 때문이지요. 그렇지만 그것이 사랑의 본질이자 숙명입니다.
 - 79~81쪽

...바디우는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사랑의 지속성과 그 과정이 가진 의미와 가치를 사유합니다.
“우리가 사랑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은 무엇보다도 지속되는 하나의 구축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랑은 끈덕지게 이어지는 하나의 모험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최초의 장애물, 최초의 심각한 대립, 최초의 권태와 마주하여 사랑을 포기해버리는 것은 사랑에 대한 커다란 왜곡일 뿐입니다.”
 - 83쪽

프로이트 이후 정신분석학자들은 물론이고 오늘날 각광을 받는 진화심리학자들까지도 하나같이 입을 모아 연애에 대한 욕구(eros)가 인간의 다른 어떤 욕구보다도 강렬하다고 주장...
인간의 가장 절실한 욕구가 “고독이라는 감옥을 떠나는 것"
 - 89쪽

(소비사회가 충동질하는 욕망 대신, 사랑과 행복을 추구함으로써 소비사회를 극복할 수 있다.)
이제 우리가 외칠 새로운 구호는 “욕망보다 사랑을!”, “쾌락보다 행복을!”입니다.
  - 299쪽


    상호 주관적매듭, 나는 언제나 우리로서 존재한다

하이데거, 사르트르, 마르셀 등 실존주의 경향의 철학자들이 사용하는 ‘존재'라는 용어의 대부분의 경우 ‘존재의 의미(Sinn vom Sein)’라는 뜻으로 이해하는 것이 좋습니다. 왜냐하면 ‘존재라는 용어를 통해 ‘존재자의 본질'을 탐구했던 고대나 중세 철학자들과 달리, 그들이 탐구하려 했던 것은 ‘존재의 의미', 곧 어떤 존재자가 그것으로 존재하는 의미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만일 그들 가운데 한 사람이 당신에게 인간의 존재가 무엇인가를 묻는다면, 당신은 ‘인간이란 무엇인가'가 아니라 ‘인간이 인간으로 존재하는 의미가 무엇인지'를 대답해야 합니다.

모든 존재, 다시 말해 모든 존재자들이 가진 ‘존재의 의미'는 오직 ‘2인칙 관계'에서만 발생한다...

그대가 없으면 나도 없다! 마르셀은 ‘나'와 ‘그대' 사이에 존재하는 이런 관계를 ‘상호 주관적 매듭(le nexus intersubjeclif)’이라고 이름지었습니다. 사랑은 상호 주관적 매듭의 상징이지요. 나는 내가 ‘그대'라고 부르는 상대에게서 역시 ‘그대’라고 불릴 때만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사랑이라는 ‘상호 주관적 매듭' 안에서는 ‘우리가 존재한다(Dous sommes)’라는 명제가 ‘나는 존재한다(Je suis)’라는 명제보다 언제나 우선하며, ‘우리가 존재한다'라는 명제가 전제되지 않는다면 ‘나는 존재한다'라는 명제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말장난에 불과합니다... 내가 있어 우리가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있어 내가 있다는 말이지요.
 - 118~122쪽

1인칭인 ‘나'가 3인칭인 ‘그'나 ‘그녀'와 어떤 관계를 맺을 때, 드디어 ‘너', ‘그대'라는 2인칭이 기적과 같이 탄생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우리가 하루하루를 그냥 사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존재하는 의미를 느끼며 살게끔 합니다. 인간에게는 이것만이, 오직 이것만이 기적이지요.
 - 128쪽

가브리엘 마르셀은 한 인간을 ‘그대’로 대하는 일은 상대를 ‘판단하지 않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알랭 바디우가 그의 <윤리학>에서 적절하게 지적한 대로, 타자의 존재를 신의 윤리적 이름인 “전혀-다른-타자(Tout-Autre)”와 연결해 신성하게 인정하는 레비나스의 ‘차이의 윤리학'을 신봉하는 사람이라도, 타자를 판단의 대상으로 대할 경우 동일성의 폭력을 피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내가 상대를 판단하여 사랑하면 상대도 나를 판단하여 사랑하고, 내가 상대의 존재 자체를 사랑하면 상대도 나의 존재 자체를 사랑한다는 거지요. 바로 이것이 사랑이라는 ‘상호 주관적 매듭'의 근본 속성입니다.
 - 131~133, 135쪽

아우구스티누스를 따라 ‘사랑하는 것이 곧 사랑받는 것이 된다(amor amatur)’고 주장한 가브리엘 마르셀은 <존재의 신비>에서 상호주관적 매듭의 신비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했습니다.
“타인에 의한 매개는 자기 사랑을 정립시킬 수가 있과, 또 그 매개만이 자기중심주의의 위험에서 자기 사랑을 보호해줄 수 있으며, 오직 그 매개만이 자기 사랑이 상실하게 될 해맑음의 성격을 보증해줄 수 있다.”
오직 타자에 대한 사랑만이 자칫 그릇될 수 있는 자기에 대한 사랑을 위험에서 구하고 본래의 순수한 의미를 지켜줄 수 있다는 말이지요. 상호주관적 매듭은 자기중심주의(hauto-centrique)와 타자중심주의(hetro-centrique)가 가진 각각의 부작용들을 서로 해소시켜주는 역할을 합니다.
  - 296~297쪽


    우리를 진정 죽음에 이르게 하는 병은 과연 무엇일까요?

우리를 진정 죽음에 이르게 하는 병은 과연 무엇일까요?
키르케고르는 그것은 오직 절망이라고 했습니다. 그것도 다른 어떤 것에 대한 절망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 대한 절망이라고 했지요.
“자기 자신에 대하여 절망하는 것, 자기 자신에게서 빠져나오려는 것, 이것이 온갖 절망에 대한 공식이다”라고 그는 강조했습니다. 그리고 이 절망에는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종류가 있다고 했지요.

“첫째는 절망하여 자기를 의식하지 않는 경우이고, 둘째는 절망하여 자기 자신이려고 하지 않는 경우이며, 셋째는 절망하여 자기 자신이려고 하는 경우가 그것이다.”
 - 201쪽


     치명적인 병으로서의 절망을 극복하려면
    가치를 추구하는 관계 속에서 자기를 실현해야 한다
    이것이 자기 사랑!


키르케고르는 인간에게는 스스로 자기를 실현할 능력이 없다고 단정했습니다. 그에게 자기실현이란 육체와 영혼의 종합에 의해서만 이루어지는데, 영혼은 인간이 아닌 신의 소관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그는 인간의 진정한 자기실현은 오직 신에 의해서 “그에게 설정된 소명"을 알고 그것에 순응할 때에만 이룰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사람은 자기의 눈높이에서 볼 수밖에 없기 때문에 그가 실현하는 자기란 결국 “자기 이상의 것은 물론이거니와 이하의 것도 되지 않기” 때문이지요.

키르케고르는 우리가 아무 의식도 없이 무지몽매하게 살거나, 남들을 따라서 살거나, 또는 자기가 스스로를 창조해서 살면, 언젠가는 절망에 빠질 수밖에 없다고 강변했습니다. 오직 절대적 가치들을 받아들여 살아야만 스스로 온전해질 수 있고 죽음에 이르는 병인 절망에서도 벗어날 수 있다고 설파한 거지요.

이제 마침내 ‘자기 사랑법'을 귀띔할 차례입니다... 당신은 자신을 가치에 투사해야 합니다.

상호주관적 매듭이 모든 가치 있는 일을 그것을 행하는 사람에게 상응하는 기쁨과 대가를 어김없이 돌려주는 메커니즘의 실체입니다.
 - 230, 231, 235, 236, 238쪽


    시인은 뭐하는 사람인가?

사라져버린 신의 시대, 새로운 신이 오지 않은 시대, 세계의 밤의 시대, 이같이 특징지어지는 우리 시대를 하이데거는 “궁핍한 시대(diedrftige Zeit)”라고 불렀습니다. 그리고 이 시대를 사는 시인에게 사명을 부여했습니다. 모두가 신과 신성한 것의 결핍으로 말미암아 절망하며 비참한 삶을 이어가고 있을 대, 시인은 시 짓기를 통해 은폐된 존재의 진리를 열어 밝힘으로써 신성한 세계를 보여주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이때 하이데거가 말하는 신은 어떤 특정 종교의 신, 예컨대 기독교에서 숭배하는 신이나 무당이 부르는 주술적 신이 아닙니다. 시인이 이름 부르는 신은 존재의 진리를 전하는 신, 곧 모든 존재자들이 존재하는 의미를 참답게 열어 밝혀주는 신이지요. 하이데거는 이 신을 “마지막 신(Der letzte Gott)”이라고 불렀습니다.
시인은 이 마지막 신의 ‘은밀한 눈짓'을 포착하여, 즉 존재의 진리가 스스로를 열어 밝히는 ‘고요의 울림'을 듣고, 그의 “말씀(Sage)”을 시어로 보존하는 사람입니다. 그럼으로써 사회적·역사적 요구가 우러나오는 대지, 존재의 진리가 스스로 드러냄으로써 사람들이 살아가게 하는 토대, 곧 김수영 시인이 말하는 문화와 민족과 인류에 공헌하는 삶의 지향을 마련해주는 사람이지요.
 - 394~395쪽


    키르케고르는 실존주의를 제시하고 극복했다

자기 실현에 대한 키르케고르의 비판은 실존주의의 문을 연 철학자가 그것의 한계까지 미리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매우 흥미롭습니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난 1945년 이후 서구인들은 키르케고르가 예상한 대로 인간의 절망은 카뮈식의 ‘반항'이나 하이데거식의 ‘기획투사', 사르트르식의 ‘앙가주망'을 통해 극복할 수 없다는 새로운 젊아에 부딪혀 “저주받은 자유"라고 토로하기 시작했지요...

인간이 스스로 자기를 선택하여 구성한다는 의미에서의 기획투사나 앙가주망에는 자신이 하는 선택의 자유에 대한 책임이 따르지 않습니다...
20세기 실존주의 철학자들이 그토록 소리높여 외쳤던 실존은 우리의 삶을 ‘의미 있게’ 할지언정 ‘가치 있게' 하지는 못합니다!

하이데거가 인간이 자신의 선택에 의해 스스로 자기를 창조하는 ‘기획투사' 대신 자기에게 다가오는 존재의 진리에 순응하는 ‘내맡김(Gelassenheit)’을 강조하고, 본래적 자기로서 사는 ‘실존(Exsistenz)’ 대신 존재의 진리 안에서 자기 자신을 벗어나는 ‘탈존(Ex-sistenz)’을 주장하는 후기 철학에 몰두했던 것은 필수불가결한 일이자 당연한 귀결이었습니다.
 - 231~233쪽


    하이데거 철학 - 존재사건
    하이데거 예술론

우리말로 생기 또는 발현이라고 번역되는 하이데거의 존재사건이란, 스스로 자신을 드러내려는 존재의 진리와 그것을 열어 밝히려는 현존재(인간)가 만나는 사건입니다. 존재의 진리의 “말걸어옴(Zuspurch)”과 이에 대해 응답하는 현존재의 “대답함(Antwort)”의 만남이지요. 존재의 ‘생기하는 던져옴(der ereignende Zuwurf)’과 이에 대응하여 일어나는 현존재의 ‘생기되는 기획투사(der ereignete Entwurf)’의 만남이기도 합니다.

달리 표현하면, 존재사건이란 존재자들이 그것으로 존재하는 본래적 의미가 스스로 드러나는 현상이며, 인간이 이에 맞대응하여 그것들을 자신의 ‘사유'와 ‘언어', 그리고 ‘예술’로 표현하는 현상입니다. 그것은 존재가 인간에게 스스로를 드러내 열어 밝혀주는 ‘줌(Geben)’이 일어나는 사건이자, 동시에 인간이 존재에게서 존재의 진리를 ‘선물(Gabe)’로 받는 사건이지요.

존재가 존재의 진리를 주고 인간이 그것을 ‘사유’와 ‘언어', 그리고 ‘예술'을 통해 받는다는 것이 한마디로 간추린 하이데거 후기 철학의 근본 구조입니다... 그것들은 스스로 우리에게 다가오는 존재의 진리가 주는 ‘선물'로서, 우리는 그것을 증여받을 뿐이지요.
 - 373~374쪽

하이데거에게 ‘세계'는 객관적 세계, 곧 데카르트나 뉴턴의 물리적·연장적 시공간이 아닙니다. 그것은 사물을 그것의 ‘쓸모(Bewandnis)에 따라' 이해하고, 자신의 ‘처지(Befindlichkeit)에 따라' 해석하는 우리 각자가 구성해낸 의미들의 집합체에 불과하지요...
“현존재(인간)는 존재하는 한 언제나 이미 그리고 언제나 여전히 존재가능성들에 입각해서 이해한다.”

...이 같은 해석학적 관점에서 보면, 자신 앞에 존재하는 개개의 사물들을 이해하고 해석함으로써 그것들의 ‘의미'를 열어 밝히는 인간이 하이데거가 말하는 현존재(Dasein)이고, 그 현존재에 의해 이해되고 해석됨으로써 열어 밝혀진 ‘의미의 집합체'가 곧 ‘세계'입니다. 그러니 우리의 세계는 개개의 사물에 대한 이해와 해석을 통해 우리 스스로 얽어낸 ‘의미의 그물망'이자 우리 삶이 그려낸 한 폭의 ‘풍경화'인 셈이지요. 이것이 바로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의 속성이자 은유가 가진 힘의 비밀입니다.
 - 41~42쪽


Posted by Daesung Ju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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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박모모 2012.03.21 17:27 신고 Address Modify/Delete Reply

    요새는 블로그 업데이트를 전보단 훨 부지런히 하는구먼.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