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적대화를 위한 넓고 얕은 지식


고대 노예제 사회 : 생산수단은 왕과 노예를 만들었다

생산수단은 소유자가 타인의 노동력을 이용하게 함으로써 사회적 관계를 왜곡시킨다.

신이 진짜 있는지 없는지의 문제는 지배자의 관심사가 아니다. 지배자 자신이 부를 수 있는 ‘신’이라는 언어만 있으면 된다. 왜냐하면 신은 지배자가 사회를 지배할 권리를 부여하기 때문이다. 독단적으로 지배하고자 하는 욕망을 지닌 자일수록, 그의 신앙은 절실하다.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역사적, 정치적으로 신의 문제를 고려했을 때, 신의 이름이 정치를 위해 사용되었을 혐의가 짙다는 것이다.

중세 봉건제사회 : 계급은 더욱 세분화되었다

쉽게 정리하면 서구는 두 가지 문화를 뿌리로 한다. 그리스-로마 신화와 그리스도교.

부르주아는 인간의 ‘이성’으로 신의 역할을 완벽하게 대체했다.

대치 구조가 명확해졌다. 구권력인 왕과 영주들은 장원을 생산수단으로 소유하고, 종교로부터 지배의 정당성을 얻었다. 반면 신권력인 부르주아들은 공장과 상업을 생산수단으로 소유하고, 이성으로부터 권력의 정당성을 얻었다.

근대 자본주의 : 새로운 권력이 탄생했다

부르주아는 자본가계급, 시민계급, 유산계급으로 불린다. 그리고 프롤레타리아는 이와는 대비되게 노동자계급, 무산계급으로 불린다.


근대 자본주의의 전개 : 공급과잉이 시작되었다

공장은 주문이 있기 전에 미리 물품을 대량으로 생산해낸다. 물품이 필요한 사람은 기다릴 필요 없이 시장에 가서 이미 생산된 물품을 구입하면 된다. 이러한 특성, 즉 물품을 구입하려는 욕구보다 이미 생산된 물품이 더 많은 상태가 자본주의의 특성이다.

제1차 세계대전 : 공급과잉이 전쟁을 일으켰다

사실 오늘날의 자본주의를 유지해주는 핵심 요소는 두 가지다. 하나는 전쟁이고, 다른 하나는 유행이다. 전쟁과 유행은 자본주의라는 어머니에게서 태어난 쌍둥이 형제라 할 수 있다. 전쟁이 공급 과잉의 문제를 단번에 해소하듯, 유행은 필요를 뛰어넘는 막대한 소비를 창출해서 공급과잉 문제를 해소한다. 충분히 사용할 수 있는 옷과 핸드백들이 매년 옷장 구석에 쌓여가거나 쓰레기통으로 향한다. 전쟁과 유행 없이 자본주의를 유지하기는 어렵다.

세계 경제대공황 : 가격 경쟁은 대공황으로 이어졌다
대공황 해결방안
1> 미국 : 뉴딜정책 - 자본주의 수정
2> 러시아 : 공산주의 - 자본주의 폐기
3> 독일 : 군국화 - 자본주의 유지

냉전시대 : 왜 자본주의와 공산주의는 대립하는가

공산주의 국가가 자본주의 국가와 무역 거래를 하지 않고 적대적인 관계를 갖는 것은, 공산주의 체제가 생산수단을 독점한 자본가의 존재를 인정하기 않기 때문이다. 

시장 확보가 필수적인 자본주의의 입장에서는, 자본주의와 무역 거래를 하지 않는 공산주의 국가가 늘어난다는 것은 시장의 축소를 의미한다. 시장의 축소는 수요량의 감소를 의미하고, 수요량의 감소는 자본주의의 생산 중단, 즉 공황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서, 공산주의 국가의 존재 자체가 자본주의에 위협이 되는 것이다.

‘국가’는 요청된다. 국가라는 개념은 신의 개념과 마찬가지로 지배를 정당화하는 역할을 수행한다. 그리고 특히 ‘애국’에 대한 강요는 지배자들을 편리하게 한다. 그래서 애국은 국가적 차원에서 장려되고 교육된다.

신자유주의의 탄생 : 새롭고 독특한 경제체제의 세계


자본주의와 공산주의 : 너에게 생산수단을 허하노라

공산주의는 개인이 생산수단을 소유하는 것을 금지하고, 모두 국가가 관리하는 체제를 말한다. 반면 자본주의는 개인이 사적으로 생산수단을 소유할 수 있게 하는 체제를 말한다.

자본주의와 공산주의의 차이는 ‘생산 수단의 개인적 소유를 인정하는지의 여부’가 된다. 자본주의는 생산수단, 잉여생산물 모두를 개인이 소유할 수 있는 체제다. 공산주의는 생산수단은  개인이 소유할 수 없지만, 잉여생산물은 개인이 소유할 수 있는 체제다.

공산주의 : 공산주의는 왜 실패했는가

공산주의는 모든 사람이 평등하고 평화롭게 살고자 한다는 인간 본성에 대한 낙관적이고 불가능한 전제에서 이야기를 시작한다.

 국가가 생산수단을 소유한다고 해도, 실제로 그 소유를 유지하고 분배하는 존재는 지극히 구체적인 사람이다. 즉 국유화된 생산수단을 관리하는 소수가 권력에 근접하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마르크스주의가 추구하는 노동자에 의한 프롤레타리아 독재는 실현되지 않는다. 국가의 이름으로 국가 전체의 생산수단을 통제하는 절대적 권한을 갖는 인물이 필연적으로 탄생한다.

공산주의와 사회주의의 구분

첫째, 혁명의 주체가 누구냐에 따른 구분이다. 이에 의하면 사회, 경제적 문제를 해결하고 노동자 중심의 세계를 만들어내는 주체를 노동자 스스로로 보는 입장을 공산주의라 한다. 반면 노동자는 실제로 스스로를 극복할 능력을 갖추지 못했으므로 엘리트계급 또는 부르주아들이 스스로의 권리를 내려놓고 노동자의 권리를 보장해나가야 한다는 입장을 사회주의라 한다. 이는 누가 사회를 바꿀 수 있는지에 대한 입장 차이로 공산주의와 사회주의를 구분하는 것이다.
둘째, 수단과 목적의 관계로 구분하는 방법이 있다. 이에 따르면 궁극적인 목표인 공산주의 사회는 노동자가 스스로 자신의 권리를 지키며 독재를 하는 사회다. 그런데 자본주의에서 갑자기 노동자 중심의 사회로 급격히 변화될 수는 없다.  따라서 과도기적 단계로서 노동자가 아닌, 국가와 정부를 대리하는 소수의 정치엘리트에 의해 운영되는 사회가 필요한데, 이를 사회주의라 부르는 것이다. 이 구분 방법은 공산주의를 궁극의 목표로, 과도기 단계를 사회주의로 설정함으로써 두 체제를 구분한다.
셋째, 내포의 관계로 보는 것이다. 사회주의를 국가가 주도하는 계획 경제라는 넓은 개념으로 파악하고, 공산주의는 그 중에서도 특히 노동자에 의한 계획경제라는 측면에서, 공산주의가 사회주의에 포함된다는 개념으로 판단하는 것이다.


보수와 진보의 현실적 구분 : 현실에서 보수와 진보는 어떻게 나타나는가
자본가의 이익을 우선할 것이냐, 노동자의 이익을 우선할 것이냐에 대한 정치적 입장이 보수, 진보 구분의 본질이다.

민주주의 : 민주주의는 어떻게 독재를 탄생시키는가

민주주의의 문제점이 발생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형식적 측면과 동시에 내용적 측면이 보강되어야 한다. 민주주의는 단순히 형식적 다수결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민주주의 정신이라는 내용적 측면까지 함께 고려되어야 한다. 다양한 의견의 수렴 과정과 절차가 보장되고, 각 구성원이 소수의의견에 귀 기울이는 관용적 태도가 전제되어야만 이상적인 형태의 민주주의가 비로소 가능할 것이다.

독재, 엘리트주의 : 독재와 엘리트주의는 나쁜 것인가

소크라테스가 질문하고 답변자가 대답하기를 반복하는데, 이 과정을 통해 소크라테스는 신탁의 의미를 깨닫는다. 자신은 자신이 잘 모른다는 것을 ‘아는’데, 사람들은 자신이 잘 모른다는 것을 ‘모른’다는 것을 말이다. 다시 말해서 자신은 다른 사람들보다 한 가지를 더 알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자신이 잘 모른다는 것’이다. 이것을 ‘무지의 지’라고 한다.

자유민주주의, 공산주의, 사회민주주의 : 경제와 정치는 어떻게 결합되는가

하지만 정부가 시장에 개입한다고 해서 군부독재기를 후기 자본주의나 사회민주주의 체제로 볼 수는 없다. 군부정권의 시장 개입은 산업을 육성하고 기업이 활동할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하기 위한 제한적인 개입이었기 때문이다. 정부가 시장에 개입해서 세금을 인상하고 규제를 확립함으로써 사회 전체의 복지를 추구한 적극적인 개입이 아니었던 것이다.

군부 정권의 시장 개입은 시장에 대한 국가의 간섭이라기보다는 국가에 의한 시장 투자라고 보는 것이 더 적절할 것이다.


이기주의와 전체주의 : 전체주의는 개인이 비윤리적 행위에 눈감게 한다

전체주의는 독립적으로 자생하는 하나의 이념이라기보다는, 사실 경제적 위기가 발생시키는 하나의 병리 현상으로 보인다.

전체가 위기에 처해있고 비윤리적인 방식으로 위기를 극복하고자 한다면 개인은 언제라도 자신에게 책임이 따르지 않는 것을 반긴다.

전체는 나의 이익을 위해 강력하게 행동하지만, 나에게는 책임이 없는 이상적인 사회가 전체주의다. 전체주의는 개인이 전체의 비윤리적 행위에 눈감게 한다.

윤리의 정의 : 윤리적 판단은 실제의 세계와 무관하게 존재한다

당위명제는 사실명제를 통해 증명될 수 없다. 당위명제는 사실명제와 무관하게 그 문장 자체의 내용만을 토대로 판단하고 평가해야 한다. 즉 윤리적 판단은 실제의 세계가 어떠한지와는 무관하게 독립적으로 존재한다.

의무론과 목적론 : 주어진 의무를 고려할 것인가, 미래의 결과를 고려할 것인가

정리하면, 의무론은 의무나 도덕 법칙을 준수하는 행위를 윤리로 보고, 목적론은 이익을 창출하는 행위를 윤리로 본다.

의무론과 칸트의 정언명법 : 절대적인 윤리법칙을 찾아라

정언명법이란 절대적이고 보편적이어서 누구나 따라야만 하는 도덕 법칙을 찾아내는 계산 기계 정도로 생각해볼 수 있다. 이 정언명법 기계에 내가 하려는 행위 X를 넣어본다. 그러면 계산을 거쳐서 이 행위 X가 보편적 도덕 법칙인지 아닌지를 구별해준다. 이 계산 기계가 작동하는 방식은 단순하다. 내가 하려는 특정 행위 X를 사회 구성원 모두가 동시에 한다고 가정해보는 것이다. 만약 그래도 사회가 붕괴하지 않는다면, 그 행위 X는 도덕적 행위가 되는 것이다. 


Posted by Daesung Ju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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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월 24일 작성


자기 아들에게 전혀 예방 접종을 하지 않은 지인이 있다. 언제고 한번 쯤은 면역에 대한 충고를 늘어놓고 싶었지만 손윗 사람이라 차마 그러질 못했다. 그러다 불현듯 생각이 떠올라 적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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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또의 예를 들어 보자. 로또에 당첨된 사람보다 꽝이 훨씬 더 많다. 매주 토요일 밤 우리는 현자 타임(멍해지는 순간)을 가진다. 이때의 합리적인 태도로 보자면 당첨과 꽝은 동등하지 않다. 꽝 될 확률이 압도적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현자 타임 이전으로 돌아가 보자. 어쩌면 내가 당첨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확률이 반반인양 홀린다. SBS 로또 방송을 기점으로 현자 타임, 즉 합리적 태도에 이르듯 동급으로 보이던 두 가지 - 당첨과 꽝 놀음도 정신 차리고 보면 돈 낭비로 여겨지게 마련이다.

현대 의학과 그에 대한 불신은 동일 선상에 놓일 수 있는 건가? 예방 주사 안 맞고 멀쩡하게 잘 사는 사람 수두룩하다는 게 예방 접종 반대주의자들의 논리다. 하지만 예방 주사 맞고 잘 사는 사람도 수두룩하다. 현대의학이 이룩한 예방 접종이라는 토대를 믿는 사람이라면, 그리고 예방 접종으로 병 안 걸릴 확률이 더 크다는 걸 믿는 사람이라면 아이에게 주사를 맞힐 것이다. 

나의 또 다른 지인은 암 시한부 선고를 받은 뒤 절치부심하고 사상의학에 매달려 몇년 째 잘 살고 있다. 기적이고 축복이다. 하지만 의사가 말하는 생존율을 우리는 부정할 수 있나? 로또 맞은 사람 한 명 있다고 해서, 수백만 분의 일이 아닌 수백만의 확률로 우리가 꽝 맞고 좌절할 거란 사실을 부정할 수 있겠나. 

대부분 죽어버릴만큼 여러 장기로 전이된 암을 앓던 형은 살아날 수도 있었고 죽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생존율이라는 확률은 변함 없이 존재한다. 로또, 그거 언젠가는 당첨될 수도 있고 꽝 맞을 수도 있다. 하지만 당첨율은 변하지 않고 존재한다. 토요일 밤의 좌절처럼 말이다.

기적적으로 살아남은 우리 형이 있다고 해서 현대의학이 말하는 생존율을 부정할 수 없듯이, 별다른 질병 걸리지 않고 잘 사는 아이가 있다고 해서 예방 주사의 효능을 부정할 수는 없다.

게다가 예방 접종은 사회적 합의의 성격도 지닌다. 예방 접종을 안 맞은 아이가 어느날 불현듯 재수없게 홍역에 걸려 응급실에 간다 치자. 거기에 머물던 면역력 약한 사람들은 홍역 전염에 노출되는 위험에 처하고 만다. 예방 접종을 통해 사회는 질병을 억제한다. 하지만 예방 접종이라는 사회적 합의가 반대주의자들에 의해 무너지면 질병은 전염되고 널리 퍼져서 겉잡을 수 없게 된다. (실제로 일어난 사건이기도 하다. http://www.hani.co.kr/arti/international/america/679185.html) 존재를 부정할 수 없는 확률, 특히 전염병을 막기 위한 예방 주사의 확률에 있어서 부정하는 것은 사회적 민폐의 문제가 된다.

내가 선하게 보고 좋게 보는 그것들이 사회적으로 나쁜 결과를 낳을 수 있다. 사회적으로 미치는 영향에 따라 어떤 행위의 선악이 판가름난다. 내가 내 아이 예방접종 안시킨다고 해서 그게 무슨 사회적 악까지 꺼낼 얘기냐 싶겠다. 개인적 선이 꼭 사회적 선으로 이어지지 않는다는 얘기다.

우리 아이 예방접종 안 맞고 건강하게 잘 크는 건 개인적으로 선한 일이다. 하지만 알 수 없는 것이 미래다. 알 수 있는 것은 확률이다. 나라면 확률을 택하겠다. 예방 접종 맞고 또한 건강하게 잘 크는 확률을 택하겠다.

물론 언제나 알 수 없을 것이다. 예방 접종이 건강을 낳을지 환자를 낳을지. 알 수 없는 것이 주는 불안감 앞에서 확률만이 유일한 종교로 남는다. 이제 마지막으로 말하고 싶다. 선택은 지인, 당신의 몫이다. 무엇을 택할 건가? 확률은 확고한 토대 위에 있다. 알 수 없는 미래가 주는 불안감 앞에서 어떤 태도를 취할 지는 당신의 몫이다. 하지만 그걸 받아주는 것은 사회, 곁에 있는 사람들의 몫이다.



Posted by Daesung Ju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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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역에 관하여



2. 독감 백신에 대한 두려움

수은 화합물인 보존제 티메로살은 다회 용량 독감 백신을 제외하고는 모든 아동기 백신으로부터 2002년까지 완전히 제거되었다. 하지만 그로부터 십 년이 훌쩍 더 지난 지금까지도 백신 속 수은에 대한 두려움은 살아 있다.


3. 우리의 몸은 윌의 은유를 결정한다

영국인들은 <한 대 맞는다 jab>고 표현하고, 총을 좋아하는 우리 미국인들은 <한 발 맞는다 shot>고 표현한다. 어느 쪽으로 부르든, 백신 접종은 폭력이다. 그리고 백신 접종이 성 매개 감염병을 예방하기 위한 것일 때, 그것은 성폭력이 되는 듯하다.


백신 접종이 대개 흉터를 남기지 않는 지금도, 그 때문에 우리에게 영구적인 낙인이 찍힐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은 사라지지 않았다. 우리는 백신이 자폐증을, 혹은 오늘날 산업화된 나라들을 괴롭히는 여러 면역 장애 질병들(당뇨, 천식, 알레르기)을 일으킬지 모른다고 두려워한다. B형 간염 백신이 다발 경화증을 일으킬지 모른다고 두려워하고, 디프테리아-파상풍-백일해 백신이 영아 돌연사를 일으킬지 모른다고 두려워한다. 여러 백신을 동시에 접종하면 면역계에 부담이 될지 모른다고 걱정하고, 전체 백신 접종 수가 많으면 면역계가 압도되어 버릴지 모른다고 걱정한다. 일부 백신에 든 포름알데히드가 암을 일으킬지 모른다고 두려워하고, 다른 백신에 든 알루미늄이 뇌를 오염시킬지 모른다고 두려워한다.


그는 마크 트웨인을 언급한다. “어떤 미국인이 믿음이라는 것을 이렇게 정의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네. 즉, ‘믿음이란, 우리가 사실이 아니라고 알고 있는 것을 믿게 하는 능력’이라고 말이야.” 그리고 말한다. “그 사람 얘기는, 우리가 열린 마음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지. 작은 바위 덩어리가 철도의 화차를 막는 것처럼, 진실의 작은 조각이 커다란 진실이 나아가는 것을 막게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일세.”


4. 집단 면역

이웃이란 철학자들이 타자라고 부르는 것, 우리가 지닌 자기애의 이기성이 시험당하는 대상으로서의 존재 (키르케고르)


우리가 백신의 효과를 따질 때 그것이 하나의 몸에 어떤 영향을 미치느냐만 따지지 않고 공동체의 집합적 몸에 어떤 영향을 미치느냐까지 따진다면, 백신 접종을 면역에 대한 예금으로 상상해도 썩 괜찮을 것이다. 그 은행에 돈을 넣는다는 건 스스로의 면역으로 보호받을 능력이 없거나 의도적으로 그러지 않기로 결정한 사람들에게 기부하는 셈이다. 이것이 바로 집단 면역(herd immunity)의 원리이고, 집단 접종이 개인 접종보다 훨씬 효과적인 것은 바로 이 집단 면역 덕분이다. 


효과가 상대적으로 적은 백신이라도 충분히 많은 사람이 접종하면, 바이러스가 숙주에서 숙주로 이동하기가 어려워져서 전파가 멎기 때문에 백신을 맞지 않은 사람이나 백신을 맞았지만 면역이 형성되지 않은 사람까지 모두 감염을 모면한다. 자신을 백신을 맞았지만 미접종자가 많은 동네에서 사는 사람이 자신은 맞지 않았지만 접종자가 많은 동네에서 사는 사람보다 홍역에 걸릴 가능성이 더 높은 건 그 때문이다.


5. B형 간염 백신과 공중 보건 조치의 계급성

B형 간염 백신 접종의 한 가지 수수께끼는 최초의 공중 보건 전략이었던 <고위험군> 접종만으로는 감염률을 낮출 수 없었다는 것이다. 1981년에 B형 간염 백신이 처음 도입되었을 때는 수감자, 보건 노동자, 게이 남성, 정맥 주사를 쓰는 마약 복용자에게만 권유되었다. 그러나 B형 간염 감염률은 변함이 없었고, 그로부터 십 년 뒤에 모든 신생아에게 백신을 권장했을 때야 비로소 낮아졌다. 집단 접종만이 감염률을 낮출 수 있었던 것이다.


우리 시대가 철저히 취약한 존재로 여기도록 부추기는 아이들의 작은 몸도, 사실은 질병을 퍼뜨릴 능력이 있기 때문에 위험한 존재이기도 하다.

 

“백신은 다수 집단을 동원해서 소수 집단을 보호함으로써 효과를 발휘하지.” 아버지(의사)의 설명이다.


6. 우리에게는 병균이 필요하다

요즘도 위생 가설을 감염성 질병을 예방하지 말아야 할 이유로 해석하는 사람들이 있다. 한 친구는 내게 “아직 정확히는 모른다지만, 홍역 같은 질병이 건강에 꼭 필요할지도 모른대”라고 말했다. 하지만 아메리카 대륙의 선주민들은 몇천 년 동안 홍역 없이 살았고, 비교적 최근에 대륙에 홍역이 도입되었을 때 그 결과는 처참했다.


많은 바이러스는 우리가 없으면 번식하지 못하지만, 우리도 바이러스에게서 얻었던 것 없이는  번식하지 못하는 것이다.


7. 오염에 대한 두려움

옛날 한 수도원장은 어떻게 신자와 이단자를 구별하면 좋겠느냐는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고 한다. “모조리 죽여라. 신은 제 백성을 알아보실 것이다.”


이미 많은 연구에서, 항균 비누로 씻는 게 그냥 비누와 물로 씻는 것보다 세균을 더 잘 제거하진 않는다는 결과가 나왔다. 매스턴 박사가 넌지시 말한 바에 따르면, 트리클로산이 비누에 들어 있는 건 오로지 회사들이 세균을 씻어내기보다 죽인다고 약속하는 항균 제품에 대한 시장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홍역 환자 1,000명 중 약 1명 꼴로 뇌염이 따른다는 건 알고, MMR(홍역-볼거리-풍진) 백신 접종자 300만 명 중 약 1명꼴로 접종 후 뇌염 발생이 보고된다는 건 안다. 그런 사례는 워낙 드물기 때문에, 연구자들은 그런 뇌염이 정말 백신 때문에 일어난 건지 아닌지를 확실히 결론 내리진 못했다.


어떤 종류의 백신이든 주사 후 실신과 근육통을 일으킬 수 있는데, 그것은 백신 때문이 아니라 주사 행위 자체 때문


<위험 인식, 즉 사람들이 주변 환경의 위험 요소에 대해 내리는 직관적 판단은 전문가들이 제공하는 증거에 완강하게 저항하곤 한다.> 역사학자 마이클 윌리히는 그렇게 말했다. 우리는 우리를 해칠 가능성이 가장 높은 것들은 오히려 겁내지 않는 경향이 있다. 우리는 운전을 한다. 그것도 아주 많이 한다. 술을 마시고, 자전거를 타고, 너무 오래 앉아 있는다. 그러면서 오히려 통계적으로 따져서 별달리 위험하지 않은 것들을 걱정한다. 우리는 상어를 무서워하지만, 순 사망자 수로 따지자면 지구에서 제일 위험한 생물은 모기일 것이다.


슬로빅이 실험에서 확인했던 경우처럼 사람들이 자신의 믿음을 반박하는 정보를 접할 때, 우리는 자신이 아니라 정보를 의심하는 경향이 있다.


연구자들이 나 같은 사람에게서 목격하는 통계적 위험 무시 현상은, 부분적으로나마, 위험에 휘둘리는 삶을 살기 싫다는 마음 탓일 것이다.


독성학자들은 <용량이 독을 결정한다>고 본다. 어떤 물질이든 과잉으로 쓰이면 독이 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물이 아주 많은 용량일 때는 인체에 치명적이라, 2002년 보스턴 마라톤 대회에서 주자가 수분 과잉으로 죽은 사건도 있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물질을 용량과는 무관하게 안전한 것 아니면 위험한 것으로 생각한다. 그리고 이런 사고방식을 노출에 대해서까지 확장하여, 화학 물질에 노출되는 것은 아무리 짧거나 제한적이더라도 무조건 해롭다고 여긴다.


8. 자연은 선하다는 통념과 ‘침묵의 봄’

요즘 어떤 부모들은 아이가 백신 없이 ‘자연적으로’ 감염성 질병에 대한 면역을 발달시키도록 만든다는 발상에 매력을 느낀다. 그 매력은 백신이 본질적으로 부자연스러운 것이라는 믿음에 의지한 바가 크다. 그러나 백신은 인간과 자연 사이의 중간적 장소에 속하는 물질이다.


효과 없는 치료법, 독성 강한 예방약, 환경을 망치는 살충제가 여태 쓰이는데, 왜냐하면 말라리아에 쓸 수 있는 효과적인 백신은 아직 없기 때문이다. 안타깝게도 DDT는 현재 그런 장소에서 말라리아를 좀 더 효과적으로 통제할 수 있는 몇 가지 수단 중 하나다. 남아프리카 공화국 일부 지역에서는 일 년에 한 차례 집 안쪽 벽에 DDT를 바르는 것만으로도 말라리아가 거의 근절되었다. 미국에서처럼 비행기로 수백만 에이커에 뿌리는 방법과 비교할 때, 이 적용 방법은 환경에 주는 충격이 비교적 적다. 그러나 DDT는 여전히 완벽하지 않은 해법이다. DDT를 생산하는 화학 회사가 거의 없고, DDT를 살 돈을 기꺼이 후원하려는 기부자는 없으며, 많은 나라는 딴 나라에서는 금지된 화학 물질을 쓰기를 꺼린다.


13. 여성 치료사와 비난받는 엄마들

논문이 널리보도되자 홍역 백신 접종률이 뚝 떨어졌지만, 사실 논문의 결론은 <우리는 홍역, 볼거리, 풍진 백신과 앞서 말한 증후군 사이의 연관성을 증명하지는 못했다>라는 거였으며 논문의 주된 발견은 더 많은 연구가 필요하다는 거였다.


14. 우리는 모두 오염된 존재

백신 속 포름알데히드가 암을 일으킬지도 모른다는 공포는 미량의 물질에 대한 공포라는 점에서, 즉 사람들이 해당 물질의 다른 흔한 공급원들을 통해 접하는 양보다 상당히 더 작은 양을 두고 형성된 공포라는 점에서 수은이나 알루미늄에 대한 공포와 비슷하다. 포름알데히드는 자동차 배기가스와 담배 연기에 들어있을 뿐더러 종이 가방과 종이 타월에도 들어 있고, 가스 난로나 벽난로에서도 나온다.


고농도라면 정말 유독하지만, 포름알데히드는 인체가 만들어내는 물질인 데다가 대사 활동에도 꼭 필요한 물질이다. 게다가 애초에 우리 몸에서 순환하고 있는 포름알데히드의 양은 백신 접종으로 얻는 양보다 상당히 더 많다.


모유를 분석한 실험실들은 그 속에서 페인트 희석제, 드라이클리닝 용액, 내연제, 농약, 심지어 로켓 연료를 검출해냈다.


순수함, 특히 신체적 순수함은 언뜻 무해한 개념으로 보이지만, 실은 지난 세기의 가장 사악한 사회 활동들 중 다수의 이면에 깔린 생각이었다. 신체적 순수함에 대한 열정은 맹인이거나 흑인이거나 가난한 여자들에게 불임 시술을 실시했던 우생학 운동의 동기였다. 신체적 순수함에 대한 걱정은 노예제가 폐지된 뒤에도 한 세기 넘게 살아남았던 인종 혼합 결혼 금지법의 이면에 깔린 생각이었으며, 최근에서야 위헌으로 판정된 남색 금지법의 이면에 깔린 생각이기도 했다. 모종의 상상된 순수성을 보존하려는 노력 때문에, 그동안 인류의 유대는 적잖이 희생되어 왔다. 제대혈과 모유에 든 엄청나게 다양한 화학물질이 앞으로 아이들의 건강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는 아직 정확히 모른다지만, 최소한 우리는 우리가 출생 시점부터도 전반적인 주변 호나경보다 더 깨끗한 존재는 못 된다는 걸 안다. 우리는 모두 오염된 존재이다. 자기 몸의 세포보다 더 많은 수의 미생물을 장 속에 품고 있다. 우리는 세균으로 우글거리는 존재이고, 화학 물질로 포화된 존재이다. 한마디로 우리는 지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과 이어져 있다. 물론, 그리고 특히, 다른 사람들과도.


17. 백신 속 수은을 둘러싼 혼란

후속 연구를 통해서 에틸수은과 메틸수은은 <크나큰 차이>가 있다는 게 확인되었는데, 제일 중요한 점은 에틸수은에는 메틸수은이 일으키는 신경 독소효과가 없다는 점이었다. 2012년 ‘소아과학’에 실린 기사는 AAP의 티메로살 성명 이후 13년 동안 수행된 연구를 돌아보며, <백신 속 티메로살이 인체에 위험하다는 신뢰할 만한 과학적 증거는 없다>고 결론내렸다.


18. 자본주의와 백신

백신 접종 거부는 엄밀히 따져서 자본주의의 전형이라고는 할 수 없는 체계를 훼손하는 일이다. 이 체계에서는 온 인구가 부담과 이득을 함께 진다. 백신 접종은 자본주의의 산물을 자본의 압박에 대항하는 목적으로 사용하게끔 해주는 일이다.


19. 가부장주의 vs 소비자 중심주의

의사들의 가부장주의는 그동안 환자들의 소비자 중심주의로 교체되어 왔다. 우리는 소비자 수요 조사에 근거를 두고 작성된 메뉴를 들여다보면서 그중에서 검사와 치료법을 주문한다. 가부장주의 모형에서 아버지에 해당했던 의사는 여기에서는 웨이터다. 손님이 왕이라는 생각은, 의학에 도입될 경우 위험천만한 금언이 된다. 생명 윤리학자 아서 캐플런은 이렇게 경고했다. <사람들에게 의료는 시장일 뿐이고 그들은 의뢰인일 뿐이며 그들이 고객으로서 만족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환자의 자율성을 제공받아야 한다고 계속 말해준다면, 의료의 전문성은 소비자의 요구 앞에 붕괴하고 말 것이다.> 의사들은 환자들이 원하는 것을 주려는 유혹을 느낄 것이다. 그것이 설령 환자들에게 나쁘더라도.


21. 지나치게 많고 지나치게 이르다?

무균실에서 살지 않는 한, 모든 아기에게는 여러 차례의 백신 접종에서 얻은 약독화된 항원을 처리하는 것보다 매일 일상에서 감염을 물리치려고 싸우는 게 더 버거운 일일 것이다.


23. 양심적 거부와 도덕의 문제

“까다로운 부분은, 그냥 불편한 느낌과 양심이 말해주는 바를 어떻게 구별할 건가 하는 문제야”


법률은 일부 사람들이 의학적, 종교적, 철학적 이유에서 백신 접종으로부터 면제받을 수 있도록 허락한다. 하지만 우리 스스로 그런 사람 중 하나가 될 것인가 말 것인가 결정하는 문제는 정말로 양심의 문제다.


여동생은 이렇게 제안했다. “서로 의존하는 관계라고 생각해 봐. 우리 몸은 자기 혼자만의 소유가 아니야. 우리는 그렇지 않아. 우리 몸들은 서로 독립적이지 않지. 우리 몸의 건강은 늘 남들이 내리는 선택에 의존하고 있어.”  이 대목에서 동생은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몰라서 잠시 머뭇거렸는데, 그녀에게는 드문 일이었다.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지도 잘 모르겠지만, 요컨대 독립성이란 환상이 존재한단 거야.”


24. 자연적 몸과 정치적 몸

우리는, 우리 몸은, 독립적이면서도 의존적이다.


종류를 불문하고 모든 위험-편익 분석과 집단 면역 모형에서는 백신 접종이 대중 뿐 아니라 개인에게도 이득이라는 결론이 나오는 편이다.


26. 건강과 질병의 이분법

그녀가 조사했던 사람들 중 일부는, 그녀의 표현을 빌리자면 <면역 마초> 같은 태도를 보였다. 가령 자기 면역계가 <끝내준다>고 말하는 식이었다. 역시 마틴이 들은 말을 인용하자면, 어떤 사람은 <훌륭한 생활 기준을 따르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백신이 필요하지만, 중산층이나 상류층 사람들의 좀 더 세련된 면역계에는 백신이 방해만 될 것> 이라고 말했다.


면역 기능이 약화된 사람은 잘 기능하는 면역계를 가진 사람들이 면역을 지녀서 자신을 질병으로부터 보호해 주는 데 의존할 수 밖에 없다.


질병이 정말로 무언가에 대한 벌이라면, 그것은 오직 살아있는 데 대한 벌일 뿐이다.


어릴 때 내가 아버지에게 무엇이 암을 일으키느냐고 물었더니, 아버지는 한참 생각하다가 이렇게 대답했다. “생명, 생명이 암을 일으킨단다.” 암의 역사를 쓴 싯다르타 무케르지의 책을 읽기 전까지, 나는 아버지의 저 대답을 교묘한 둘러댐으로만 여겼다. 무케르지는 책에서 생명이 암의 원인일 뿐 아니라 심지어 암이 곧 우리라고 주장했다. “그 타고난 분자적 핵심까지 속속들이, 암세포는 과잉 활동적이고, 생존 능력을 타고났고, 공격적이고, 생식력이 뛰어나고, 창의적인 우리 자신의 복사본이다” 그리고 그는 덧붙였다. “이것은 결코 은유가 아니다.”


27. 과학 정보를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우리가 지식을 몸으로 상상한다면, 몸의 일부가 맥락으로부터 뜯겨 나갔을 때는 뻔히 해로울 것임을 알 수 있다. 백신을 둘러싼 토론에서는 이런 식의 절단이 상당히 자주 벌어진다. 전체 연구가 지지하지 않는 어떤 입장이나 생각을 지지하기 위해서 개별 연구를 내세우는 것이다.


우리가 과학적 증거를 알아볼 때는, 정보 전체를 고려해야 한다. 수역 전체를 조사해야 한다. 만일 그것이 방대하다면, 어느 한 사람이 하기에는 불가능한 일이 된다. 의학 한림원에 제출할 2011년 백신 부작용 보고서를 작성하기 위해서 동료 심사를 거친 논문 12,000편을 점검하는 일에는 의학 전문가 18명으로 구성된 위원회가 꼬박 2년을 들여야 했다. 그 위원회에는 연구 기법 전문가, 자가 면역 질병 전문가, 의료 윤리학자, 아동 면역 반응에 대한 권위자, 아동 신경학자, 뇌 발달 연구에 전념하는 연구자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들의 보고서는 백신이 비교적 안전하다는 사실을 확인한 것은 물론이거니와 오늘날 우리에게 주어진 정보를 항해하는 데 어떤 종류의 협동이 필요한지도 보여주었다. 우리는 혼자서는 알 수 없다.


28. 모르는 것이 주는 두려움

“두려움은 존중할 수 있어요. 백신에 대한 두려움은 이해할 만합니다. 하지만 그런 결정은 존중할 수 없어요. 그건 쓸데없는 위험을 지는 겁니다.”


아버지가 스토아 철학에 끌린 이유는, 내게 설명하신 데 따르면, 우리가 자신에게 벌어지는 일을 통제할 순 없지만 그 일에 대한 감정은 통제할 수 있다는 생각 때문이다. 장 폴 사르트르의 말을 빌리자면, “자유란 주어진 것에 대한 행함”이다.


29. 의학적 신중함과 사회적 편견

사람들이 편견으로 기우는 경향성은 스스로가 특히 취약하다고 느끼거나 질병에 대해서 위협을 느낄 때 좀 더 강화된다고 한다. 일례로 한 연구에 따르면, 임신한 여성은 임신 초기 단계에서 외국인 혐오를 좀 더 많이 드러낸다. 슬프게도 우리는 자신이 취약하다고 느낄수록 좀 더 편협해지는 것이다.


하지만 그래도, 나는 여전히 백신 접종에는 의학을 초월한 이유들이 있다고 믿는다.


30. 면역은 우리가 함께 가꾸는 정원이다

우리는, 마틴 루서 킹이 상기시켰던 것처럼 우리 모두가 ‘벗어날 수 없는 상호성의 그물에 얽혀 있다는 사실’을 종종 못 보곤 한다.


우리는 싸우지 않고 질병과 싸울 수 있을지도 모른다. 내가 이 이야기를 읽은 기사의 제목은 <몸 속 미생물 정원을 가꾸다> 였다. 이 은유에서, 몸은 이질적이고 낯선 것이라면 모조리 공격하는 전쟁 기계가 아니다. 우리가 적절한 환경에서 다른 많은 미생물과 함께 균형을 이루어 살아가는 정원이다. 몸의 정원에서, 우리가 제 속을 들여다볼 때 발견하는 것은 자기가 아니라 타자다.

  

우리가 사회적 몸을 무엇으로 여기기로 선택하든, 우리는 늘 서로의 환경이다. 면역은 공유된 공간이다. 우리가 함께 가꾸는 정원이다.



Posted by Daesung Ju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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