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사 유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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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자의 자리에서 욕심을 버리고 진심을 다해 최선을 다한다면 분명 살기 좋은 세상이 될 거야. 지금 우리에겐 그게 제일 필요해." - 유희열의 문유석 판사 회고 중에서


담담한 동심


이제 파산 문제는 특정 계층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들 자신을 포함한 모든 사람에게 닥칠 수 있는 문제이고,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파산제도와 개인회생제도는 일종의 사회적 보험인 것입니다.


어찌 보면 법원의 면책결정은 별 게 아닙니다. 원래 가치가 0원인 채권을 0원이라고 공식 확인해주는 것에 불과한 것이죠.


물론 파산 사건의 증가와 함께 이러한 악용 사례가 늘어날 가능성은 저희들도 항상 염려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적어도 아직까지 우리나라에서의 개인파산은 남용을 걱정하기보다는 이용하지 않는 것을 걱정해야 하는 걸음마 단계라고 생각됩니다.


파산한 기업은 청산되어 소멸하지만, 파산한 인간은 계속 살아가야 합니다. 도전하다가 쓰러진 인간에게는 무덤 대신 두 번째 기회가 주어져야 합니다. 이것이 활자가 아닌 사람을 통해 제가 배운 것입니다. 


한번도 용서받지 못한 사람


그런데 그 순간, 피고인의 마지막 한마디가 제 가슴을 찔렀습니다. "나는 단 한 번도 용서받아 본 적이 없습니다!"


희망이 인간을 고문한다


기성세대의 위선을 비웃고 가치를 전복하려 싸우다 보니 어느새 이제는 위악이 쿨한 것이고 날 것의 욕망이 솔직한 시대가 돼 버린 것 같습니다. 하지만 위악이 위선보다 나은 것이 도대체 뭐죠?


대중의 물질적 욕망의 배후에는 자본의 논리가 있습니다. 로버트 매닝 (Robert D.Manning)의 '신용카드 제국'이라는 책을 읽어보면 미국의 1970년대 장기불황 시대에 금융자본이 기업금융으로 수익을 창출하지 못하자 찾아낸 활로가 소비자 금융임을 알 수 있습니다. 열심히 일한 당신, 떠나라! BC 로 사세요~


지성과 반지성


요즘 새삼스레 드는 생각은 좌와 우, 보수와 진보 등의 편 가르기는 다 본질과 직결되지 않는 '이름 붙이기'에 불과하고, 진짜 대립하고 있는 것은 지성과 반지성이라는 것입니다.


자신이 안다고 생각하는 것도 절대적 진리가 아니라 상대적일 수 있음을 인식하고, 자신이 틀릴 가능성을 인정하고 유보적인 태도를 취할 수 있는 것 또한 지성적인 태도일 것이빈다. 이에 반하여 자신이 믿고 있는 것 또는 자신이 바라는 것을 아는 것과 혼동하는 것, 더 나아가 자신이 믿고 있는 것 또는 바라는 것에 저촉되는 것을 무조건 배척하는 것은 갈릴레이를 법정에 세웠던 바로 그 반지성 아닐까요.


매사에 꼭 선명한 결론을 내리려고 무리하는 것은 오만인 동시에 무지입니다. 근거 없는 확신을 유포하는 것은 무지를 넘어선 범죄일 수도 있는 것이고요.


의견과 지식의 한계를 스스로 인식하고 이를 전제로 자기 검증을 되풀이하며 자기가 말할 수 있는 부분까지 말하자는 것입니다. 결론을 내릴 만한 근거가 없으면 스스로 단정하지 말고 의문만 제기하면 되는 것 아닙니까. 결론을 사실상 내려놓고 반문하는 의문이 아니라, 진실에의 열린 가능성을 열어 둔 순수한 의문 말입니다.


서울 법대와 하버드 로스쿨 3


수강신청을 할 때는 우선 이렇게 쌓인 수년 치의 강의 평가를 정독한 후 실제 수업을 들어가 직접 판단하고 확정합니다. 성의 없이 수업하는 교수가 살아남을 수 있을까요?


기본적으로 한국의 법학 교육은 학생들의 머리 위에 거대하고 복잡한 개념의 탑을 쌓아놓고, 그 완결적 구조의 아름다움을 음미하도록 하고는 실제 지금 이 사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분쟁을 해결하는 방법에 대해서는 각자 일하면서 알아서 자기 머릿속에 들어있는 개념들에 꿰어 맞추든지 뭐 알아서 하라는 방식인 것 같습니다.

하버드 로스쿨의 법학은 그야말로 '실사구시'하는 학문입니다. 기본적으로 판례법이 중요한 소스인데, 판례라는 것 자체가 실제로 사회에서 일어난 분쟁이나 해결의 과정이니 현실적일 수 밖에 없고요, 성문법을 주로 가르치는 과목도 기본적인 개념과 법조문은 학생들이 읽어와야 하지요. 그리고 교수는 실제 주로 발생하는 사례들이나 이를 단순화한 연습 문제를 가지고 이 법조문이 도대체 무슨 소리고 어떨 때 써먹으라고 나온 것인지를 가르칩니다. 


그런데 개인적으로 느끼기에는 시스템의 차이, 학문 풍토의 차이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차이는 이곳에서는 '정성', '성실' 같은 평범해 보이는 가치를 우리보다 더 귀하게 여긴다는 것입니다. 자기가 맡은 일에 최선을 다하는 것에서 행복을 찾는 것이 당연한 문화인 것이죠. 교수들도, 학사 행정을 담당하는 직원들도, 도서관의 사서들도, 스쿨버스를 운전하는 기사들도 다들 자기 일에 최선을 다하고 거기서 즐거움을 찾는 것 같습니다. 밥벌이하려고 마지못해 하고 있다는 인상을 받을 수가 없습니다.

다들 정말 귀찮을 정도로 학생들 공부를 도와주려고 애를 씁니다. 학사 행정 담당 스태프가 밤이고 일요일이고 학생들에게 메일을 보내서 다음주 주요 행사와 세미나를 알리고 참석을 권유합니다. 도서관 사서는 제 논문계획서를 읽어보고는 큰 흥미를 느낀 포인트를 말하며 자료 찾는 것을 도와줄 테니 만나서 같이 토론해 보자고 연락해 옵니다. 


한국형 세미나 유감


판사들도 법원 행사로 이루어지는 세미나 때 보면 겸손, 미괄식, 문맹자 배려 증후군을 잘 보여줍니다. 그런데 묘한 것은 판사들이 재판부 내에서 사건 결론을 합의할 때나 동료 판사들끼리 공통의 현안인 사건 쟁점에 대해 톨노할 때에는 또 완전히 딴판이라는 겁니다. 굉장히 효율적으로 쟁점만 치열하게 토론하곤 하거든요? 한참 싸우다가도 상대방의 논거가 더 그럴듯하면 바로 "어, 듣고 보니 그러네? 난 의견 번복하여 그 설에 찬동!" 하고는 손바닥 뒤집듯 바로 입장을 바꾸는 것에 거리낌들이 없고요.

짐작컨대 이런 토론은 그야말로 일상적인 업무로서, 모두의 시간이 금인 상황에서 가장 합리적인 결론을 빨리 도출해 사건을 해결해야 하는 실무적 필요성이 압도적인 경우니까 효율적으로 이루어지는 듯해요. 


이유 같지 않은 이유로


저는 그냥 엄벌할 것이면 엄벌할 사유를 상세히 힘주어  쓰고, 선처할 것이면 유리한 정상을 상세히 써서 양형 이유만 읽어봐도 이 재판부가 무엇에 중점을 두고 판단했는지 납득이 가도록 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정치, 사회 어느 영역에서든 세상을 정말 의미있게 바꾸기 위해서는 원래 자기와 의견이 같은 사람들의 열광보다 자기와 의견이 다른 사람들의 수긍을 얻을 수 있는 방법으로 주장을 펴야 한다고 봅니다. 판결도 마찬가지지요. 항상 첨예하게 이해관계가 대립된 양측이 있기 마련인데 모두가 박수치는 판결이란 있을 수 없다고 봐요. 판결에 불만족 하는 쪽에서도 '마음에는 안 들지만 읽어보니 판사가 잘못했다고까지는 하지 못하겠네' 정도의 반응을 보인다면 성공적인 판결문이 아닐지요. 그러기 위해서는 최대한 중립적인 입장에서 보편적인 논리와 어느 누구도 부인하기 어려운 근거를 들어야 할 것입니다. 


법원 유모아


법정에서 치열함을 넘어 살벌하기까지 한 갈등의 양 당사자들과 함께 재판을 진행해야 하는 법관에게 유머를 구사할 수 있는 여유와 능력은 소중한 자질이라고 생각


제도 이전에 욕망이 있다


애덤 스미스는 개개인이 최선을 다해 경쟁하면 결과적으로 사회 전체가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이롭게 된다고 했는데, 내쉬 균형에 따르면 실제로는 각자가 최선 대신 차선을 선택하는 방법으로 경쟁을 줄인다면 최악의 사태를 피할 수 있다는 것이니까요.


나는 놀기 위해 태어났다


대법원장님이 인사청문회 때 이런 말씀을 하는 것을 TV 에서 본 적이 있습니다. "나는 개인에 대한 외부의 부당한 간섭을 배격하고 자유분방함을 추구하며 인간을 일정한 틀에 묶어두려는 어떠한 시도에도 반대한다. 법의 사명은 이런 사회를 조성하는 것이다."



Posted by Daesung Ju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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