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 : 2015.3/31 오전 1:50

수정 : 4/1 오후 6시




메이즈 러너 (2014)

The Maze Runner 
7.2
감독
웨스 볼
출연
딜런 오브라이언, 카야 스코델라리오, 윌 폴터, 토마스 브로디-생스터, 이기홍
정보
미스터리, 액션, 스릴러, SF | 미국 | 113 분 | 2014-09-18



내 인생이 망했구나 느끼는 거랑 세상이 망했다고 느끼는 게 다른 걸까? 뭐가 됐든 둘 중에 하나는 확실히 망했다. 둘 다 망한 걸수도 있고. 


갑갑한 기분 좀 떨치고 싶어서 테이큰 3를 보려다가 메이즈 러너를 택했다. 순전히 여자친구의 추천 때문이었다. 짱짱맨 리암 니슨한테 감정 이입해서 현실의 열패감을 잊고 싶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여자친구는 메이즈 러너를 보라고 했다.


메이즈 러너가 참신한 영화는 아니다. 모든 게 거짓된 '아일랜드' 같은 감옥에서 '매트릭스' 같은 자각으로 '레지던트 이블' 처럼 적의 무리를 헤쳐나간다. '스타크래프트' 드라군에 '에일리언' 머리를 한 괴물은 낯익을 정도였다. 하지만 얽힌 마음 풀어낼 실마리는 찾은 것 같다. 


나는 세상을 나름대로 이해했지만 결코 세상으로부터 이해받을 수는 없다. 끝없는 오디션에서 줄곧 나를 납득시켜야만 한다. 그래서 이 세계를 꿰뚫는 단 하나의 열쇠를 갖고 싶다. 어떤 위기도 헤쳐나갈 수 있는 진리를 쥐고 싶다. 하지만 그런 건 없는 것 같다. 그래서 망했다는 거다. 


진리 따위는 없다고 깨달았을 때, 상상으로 만드는 가상의 열쇠가 예술 아닐까. 엉킨 실타래를 풀 수 없겠구나 절망하며 잠들지만, 꿈 속에서 실마리를 찾는 것. 그렇고 그런 나날들에서 드라마틱한 전개를 건져올리는 것. 하지만 손맛만 보다가 놓치는 것. 그러나 끊임없이 추구하는 것. 


리얼리스트가 되라는 건 나도 세상도 망해버렸다는 현실을 인식하란 얘기일 테고, 불가능한 꿈을 꾸라는 건 개똥밭에 구를지언정 이리저리 부대껴보자는 선언이겠지. 이성으로 비관하되 의지로 낙관하란 그람시의 말이나, 칸트의 순수이성과 실천이성이 아마 이런 얘기겠거니 생각한다.


닳고 닳은 얘기지만, 구원은 밖이 아니라 안에서 온다. 메이즈 러너의 주인공 토마스는 기억을 되살려 사람들과 함께 감옥에서 탈출한다. 도망쳐 나와서 또 새로운 시험을 맞닥뜨린다는 게 퍽 숨 막히는 일이지만 그래도 그게 어딘가. 그게 시작이다. 거대한 실패 속에서 한움큼의 성공을 쥐는 것.


망한 건 망한 거다. 그래도 과히 슬퍼하지는 말자. 현실 인식의 비참함을 끝내 떨칠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가는 거다. '못 먹어도 고'란 말도 있잖나. 메이즈 러너(Maze Runner), 미궁 속을 달리니까 불안감은 숙명이지만 그래도 좌절하지 않는 것. 그것이 진리라면 진리겠지. 


얼마전 어느 트위터에서 본 문구가 생각난다. '인생은 클리셰, 사랑은 미장센. 지성은 태도에서 나온다. 그러므로 인간에 대한 애정을 견지하도록 노력해 봄' (출처 : 트위터 프로필 https://twitter.com/field_dog )


미궁 같은 세상을 풀어낼 열쇠는 물질도 아니고 관념도 아닌 ‘태도’일 거라고 생각한다. 끝내 실패할지언정 마음 한구석은 포기하지 않는 것. 자꾸만 고꾸라져도 날아오르는 것. 옛날 책에서 본 라이트형제는 미소를 띄고 있었던 것 같다. 내게 주어진 생애가 퍽 시지프스같지만 그래도 한줌 웃음만은 잃지 말아야지. 

Posted by Daesung Jung

댓글을 달아 주세요

  1. Daesung Jung 2015.04.05 16:03 신고 Address Modify/Delete Reply

    폐허 이후 - 도종환

    사막에서도 저를 버리지 않는 풀들이 있고
    모든 것이 불타버린 숲에서도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믿는 나무가 있다
    화산재에 덮이고 용암에 녹은 산기슭에도
    살아도 재를 털며 돌아오는 벌레와 짐승이 있다
    내가 나를 버리면 거기 아무도 없지만
    내가 나를 먼저 포기하지 않으면
    어느 곳에서나 함께 있는 것들이 있다
    돌무더기에 덮여 메말라버린 골짜기에
    다시 물이 고이고 물줄기를 만들어 흘러간다
    내가 나를 먼저 포기하지 않는다면